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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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논문

중국의 ‘국공합작’ ― 반제국주의 민족공조의 모범적 사례인가?

최영준 undefined 169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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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말 중국공산당은 중국에서 가장 큰 산업지역인 상하이에 ‘단 하나의 진정한 산업 세포’조차 없다고 했다. 당내 회람 보고서에도 “불행하게도 도시에 있는 당 조직들은 분쇄당하거나 고립 당했다. 중국 어디에서도 산업 세포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당시[1929년] 당원의 85퍼센트가 대도시와 주요 도시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오지에 흩어져 있던 것이다. 뒤늦게 농민봉기가 축적된 역량을 활용하며 전진하자,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내팽개치고 농민에게 몰려갔다.”9

당시 중국은 믿기 힘들 만큼 혹독한 농민 억압이 존재했다. 인구의 10퍼센트가 경작 토지의 60퍼센트를 소유했고, 매우 높은 지대(수확의 40~60퍼센트), 만연한 고리대(평균 이자율 연 40퍼센트 이상), 지나치게 무거운 조세, 정부군이나 군벌 용병으로의 일상적인 징발 등 기생적 억압 피라미드에 일본의 침략까지 더해졌다.

농민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무기를 들고 일어난 농민과 국민당 군대에서 이탈한 반항적 병사들이 결합돼 농촌은 거대한 저항의 저수지가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 중국공산당은 도시를 버리고 농촌으로, 노동자에게서 농민에게로 완전히 방향을 전환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일본이 피부병이라면 공산주의자는 심장병이다”라며 일본군보다 공산당을 주적으로 삼아 무자비한 탄압과 테러를 자행한 점도 공산당이 도시에서 철수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1929년 10월 코민테른은 농민에 초점을 맞춘 중국공산당의 방향 전환을 ‘민족적 위기와 혁명적 고조의 중국적 특색’이라며 정당성을 부여해 줬다. 중국공산당은 1929년 이후 혁명을 성공시킨 1949년까지 더는 중국 노동계급 안에서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항일 투쟁에 효과가 없었던 2차 국공합작

대다수 좌파는 1937년부터 시작해 1945년까지 지속된 2차 국공합작이 반제국주의 운동의 성공적 사례로 본다. 실제 공산당은 항일 전쟁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1945년 이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도 승리했다. 분명 1차 국공합작과 다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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