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사회주의 고전 읽기] 《프랑스 내전》 ─ 최초의 노동자 권력, 파리 코뮌

김지윤 179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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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3월 18일 동틀 녘, 파리는 ‘코뮌 만세’라는 우렛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1

노동계급이 전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 한 곳을 장악했다. 불과 4년 전 루이 나폴레옹은 “길이 482미터의 타원형 유리 건물을 중심으로 ‘대박람회’를 개최해 유럽 군주들에게 프랑스 제국의 위엄을 과시”했던 2 터였다.

노동계급은 파리 코뮌을 세워 사상 최초로 권력을 장악했다. 코뮌의 생명은 겨우 두 달이었지만, 당시까지 세계가 결코 본 적 없던 가장 민주적인 정부의 모습을 보여 줬다.

파리 코뮌은 “자본주의가 확립된 이후에도 세상은 계속 뒤집힐 수 있음을 보여 줬다.” 3 노동계급이 기존 사회를 분쇄하고,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사상을 현실에서 증명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파리 사람들이 “하늘을 뒤흔들고 있고”, 코뮌이 “전 세계적 중요성을 갖는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적극 지지했다. 4

《프랑스 내전》은 마르크스가 1871년 5월 30일 파리 코뮌의 마지막 순간에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제1인터내셔널)의 위임을 받아 발표한 연설문을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파리 코뮌에 대한 열렬한 옹호이자,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파리 코뮌의 위대한 역사를 간결하지만 강렬하고 생생하게 담고 있으며, 지배계급의 비열함과 추악함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무장한 도시

1851년 공화정이 무너진 이후 프랑스 자본주의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근대 공업이 성장하면서 산업 생산은 두 배로 증가했고, 가내 수공업 노동자들을 공장 노동자들처럼 취급한 선대제 자본가들의 재래식 수공업에 대한 통제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다.” 5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했다. 투기 열풍 속에 손해를 입은 일부 부르주아지는 정부에 반감을 품었고, 프랑스가 멕시코에서 벌인 군사적 모험도 실패로 끝났다. 파리 노동자들은 임금보다 생계비가 더 빨리 오르고 있었다. 파리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루 11시간을 일하는데도 “극빈 상태에 가까운 빈곤”에 처해 있었다. 1869년 공화파 야당이 파리를 비롯한 여러 대도시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자 1870년에 루이 보나파르트는 비스마르크의 프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군은 참패했고, 루이 보나파르트는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권력은 부르주아 공화파 야당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선포됐지만, 부르주아 정부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공화파가 내세운 ‘자유, 평등, 우애’는 대다수 노동계급의 삶에서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프랑스 노동계급은 전쟁과 기아에 시달렸다. 당시 파리 인구의 다수는 성장하는 노동계급과 상당 규모의 실업자들이었다. 파리 시민 약 60퍼센트가 자신의 장례식 비용도 감당 못할 정도로 끔찍하게 가난했다.

프로이센 군대에 맞서 도시를 방어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기아와 추위를 견디면서도 국민방위대에 앞다퉈 자원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국민방위대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1792년 상퀼로트의 후손들이자 1848년 투사들의 아들딸들이 다시 무기를 들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장한 파리, 그것은 무장한 혁명이었다.” 6

대부분 부르주아지로 구성된 공화정 정부와 무장한 노동계급 사이의 대립은 날로 커졌다. 1870년 10월 좌파의 정부 전복 시도에 이어 이듬해인 1871년 1월 22일에 또 한 번 정부 전복 시도가 벌어졌다. 정부는 이를 가까스로 진압했지만, 다음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내전”에 직면한 부르주아 정부는 1월 23일에 항복 조건을 두고 비밀리에 프러시아와 협상했다.

부르주아지 대부분이 내버리고 떠난 파리를 가까스로 방어해 온 노동자·빈민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포위의 고통을 자신들에 떠넘겨 온 부르주아 정부를 지독히 증오하고 있었다.

