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6호 2020년 11~12월호)

지난 호

일반 논문

중국, 티베트, 좌파

찰리 호어 8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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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는 라싸 시위대가 한족인 중국인들과 후이족回族 무슬림들을 공격한 것으로 꾸미고는10 이번 소요 사태의 본질이 인종차별적 학살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 반란자들은 중국 은행, 정부 건물 같은 중국 지배의 상징물들을 주로 표적 삼았다 ─ 중국인 기업가에 대한 습격이 적잖았고, 거리에서 개별 중국인에 대한 공격도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공격은 1980년대 이래로 티베트에서 경제 발전이 급격하게 진행된 결과다. 특히 라싸에서 경제가 매우 빠르게 발전했지만 대다수 티베트인들은 그 수혜를 전혀 얻지 못했다. 신규 일자리와 경제적 기회의 대부분은 한족과 후이족 이주민들 차지였는데, 이들은 티베트인들에 대해 무관심했고 최악의 경우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11 게다가 중국인 관광객들(2007년에는 200만 명이 넘었다)이 점점 늘어나면서 라싸가 “이국적인” 관광지가 됐지만, 이 점을 빼면 티베트인들에게는 자신들이 라싸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생각만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티베트인들이 중국인 기업가들에게 자신들의 좌절감을 쏟아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은 1960년대에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반란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억압을 상징하는 백인 소유 기업을 표적으로 삼은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중국 경찰과 군대가 저지른 폭력이 훨씬 더 많았다.

티베트 민족주의의 놀라운 부상은 중국 정부에게 커다란 골칫거리를 안겨 주었다. 많은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민족주의나 티베트 독립을 현 상황보다 더 선호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의 독립을 호소하지도 않음에도) 자신들의 열망을 구현할 인물로 본다. 1949년 이후 티베트의 역사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1949년 이후의 티베트

1949년에 “역사적” 티베트는 문화적·언어적 공동체entity였지만 정치적 공동체는 아니었다. 상층 지주와 라마들(불교 지도자들)이 지배하는 독립적 티베트 정부가 이 지역의 주요한 두 성들(지금은 티베트 자치구에 속해 있다)을 다스리고 있었다. 북쪽의 암도Amdo성(지금은 칭하이성과 간쑤성으로 통합됐다)과 동쪽의 캄Kham성(지금은 쓰촨성과 윈난성으로 통합됐다)은 명목상으로는 중국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지방 군주가 지배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티베트 사회는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지배계급 내에서는 주요한 정치적 차이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1950년 초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암도와 캄을 장악했다. 인민‘해방’군이 라싸로 진격한 그 다음해인 1951년에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부가 당시 티베트 지배계급을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중국 지배를 받아들이는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한 티베트 공산당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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