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1호 2019년 7~10월호)

지난 호

특집: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과 신중국 초기 노동자 투쟁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 30년 ─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교훈

정선영 93 31
337 15 13
14/26
프린트하기 전체 보기 PDF 보기

헝가리에서의 변화는 위로부터 시작했다. 헝가리의 국제수지는 날로 악화했고 심각해지는 경제 위기를 보며 지배층 내 분열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보다 완전한 시장경제를 밀어붙이기를 원했던 일단의 소수 고위 지도자들은 노쇠한 당 지도자 야노시 카다르를 축출하기로 공모했다. 지배층 내 노선 대립이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서 집권당에 반대하는 정치 집회는 수십만 명이 모일 정도로 커졌다. 결국 헝가리에서도 정부는 반정부 세력들을 상대로 폴란드와 비슷한 원탁 협상을 벌이기로 합의한다.

헝가리의 변화는 동독의 변화를 촉진했다.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던 헝가리 정부는 관광객을 가장해 헝가리에 들어온 동독인들이 서방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1989년 5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었던 철조망이 사라졌다.

대규모 이민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 동독 체제에 대한 불만은 동독 정부의 위기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의 저항 세력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9월 초 노동자 밀집지역인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시위는 10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참가자들은 “우리는 여기에 남겠다”며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경찰은 시위를 폭력적으로 공격했는데 그 때문에 다음 날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결국 보안경찰의 총수가 노쇠한 당 지도자 호네커를 축출하고 개혁을 약속했다. 이후 11월 4일 100만 명이 참가한 시위가 벌어졌고, 독일 정부는 자신들의 개혁 약속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을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출발점이었다. 다른 곳의 사건들을 보며 자극을 받은 학생들이 11월 17일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는데, 대개 10대 후반이었던 시위대가 경찰에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게 됐다.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의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했고, 프라하의 모든 극장이 토론과 저항운동의 중심으로 변했다. 수십만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앞선 나라들에 비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혁명적 요소들이 많이 생겨났다. 반대파 그룹인 시민포럼위원회의 지방위원회는 900개가 넘었고, 7200개 공장에서 파업위원회가 생겨났다. 결국 지배 세력은 반대파와 연립정부를 구성해 자유선거를 치뤘고, 정치수였던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에 선출됐다.

루마니아에서는 동유럽 혁명 중 유일하게 폭력 혁명이 일어났다.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라는 권력자 1인에게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심하게 권력이 집중돼 있었다. 그는 저항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1987년 12월 브라소프에 있는 붉은별 트랙터 공장의 노동자들이 난방 감축 조처에 항의하며 파업하자, 차우셰스쿠는 보안경찰을 보내 파업 노동자들을 쏴 죽였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의 주민들이 폭압 정치에 반대해 거리에 나섰을 때에도 차우셰스쿠는 마찬가지 방법을 썼다. 그러나 티미쇼아라의 노동자들이 석유화학 공장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하자 군대는 하는 수 없이 철수했다. 그 직후 차우셰스쿠는 친 정부 관제 시위를 조직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처음에는 차우셰스쿠에게 환호를 보내는 듯했지만 이내 환호는 야유로 바뀌었고, 저항의 노래인 ‘티미쇼아라 찬가’가 울려 퍼졌다. 이 장면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고, 방송으로 이 장면을 본 수십만 명이 집회에 합류하며 차우셰스쿠는 타도됐다. 차우셰스쿠는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붙잡혔고, 결국 크리스마스에 자기 휘하의 장군들에게 총살당했다. 이후 권력의 공백기를 메운 군대와 보안경찰은 자유 선거, 식품 공급 개선, 노동일 단축 등 양보 조처를 취해야 했다.

닫기
x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