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24호 2018년 3~4월호)

지난 호

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제주 4·3항쟁 70주년 ─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

김현옥 고등학교 역사교사 13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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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제주 4·3항쟁이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미국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4·3항쟁을 ‘전후 한국 정치의 현미경’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역사적 격변기 한가운데 위치한 4·3항쟁을 둘러싼 논쟁이 첨예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 명칭도 폭동, 사건, 항쟁 등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이후 군부 독재 시기 동안 4·3항쟁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됐다. 4·19혁명 직후 시작한 4·3항쟁 진상규명 운동은 이듬해 발생한 5·16쿠데타로 중단됐다. 소설가 현기영은 《순이삼촌》(1978년)에서 국가권력이 저지른 북촌리 민간인 학살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탄압받았다. 1997년에는 4·3행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드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서준식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

1987년 투쟁으로 형성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에 진상규명 운동이 조금씩 전개돼 2000년에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공표됐다. 그러나 특별법은 희생자에 대한 피해 배상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역사적 재평가도 충분치 않았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이마저도 되돌리려 했다.

특별법 시행 이후 정부가 인정한 희생자는 1만 4233명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정부 기구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2003년 발행한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가 희생자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한 것에 견줘도 턱없이 적다.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의 세 번째로 “제주 4·3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제주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집권 반년이 지나도록 어떻게 완전한 해결로 나아갈지 뚜렷한 방향과 원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비판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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