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반혁명의 유령들

알렉스 캘리니코스 5 38
386

출처 : Alex Callinicos, Spectres of counter-revol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Issue: 140, Posted on 7th October 2013

번역 김준효

이제 반혁명이 아랍 세계에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다양하고 혼란스럽다. 예컨대 시리아에서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과 알아사드 정권에게 군사 행동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미국, 둘 모두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우드 왕가는 중동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애쓰는 걸프 연안 국가들을 선도한다. 어떤 곳(바레인)에서는 직접 무력으로 개입하고, 다른 곳(이집트)에서는 구정권 을 지원하고, 또 다른 곳(시리아)에서는 종파적 수니파 지하드를 후원한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아랍 세계의 심장 이집트에서 반혁명은 압델 파타 엘시시 장군이라는 너무나 위압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2013년 7월 3일 이집트군 총사령관 엘시시는 선출된 대통령인 무슬림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를 축출하고 이집트의 통치자가 됐다.

아랍 혁명이 분출한 지 약 3년이 지난 오늘날 중동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튀니지] 벤알리와 [이집트] 무바라크의 타도에 고무된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질 만하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1968년의 오랜 구호를 떠올릴 때다. “생각을 고쳐먹지 마라. 문제는 현실이다.” 혼란은 실로 심각하다. 이 혼란은 현 상황을 규정하는 모순들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 모순들은 예컨대 버락 오바마 정부의 주저함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이집트: 혁명과 반혁명이 얽히다

이 모순들이 낳은 애매함에 대해 리버럴 좌파나 더 확실한 좌파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는 한 가지 반응은 애당초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집트] 상황에 밝은 논평가 휴 로버츠는 최근 이렇게 썼다. “이제 환상을 팔아먹는 사람들은 겁에 질린 듯하다. 7월 3일에 벌어진 일을 ‘2차 혁명’으로 묘사하는 것은 더는 유행이 아니다. 그에 비해 반혁명이라는 묘사는 이론의 여지 없이 훨씬 정확하지만 애초에 혁명이 있어났음을 전제한다.” 1

인도공산당(마르크스주의파)과 연관된 가장 유명한 지식인일 아이자즈 아마드도 나름의 방식으로힐난조로 말한다.

화려한 참가자 통계와 볼거리를 뽐냈음에도 [2011년 1월 25일과 2013년 6월 30일에 벌어진] 이 항쟁들은, 1952년 나세르주의 자유장교단 쿠데타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제한적 의미의 혁명에도 못미치는 것이었다. 나세르주의자들은 군주제와 봉건적 특권을 철폐하고, 토지를 재분배하고, 동맹 관계를 반제국주의적 방향으로 재구축하고, 공공부문을 건설하고, 빈민과 하층 중간계급에 득이 되는 온갖 정책을 도입해, 매우 신속하게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2011년이나 2013년에는 이와 조금치라도 비슷한 것이 약속되지도, 제안되지도 않았다. 2

1952년 7월 가말 압델 나세르는 군사 쿠데타로 권좌에 올라 이집트 정치 경제를 국가자본주의적으로 재편할 수 있었다. 아마드가 스스로도 인정한 “역사상 유례 없는 규모의 두 대중 항쟁”보다 나세르의 쿠데타를 더 선호하는 것은, 인도뿐 아니라 아랍 세계, 특히 이집트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좌파와 세속 민족주의자들의 관점을 표현한 것이다. 국가자본주의적 국내 정책과 지정학적 동맹 관계를 이유로 “진보적” 군사 정권을 선호하는 맥락에서 아마드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지지했다.

시리아는 역사적으로 아랍 민족주의로 이해되던 것의 마지막 남은 대변자다. 시리아는 아직도 사회주의를 표방한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대폭 시행했음에도 국영 부문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시리아는 정치에서 종교를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금지한다. 시리아는 종교 정당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시리아는 여러 이유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숙적이다. … 지난 시절 시리아는 사회주의 진영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으며 그 관계는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3

아마드의 시각은 상이한 색조의 정치적 이슬람주의를 단일한 반동적 세력으로 뭉뚱그리는 시각의 전형이다. 그래도 아마드는 이집트 대중 행동의 규모를 인정한다. “이집트의 정치 행위자는 군부와 이크완[무슬림형제단 — 캘리니코스], 이 둘이 아니라 셋이다. 셋째는 바로 대중 운동이다.” 4

