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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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논문

중국의 ‘국공합작’ ― 반제국주의 민족공조의 모범적 사례인가?

최영준 undefined 169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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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국공산당은 제1차 중국혁명(1925~1927년) 동안 엄청나게 성장했다. 1926년 초 1천 명도 안 되던 당원 수는 1927년 4월 6만여 명이 됐다. 무엇보다 당원의 66퍼센트가 노동자였고 53.8퍼센트가 주요 산업 도시에서 일하는 산업 노동자들이었다.

1905년 1차 러시아혁명 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이 7만 명(1906년 10월 기준)이었던 점에 비춰 봐도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꽤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일부 좌파는 이런 성과가 국공합작의 결과물인 것처럼 말한다.

〈민플러스〉는 “중국공산당은 이런 좌우합작(국공합작)을 통해 반半합법적인 지위를 획득”했고, “이 조건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이 대중화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고,7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문영찬은 “1차 국공합작으로 인해 중국혁명은 일취월장했으며 군벌이 토벌되고 반봉건혁명이 힘을 얻게 된다”8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성장은 국민당과의 동맹이 아니라 1925년부터 시작한 거대한 노동계급 반란 덕분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오히려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당에 정치적·조직적으로 종속돼 참담한 비극을 맞았다.

1927년 패배 이후 중국공산당은 더는 노동계급 안에서 정치적 영향을 구축하지 못했다. 1928년 중국공산당의 노동자 당원 비율은 10퍼센트로 급감했고 1929년 3퍼센트, 1930년 3월 2.5퍼센트, 9월 1.6퍼센트로 추락했고, 그 해 12월 사실상 0퍼센트가 됐다. 1930년 9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당 지도자였던 저우언라이는 당원 수가 12만 명이고 그중 공장 노동자는 2천 명이라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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