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표현, 국가 규제 그리고 표현의 자유

양효영 170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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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표현 규제와 표현의 자유 관련한 논란이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우파들이 표현의 자유를 방패막이 삼아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망언을 정당화하는 게 하나의 유행처럼 됐다. 트럼프는 대학 내 인종차별적 우파 지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학 당국들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영국에서는 인종차별적 우파들이 ‘표현의 자유 협회’를 설립했다. 한국에서도 가령 기독교 우익이 동성애 혐오 언사들을 표현의 자유로 포장한다. 하지만 우파들이 혐오 표현을 표현의 자유로 정당화하는 것은 견강부회일 뿐이다.

표현의 자유의 역사적 맥락

역사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게 제기된 이유는 자유로운 표현이 억압받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전 시기에 전제 왕정들은 지배 질서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배 질서에 대한 비판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져 처형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부르주아 혁명에서 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요구였다. 1689년 영국 명예혁명으로 작성된 권리장전은 “의회에서 말하고 토론한 내용으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도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는 ‘인권 선언’을 발표했다. 즉, 표현의 자유는 피억압자들이 권력자를 비판할 자유 문제로 제기됐다.

그런데 부르주아지들은 권력을 잡자 노동계급에게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표현의 자유는 노동계급 투쟁에 의해 확대돼 왔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결사(대표적으로 노동조합과 정당 등)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마르크스도 〈라이니셰 차이퉁〉(라인신문)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프로이센 국가의 언론 검열에 저항했다.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정부 비판과 피억압 계급의 결사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민주주의 투쟁의 중요한 일부였다.

자본주의 사회는 대체로 표현의 자유를 형식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피지배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늘 제약해 왔다. 자본주의 국가는 법적 장치들로 공개적인 표현을 제약하곤 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그랬다. 국가보안법은 혁명적 또는 친북적 사상과 견해, 단체 결성을 탄압해 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저작권법이나 방송 출판물 심의 제도 등도 피억압 계급이 무엇을 말하고 출판할 수 있는지를 제약한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은 이데올로기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이 미디어를 지배하며 무엇이 방송·출판될 수 있는지 결정한다. 돈이 많으면 그만큼 자신의 생각을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다. 그런 재력이 없는 혁명적 좌파는 일상적 시기에 그 주장을 사람들이 수용하냐 여부 이전에 주류 언론들에 비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범위 자체에 한계가 있다.

누구의 표현의 자유인가?

이렇듯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불평등하다. 지배계급의 지배적 사상은 사실상 거의 무제한으로 표현될 수 있는 반면, 차별받거나 착취받는 사람들의 표현은 근본적으로 제약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돼 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 또한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를 말할 때는 누구의 자유이고, 무엇을 말할 자유인지를 물어야 한다. 진정한 표현의 자유는 노동자와 천대받는 사람들의 의견과 주장을 확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차별받는 여성, 섹슈얼리티, 소수 인종, 특정 종교 등에 대해 차별하거나 혐오를 선동하는 표현들을 표현의 자유로 옹호해서는 안 된다.

가령,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한 교사가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신문 만평을 수업 시간에 보여 줬다가 한 무슬림 청년에 의해 참수 테러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 지배계급은 교사가 “표현의 자유”를 가르치다가 참수당했다며 분개했다. 하지만 무슬림처럼 프랑스 제국주의에 의해 천대받아 온 집단의 믿음을 조롱하는 인종차별적 행위를 표현의 자유로 옹호할 수 없다.

한국에서도 가령, 박유하 씨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모욕하자 ’위안부’ 피해자들이 박유하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진보 지식인들 중 일부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그 소송을 비판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출판물을 법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지만, 박유하 씨가 모욕적인 주장을 철회할 의사가 명백하게 없는 상황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그 방법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던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를 앞세우는 것은 피억압자들인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라 박유하 씨를 편들게 된다.

후진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아예 발언 기회를 주지 말자?

그렇다면 차별받는 집단에 대한 혐오 표현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어떤 수단으로 맞서야 할까? 혐오 표현을 표현의 자유로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은 우파나 반동에게 말할 기회를 원천 차단하라는 것일까? 혹은 법률로 혐오 표현을 금지시키라는 것일까?