공화정은 서둘러 총선 실시를 선포해 항복 결정을 굳히려 했다. 급박한 일정 탓에 파리 좌파들은 선거 운동을 벌이기 어려웠고, 결국 왕정주의자들이 대거 당선했다. 마르크스가 “괴물 같은 난쟁이 도깨비”라고 부른 아돌프 티에르가 정부 수반이 됐다. 티에르는 1834년 공화주의 봉기를 진압한 전력이 있었다.

“티에르는 파리 노동자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한 유산 계급의 지배는 항상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7 1871년 3월 18일, 티에르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정규군을 보내 국민방위대가 보유한 대포 200문 등의 무기를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이 시도를 알아차린 여성 노동자 루이즈 미셸은 소총으로 무장한 여성 200여 명을 이끌고 언덕으로 달려왔다. 국민방위대는 물론이고, 여성과 아이들도 병사들을 에워싸고 항의했다. 병사들은 장군의 발포 명령을 세 차례나 거부했다. 티에르와 공화정 정부는 파리 밖으로 도망쳤고, 파리는 노동계급의 손에 넘어갔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쥐다

파리에 새로운 종류의 권력이 등장했다. 파리의 무장한 대중은 이제 지역마다 남성 보통선거권을 기초로 한 선거를 실시해 새로운 대의 기구인 ‘코뮌’을 구성했다.

파리 노동자들의 대표 기구로서 코뮌은 짧은 기간에 커다란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성취했다. 그 변화들은 그전까지 어떤 의회 민주주의도 이루지 못한 것들이었다. 《프랑스 내전》 3장은 이 놀라운 성취들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우선 부르주아지의 지배 도구인 상비군이 폐지됐다. “코뮌의 첫 번째 포고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것을 무장 인민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8

코뮌은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원칙들을 확립해 나갔다. 기존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코뮌은 파리의 각 구에서 보통 선거를 통해 선출된 시 의회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책임을 지고 있었고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당연히 노동자들이거나 노동계급의 공인된 대표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이제까지 중앙 정부의 도구였던 경찰은 즉시 자신의 모든 정치적 속성을 벗어 버리고 책임이 있고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는 코뮌의 관리로 전환되었다. 다른 모든 행정부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뮌 의원들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국가 고위 관직의 기득권과 판공비는 이 고위 관리들 자체와 함께 사라졌다. 공직은 중앙 정부 앞잡이들의 사유 재산이기를 중지하였다. 9

노동자들은 기존의 국가를 인수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인 형태의 국가를 만들었다. “[코뮌은] 국민 자체에 대해 독립적이고 군림하려고 하면서도 국민의 통일의 구현체임을 주장한, 국민의 신체에 기생하는 이상 생성물에 불과한 국가 권력의 절멸을 통해 현실로 되어야 했다.” 10 정치적·사회적 권력의 고삐를 쥔 것은 다름아닌 노동계급이었다.

보통 선거권은 3년이나 6년마다 지배 계급의 어떤 구성원이 의회에서 인민을 올바르게 대표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대신에 코뮌을 구성하는 인민에게 봉사해야 [한다] …코뮌 제도는 사회에서 자양분을 얻고 사회의 자유로운 운동을 저해하는 ‘국가’라는 기생물이 이제까지 빨아먹은 모든 힘을 사회의 신체에 돌려줄 것이다. … 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었다.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전된 정치 형태였다. 11

코뮌은 자신이 대표하는 노동계급을 위한 조처들을 실행했다. “코뮌은 의회제가 아니라 행정과 입법의 업무를 겸하는 행동 기구” 12 였기 때문에 자신의 공약을 실현하고, 공장주·금융업자들의 기득권에 도전할 수 있었다.

빵집의 야간 노동이 금지되고, 남편을 잃은 여성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임대료 체불 세입자의 강제 퇴거가 금지됐다. 문을 닫은 모든 작업장·공장을 노동자들의 협동조합에 넘겨주도록 했고, 모든 아동에게 무상교육을 제공했다.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모든 간섭이 제거되었다. 학문 자체가 계급적 선입견 및 정부의 강제력이 부과한 족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3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에서 벗어났다.