반면, 로버츠는 대중 운동과 활동가들(특히 6월 30일 거대한 시위를 조직한 활동가 연합 타마로드의 활동가들)이 사악하고 비밀스러운 세력에게 이용당한 얼간이들이며, 가장 중요한 배후 세력인 군부가 이제 전면에 나섰다고 본다. 로버츠는 무바라크가 거의 30년간 집권하면서 군부로부터 고도의 정치적 자율성을 키워 왔으며 갈수록 왕조를 닮아가는 대통령제에 중점을 두고, 때때로 무슬림형제단을 이용해 군부를 견제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11년 2월 11일에 일어난 일[무바라크 사임]은 자유장교단 국가의 갱신이다. 무바라크의 몰락 그 자체는 혁명에 못미치는 일이었다. 1952년 자유장교단 쿠데타로 수립된 국가의 근본적 틀이 여전히 무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군최고평의회SCAF가 지배적 정치 행위자로 부상하면서 누구에게나 명백해졌을 것이다. … 군부는 1952년 이래 정치 권력의 원천이었다. … 무바라크가 이들을 주변화시키면서 군부는 일상적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게 됐지만, 대안적 권력의 원천이 군부를 대체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군부를 무대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들인 2011년 1~2월의 사건은 혁명이 아니었다. … 2013년 7월 3일이 2011년 2월 11일의 근본적 논리를 회복시켰다고 하는 엘시시 장군과 타마로드의 주장에는 적어도 일관성의 맹아가 있다. 그날의 근본 논리는 역사적으로 정치적 우위에 있었던 군부가 자기 자리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혁명이 아니었고 민주주의의 혁명적 도래도 아니었다. 이 점을 직시하면 그 일관성을 이해할 수 있다. 5

로버트의 분석에 있는 매우 중요한 일말의 진실은, 무바라크가 타도됐어도 이집트 국가의 정치적·억압적 핵심, 즉 군부가 온존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2011년 2월의 이집트는 1979년 2월의 이란과 예리하게 구분된다. 당시 이란에서는 좌파와 이슬람주의자들이 연합해 일으킨 무장 봉기가 샤의 군대를 분쇄해 버렸다. 6 물론, 어느 자본주의 국가에서든 군대는 최후의 방어선이지만, 이집트에서 군대는 1952년 이래 핵심 정치권력 기구였으며, 1970년대에 안와르 사다트가 다진 미국과의 동맹을 지탱하는 핵심축이기도 했다. 군 장성들이 1월 25일 혁명을 자신의 우위를 재확립할 기회로 삼았다는 로버츠의 말은 과장일 수 있지만, 무바라크 퇴진 후 군부가 부르주아 정치 무대를 조직하는 핵심 세력이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처음에 군부는 2011년 2월 ~ 2012년 7월 동안 군최고평의회 통치를 통해 그런 구실을 했다. 그 후 무르시 하에서는 이전보다 배후에 있었다가, 무르시를 축출한 후에는 (형식적으로 민간인 대통령과 각료를 두는 있으나 마나 한 위장을 했지만)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군부가 이런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집트 부르주아지에게 힘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이는 이집트 부르주아지의 만성적인 정치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실로, 혁명이 시작되고 나서 이집트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대중 운동 규모와 그 정치적 표현 사이의 간극이었다. 정확한 의미의 부르주아지 정당들은 계속 한심한 혼란 상태였다. 무바라크 치하에서 성장한 세속 민족주의자들과 좌파들도 마찬가지였다. 엘시시는 무르시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대거 규합한 구국전선NSF의 지지를 챙기면서도 그로부터 큰 제약을 전혀 받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집트 자유주의자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무슬림형제단 시위대 유혈 진압에 항의해 용기를 내어 8월에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가 결국 “국가 신뢰 실추”를 이유로 기소 위협을 당했다. 수치스럽게도 타마로드는 무슬림형제단 탄압의 응원 부대 구실을 했다.