차별 반대 운동 내에서는 우파적이거나 반동적인 표현에 대해 아예 발언 기회를 주면 안 된다는 주장들이 적잖다.

예컨대 서구에서는 트랜스젠더를 방어하는 사람들이 트랜스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의 대학 강연을 못하게 막는 일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워마드 등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을 옹호해 온 윤김지영 교수의 강연을 그 주장에 비판적인 측의 항의로 몇 차례 무산됐다. 실로, 《젠더는 해롭다》(한국에서는 열다북스에서 출판) 저자 실라 제프리스 등이 트랜스젠더에 대해 매우 편견을 갖고 문제적 주장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트랜스젠더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아예 막아버리는 것은 비생산적이고,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일 것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발언을 막아버리는 방식은 도덕주의적 분위기를 팽배하게 만들어 오히려 자유로운 토론과 사상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사실, 반대 측에서도 똑같은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얼마 전 트랜스젠더를 지지해 온 은하선 씨의 숙명여대 강연이 그 대학 내 트랜스 비판적 페미니스트들의 항의로 무산됐다.

따라서 동의하지 않는 주장들(그것이 보수적이고 우파적일지라도)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고 철저히 비판해서 중간에서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럴 때 차별을 조장하는 진정한 적(자본주의 지배계급)에게 초점을 맞추기가 더 용이해진다.

발언 기회 주지 않기(‘노 플랫폼’) 전술은 서구에서 혁명적 좌파들이 파시스트에 맞서기 위해 고안한 특수한 전술이다. 파시즘이 특별한 종류의 극우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단순한 우익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을 모조리 분쇄해 노동계급을 원자화하려는 특별히 반동적인 정치 운동이다. 파시스트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 혁명적 좌파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모든 조직과 운동(노동조합, 노동자 정당 등)을 분쇄한다. 표현의 자유 자체를 본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시스트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노 플랫폼’ 전술을 노동계급 내 보수적이거나 후진적인 주장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분별없는 행위다. 그보다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설득해야 한다.

혐오 표현을 국가가 규제하라고 요구해야 하는가?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국가에게 혐오 발언을 하는 우파나 보수적 개인들을 규제(처벌)하라고 요구한다. 핵심 쟁점은 혐오 발언(불특정 다수에 대한 것도 포함)을 형사 처벌할 것이냐다.(특정 개인들 사이에 벌어진 혐오 발언은 지금도 민사상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는 처벌할 수 있다.)

혐오 표현 규제론은 주로 NGO 인권 단체들이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로부터 나온다. <한겨레>, <경향신문> 등도 이런 주장을 우호적으로 보도해 왔다. 이런 의견을 종합한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2016년, 이하 ‘연구’)이다. 이 연구는 혐오 표현을 국가가 규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혐오 표현 규제론은 ‘사상의 자유시장론’에 비판적이다. 여러 사상들이 시장처럼 경쟁했을 때, 합리적 토론 과정을 거쳐서 혐오를 부추기는 주장이 도태되고 차별에 반대하는 주장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경제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상과 관념의 시장에 대해서도 정부가 일정 부분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연구’)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회주의자들도 자본주의 내에서 ‘사상의 시장’은 본질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혐오 표현에 맞서야 한다는 것도 완전히 공감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에게 혐오 표현을 규제할 권한을 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면 효과는 거의 없는데 부작용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선, 국가가 규제해도 혐오 표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적 경험이 보여 준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 법이 있다. 대체로 나치와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면서 제정된 법들이다. 독일에는 인종적 혐오 표현을 폭넓게 규정해 처벌할 수 있는 형법(독일 형법 제130조)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도 혐오 표현 규제 법률이 존재한다. 실제 이 법률을 근거로 망언을 내뱉은 일부 우익들이 처벌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법률이 파시즘이나 극우 포퓰리즘 자체를 막지 못한다. 독일에는 나치가 그 중심에 있는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만만찮은 세력으로 존재한다. 경제 위기로 이미 정치 양극화 압력이 증대한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자, 파시즘과 극우는 각종 음모론에 기대 기성 체제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지난 8월 독일에서는 코로나19 방역에 반대하는 ‘큐어넌’ 시위에 4만여 명이 모였다.