코뮌은 국제주의를 표방했다. 군국주의의 기념물인 나폴레옹 전승 기념 원기둥을 무너뜨렸고, 독일 노동자를 코뮌의 노동부 장관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코뮌은 다수의 노동을 소수의 부로 전화시키는 저 계급 소유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코뮌은 수탈자에 대한 수탈을 목표로 하였다. 코뮌은, 지금 무엇보다도 노동의 노예화와 착취의 수단인 토지와 자본이라는 생산 수산을 자유롭고 연합된 노동의 단순한 도구로 전화” 14 시켰다.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이라트 독재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 생생한 증거였다. 1891년 파리 코뮌 2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 내전》을 재출간하며 쓴 서문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라.”

피로 물든 파리

코뮌의 성과는 눈부셨지만 더 많은 것들을 이루기엔 수명이 짧았다. 당시 코뮌 지지자들은 파리 바깥에서 낡은 국가 기구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고 있고,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임을 간과했다.

코뮌이 파리 대중의 삶을 개선하는 데에 힘을 쏟는 동안 파리의 바깥에서는 티에르와 공화정이 코뮌을 분쇄할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 티에르는 프로이센의 도움까지 얻었다. 두 국가의 지배자들은 얼마 전까지는 서로 총을 겨눴지만, 코뮌 분쇄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협력했다.

마르크스는 지배계급의 계급적 본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낡은 세계는 시청 위에서 나부끼는 노동의 공화국의 상징인 붉은 깃발을 보고 분노의 경련을 일으켰” 15 고, “국민 정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하나가 된다!” 16 이 자들은 “법”과 “문명”을 앞세우지만 자신들의 지배에 대한 도전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며, 야만과 광폭함으로 얼마든지 맞선다.

1871년 5월 21일 “티에르와 피에 굶주린 그의 사냥개들”이 파리로 진격했고,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다. “외국 침략자의 비호 하에 수행된 내전을 통하여 혁명을 진압”하려는 지배계급의 음모는 파리의 대량 학살로 절정에 다다랐다. 17 베르사유 군대는 코뮌 편에 선 사람이면 누구든 목숨을 빼앗았다. 영국 신문 <타임스>는 이렇게 논평했다. “베르사유 군대는 죄수들, 여성들, 아이들을 총살하고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온몸을 찢어 갈렸다. 우리 기억에 역사상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리 노동자들은 끝까지 결연하게 저항했다. 여성들도 투쟁에 나섰다. “코뮌은 당시의 시대적 편견 때문에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지만 노동계급의 여성들은 코뮌 탄압이 바로 자신들에 대한 탄압이라는 것을 알았다.” 18

티에르가 코뮌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하는 데에는 1주일이나 걸렸다. 노동자들은 끝내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묘비를 엄폐물 삼아 티에르 군대의 기관총에 맞서다 죽어갔다. 2만~3만 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역겨운 공화정은 “자기가 살해한 사람들의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걱정했다. 19

코뮌의 실수

엥겔스는 파리 코뮌의 활동과 역사적 의의를 돌아보며 당시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 및 코뮌에서 득세했던 블랑키주의와 프루동주의의 한계가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블랑키주의는 급진적이었지만, 노동계급을 대신해 행동하는 소수 음모가들의 구실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다. 프루동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시하며 정치 행동을 거부했고, 노동계급이 집단적으로 건설한 새로운 권력이 아니라 협동조합이면 충분하다고 봤다.

이런 정치적 약점은 두 가지 부적절한 결정에 영향을 줬다. 첫째, “3월 18일 공화정이 파리에서 도망칠 때, 그 수중에 남아 있는 군대는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그때 국민방위대가 베르사유로 진격했다면 공화정의 군대를 총 한 방 쏘지 않고 해산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 그러나 “파리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공격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을 펼치는 대신에, 스스로를 자치공동체 안에 고립시키려 했다.” 21 그 때문에 티에르는 병력을 끌어모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둘째, 코뮌은 프랑스 은행에 도전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모든 금은 이곳에 있었으므로 코뮌이 금을 몰수했다면 티에르의 돈줄을 끊고 프랑스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엥겔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코뮌이 프랑스 은행의 문전에 공손히 머물러 섰던 [것은] … 커다란 정치적 오류였다. 코뮌의 수중에 있는 은행, 이것이야말로 만 명의 인질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였더라면 프랑스의 부르주아지 전체는 코뮌과의 강화에 관심을 갖도록 베르사유 정부에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 22 그러나 프루동주의와 블랑키주의 전통 모두 “재산권”에 대한 공격을 거부했다.