이런 패턴에서 유일한 예외는 역설적이게도 (유일하게 만만찮은 부르주아 정당이자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조직인) 무슬림형제단 자신이었다. 무바라크 집권 수십 년 동안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었지만, 복지를 제공하고 반정부 진영에서 두각을 보인 덕에 강력한 대중 기반을 구축했다. 2011년 2월 이후, 이집트 자본주의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서 군부가 선택할 파트너는 논리적으로 무슬림형제단이었다. 무르시의 대통령 취임은 양측 모두의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군최고평의회는 대중 저항을 단속할 수 없었다. 무르시가 더 잘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2011년[2012년의 오기] 6월 대선 결선 투표에서 무르시가 선두를 달린 것은 혁명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대거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르시에 투표하는 것이 ‘펠로울’, 즉 구체제 “잔당 세력”의 후보 아흐메드 샤피크를 저지할 유일한 방안이라고 여겼다. 이 투표에서 무르시가 51.73퍼센트 대 48.27퍼센트로 간신히 이긴 것은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광범한 불신을 보여 줬을 뿐 아니라, 이집트 사회의 보수층 사이에 반혁명 진영의 대중적 기반이 적잖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 세력들에 기회를 열어 준 것은 무르시 정부였다. 로버츠는 무슬림형제단이 집권을 도모하면서 사실상 제발로 함정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집권 후 무슬림형제단은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모순에 처했다. 이집트 부르주아지와 미국 정부를 만족시키기 위해 무르시는 정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려 했다.(물론, 예컨대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대로 연료 보조금을 삭감했다가는] 연료비가 상승해 반란을 촉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피하려고 IMF 차관 협상에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기는 했다.) 이것은 대중에게 배신감을 안겨 주는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무르시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도 유지했다.

동시에 무르시는 (수니파 원리주의인 살라피주의 정당들과의 경쟁 압력 속에서) 무슬림형제단의 기반을 지키려고, 그리고 군부에 대한 불신 (완전히 정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때문에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려 했다.(2012년 11월 “헌법 선언”이 대표적이다.) 더 일반적으로는 이슬람주의의 사회적·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럼으로써 무르시는 혁명가들과 광범한 부르주아지 모두에게 적대적인 여론을 샀다. 군대와 경찰,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들이 시위대에 퍼부은 폭력과 소수 종교인 콥트교 신자들을 겨냥한 공격은 증오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고, 이는 무르시 정부를 무너뜨렸으며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군부를 강화했다.

6월 30일 대규모 시위는 이집트인들의 진정한 대중 운동이었다. 무르시 타도에 성공했다는 점, 다시 말해 무르시가 2년 반 만에 대중 반란으로 타도된 두 번째 대통령이 됐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무바라크든 무르시든 그들의 해임을 집행한 것은 군대였다. 당연히 엘시시와 동료 군 장성들은 중립적인 “국민의 공복公僕”이 아니라 이집트 자본가 권력의 핵심 기구로서 움직였다.

이집트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RS는 군부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게 분석한다.

대중의 분노가 무르시를 끌어내릴 만큼 커졌음이 분명해지자, 지배계급 내에서 가장 강력하고 응집력 있는 기구인 군대가 재빨리 개입해 대중의 분노를 단속하고 대중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정부 수반에 건 이기지 못할 도박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지배계급을 재편하고 결집시켜야 했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대중의 요구를 실현하고 이집트인을 “하나의 대오”로 단결시킬 영웅처럼 등장할 터였다.
사실 군부는 양쪽에서 타오르는 불길 사이에 갇혀 있었다. 한쪽은 대중 운동의 불길이었다. 무르시가 계속 집권했다가는 이 불길이 일정한 한계를 돌파할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쪽은 거리의 무슬림형제단과 이슬람주의자들의 불길이었다. 무르시가 퇴진할 시 시나이 반도에서 상당히 복잡한 전선이 형성되고 정도는 덜하겠지만 상이집트[나일강 상류 지역] 일부 지역에서도 전선이 생길 터였다. … 군부는 그런 대가를 치르더라도 대중 운동의 불길을 피하기로 했다. 무르시를 쓰러뜨리는 한편 대중을 달래고 대중 운동의 발전을 저지하면서 무슬림형제단의 불길을 상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는 편이 대중 운동의 불길을 상대하는 것보다 덜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7

