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지난 호

일반 논문

중국의 ‘국공합작’ ― 반제국주의 민족공조의 모범적 사례인가?

최영준 undefined 169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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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5월 30일 영국이 지배하는 상하이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12명을 살해했고 이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5·30 운동의 시작이었다. 거의 4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이후 반제국주의의 거대한 물결과 함께 주요 대도시에서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고, 홍콩·광저우 노동자 파업은 파업위원회가 조직되며 혁명적 운동으로 성장했다. 5·30 운동의 초기 몇 달 동안 파업 물결은 제국주의 침략의 중심이자 상징인 상하이를 중심으로 시작했고, 중국 노동자들의 끔찍한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이 결합돼 폭발적으로 확산했다.

외국 자본에 맞선 파업은 중국 자본에 맞선 파업으로 이어졌고 외국인의 재산과 특권뿐 아니라 국내 자본가들의 소유권까지 위협했다. 이는 민족해방혁명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고, 민족주의적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당을 모순된 처지에 놓이게 만들었다.

“노동자 총파업은 국민당에게 광둥성에 인접한 성들에게까지 통제권을 갖게 해 주었고 국민당이 유일한 전중국 정부라는 선언을 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자신감 증대는 제국주의에 대한 위협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지배와 이윤에 대해서도 위협 거리였다.”4

농민 반란도 외국인 지주뿐 아니라 중국인 지주와 지방 엘리트들을 공격했다. 스탈린은 농민들이국민당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는 훈령을 보냈고 토지 몰수는 ‘악덕’ 지주에 한정하고 국민당원의 토지는 그냥 둘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지주들은 위협을 느끼자마자 바로 국민당에 가입했다.

반란을 시작한 농민들에게 ‘선량한’ 지주와 ‘악덕’ 지주의 구별은 무의미했다. 이들에게는 토지를 몰수할 대상으로서 악덕 지주와 죽여야 할 대상으로서 최악질 지주 사이의 구별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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