법률로 혐오 표현을 막을 수 없다. 왜냐면 자본주의 자체가 파시즘과 극우가 자라나는 토양을 계속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 표현을 처벌한다 해도, 차별을 낳는 토양이 바뀌지 않는 이상 대체할 표현은 쉽게 개발될 수 있다. 예컨대, 독일 큐어넌 시위대들은 거대한 독일 제국 깃발을 휘날렸는데, 이것은 금지된 하켄크로이츠나 나치 독일 깃발의 대용품이다.

그래서 사실 혐오 표현을 규제하자는 측에서도 규제의 효과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신하지 못한다. “혐오 표현 규제는 혐오 표현을 막거나 줄이는 데 기여해야 하지만 혐오 표현의 형사범죄화로 그런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형사범죄화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유의미한 효과가 있는지 제대로 검증된 적은 별로 없다.”(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실제 혐오표현 규제법이 있는 나라들에서도 법 집행이 자주 있지는 않다. 예컨대, 영국에서 인종적·종교적 증오 선동을 처벌하는 공공질서법으로 실제 처벌받은 수는 1년에 2~3건가량이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총 18명이 처벌받았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실제 처벌은 100~200건 정도다. 지난 20여 년간 유럽에서 무슬림과 이주민에 대한 인종적 증오 선동이 상당히 늘어왔던 것을 감안해 보자면 미미한 수다.

이런 경험은 우파들의 혐오를 규제하는 법이 생기더라도 그 법이 별로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그 법의 수사나 기소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법기구(한국에서는 경찰과 검찰)의 미온적 태도와도 관련 있다.

국가 규제 요구는 좌파에게 부메랑이 될 수 있다

혐오 표현 처벌은 실제 차별적 행위들(임금 차별, 괴롭힘이나 폭력 등)에 비해 그 대상이 훨씬 광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과 국가가 문제 삼는 게 꼭 일치할까? 국가의 판단을 우리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대체로 유럽의 혐오 표현 관련 법은 특정 인종과 민족에 대한 증오 선동을 처벌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유럽에서는 좌파의 이스라엘 국가 비판이 유대인 혐오라는 이유로 처벌받거나 제재받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2015년 프랑스 대법원은 “팔레스타인이여 영원하라, 이스라엘 보이콧 하자”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반시온주의 활동가들에게 혐오 표현 유죄를 선고했다. 또 다른 프랑스 활동가들은 이스라엘산 채소에 “보이콧” 스티커를 붙였다는 이유로 “인종 혐오 선동”으로 기소됐다.

물론 혐오 표현을 규제하자는 사람들이 장삼이사들의 일상적 표현을 다 검열하자는 취지로 이 법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영향력과 파급력이 큰 공인이나 정치인, 고위 관료 등의 발언을 규제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관심사다. 이를 통해 사회 전체에 상징적 효과를 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조차도 국가 기구에 의해 의도가 틀어질 개연성은 여전히 있다. 에드워드 스노든과 함께 CIA를 폭로해 퓰리처상을 받은 그린월드는 “유럽에서는 혐오 표현 규제법이 자주 좌파적 관점을 억누르고 처벌하는 데 쓰인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2012년 영국에서 10대 무슬림 청년이 혐오 표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분노를 표현하며 “모든 군인들은 죽거나 지옥에 가야 한다”고 페이스북에 썼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표현이 “인종차별적”이라는 것이었다.

국가기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한다. 그리고 법을 집행할 사법 기구들은 훨씬 억압적이고 대중의 통제를 받지도 않는다. 사법기구들 중 대중과 가장 접점이 많은 경찰은 혐오를 막아 주기는커녕, 그 자신이 혐오와 인종차별에 찌들어 있는 기구다. 경찰은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고, 그 질서 속 위계와 차별을 뼛속까지 내면화하고 있다. 그래서 올해 미국 전역을 흔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는 경찰의 인종차별에 항의해 벌어졌다. 유럽 나라들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경찰에 의한 충격적인 인종차별적 살해 사건이 계속 벌어진다. 2019년 독일 경찰노조는 많은 경찰들이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2017년 4월 프랑스 대선에서는 경찰의 절반 이상이 파시스트 정당인 국민전선(FN)에 투표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기도 했다.