군부가 이런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의 경제적·정치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능력이 있는, 대중의 강력한 자기 조직 형태 내지 정당을 혁명 운동이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만한 실패다. 예컨대, 이집트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는 이 한계를 극복하려고 장렬히 분투했지만 사회적 뿌리가 비교적 얕은 소규모 마르크스주의 단체가 수십 년간의 탄압과, 스탈린주의 정치의 왜곡이 낳은 효과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집트 좌파를 지배해 온 스탈린주의 정치가 주요 이집트 좌파들을 구국전선으로 들어가게 하고 엘시시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해도 6월 30일 시위를 일면적으로 일축하는 것(로버츠가 이를 가장 뚜렷하게 표현했다)은 옳지 않다. 무르시 퇴진은 대중 항쟁 군부 쿠데타 모두의 결과다. 두 결정 요인을 모두 포착하지 못하면 무바라크에 맞선 항쟁으로 분출한, 근본에서 혁명적인 동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이중성이 낳은 애매함은 단기적으로 군에 유리하다. 이는 6월 30일 시위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펠로울’이 무르시 반대 흐름에 편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부가 나세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유산을 이용할 수 있었던 탓에 애매함은 더 커졌다. 나세르주의 덕에 군부는 “국민”, “대중” 운운하는 수사(“민주“를 운운하지는 않았지만)로 치장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구국전선의 가장 명망 있는 지도자 함딘 사바히에 의해 강화됐다. 사바히는 2012년 대선 1차 선거에서 인상적인 좌파적 선거 운동을 벌였지만 이후 군부에 끈질기게 구애하면서, 자신이 얻은 표를 조직으로 승화시킬 기회를 스스로 팽개쳤다. 유혈 낭자한 군부 치하 시절 라틴아메리카의 장군들처럼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으스대는 엘시시는 어처구니없게도 새로운 나세르로 선포됐다. 가까운 미래에 엘시시가 이집트를 서방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의 중심으로 만들 기색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군 장성들이 이전의 군최고평의회나 무르시보다 앞날이 평탄한 것은 아니다. 일단, 무슬림형제단은 깨뜨리기 어려운 세력으로 드러날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영국,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가 종종 자행한 혹독한 탄압을 모두 견뎌냈다. 군부가 선출된 대통령을 제거한 탓에 무슬림형제단 활동가들은 그들에게 민주적 정당성이 있다는 인식으로 힘을 얻을 것이다. 한편, 이집트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가 지적하듯이 이미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활동가들이 지하드 단체로 이반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슬람주의로 가는 의회적 길을 이런 단체들이 거부하는 것이 사태 전개에 의해 입증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의 “테러리즘”에 대한 엘시시의 공세는 흔히 그렇듯이 더 많은 진짜 테러리스트를 배양할 공산이 크다.

더 근본적으로 이집트는 경제적으로 사실상 파산 상태다. 게다가 (마이클 로버츠가 이번 호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실린 글에서 보여 주듯이) 세계경제가 여전히 2007~2009년의 추락과 부진이 낳은 효과와 씨름하는 와중에 그렇게 됐다. 그런데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최근에는 (현재까지는 무슬림형제단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카타르까지, 걸프만 연안 국가들에서 차관이 쏟아졌다. 덕분에 정권은 시간을 벌 것이다. 정권은 무르시가 대중의 반감을 산 전력 차단과 식료품·연료 부족(분명 ‘펠로울’도 일조했을 것이다)을 불식시키려 안간힘을 써 왔다.

하지만 이런 지원으로는 이집트 경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라는 이집트 국내외 자본의 요구와 2011년 1월 25일 이래로 대중의 몸에 밴 행동 사이의 모순을 해소할 수 없다. 1월 30일[“6월 30일”을 잘못 쓴 듯하다] 시위의 의의 하나는 행동이 지리적으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농촌에서 무르시의 경제 정책에 분노한 많은 사람들을 행동에 끌어들였다.

