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반혁명의 유령들

알렉스 캘리니코스 5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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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는 역사적으로 아랍 민족주의로 이해되던 것의 마지막 남은 대변자다. 시리아는 아직도 사회주의를 표방한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대폭 시행했음에도 국영 부문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시리아는 정치에서 종교를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금지한다. 시리아는 종교 정당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시리아는 여러 이유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숙적이다. … 지난 시절 시리아는 사회주의 진영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으며 그 관계는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3

아마드의 시각은 상이한 색조의 정치적 이슬람주의를 단일한 반동적 세력으로 뭉뚱그리는 시각의 전형이다. 그래도 아마드는 이집트 대중 행동의 규모를 인정한다. “이집트의 정치 행위자는 군부와 이크완[무슬림형제단 — 캘리니코스], 이 둘이 아니라 셋이다. 셋째는 바로 대중 운동이다.” 4

반면, 로버츠는 대중 운동과 활동가들(특히 6월 30일 거대한 시위를 조직한 활동가 연합 타마로드의 활동가들)이 사악하고 비밀스러운 세력에게 이용당한 얼간이들이며, 가장 중요한 배후 세력인 군부가 이제 전면에 나섰다고 본다. 로버츠는 무바라크가 거의 30년간 집권하면서 군부로부터 고도의 정치적 자율성을 키워 왔으며 갈수록 왕조를 닮아가는 대통령제에 중점을 두고, 때때로 무슬림형제단을 이용해 군부를 견제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11년 2월 11일에 일어난 일[무바라크 사임]은 자유장교단 국가의 갱신이다. 무바라크의 몰락 그 자체는 혁명에 못미치는 일이었다. 1952년 자유장교단 쿠데타로 수립된 국가의 근본적 틀이 여전히 무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군최고평의회SCAF가 지배적 정치 행위자로 부상하면서 누구에게나 명백해졌을 것이다. … 군부는 1952년 이래 정치 권력의 원천이었다. … 무바라크가 이들을 주변화시키면서 군부는 일상적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게 됐지만, 대안적 권력의 원천이 군부를 대체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군부를 무대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들인 2011년 1~2월의 사건은 혁명이 아니었다. … 2013년 7월 3일이 2011년 2월 11일의 근본적 논리를 회복시켰다고 하는 엘시시 장군과 타마로드의 주장에는 적어도 일관성의 맹아가 있다. 그날의 근본 논리는 역사적으로 정치적 우위에 있었던 군부가 자기 자리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혁명이 아니었고 민주주의의 혁명적 도래도 아니었다. 이 점을 직시하면 그 일관성을 이해할 수 있다. 5

로버트의 분석에 있는 매우 중요한 일말의 진실은, 무바라크가 타도됐어도 이집트 국가의 정치적·억압적 핵심, 즉 군부가 온존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2011년 2월의 이집트는 1979년 2월의 이란과 예리하게 구분된다. 당시 이란에서는 좌파와 이슬람주의자들이 연합해 일으킨 무장 봉기가 샤의 군대를 분쇄해 버렸다. 6 물론, 어느 자본주의 국가에서든 군대는 최후의 방어선이지만, 이집트에서 군대는 1952년 이래 핵심 정치권력 기구였으며, 1970년대에 안와르 사다트가 다진 미국과의 동맹을 지탱하는 핵심축이기도 했다. 군 장성들이 1월 25일 혁명을 자신의 우위를 재확립할 기회로 삼았다는 로버츠의 말은 과장일 수 있지만, 무바라크 퇴진 후 군부가 부르주아 정치 무대를 조직하는 핵심 세력이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처음에 군부는 2011년 2월 ~ 2012년 7월 동안 군최고평의회 통치를 통해 그런 구실을 했다. 그 후 무르시 하에서는 이전보다 배후에 있었다가, 무르시를 축출한 후에는 (형식적으로 민간인 대통령과 각료를 두는 있으나 마나 한 위장을 했지만)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군부가 이런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집트 부르주아지에게 힘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이는 이집트 부르주아지의 만성적인 정치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실로, 혁명이 시작되고 나서 이집트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대중 운동 규모와 그 정치적 표현 사이의 간극이었다. 정확한 의미의 부르주아지 정당들은 계속 한심한 혼란 상태였다. 무바라크 치하에서 성장한 세속 민족주의자들과 좌파들도 마찬가지였다. 엘시시는 무르시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대거 규합한 구국전선NSF의 지지를 챙기면서도 그로부터 큰 제약을 전혀 받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집트 자유주의자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무슬림형제단 시위대 유혈 진압에 항의해 용기를 내어 8월에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가 결국 “국가 신뢰 실추”를 이유로 기소 위협을 당했다. 수치스럽게도 타마로드는 무슬림형제단 탄압의 응원 부대 구실을 했다.

이런 패턴에서 유일한 예외는 역설적이게도 (유일하게 만만찮은 부르주아 정당이자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조직인) 무슬림형제단 자신이었다. 무바라크 집권 수십 년 동안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었지만, 복지를 제공하고 반정부 진영에서 두각을 보인 덕에 강력한 대중 기반을 구축했다. 2011년 2월 이후, 이집트 자본주의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서 군부가 선택할 파트너는 논리적으로 무슬림형제단이었다. 무르시의 대통령 취임은 양측 모두의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군최고평의회는 대중 저항을 단속할 수 없었다. 무르시가 더 잘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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