혐오 표현 규제 법제화는 무엇이 혐오 표현이고, 어떤 것이 처벌돼야 하는지에 대해 국가기구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는 위험성이 있다. 국가기구의 칼끝은 때로 우파들을 향할 수 있지만 언제든지 좌파에게로 향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 독재 국가들도 “혐오” 규정의 모호함을 이용해 혐오표현 처벌법을 반정부 여론을 억누르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올해 홍콩 당국은 교사가 SNS에 “부적절한 발언”이나 “혐오 표현”을 올릴 경우 처벌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홍콩 시위에 참가한 교사와 학생에 대한 통제 강화의 일환이었다. 러시아에도 혐오 선동을 처벌하는 법률(형법 282조)이 존재하는데, 이는 극우만이 아니라 좌파, 소수 종교 집단 등을 억누르고 처벌하는 데 이용돼 왔다.

혐오 표현 규정의 모호함과 주관성 문제

이러한 사례들은 지배자들이나 우파도 “혐오 표현” 처벌을 자신들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악용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혐오”의 규정이 모호하고 주관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혐오란 주관적 호오好惡와 관련된 개념이다. 혐오란 대체로 불쾌하거나 더럽다는 느낌과 연결돼 있고, 그래서 그 대상을 제거하거나 배척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쉽다.

자본주의에 뿌리박힌 구조적 차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이 혐오인 경우가 있다. 예컨대, 무슬림이나 난민에 대해 “테러리스트”라거나 “강간범”이라는 혐오 부추기기가 자주 동원된다. 기독교 우익들은 성소수자들이 사회와 가정을 무너뜨리는 주범이고, 에이즈를 옮기는 병적 집단이라고 혐오를 부추긴다.

하지만 사람들이 혐오하거나 증오하는 대상이 반드시 차별받는 집단은 아닐 수 있다. 트럼프의 역겨운 말들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자들을 증오하고, 광주 학살의 피해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전두환을 증오한다.

물론 일부 NGO 리더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혐오나 증오감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도 한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5.18 피해자 단체들이 전두환 동상을 만들어서 때린 것,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는 아베 전 일본 총리를 규탄하면서 그의 얼굴을 때리는 퍼포먼스를 한 시민단체도 혐오를 부추겼기 때문에 문제라고 비판한다.1 하지만 지배자들의 악행에 분노하고 사람들의 의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선동하는 것은 체제의 피해자들에게 혐오를 부추기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목적과 효과 모두에서 다르다. 전자는 지배계급을 폭로하고 들추지만 후자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킨다.

한편, 상당수 페미니스트들이나 인권 운동가들이 혐오를 지나치게 넓게 규정해 온 것이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들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혐오표현 리포트’는 “장애인은 착하다”, “흑인은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 같은 잘못된 일반화와 편견도 혐오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혐오라는 개념을 매우 느슨하게 사용한다. 여성 살해, 여성에 대한 편견, 포르노 등 다양한 수위의 행위들이 모두 여성 혐오로 묶여서 사용된다. 이런 언어 사용은 더 강한 표현을 통해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진정한 혐오가 무엇인지 흐리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혐오 표현 규제에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혐오에 대한 운동 내 용어법과 법률 용어를 분리시키자는 절충도 나온다. 운동 내에서는 혐오를 최대한 광범한 의미로 쓰되, 법적으로 처벌할 때는 협소하게 쓰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혼란을 낳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법제도 문제와 운동의 요구가 연결되는 경우가 많고, 운동의 용어와 법률 용어도 칼같이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증오 선동만 처벌하자?

규제 수위를 두고서는 이견이 있는 듯하지만, 좀더 엄격하게 혐오 “선동”을 규정하고 이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도록 입법해야 한다는 의견도 꽤 있다. 추방, 폭력을 선동하는 말 등 직접적이고 당면한 위협을 가하는 표현만 선별해서 처벌하자는 것이다. 홍성수 교수가 그런 입장이다. 또, 지난해 말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를 낸 이정희 전 의원도 인종차별적 혐오 선동에 대해 제한적으로 형사처벌을 할 수 있게 입법하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증오 선동과 혐오 표현이 칼로 무 썰듯이 정확히 나눠지지 않는다. ‘난민은 강간범이고 테러리스트다’(혐오 표현)와 ‘난민을 내쫓자’(혐오 선동) 사이에 만리장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 중 무엇이 더 난민에게 직접적이고 당면한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법을 아무리 촘촘히 짠다고 해도 결국 표현들의 수위와 위험성에 대해서 또다시 해석이 필요하게 되는데, 자본주의에서는 국가기구가 그 해석을 독점하고 있다.