군부는 국가의 탄압 능력을 재건하려 한다. 무바라크에 맞선 항쟁으로 산산조각난 경찰과 정보 기관들을 소생시키고 비밀경찰을 주지사 자리에 앉히려 한다.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탄압이 남긴 선례와, 9월에 연장된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정권이 휘두를 예외적 권력은 잠재적으로 혁명 운동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적대감 때문에 무슬림형제단이 고립되기는 했어도 군부가 (대개 도시에서 징집한) 병력으로 직접 도시 대중 운동을 분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폴레옹이 말했듯 총검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 위에 앉을 수는 없다. 그래서 강제뿐 아니라 동의도 필요하다는 점은 이집트독립노조연맹 위원장인 카말 아부-에이타를 노동부 장관에 임명한 것에 반영돼 있다. 아부-에이타가 군사 정권에 입각하는 수치스런 결정을 한 것은 나세르주의 정치의 반영이다. 그러나 이것은 1월 25일 이전까지는 독립노조가 거의 존재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노동조합 관료가 놀랍도록 빨리 자라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종류의 조처들로 노동자 운동을 단속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새 정부가 수립하자마자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이 몰아쳤다. 파업 노동자들은 요구를 대체로 쟁취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쿠데타가 가져온 후퇴의 의미를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군부는 혁명 운동에 균열을 내는 데에 (적어도 당분간은) 성공했다. 그러나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최초로 항쟁이 분출한 이래 우리가 거듭 강조했듯이 혁명은 하나의 과정이지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혁명은 진퇴를 거듭하며, 대중의 의식과 자주적 조직이 전진하기도 하고, 반혁명 세력이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8 이런 측면들이 6월 30일 이집트에서 벌어진 상황에 혼재해 있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럽지만,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다.

군부와 무슬림형제단을 한 번씩 경험해 본 대중은 후자를 거부하면서 전자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악순환을 깨려면 노동자 운동이 크게 발전하고, 착취받고 천대받는 광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정치적 좌파가 크게 성장해야 한다. 판돈이 매우 크다.

시리아: 제국주의는 궁지에 몰렸는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 언제나 따라오는 질문은 거기에 미국이 얼마나 연루돼 있을까 하는 것이다. 9 시리아의 경우, 미국 대통령 오바마(이집트 군부의 8월 학살에 대응해 이집트와의 합동 군사 훈련을 취소했다)와 국무장관 존 케리(이집트 장성들에게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찬사를 보냈다) 사이에 강조점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미국은 아랍 세계의 안정성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에 안도했을 것이다. 이안 브레머는 미국의 대이집트 정책에 관해 쓴 흥미로운 글에서 “미국이 지난 [즉, 6월 30일 이후 – 캘리니코스] 6주 동안 이집트 상황에 사실상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지만 오바마는 “웬만하면 현상 유지에 매달릴 것이다”고 했다. 10

그러나 백악관과 미국 국방부의 시선은 중동 다른 곳에 단단히 고정돼 있다. 미국이 결국 아사드 정권을 군사력으로 치게 될지 여부(표면적인 명분은 8월 21일 다마스커스 동부에서 일어난 화학 무기 공격에 대한 응징이다)와 별개로 최근 몇 주 사이에 매우 분명해진 점이 하나 있다. 오바마가 시리아 공격 명령을 극도로 꺼린다는 것이다. 11

이것은 대통령이 지닌 기질의 장점이나 (관점에 따라서는) 약점 때문이 아니다. 즉, 오바마가 평화를 선호하거나 조지 W. 부시의 군사적 호기에 필적하지 못해서가 전혀 아니다. 오바마는 스티븐 홈스의 표현대로 프레데터 드론을 이용한 “원격 조종 살상”을 “대테러 정책의 핵심” 12 으로 삼은 자다. 미국 자본주의의 국제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면 부분적으로는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데에서 오바마는 전혀 환상이 없다. 시리아 개입을 꺼리는 것은 전략적 판단 때문이다. 여기에는 적극적 측면과 소극적 측면이 모두 있다.

적극적 측면을 보면, 오바마 정부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패배한 전쟁을 청산하고 미국의 군사적 역량과 외교적 노력을 태평양 건너에 있는 미국의 유일하게 만만찮은 경쟁자인 중국으로 돌리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중동에서 또 다른 수렁에 빠지는 것은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에 해가 될 것이다.

소극적 측면은 시리아에 지나치게 깊이 연루되는 것이 그 자체로 재앙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정학적 동맹 관계를 이유로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일부 좌파들(아흐마드가 대표적이다)은 2011년 봄에 시작된 반정부 대중 항쟁의 깊이와 규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실제로 시리아는 그 지역과 세계의 국가 간 체계에서 주요 단층선이다.

서방의 중동 정책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로 손꼽히는 언론인 패트릭 콕번은 그러한 조건에서 비롯하는 복잡성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했다.

