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지난 호

쟁점:현재의 이슈들

1930년대의 대불황과 미국의 뉴딜

이정구 21 34
356 1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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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노동력 고용 실업자수 실업률
1929 49.1 47.6 1.5 3.2
1930 49.8 45.5 4.3 8.7
1931 50.4 42.4 8.0 15.9
1932 51.0 38.9 12.1 23.6
1933 51.5 38.8 12.8 24.9
1934 52.2 40.9 11.3 21.7
1935 52.8 42.2 10.6 20.1
1936 53.4 44.4 9.0 16.9
1937 54.0 46.3 7.7 14.3
1938 54.6 44.2 10.4 19.0
1939 55.2 45.8 9.5 17.2
1940 55.6 47.5 8.1 14.6
1941 55.9 50.3 5.6 9.9

노동자 400만 명이 추가로 일자리를 잃었다. 표3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제2차 뉴딜정책이 추진되던 시기에도 실업자는 800만 명 이상을 유지했고 실업률은 계속 15퍼센트 이상이었다. 이런 취약한 경제는 1941년에 완전히 회복되면서 1929년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데, 바로 전쟁 준비를 위한 경제로 나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29년 증시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 그리고 멀리는 제2차세계대전까지도 그 원인은 제1차세계대전과 전쟁 당사국인 주요 자본주의 국가 간 관계의 급격한 재편에 있었다. 영국의 정치가 원스턴 처칠은 1929년 대공황을 포함한 시기를 ‘제2차 30년 전쟁’이라고 표현했고, 1933년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스는 “우리는 4년째가 아니라 19년째 세계적 위기 속에 살고 있다”고 했다.39

요약하면, 뉴딜정책은 몇 가지 중요한 정책들을 통해 부분적인 경기회복을 이끌었지만 회복의 토대는 매우 취약했다. 또한, 루스벨트는 전임자보다 압력을 적게 받았지만 균형예산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적자 재정을 확대하는 데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루스벨트의 이런 태도는 보수파의 반발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규모 적자 재정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그 당시의 규범이 작동했다. 그 당시 케인스주의자들이나 루스벨트는 대공황에 직면해서 대규모 적자 재정을 시행하고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민간 부문의 투자 의욕을 억제하는 것으로 보고 자제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경제는 제2차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전쟁 경제로 나아가면서 대공황의 위기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뉴딜정책 평가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19세기 문명의 기초를 이루던 세력 균형, 금본위제, 자유주의적 국가 등의 제도들”은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동일한 원천에서 비롯됐는데, 이런 자기조정적 시장이 확립하려던 경제적 자유주의 노력이 1930년대 초 파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40 폴라니는 이런 ‘거대한 전환’을 이룬 이정표가 되는 사건들로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러시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뉴딜의 출범, 독일에서 나치즘의 국가 사회주의 혁명, 국제연맹이 무너지고 대신 폐쇄형 제국들이 나타난 것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폴라니는 뉴딜정책을 사회주의 정책으로 보는 혼란을 드러냈다.41

다른 한편, 쉬벨부시는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무솔리니의 파시즘, 히틀러의 나치즘을 하나로 묶어 정치경제적 위기에 대한 비슷한 대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뉴딜정책과 나치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비슷한 목표와 수단을 동원했다고 지적했다.42 하지만 차이점도 존재했다. 뉴딜정책이 민간기업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부의 재정지출을 추진한 것이라면, 스탈린과 히틀러 등은 국가를 통해 민간기업을 통제하고 군사적 목적을 위해 재편함으로써 1930년대의 대불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베리 아이켄그린은 1930년대의 대불황에서 벗어나게 한 공헌은 뉴딜의 루스벨트가 아니라 히틀러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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