개혁주의

혐오 표현을 국가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차별의 원인을 자본주의와 분리해서 보는 개혁주의 전략과도 연결돼 있다. 혐오 표현의 법적 규제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홍성수 교수는 개개인들의 혐오 표현이 쌓이다 보면 혐오 폭력이나 심지어 홀로코스트 같은 대량 학살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는 “혐오 표현과 차별을 막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혐오범죄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2고 말한다. 마치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예방하는 것처럼 혐오 표현 단계에서부터 예방적·선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혐오 범죄가 성장하는 이유를 개개인의 행위 문제로 환원해서 보는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차별을 자본주의와 분리해서 보게 되면 이처럼 개인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가 쉽다.

하지만 인종차별, 여성차별, 성소수자 혐오 등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노동력을 착취해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차별과 혐오를 체계적으로 재생산하고 부추긴다. 사람들의 생각은 이런 체계적 차별로부터 영향을 받고, 따라서 개개인의 의식은 차별과 혐오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인종차별은 자본주의 초기 노예무역과 함께 등장했고, 여성 차별은 계급의 발생과 함께 나타나 자본주의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성소수자 차별은 자본주의에서 소위 ‘정상’ 가족제도가 안착하면서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지배계급은 이런 차별들을 통해 피지배계급을 분열시키고 단결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특히, 경제 위기가 심각하고 대중의 불만이 커지자 각국 지배자들은 불만의 화살을 엉뚱한 데로 돌리기 위해 속죄양을 찾고 차별과 혐오를 부추겨 왔다. 많은 사람들은 지배자들이 부추기는 차별과 편견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소외(통제력 상실)를 늘 경험한다. 이런 상황에서 상시적으로 무기력과 분노를 경험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보다 더 열등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하고 비난함으로써 심리적 보상을 얻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노동계급의 단결을 파괴하고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데 득이 될 뿐이다.

NGO나 온건한 개혁주의자들은 국가를 중립적인 기구로 잘못 보고, 국가를 지렛대 삼아 차별과 혐오를 없앨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국가는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한다. 따라서 국가에게 피지배 계급의 사상과 표현을 검열하거나 제약할 수 있는 권한을 더 많이 줘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기업의 자율 규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온라인이 혐오 표현이 확산되는 중요한 매개가 되자 트위터나 페이스북, 네이버 등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표현을 규제하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페이스북은 최근 인공지능으로 혐오 표현을 걸러내는 기술을 개발해서 95퍼센트의 정확성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기업들에게 혐오 표현 규제 권한을 더 주는 것이 좋은 효과를 낼까?

페이스북은 이미 표현의 자유를 꽤 광범하게 규제하고 있는데, 이런 규제로 일부 극우들의 페이스북 계정이 정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좌파나 사회운동 매체도 적잖이 검열 대상이 돼 왔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거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게시물이 혐오 표현으로 규제 대상이 된 것이다. 12월에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활동가 45명의 페이스북 계정이 정지됐는데, 페이스북이 설계한 검열 알고리듬 자체가 이런 좌파적 정치 표현을 “혐오 표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3

알고리듬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거대 IT 기업들의 편견과 의도가 반영될 수 밖에 없다. 2017년 독일에서는 SNS 기업이 온라인 상 혐오 표현을 즉시 삭제하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하는 법이 통과됐다. 이에 대해 국경없는기자회는 기업에 의한 광범한 게시물 삭제가 우려된다면서 이것이 “검열의 민영화”라고 비판했다. 따라서 국가의 검열만이 아니라 기업의 검열 강화도 요구하거나 반겨서는 안 된다.