시리아에서는 서로 구분되는 다섯 가지 갈등이 서로 얽히게 됐다. 반독재 대중 저항은 수니파와 알라위파의 종파 분쟁 성격도 띤다. 이 지역의 시아파 대 수니파 분쟁은 이란이 주도하는 동맹국들과 이란의 숙적, 특히 미국·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와는 또 다른 층위에서 냉전적 갈등이 부활했다. 러시아와 중국이 서방과 겨루고 있는 것이다. 14

이런 갈등들이 뒤얽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오바마와 국방부(시리아에 대해서는 국무부보다 훨씬 덜 강경한 듯하다)가 개입을 주저하는 것이다. 예컨대, 카타르는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권과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레바논의 시아파 대중 운동 헤즈볼라가 포함된 동맹을 꺾으려고 수니파 지하드 전사들의 시리아 유입을 부추겼다. 그 덕에 알카에다는 시리아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종파주의적 광신은 시리아 혁명의 이미지를 시리아 안팎에서 더럽혔다.

아사드 투쟁 세력들 사이에서 지하드 전사들의 구실이 커지자 미국은 반아사드 세력들에게 무기와 훈련을 지원하는 데에 매우 신중해지기도 했다. 이제는 다들 역풍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세계 곳곳에 개입하다가 낳은 의도치 않은 파괴적 결과를 아는 것이다. 15 가장 큰 역풍은 물론 2001년 9월 11일 공격이었다. 이 공격을 수행한 지하드 네트워크는 1980년대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저항하는 무자헤딘을 미국·영국·사우디아라비아·파키스탄이 지원하면서 생긴 것이다. 오사마 빈라덴 암살을 대외 정책의 최대 성과로 내세우는 오바마가 알카에다의 부활에 일조한다면 그것은 화려한 역풍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물론, 아사드 옹호자들의 오도와 달리 반정부 세력은 그저 지하드 전사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매우 넓은 스펙트럼에 걸친 정치 경향들이 반정부 투쟁에 참가하고 있다. 다른 중동 지역과 마찬가지로 시리아에서도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의심은 팽배하다. 그런데 이는 미국의 걱정을 더 키우는 요인일 뿐이다. 미국이 보기에, 혁명 세력이 승리하면 시리아는 아사드 치하 때보다도 훨씬 예측하기 어려운 요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제국주의 국가 간 경쟁이라는 차원도 있다. 물론 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 새로운 “냉전”을 앞둔 상황은 아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쇠락한 러시아는 이제 세계적 강대국이 아니다. 중국은 아시아와 어쩌면 더 넓은 지역에서 미국 헤게모니에 도전할 만한 군사적·경제적 역량을 키우고 있지만,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시리아에 대한 군사적 대응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을 막는 것 이상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반면,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 하에서 2008년에 조지아를 침공하는 등 “근외지역”[옛 소련 소속 공화국들]에 성공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해 왔고, 아사드 정권과도 오랜 연계가 있다. 러시아는 자신이 꾀임에 넘어가 카다피 정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나토의 개입을 용인하게 됐다고 보고, 더는 미국이 중동에서 지배력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다. 16

러시아는 쓸 수 있는 패가 많지 않았지만 이를 매우 잘 사용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시리아가 러시아와 푸틴을 “세계 외교 무대의 중심에” 17 올려놓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흥미로운 것은, 아사드의 화학 무기를 국제적으로 규제하자는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의 제안이 아니라 그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다. (미국이 1991년과 2003년에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에도 이와 유사한 외교적 제안이 있었다.) 부시 부자父子는 미리 전쟁을 피하려는 시도를 가볍게 무시했지만, 오바마와 케리는 마치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듯한 속도로 라브로프의 제안에 관해 논의하자는 데에 동의했다. 오바마가 중동에서 또 다른 전쟁에 휘말리기를 꺼린다는 또 다른 징후는 이란의 핵 개발을 둘러싼 협상에 미국을 끌어들이려 하는 새 이란 대통령 하산 로하니의 노력에 오바마가 비교적 호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시리아에서 최종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러시아의 제안은 오바마에게 자승자박에서 벗어날 기회가 됐다. 처음에 오바마의 자승자박은 아사드의 화학 무기 사용을 “레드 라인”으로 설정한 것에서, 이후에는 의회에 군사 행동을 승인해 달라고 요구한 것에서 비롯했다.

물론 오바마가 그런 요구를 했던 것은 8월 29일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이 시리아 문제를 두고 하원에서 역사적인 패배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는 1855년 애버딘 내각의 크림 전쟁 수행을 규탄하는 하원 표결로 애버딘이 총리에서 물러난 이래 영국 정치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보수당 평의원들이 시리아에서의 군사 행동에 반대한 것은 영국 정부의 취약성과 총리인 캐머런 개인의 권위가 쇠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징후다.

