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3호 2020년 3~4월호)

지난 호

일반 논문

중국, 티베트, 좌파

찰리 호어 8 33
35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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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티베트 항의 시위, 티베트 독립 운동, 티베트 독립 사상(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다)을 반대하는 배경에는 세 가지 주요 논지가 있다: 중국은 티베트를 장악할 권리가 있다; 달라이 라마는 봉건제를 회복시키려는 반동적 인물이다; 티베트 독립 운동은 미국 제국주의가 쓰는 장기판 위의 졸이다.

“티베트는 중국의 것이다”

우리는 이 주장을 일거에 다룰 수 있는데, 앞선 문장에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면 된다. “티베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없이.” 8세기 이후 티베트-중국 관계에 대한 중국의 설명이 전적으로 사실이더라도 티베트 민중에게는 자결권이 있다. 평범한 티베트인들은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중국에 포함되자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점령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여긴다.

심지어 [중국의] 역사 설명조차 사실이 아니다. 티베트가 여러 차례 점령당한 것은 맞지만, 티베트에서 중국을 몰아낸 적이 있거나 중국 지배가 형식상의 지배일 뿐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략 1250년경 티베트는, 징기스칸이 세웠고 나중에 중국 원나라를 세운 몽골 제국에 통합됐다. 1368년에 몽골 제국이 한족의 명 왕조에 망하면서 이들 사이의 관계는 느슨해졌다. 대체로 중국 편인 한 역사가에 따르면, “1566년부터 명 왕조가 몰락한 1644년까지 베이징과 라싸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관계가 전무했다.”36

명 왕조는 더욱 팽창적인 청 왕조에 의해 무너졌는데, 청 왕조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왕리슝은 이렇게 주장했다.

1727년부터 1911년까지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나타내는 주요한 상징은 주장대신钦差驻藏办事大臣[황제를 대리하여 신장에 머무는 관리 - 역자] 관청이었다. … 그러나 라싸에서 청 제국의 존재는 “주로 주장대신 자신과 몇 명의 병참 담당과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티베트어를 하지 못해 통역자에 의존했으며, 일 년에 몇 차례 순시를 위해 라싸를 비운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라싸에서 보냈다.37

1904년에 영국군이 잠깐 티베트를 점령했는데, 티베트에서는 [영국] 중앙정부의 제재를 받지 않고 약탈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침략자들은 한 달도 머무르지 않고 떠났는데, 그로 인해 티베트 정부와 중국의 통치 모두 심각하게 약화됐다. 청 왕조가 1911년에 무너지자 티베트 정부는 이 기회를 틈타 모든 중국 군대와 관리들을 내쫓았다. 그때부터 1949년까지 티베트는 사실상 독립적이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영국 지배기로 보지만, 티베트 정부는 영국에게서 약간의 무기를 손에 넣었고, 인도와는 무역 거래를 했으며, 영국이 티베트에 대사를 파견하려는 것을 거부했다. 어떤 기록을 보면, 1940년대 말에 티베트에는 유럽인이 단 6명뿐이었는데, 그중 3명은 티베트 정부가 고용한 사람들이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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