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378 12 10
11/18
프린트하기 전체 보기 PDF 보기

그러나 쿠바 지배자들은 하향식 “발전” 모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제 모델이 또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브레즈네프가 이끄는 동유럽 블록에서 우세한 모델로 향했다. “카스트로는 이제 쿠바 경제를 새로운 소련 고문단의 손에 넘겼고”57, 당시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1만 명가량의” 러시아인들이 머물렀다.58

관료화

이제 1959~1961년의 유동성은 사라졌고 사회 구조가 고착됐으며, 동유럽과 소련은 쿠바가 모방해야 할 본보기로 여겨졌다. 그 모방이 불완전했다면, 그것은 소련 군대가 권력을 쥐어 준 동유럽 정권들(유고슬라비아는 제외)과 달리 쿠바에는 혁명의 발자취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바에는 소련식 일당 국가가 거느리고 있을 법한 온갖 기구들이 넘쳐났고, 당원들 사이에서든 소위 “민중 권력” 기관들에서든 진정한 논쟁이 벌어질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트가 말하듯 “쿠바는 … 소련이라는 틀에 맞추어 사회를 재구성”하려 했고 1970년대 중반에 그 과정이 완수된다.59

물론 이 시기 쿠바의 불평등은 1959년 이전의 쿠바나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보다 덜했다. 혁명 초기에 성취한 의료 및 교육 부문의 성과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혁명 이후 쿠바를 떠난 의사 2500명을 대체할 의사들이 다른 라틴아메리카 나라들로부터 충원됐고, 1959년 혁명 이전과 달리 도시 지역만이 아니라 농촌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까지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대한 사회 분단선이 존재했다. 1973년 상위 20퍼센트의 소득은 하위 20퍼센트의 4.8배였으며(1958년에는 10배가 넘었다), 상위 10퍼센트의 소득은 하위 10퍼센트의 10배였다.60 이 비율은 대다수 서구 자본주의 나라들보다는 낮지만 같은 시기 대만과 매우 비슷했다. 하지만 이 수치도 사회 최상층의 극소수가 나머지와 얼마나 동떨어진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듀몽은 쿠바를 방문해 최상층 쿠바인들과 섞여 지낸 뒤 이렇게 썼다.

정부 고위 관리들과 그 가족들은 멋진 별장과 아름다운 베라데로 해변에서 공짜 휴가를 보냈다. 새로운 지배 카스트가 쿠바에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호의적이지만 온정주의적으로 호의를 베푼다. 특권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고 결핍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이 새로운 계급은 대중의 물질적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61

심지어 사탕수수 수확을 위해 징집된 “자원자” 팀 내에도 격차가 존재했다. “공용 숙소에 머무는 젊은이들에게 제공되는 가장 흔한 메뉴는 곤죽 한 국자였지만, 고위 관리들은 닭고기·쌀·아보카도·시가·커피를 즐겼다.”62

다수 대중은 카스트로가 몇 시간이고 연설하는 정례 대규모 집회에 참가해 정권에게 지지를 보내야 했다. 분명 실제로 많은 이들이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집회 참가는 그다지 자발적이지 않았다. 듀몽은 이렇게 지적한다. “일손을 놓고 집회에 참가하는 것은 의무였다 …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모든 쿠바인들이 카스트로를 지지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열렬한 지지자가 그보다 적었다.”63 1960년대 말 꼴을 갖춘 새로운 공산당은 노동자들을 당원으로 충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동자들은 당위원회가 지명하고 대중 집회에서 인준받은 “모범” 노동자들이었다. 평당원들은 경제 계획 목표치, 소비 대 축적의 비율, 지배 집단과 나머지 인구 사이에서 희소 소비재 분배 등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중대한 결정에 관해 발언권이 전혀 없었다.

닫기
x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