그러나 군과 정보 기관의 판단을 둘러싼 논쟁 과정에서 깊은 회의감이 표출되고, 오바마가 대통령직의 운명을 자신에게 적대적인 공화당원들로 들어찬 의회에 맡겼다는 사실은, 여기에 뭔가 훨씬 근본적인 것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보여 준다. 뻔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상당수 좌파가 이를 부정한다. 그런 주장을 가장 정교하게 제시한 것이 나오미 클라인이다. 클라인은 이라크 점령으로 미국의 “재난 자본주의”가 벌어들인 이윤을 자세히 설명한다. 18 그러나 이는 지독한 경제환원론이다. 장기적 수익성을 보장받으려면 미국 자본에게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세계에서 수호할 수 있는 국가가 필요하다. 그 국가의 힘과 정당성이 감퇴하면, 더 전반적인 수준에서 미국 자본주의가 약화된다.

미국 제국주의가 중동에서의 또 다른 군사적 모험에 관해 고심하는 지금,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가 얼마나 약화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의 인식과 다른 나라 국민의 인식으로 가늠할 수 있다. 미국 상·하원 의원들과 영국 의회 의원들은 미국·영국의 안보 기구를 상당히 의심하는 대중을 상대하고 있다. 이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서방이 전쟁에 패하고 그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거짓말을 경험한 결과다. 그러나 이는 부시 2세의 “테러와의 전쟁”에 맞서 성장한 반전 운동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미국의 이라크전 패배는 베트남전 패배보다 더 심각하다.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미국은 “베트남 신드롬”에 시달리며 수십 년 동안 해외 군사 개입 능력을 제한해 왔지만, 그 패배가 아시아에 미친 파장 자체는 제한적이었다.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가 중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일본·남한·대만에서 미국과 연계가 깊은 강력한 자본주의가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중동은 언제나 다루기 더 까다로운 지역이었다. 레이건 정부가 1980년대에 레바논과 이란에서 휘말린 난장판이 보여 주듯이 말이다. 19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끌어내린 덕분에 이란의 세력권은 더 강력해졌다.(현재 이라크는 친이란 성향의 시아파 정부가 지배한다. 이 또한 역풍의 사례다.) 그리고 아랍 혁명은 이 지역을 더한층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국 제국주의가 끝장난 것은 아니다. 미국 지배계급은 어마어마한 경제적·군사적 역량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 군부에 있는 그들의 동맹은 이집트에서 피비린내 나는 질서를 재구축하는 데에 성공할 수도 있다. 아랍 혁명은 매우 위험한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혁명이 끝난 것도 아니다.

MARX21

후주

1 Roberts, 2013, p3.
2 Ahmad, 2013.
3 Ahmad, 2011. 국가자본주의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시각은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한 그의 훌륭한 비판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Ahmad, 1992.
4 Ahmad, 2013.
5 Roberts, 2013, p6. 로버츠는 1952년 이후 이집트 국가 기구 내에서 대통령, 군부, 보안기관 사이에 일어난 내부 쟁투에 대한 Kandil, 2012의 상세한 설명을 소화한 것에 크게 기대고 있다.
6 이 핵심 논점은 필 마플릿에게 빚진 것이다. 이집트에 관한 마플릿의 최신 논문은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배경을 다룬다. Marfleet, 2013a, b, c를 보시오. 이 글의 초고를 읽고 평해 준 마플릿, 앤 알렉산더, 조셉 추나라, 찰리 킴버, 주디스 오어, 존 로즈에 감사하다.
7 Revolutionary Socialists, 2013.
8 Callinicos, 2011.
9 Harmer, 2011를 보시오. 이 흥미로운 연구는 아옌데 하 칠레에서 1973년 9월 쿠데타가 준비되는 데에서 닉슨 정부가 한 구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주도권은 브라질 군사독재 정권과 긴밀히 협조한 칠레 군부에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집트의 경우, 사우디아라비아가 엘시시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이 이와 유사하다.
10 Bremmer, 2013.
11 Blitz, 2013a는 정부의 몇몇 하급 관료가 아니라 아사드가 공격을 지시했다는 불확실한 증거를 검토한다.
12 Holmes, 2013.
13 Maunder, 2012와 Callinicos, 2012를 보시오.
14 Cockburn, 2013.
15 Johnson, 2001.
16 시리아 위기가 러시아의 전략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에 대한 좋은 분석은 Friedman, 2013을 보시오. 프리드먼의 최근 논평은 더 일반적으로 흥미롭다. 9·11 공격 이후 강경파가 된 프리드먼은 미국이 시리아에 사활적 이해관계가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17 Blitz, 2013b.
18 Klein, 2007.
19 Freedman, 2008 2부를 보시오.

