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논쟁 : 어떤 전략과 전술인가?

역사에서 배운다

해방정국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

MARX21

  1.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사상.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자 당시 조선 총독 미나미지로는 조선을 전쟁에 동원하는 강압 정책으로 내선일체를 내걸었다 — M21.
  2. 에커트 2008, pp369-370.
  3. 해방3년사연구회 1988, pp85-96 참조.
  4. 조선공산당 정치국(장안파) 1945, 심지연 1987, pp142-143 참조.
  5. <자유신문>(1945.10.27).
  6. 김남식 1988b, pp20-37 참조.
  7. 이른바 코민테른 3기 노선은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에서 채택된 노선이다. 이 노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파국적 위기에 빠져 혁명이 임박했고, 공산당의 가장 큰 적은 사회민주당 등 개혁주의 세력으로, 이들은 ‘사회파시스트’다. 이는 당시 나치가 부상하는 상황에서 사회민주당과 노동자 공동전선을 펼칠 필요성을 부정하는 초좌파 노선이었다.
  8. 서중석 1997, p238.
  9. 서중석 1997, pp238-239.
  10. 김남식 1988b, p22.
  11. 김무용 2001b, p331.
  12. 김남식 1988b, p28.
  13.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14. 서중석 1997, p296.
  15. 김남식 1988b, pp32-33.
  16. 김남식 1988b, p33.
  17. 서중석 1997, p239.
  18. 1935년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는 이른바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스탈린은 그 전의 3기 노선에서 180도 방향을 바꿔, 파시즘에 대항하는 계급연합을 주창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까 두려웠던 스탈린이 서유럽 열강과 동맹을 맺고자 한 게 주된 동기였다. 이에 따라 서방 공산당은 자국 자본가계급을 화나게 할 급진적 주장과 행동을 삼가야 했다. 그 결과 스페인에서 혁명은 패배했고, 나중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스탈린은 서방 지배자들을 안심시키려고 아예 코민테른을 해산시켰다.
  19. 다우어 2009, p329.
  20. 다우어 2009, p339.
  21. 小山弘健 1991,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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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30. 양지은 2008, p17.
  31. 안재홍이 “백만대군” 운운하며 위협한 것은 심한 과장이다. 당시 일본 육군의 주력이던 관동군은 이미 만주에서 붕괴한 상태였다. 또, 일본인들의 증언을 보면, 조선주둔군의 경우 부대별로 60∼80퍼센트가 조선인들이었고, 이들은 소련군과 전투가 임박하자 대부분 탈영해버렸다. 모리타 요시오 외 1995, pp15-19.
  32. 서중석 1997, p215.
  33. 서중석 1997,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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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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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내각 명단은 <매일신보> 1945년 9월 15일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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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김남식 1988b, p21.
  48. 서중석 1997, p27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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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김양재 1987,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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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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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이강국 2006,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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