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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2차 세계대전의 민중사》

두 개의 전쟁? *

MARX21

  • 출처: Bolaris, Leandros, 1983, Two in one?, International Socialism 138,(Posted on 10th April) http://isj.org.uk/two-in-one/

  1. Gluckstein, 2012, p208.
  2. Gluckstein, 2012, p209.
  3. Gluckstein, 2012, p210, 강조는 글럭스틴의 것.
  4. Gluckstein, 2012, p15.
  5. Gluckstein, 2012, p21.
  6. Gluckstein, 2012, p85.
  7.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과 균형 잡힌 논의는 Jackson, 2004을 참고하라.
  8. Gluckstein, 2012, p87.
  9. Trotsky, 1973a, p498.
  10. Trotsky, 1973b, p302.
  11. Mandel, 2011, p45. 만델의 책에 대한 비판으로는 Hallas, 1987을 보라. [원문의 참고문헌 목록에는 해당 문헌이 빠져 있는데, 다음 글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Hallas, 1987, “Wars within wars,” https://www.marxists.org/archive/hallas/works/1987/03/ww2.htm — 옮긴이]
  12. 파보네의 관점에 대한 설명은 Behan, 2009, pp56-60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13. Jackson, 2001, p558.
  14. Gluckstein, 2012, p214.
  15. Gluckstein, 2012, p96: 강조는 인용자의 것.
  16. 그러나 에셀이 자유프랑스[드골 주도의 망명 정부]의 정보 기관 BCRA의 드골파 요원이었다는 점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7. FTP는 공산당 레지스탕스의 무장 조직이었다. MOI는 1920년대 초 이후 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조합 연맹인 CGT-U의 이주노동자 조직이었다.
  18. 이는 좋게 말해 매우 기이하기 짝이 없는 정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프랑스를 다룬 장의 제목은 ‘제국의 영광 대 레지스탕스 이데올로기’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던가? “프랑스의 영광”이나 공화국의 영광이 과연 제국주의적 영광, 프랑스 식민지들, 프랑스 문화가 그 식민지들에 끼친 “문명화” 영향과 별개였을까? 자유프랑스는 레지스탕스의 일부였고 드골주의 이데올로기의 짐 가방에는 “제국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 가득했다.
  19. 후크발라합(인민항일군)은 필리핀 공산당의 무장 조직이었다. 이상하게도 글럭스틴의 책에는 후크발라합에 관한 언급은 없다. 오히려 인도네시아에 한 장을 할애했다. 그곳의 민족해방투쟁이 일본의 패망 이후에 시작됐고 수카르노를 포함한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일본의 지배에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했는데도 말이다.
  20. 벨기에에서는 1944년 11월에 가까스로 군사적 충돌을 피했다. Kolko, 1990, pp97-98을 보시오.
  21. Gluckstein, 2012, p41.
  22. 도미니크 외드가 제시하는 수치는 그의 다른 많은 설명들과 마찬가지로 부정확하다.(Eudes, 1972) 필자가 제시한 수치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Hadzis, 1977, pp52-57, KKE, 2005, pp461-462, Bartziotas, 1983, pp263-264. 타나시스 하지스는 공산당의 후보 중앙위원이었으며 1941~1944년에 민족해방전선 총서기를 지냈다. 바실리스 바르지오타스는 공산당 정치국원이었고 1943~1946년 아테네 당 조직 책임자였다.
  23. AKE에 가입시키고 마을 당 세포 조직을 해체시켰다.
  24. Gluckstein, 2012, p40.
  25. 글럭스틴의 설명에는 그 외에도 부정확한 사실관계가 여럿 있다. 예를 들어 1936년 8월 4일 메탁사스와 국왕이 자신들의 독재를 관철시켰을 당시 메탁사스는 장군이 아니라 총리였다. 공산당 지도자인 니콜라오스 자하리아디스가 “양극 이론”(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그리스가 균형을 잡아야 하며 영국 제국의 “정당한” 이해관계를 인정하자는 주장)을 정식화한 것은 나치 점령 시기가 아니라 1945년 6월 제12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였다. 영국의 장군 알렉산더가 아테네를 “로테르담”처럼 [쑥대밭으로] 만들자고 한 것은 “12월 사태” 동안 더디게 진척된 작전에 관해서 한 얘기이지 “마나 작전”[독일이 철수한 후 민족해방전선이 아테네를 접수하기 전에 영국군 병력을 진입시키기 위한 작전]에 관해 한 얘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영국이 충돌 첫 24시간 동안 2500개의 포탄을 발사해 1만 3700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26. 이러한 설명은 그리스를 다룬 장의 후주로만 처리돼 있다. Gluckstein, 2012, p230.
  27. McNeill, 1947, pp145-146.
  28. Gluckstein, 2012, p54.
  29. Gluckstein, 2012, p213.
  30. A J P Taylor는 《제2차세계대전의 기원》에서 두 전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서방의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간상 겹친” 동방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Taylor, 1991, Kindle locations 612-616.
  31. Collingham, 2011, Kindle locations 181-182.
  32. Gluckstein, 1999, p2;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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