참고문헌

Ahmad, Aijaz, 1992, In TheoryClassesNationsLiteratures (Verso).
Ahmad, Aijaz, 2011, “Why Syria Matters” (30 November 2011), http://williambowles.info/2011/11/30/video-why-syria-matters-interview-with-aijaz-ahmad-by-prabir-purkayastha/
Ahmad, Aijaz, 2013, “Revolution or Restoration?”, Frontline (20 September 2013),
www.frontline.in/cover-story/revolution-or-restoration/article5085155.ece?homepage=true
Blitz, James, 2013a, “Syria: Did Bashar al-Assad Personally Order the Chemical Weapons Attack?” (9 September 2013), http://blogs.ft.com/the-world/2013/09/syria-did-bashar-al-assad-personally-order-the-chemical-weapons-attack/
Blitz, James, 2013b, “A Long Week: Putin’s Diplomatic Gambit”, Financial Times
(14 September 2013), www.ft.com/cms/s/0/55e2f4c4-1c6c-11e3-a8a3-00144feab7de.html#axzz2et9zT0XR
Bremmer, Ian, 2013, “Barack Obama Declines to Correct His Egypt Mistake”, Financial Times (15 August 2013), www.ft.com/cms/s/0/1a363ea0-0596-11e3-8ed5-00144feab7de.html?siteedition=uk#axzz2eknQ6IKo
Callinicos, Alex, 2011, “The Return of the Arab Revol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30 (spring 2011), www.isj.org.uk/?id=717
Callinicos, Alex, 2012, “Rumours of Crisis, Revolution, and War”, International Socialism 134 (spring), www.isj.org.uk/?id=792
Cockburn, Patrick, 2013, “Is It the End of Sykes-Picot?”, London Review of Books (6 June 2013), www.lrb.co.uk/v35/n11/patrick-cockburn/is-it-the-end-of-sykes-picot
Freedman, Lawrence, 2008, A Choice of EnemiesAmerica Confronts the Middle East (Weidenfeld & Nicolson).
Friedman, George, 2013, “Syria, America and Putin’s Bluff” (10 September 2013),
http://www.stratfor.com/weekly/syria-america-and-putins-bluff
Harmer, Tanya, 2011, Allende’s Chile and the InterAmerican War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Holmes, Stephen, 2013 “What’s In It for Obama?”, London Review of Books (18 July 2013),
www.lrb.co.uk/v35/n14/stephen-holmes/whats-in-it-for-obama
Johnson, Chalmers, 2001, BlowbackThe Costs and Consequences of American Empire (Owl Books).
Kandil, Hazem, 2012, SoldiersSpies and StatesmenEgypt’s Road to Revolt (Verso).
Klein, Naomi, 2007, The Shock DoctrineThe Rise of Disaster Capitalism (Penguin).
Marfleet, Phil, 2013a, “’Never Going Back’: Egypt’s Continuing Revol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37 (winter 2013), www.isj.org.uk/?id=866
Marfleet, Phil, 2013b, “Egypt: The Workers Advance”, International Socialism 139 (summer 2013), www.isj.org.uk/?id=904
Marfleet, Phil, 2013c, “Egypt: Revolution Contained?”, Socialist Review (September 2013) www.socialistreview.org.uk/article.php?articlenumber=12379
Maunder, Jonathan, 2012, “The Syrian Crucible”, International Socialism 135 (summer 2012), www.isj.org.uk/?id=824
Revolutionary Socialists, 2013, “Letter to Comrades” (15 August 2013), http://socialistworker.co.uk/art/34144/Egyptian+Revolutionary+Socialists+letter+to+supporters
Roberts, Hugh, 2013, “The Revolution That Wasn’t”, London Review of Books (12 September 2013), www.lrb.co.uk/v35/n17/hugh-roberts/the-revolution-that-wasnt
x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