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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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티스타의 군부 지배로는 부르주아지의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회복시킬 수 없었다. 쿠바 경제 상황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쿠바의 1인당 실질 국민총생산GNP은 1920년대와 같았다. 도시의 경제 발전으로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의 기반이 형성됐지만, 농촌의 고통스러운 가난을 뿌리 뽑지는 못했다. 실업률이 높았고(15퍼센트 이상)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노동자들도 일 년에 몇 달밖에 일하지 못했다.

바티스타는 입헌 정치의 여지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 제2차세계대전 시기 대부분 동안 바티스타는 (스탈린주의 정당 PSP의 지지에 힘입어) 선출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통치했다. 1944~1952년에 1933년 운동에서 등장한 특정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정부를 운영했지만 이들은 금세 인기를 잃었다. 당시 특징적인 정치 분위기 하나는 대다수 국민이 정권에게서 느낀 배신감이었지만, 그 배신감은 수동적 성격을 띠었다. 또 다른 특징은 한때 단결했던 혁명운동 세력이 갈라져 생겨난 두 포퓰리즘 정당(‘아우텐티코’와 ‘오르토독소’), 학생운동의 다양한 분파들(이들은 국가를 상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무장 충돌을 벌였다)이 서로 격렬한 쟁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 내내 쿠바 자본가들은 안정적 정치 체제를 마련하지 못한 대가를 이중으로 치러야 했다. 하나는 자본가들과 이해관계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 갈수록 폭력배 비슷해지는 통치자에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또 다른 대가는, 최소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계급 부문에게는 임금 인상 요구를 들어 주고 산업 붕괴를 막기 위해 국가 개입을 수용하는 등 일정한 양보를 해야 했다는 점이다.

1952년에 바티스타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전 세계 설탕 가격이 하락해 쿠바의 1인당 소득이 일 년 만에 15퍼센트 감소하던 때였다. 군대와 경찰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덕에 바티스타는 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만, 탄탄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 바티스타는 노동자와 농민에게서 적극적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쿠바 부르주아지가 원하는 조치를 노동자·농민에 강요할 만큼 막강하지도 않았다. 하층 중간계급/학생 집단들 사이에서 불만이 여전히 팽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티스타는 이런저런 정치 세력을 포섭하는 전략에 기댈 수 없게 됐고, 그래서 모든 세력을 거세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1956년 말,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비롯한 게릴라 200여 명이 쿠바 해안에 상륙할 무렵에는 쿠바 전역의 모든 정당, 사회 단체, 심지어 부르주아지와 연계된 곳들도 바티스타를 격렬히 반대했다.

저항, 반란, 게릴라

바티스타 전복의 결정적인 주도력은 이번에도 1933년 운동에서 일정한 구실을 한 포퓰리스트 정치 환경에서 나왔다. 파버가 설명하듯 “‘오르토독소’ 청년들은 카스트로가 이끄는 ‘7월 26일 운동’의 조직원을 충원하는 주요 원천이었다. 1940년대 말 피델 카스트로는 오르토독소의 중간 간부로서 당원들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좀 더 급진적인 경향을 형성하려 했다.”11 노동자들은 봉기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노동조합은 국가가 지명한 인물이 운영했다. 다른 도전자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면 노동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 줘야 했지만 말이다. 노동조합 안에서 좌파적 저항을 주로 이끈 PSP는 바티스타 정권에 협조한 전력으로 위신이 떨어진 데다가 [바티스타에 의해 불법화돼] 비밀리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또, 농촌 노동자와 상대적으로 보호받는 여러 도시 노동자의 처지 사이에 현격한 불균형이 존재했다. 1958년 4월에는 총파업 시도가 처참히 실패했다. 주요 산업 부문 노동자들이 반란에 참가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난 셈이었다. 반면, 1930년대부터 전해 내려온 학생/중간계급의 포퓰리스트 전통은 무장 행동을 늘리며 상황에 호응했다. 상대적으로 작고 철저히 지하에서 활동하는 집단만이 비밀경찰을 피해 정권 반대 행동을 계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실행에 나서면 같은 배경의 사람들뿐 아니라 바티스타를 제거하길 간절히 원하는 쿠바 사회 내 모든 세력, 심지어 부르주아지 일부도 이들을 칭송했다.

카스트로는 1953년의 실패한 반란으로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카스트로는 소수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병영을 공격했다. 이런 전술을 편 것은 카스트로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그룹인 ‘학생혁명지도부’는 1957년 3월, 대통령궁을 공격해 바티스타를 암살하려 했다. 즉 1956년 12월에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소수의 핵심 게릴라 부대12를 이끌고 상륙했을 때, 이들은 그런 전술을 편 유일한 집단이 아니었다. 지하에서 투쟁을 벌이던 광범한 게릴라 네트워크가 존재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카스트로의 ‘7월 26일 운동’과 연계돼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게릴라들도 일부 있었다. 최근 줄리아 스웨이그는 이런 네트워크에 속한 다양한 반란 조직들이 1956~1958년에 도시에서 벌인 활동을 생생하게 설명했다.13 그들은 폭탄을 설치하고, 암살을 시도하고, 파업을 부추겼다. 도시를 중심으로 봉기를 촉발한다는 전망에서였다. 그들은 무기를 밀수해 쿠바 남동부(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는 카스트로의 소규모 게릴라에게 제공했다. 파버는 이렇게 쓴다. “신화와 달리, 도시에서의 투쟁은 ‘7월 26일 운동’이 벌인 대부분의 활동이자 가장 위험한 활동이었다.”14 1957~1958년에 도시에서 저항하다 사망한 조직원의 수는 1500~2000명에 이르렀다.15 이는 농촌 게릴라 사망자의 10배나 되는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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