결국 코뮌의 관대함 덕분에 티에르는 군대를 모으고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조건이 무르익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파리로 진격했던 것이다.

혁명적 영감과 교훈

파리 코뮌의 위대한 교훈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쟁취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이것[코뮌]은 노동자 계급이 사회적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인정된 (부유한 자본가들만을 제외한 파리의 대다수 중간 계급들 — 소상점주, 수공업자, 상인 — 조차 인정한) 최초의 혁명이었다.” 23

그리고 이 위대한 경험을 통해 마르크스는 국가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은 단순히 기성의 국가 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사할 수는 없다” 24 고 썼다. 만일 노동계급이 기존의 국가를 분쇄하지 않는다면 지배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되찾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엥겔스도 “노동자 계급은 일단 지배권을 획득하면 낡은 국가 기구로는 더는 관리해 나갈 수 없”다면서 “사회의 종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바뀐 “모든 낡은 억압 기구를 제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의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도 같은 교훈을 이끌어 냈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와중에 쓴 《국가와 혁명》에서 《프랑스 내전》 등 여러 저작에 흩어져 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가론을 더 분명하게 발전시켰다.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이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보를 참칭하는 문재인 정부는 혐오스러운 우파에 대한 대안은 자신밖에 없다고 을러댄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자본주의를 개혁할 수 있다는 주장·실천도 여전히 강력하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자본주의 하에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일지 생생히 보여 줬다. 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고,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를 스스로 건설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도 남겼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파리는 코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영광된 선구자로 영원히 칭송될 것이다. 그 순교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다” 25 고 찬양했다. 파리 코뮌 이후 전 세계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권력과 권위에 맞서 싸웠고, 파리 코뮌과 비슷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1919년에 독일과 헝가리, 1936년 스페인, 1956년 헝가리, 1974년 포르투갈, 1979년 이란에서 그랬다.

파리 코뮌의 역사에서 혁명적 영감과 교훈을 얻는 데에 《프랑스 내전》은 아주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MARX21

후주

1 마르크스, 2005, 81쪽.
2 하먼, 2004, 473쪽.
3 하먼, 2004, 473쪽.
4 마르크스가 1871년 4월 12일과 17일에 동료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
5 하먼, 2004, 474쪽.
6 마르크스, 2005, 55쪽.
7 같은 책, 19쪽.
8 같은 책, 86쪽.
9 같은 책, 86쪽.
10 같은 책, 88쪽.
11 같은 책, 88~91쪽.
12 같은 책, 86쪽.
13 같은 책, 87쪽.
14 같은 책, 91~p.92쪽.
15 같은 책, 93쪽.
16 같은 책, 122쪽.
17 같은 책, 121쪽.
18 하먼, 2004, 481쪽.
19 마르크스, 2005, 114쪽.
20 하먼, 2004, 479쪽.
21 Trotsky, Leon 1921, ‘Lessons of the Paris Commune’
22 마르크스, 2005, 24쪽.
23 같은 책, 93쪽.
24 같은 책, 81쪽.
25 같은 책, 124쪽.

참고문헌

마르크스, 카를 2005, 《프랑스 내전》, 박종철출판사
하먼, 크리스 2004,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
Marx, Karl 1871, ‘Concerning the Paris Commune’,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1/letters/71_04_12.htm
Mueller, Marieke 2004, The Civil War in France: When workers took power in Paris,
Trotsky, Leon 1921, ‘Lessons of the Paris Commune’, https://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21/02/commun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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