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지난 호

일반 논문

중국의 ‘국공합작’ ― 반제국주의 민족공조의 모범적 사례인가?

최영준 undefined 169 34
360 6 4
5/12
프린트하기 전체 보기 PDF 보기

1925년 시작한 노동자들의 반란은 국민당의 사회적 기반을 이루고 있던 계급과 집단 즉 도시 부르주아지와 토지 혁명을 두려워하는 지주들을 위협했다. 더는 국공합작과 양립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이를 알고 있었고, 1927년 이 위험을 제거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과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에게 대중의 급진주의를 진정시키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장제스와 정치적 동맹을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동맹 유지는 무기를 든 노동자들의 무장해제를 의미했다.

이 때문에 중국 최대 도시이자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과 노동운동은 대학살을 당했다. 이후 도시의 노동조합과 학생 조직은 궤멸되다시피 했다. 1927년 한 해 동안 국민당의 무자비한 탄압과 테러로 중국공산당은 노동자 당원 2만 명의 목숨을 잃었다.

중국공산당의 변화

1920년대 중반 중국 산업 노동자 수는 1917년 러시아와 비교해 그다지 적지 않았다. 중국 인구에 비해 노동계급은 아직 소수였지만 연안 공업 단지에 집중돼 있었고, 정치적으로 각성했으며, 무척 전투적이었다. 상하이에는 노동자 1천 명 이상을 고용한 공장이 50여 곳 있을 정도였다. 당시 노동자 탄압에 앞장선 국민당 장교조차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인정할 정도였다. “실제 20세기 어떤 지역의 노동운동도 혁명적 에너지, 조직적 창의성, 비범한 영웅주의, 자기희생정신과 혁명사업에 대한 헌신이라는 면에서 중국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여 준 것에 미치지 못했다.”5

중국공산당은 젊고 활기 찬 중국 노동계급 속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공산당의 창당 멤버들은 모두 지식인들이었지만 몇 달 안에 공산당은 노동계급 속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12개 도시 약 삼십 만의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파견된 대표자들이 모인 1922년 5월의 제1차 전중국 노동자대회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

닫기
x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