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3호 2020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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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이집트 혁명의 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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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의 제1막을 장관으로 만든 것들 중에서 2월 2일 타흐리르 광장에서 일어난 사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무바라크가 사복 경찰을 시켜 시위대를 공격하게 했을 때, 시위 참가자들은 미친 듯이 맞서 싸웠다. 그들은 저항했고, 결국 발타기야(깡패들)를 몰아냈다. 이 전투 소식이 퍼지자, 카이로 전역에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은 전투를 지원하려고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심지어 <인디펜던트>의 로버트 피스크처럼 전 세계의 온갖 분쟁 현장을 목격한 기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 놀라운 장면이었다. 떨쳐 일어선 사람들은 이제 더는 폭력, 잔혹 행위, 감옥을 참으려 하지 않았다.”[1]

이 사건은 이집트 항쟁의 성격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 사건은 무바라크가 얼마나 쉽게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보여 줬다. 이 사건을 목격한 피스크는 발타기야의 등장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냉혹하고 잘 계획된” 것이었다고 말했다.[2] 무바라크와 그의 최측근 각료, 일가친척, 가까운 기업인들은 여러 차례 효과를 본 이 방법이 저항 운동을 꺾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목표는 시위대를 잔혹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즉, 항쟁 참가자들의 뼈를 부러뜨려 의지를 꺾으려는 것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빈곤·굶주림·실업에 맞서서, 그리고 두려움·학대·고문에 맞서서 싸웠다. 그들의 수와 그들의 분노는 고비점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아흐레 뒤 무바라크는 쫓겨났다. 징집병들이 계속 명령에 충성할지 확신할 수 없었던 장군들은 마침내 독재자를 퇴진시켰다. 그들은 이제 군대최고평의회 이름으로 권력을 잡은 채,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한 체제의 수호자 노릇을 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운동의 초점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이집트 전역의 작업장들로 옮겨갔다. 지금 이집트의 많은 주요 공장에서 파업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은 임금, 보너스, 계약 조건, 연금, 건강 보험, 노동조합 권리와 노조 인정, 무바라크 정권 시절 노동자들을 괴롭힌 경영진과 공식 노조 지도자들의 퇴진 등 다양한 요구를 제기했다. 수에즈에서는 군대가 부패 혐의를 받고 있던 경영자들을 체포했다.[3] 마할라 알 쿠브라에 있는 미스르 방직 공장(이집트 최대의 공기업이자 중동에서 가장 큰 방직 공장)의 파업 노동자들은 회사 경영진이 부패했고 노조 활동가들을 탄압했으므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포르투갈 혁명 당시 ‘사네아미엔투’(정화)라고 불린 숙정 과정이 시작됐다. 맨 처음 고발된 자는 집권 국민민주당 고위 인사이자 무바라크의 억만장자 친구인 철강왕 아흐메드 에즈였다. 최고평의회는 내무부장관 하비브 알-아들리, 주택부장관 아흐메드 마그라비, 관광부장관 주헤이르 가라나도 체포했다.

억압 기구

이집트 혁명의 전개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2011년 1월 25일 무바라크 정부 지지자들은 내무부장관을 “이집트 제1의 인권 수호자”라고 불렀다. 관영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법원 앞에서 열린 시위에서 그들은 “하비브 알-아들리는 이집트를 위험에서 보호하는 영웅이다”, “하비브, 강하게 대처하라”고 외쳤다.[4] 아들리는 같은 날 벌어진 대중 시위에 증오의 대상인 소요 진압 경찰을 보냈다. 소요 진압 경찰이 시위대를 몰아내지 못하자 그는 발타기야를 불러모았다. 무바라크는 집권 기간 내내 대중 저항에 이런 식으로 대처했다. 1981년 권력을 잡자마자 그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파업·시위와 10인 이상의 공개 집회를 금지하고, 신문을 검열하거나 폐간하고, 항소가 불가능한 군사법원을 설치했다. 또, 보안 기구를 대폭 강화하고, 경찰과 정보기관들이 멋대로 용의자를 체포·구속해도 처벌받지 않게 해 줬다. 또, 약간의 양보책으로 비교적 고분고분한 야당 인사들을 포섭하려 했다. 이런 양보로 저항을 봉쇄하기가 여의치 않으면 서슴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무바라크 정권은 방대한 억압 기구를 건설했다. 정권은 민사행정경찰civil police 말고도 군대와 비슷한 소요 진압 경찰, 즉 암 알-마르카지(중앙보안군)를 비롯한 다양한 보안·정보 기관들을 운영했다.[5] 이들은 모든 종류의 독립적 정치 활동을 억압했고, 심지어 정권이 허용한 좁은 틀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2004년 온건 개혁주의자인 아이만 누르는 가드(‘내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서 무바라크의 경쟁 후보로 나섰다가 곧장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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