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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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논문

중국의 ‘국공합작’ ― 반제국주의 민족공조의 모범적 사례인가?

최영준 undefined 169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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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1차 국공합작 실패와 그 뒤 모진 탄압을 겪은 뒤로 정치적·사회적 계급투쟁의 결과를 결정짓는 것이 군사력이라는 인식에 도달했고, 2차 국공합작 내내 ‘총을 쥐고’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지킨 것은 노동계급의 독립성이 아니라 당의 군사적 독립성이었다. 인민전선의 틀 내에서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지킬 수는 없었지만 군사적 독립은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1927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더는 지킬 만한 노동계급 정치를 가지고 있지도 노동계급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다. 농촌 변두리를 떠돌면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그들이 관계를 맺은 주요 집단은 노동자에서 다양한 농민 집단으로 변했다. 공산당은 게릴라 전투와 반제 민족주의를 뼈대로 한 정당으로 변모했다. 1930년대 일부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때때로 격렬한 파업을 벌였지만 공산당은 벽지僻地에 근거지를 만들고 군사력을 기르는 것에 역량을 집중했다.

동시에 공산당 지도자들은 노동계급 투쟁과 유리됐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 정치로 후퇴했고, 대중의 민족주의적 반제국주의 정서에 공감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자신이 능동적인 민족주의의 수호자가 됐다.

물론 공산당의 정책에서 급진적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주들과의 관계 때문에 그럴 듯한 토지 개혁안을 전혀 내놓을 수 없었던 국민당에 비해 공산당은 토지 분배 정책을 내놓고 실천했다. 그러나 ‘농사짓는 사람이 자기 땅을 갖는 것’이 사회주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동맹을 위해 국민당에 대한 비판을 삼갔고 급진적 요구와 강령을 후퇴시켰다. 1936년 마오쩌둥은 일본에 맞서는 조건으로 공개적으로 장제스에게 연합을 제안했고, 공개서신·기사·전보들을 통해 국공합작의 조건으로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고 보호하겠다는 구체적 보장책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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