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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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논문

정체성 정치 ― 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정진희 17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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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정치는 장점이 있지만 약점도 많다. 정체성 정치에 무비판적인 경향이 사회운동에 널리 퍼져 있으므로, 약점을 명확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차별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정체성 정치에 깔린 핵심 가정은 특정 차별을 받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모두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차별을 당하는 집단에 속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의 삶은 계급에 따라 매우 다르다. 호화 주택에서 살며 청소와 요리 등 온갖 궂은일을 노동자를 고용해 처리할 수 있는 부유층 여성의 처지는 노동계급 여성의 처지와 전혀 다르다. 자본가계급 성소수자의 삶과 노동계급 성소수자(성적 지향이 드러나 해고될까 봐 불안한)의 삶도 다르다. 부유한 사람들은 특정 차별을 겪더라도 차별로 인한 효과를 완화할 자원이 있다. 

지배계급 여성도 투표권이 이혼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던 자본주의 초기에조차 지배계급 여성의 대다수는 투쟁적 여성운동과 거리를 뒀고, 노동계급이 벌이는 파업과 시위에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벌어진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단일한 여성운동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운동은 결코 단일한 운동이 아니었다. 참정권 운동 내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계급적 운동과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하는 운동이 경합을 벌였다. 출신 배경이 다른 여성들이 함께 시위를 벌이는 일이 때때로 있었지만, 계급 문제 때문에 결속은 지속되지 못했다. 상층 계급의 여성 참정권론자들은 투표권 보장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겼고 노동계급의 처지에는 무관심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여성 활동가들 사이의 계급적 차이는 더 첨예해졌다. 상층 계급 여성들은 거의 전폭적으로 전쟁을 지지하며 참정권 요구마저 포기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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