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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이주노동자 그리고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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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Jane Hardy, 'Migration, migrant workers and capit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issue 122. 2009

임준형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첫째, 아일랜드·폴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 노동자 10만 명이 이주노동자를 아일랜드 노동자보다 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채용하려는 사장에 맞서 2005년 12월에 아일랜드에서 시위를 벌였다. 둘째, 노동자 수백 명이 “영국 일자리는 영국 노동자에게”라는 슬로건으로 2009년 1월 영국에서 쟁의 행위를 벌였다. 전자는 “분열지배”를 거부하고 연대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후자는 영국 경제가 일자리를 줄이고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지자 두려움을 느낀 노동자들이 “외국인들”에게 등을 돌린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이주는 특히 핵심 자본주의 경제들의 지배계급에 항상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자본주의 팽창기를 지속하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이 필요하지만 이 노동자들의 유지·재생산 비용은 감당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인구 이동은 역사가 길다.1 가장 중요했던 최초의 이주는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중동·아프리카에서 있었다. 16세기 후반부터는 경제적·군사적 동학의 변화 때문에 유럽에서 이주가 크게 늘었다.2 유럽 동부·남부·중부에서 정치적 충돌들이 벌어지면서, 민족 집단들이 끊임없이 바뀌는 국경선을 넘어 대거 이동했다. 한편, 중상주의 국가와 제국들은 숙련 노동자의 유입에 의존했다.3 17~18세기에 유럽의 식민 점령과 아메리카 대륙은 노예무역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노예무역은 압도적으로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구를 강제적이고 잔혹하게 이동시켰다.

자본주의의 팽창은 흔히 노골적인 폭력에 의존했다. 강제적 지배, 인구 이동, 계약노동으로 실론(현 스리랑카)에서 커피·차 플랜테이션이, 카리브해 지역에서 설탕 플랜테이션이, 브라질에서 광산과 플랜테이션이 생겨났다.4 1838년에 노예무역이 폐지되자 아시아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해 식민지 경제에서 노예 노동을 대체했다.(이는 흔히 “쿨리” 제도라 불렸다.) 흔히 형사 범죄자, 이주 과정에서 생긴 부채를 갚지 못한 사람들이 쿨리 노동을 하게 됐고, 예외 없이 노동조건은 야만적이었고 급여 수준은 형편 없었으며 단기 계약 노동이었다.5 19세기에 규모가 손꼽혔던 이주는 인도 노동자들이 계약 노동자나 행정직 노동자로서 영국 제국의 변방으로 이주했던 것이었다. 한 추정치에 따르면, 1834~1937년에 3000만 명이 인도를 떠났다(2400만 명이 돌아왔다).6 중국인 이민 물결이 이에 비견할 만한데, 이들은 일시적·계절적·영구적 이주의 형태로 동남아시아와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골드러시 시기에 광산을 파고 철도를 건설하는 핵심 노동력이 됐다.7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대서양을 건넌 대규모 이주 물결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유럽에서는 유랑 생활을 하는 헐벗은 농업 노동자들이 대거 생겨났는데, 이들은 남·북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성장에 꼭 필요했다. 1870~1914년에 5000만 명이 유럽을 떠났다. 그중 3분의 2는 미국으로 갔고, 나머지는 캐나다·호주·뉴질랜드·남아공·아르헨티나·브라질로 갔다.8 이런 대규모 이주의 규모는 1900년 유럽 인구의 8분의 1 정도 됐고, 당시 영국·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같은 나라 인구의 20~30퍼센트 정도였다.9

제1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 위축되고 미국에서 이민법 강화에 인종차별이 동원되면서 이런 대규모 이주 흐름은 중단됐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선진 자본주의 경제들, 특히 유럽 국가들은 이주를 필요로 했고 적극적으로 노동자를 끌어들였다. 영국·프랑스·네덜란드는 그들의 옛 식민지에서 노동자를 끌어들였고, 다른 국가들은 유럽의 변방인 동부·남부 유럽, 터키, 북아프리카에서 노동력을 모집했다. 서독은 이탈리아(1955·1965년), 그리스·스페인(1964년), 모로코(1963년), 포르투갈·터키(1964년), 튀니지(1965년), 유고슬라비아(1968년), 심지어 한국(1962년)과도 노동력 모집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1973년이 되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전체 노동력의 약 10퍼센트가 이주노동자였다.10

1973년에 경기 침체가 시작되면서 활짝 열렸던 노동력 이주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1980년대가 되자 유럽 전역에서 매우 엄격한 이민법이 실행됐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특히 1980년대 이후 빈곤·전쟁·박해를 피해 개발도상국에서 도망친 대규모 강요된 이주가 주요한 요소였다.11 예컨대 이라크 전쟁 때문에 수많은 난민이 생겼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이라크인 420만 명이 고향에서 강제로 쫓겨났다고 보고했다. 그중 절반은 이라크 안에서 이동했고 그 나머지는 해외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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