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1호 2019년 7~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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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현재의 이슈들

서평 《우먼스플레인》,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 ─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에 대한 예리한 지적

최미진 9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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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에 대해서도 남성들은 동일체가 결코 아니다. 특히, 최근 지탄의 대상이 된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12 같은 권력형 성폭력은 권력과 재력을 가진 소수의 특권층 남성이 저질렀고, 덕분에 이들은 수사기관의 비호까지 받았다. 하지만 노동계급 남성들은 그런 권력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대부분은 여성과 함께 분노했다. “강간 문화,” “남성 강간 카르텔” 등 남성 일반을 잠재적 성범죄자나 동조자로 싸잡아 매도하는 용어가 전혀 부적절한 이유다.

이처럼, 모든 남성들에게 원죄 의식을 강요하면 당연히 반발을 부르기 마련이다. 오히려 남성과 여성이 모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고, 이것이 사람들의 사회적 삶에서 핵심 기준선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여성·남성 노동자가 같은 계급으로 연대할 잠재력과 이해관계가 설명되는 한편, 남녀 지배계급과는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갖게 되는 것도 설명된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 배신에 맞서 싸우는 남녀 노동자들의 연대가 최신 사례이다. 

급진 페미니즘의 성별 이분법은 남성을 싸잡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는 한편, 여성을 ‘잠재적 피해자’로만 취급하는 난점도 있다. 오세라비는 이렇게 일갈한다. “페미니즘 운동에는 피해자 DNA가 흐른다. 1그램의 이론에 1톤의 피해의식이 담겨 있다. 여성은 언제나 약한 존재여야 하고 일과 섹스에 있어 자주성과 자율성이 없는 존재로 만든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급진 페미니즘의 ‘피해자 담론’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피해자 담론’은 여성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고, 정치적 평가(비판이든 지지든)도 수용할 수 있으며, 사회 변화나 성의 관계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일 수 있음을 간과한다. 이런 수동적이고 피해자성이 강조된 여성상이 여성운동의 지향점이라면 여성해방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이와 달리,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사회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꿀 능력과 힘이 있다. 그 힘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여성의 노동 없이는 굴러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자본주의 체제는 여성을 배척하고 주변화시켜 운영되는 게 아니라, 여성을 임금 노동에 끊임없이 끌어들여 착취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 여성은 노동계급 남성과 같은 이해관계와 잠재력을 공유하면서 연대를 구현할 수 있다. 물론 노동계급의 단결이 늘 자동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들은 사용자들과 그 정부, 그 언론의 온갖 이간질과 분열 위험에 맞서 연대를 구축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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