대중 운동

혐오 표현 규제론자들 중에 혐오 표현에 맞선 ‘대항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혐오에 맞서기 위해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반론과 비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옳다. 그러나 혐오 표현에 대한 규제(특히 형사처벌)가 필요하다고 보는 데에는 운동이나 대항 표현만으로는 혐오 표현에 맞서기 어렵다는 비관이 깔려 있다.

특히 적잖은 지식인들은 노동계급 대중의 의식 변화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노동자들이 성차별적이거나 성소수자 차별적, 인종 차별적이라는 인상이 상식처럼 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엘리트주의적 편견이다. 노동계급의 의식은 변할 수 있고, 그리고 변화해 왔다. 예컨대, 한국에서도 지난 20년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해 왔다. 결혼과 여성 차별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개선돼 왔다.

이는 노동계급의 물질적 조건이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많이 진입했고, 여성의 교육 수준도 크게 높아졌다. 사회 전체적으로 결혼을 해 가족을 꾸리는 비중은 상당히 줄었고, 여성이 꼭 출산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인식도 크게 줄었다. 정상 가족의 약화는 성소수자나 미혼모, 미혼부에 대한 인식도 변화시켜 왔다.

무엇보다, 대중 투쟁 속에서 노동계급의 의식은 빠르게 급진화한다. 대중 투쟁이야말로 혐오와 차별에 맞선 진정한 동력이었다. 투쟁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자신의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한다. 이 과정 속에서 기존의 낡은 지배적 생각들이 크게 도전받고, 새로운 생각에 대해서도 개방적이 된다. 서구에서는 1960~1970년대 흑인·성소수자·여성 차별에 맞선 대규모 저항들이 벌어졌고, 그런 대중 동원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그래서 혐오가 존중받아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 투쟁의 여파 속에서 차별적 법과 제도가 개선됐다. 또한 동성 결혼, 시민결합, 차별금지법 등이 도입됐다.

그러나 1970년 후반 운동이 침체하면서 서구 학생운동 내에서 차별에 맞서 항의나 투쟁보다는 좀더 손쉬운 행정적 방식으로 대체하는 분위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학생회가 혐오적 표현에 대해 징계, 규율을 하거나 우파들이 여는 토론회 등을 불허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는 논쟁이나 시위보다 문제를 더 빠르게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여겨졌다. 특히 좌파들이 그 기구를 운영할 때 그런 생각에 더욱 이끌렸다. 하지만 이런 행정적 방식은 오히려 대중의 모순적이고 후진적인 의식과 논쟁하고 도전하는 일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1938년 트로츠키는 멕시코의 개혁주의적인 노조 지도자들이 주도한 반동적 신문 규제 요구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반동적인 언론에 대해 끊임없는 투쟁을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조직과 언론을 통해 스스로 완수해야 할 그 과제를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적인 주먹에 맡길 수 없다. 오늘, 정부가 노동자 조직에 대해 호의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일은 그러지 않을 수 있고, 필연적으로 정부는 부르주아의 가장 반동적인 부위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우파를] 억제하던 법률이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것이다. 오직 그 순간의 필요만을 생각하는 모험가들만 그런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비판은 혐오 표현의 국가 규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조건을 들춰내고 대중이 세계를 더 잘 이해해서 그 세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자신감을 더 많이 갖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논쟁해 진보적 생각을 받아들이게끔 노력하고, 대중 동원에 힘써야 한다. 대중 운동이야말로 차별에 맞서고 기존 관념을 바꾸는 진정한 동력이다.

2017년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나치가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를 공격한 것에 맞서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나치와 극우파는 자신들의 시위를 취소해 매우 소수만 모였다. 2020년 폴란드에서도 낙태권 후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조직되자, 매년 파시스트가 독립기념일에 맞춰 조직하던 반동적 시위는 매우 쪼그라들었다. 혐오 표현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혐오 표현을 규탄하는 대중 운동을 성장시켜 우리 편의 표현의 자유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MARX21
1 조성은 2020, ‘착한 ‘혐오’는 없다: [인터뷰]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프레시안>.
2 홍성수 2020, ‘혐오 ‘표현’과 ‘차별’은 혐오범죄로 나아간다’, 《시사인》 690호.
3 안형우 2020, ‘[증보] SNS 기업들의 가짜뉴스 단속 예고: 우익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