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국제사회주의자들의 기원》 서문

던컨 핼러스 88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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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부르주아적 반혁명을 왜곡된 방식으로 반영하는 우파 경향이 러시아공산당 안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부하린-리코프 그룹이었다. 이들은 좌익반대파의 일관된 반대에 부딪혔다. 둘 사이에는 동요하고 일관성 없는 중간파인 스탈린주의 분파가 있었다. 이 분파는 당과 국가 관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주적은 우파였다. 우파의 정책은 산업화는 달팽이 같은 속도로 추진하는 반면 농촌과 도시의 소자본가(쿨라크와 네프맨)들은 방임하는 것이었는데, 트로츠키가 보기에 반혁명으로 직행하는 길이었다. 스탈린주의 중도파는 우파에게 길을 열어 준다는 이유에서 비난받았다. 스탈린주의 중도파는 1926~1928년에 우파와 연합했다. 좌익반대파의 국내 정책은 공업화와 민주화를 중심으로 했다. 두 축은 러시아 노동자 운동의 부활을 도모하는 상호 보완적인 측면으로 여겨졌다.

훗날 트로츠키는 1920년대 중반에 취한 입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분명 이원 권력의 요소들이 러시아 안에 싹트기 시작했지만, 반혁명적 전복이 아니면 그런 요소들이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로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좌익반대파는 주장했다. 이미 관료들은 네프맨·쿨라크들과 연계가 있었지만, 그들의 주된 뿌리는 여전히 노동계급으로 뻗어 있었다. 좌익반대파에 맞선 투쟁에서 관료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네프맨과 쿨라크라는 무거운 꼬리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꼬리가 머리, 즉 지배 관료들을 때릴 터였다. 관료층 내의 분열은 필연적이었다. 반혁명적 전복의 위험이 목전에 다가오면 중간파 관료들의 핵심부는 성장하는 농촌 부르주아지들에 맞서 노동자들의 지지에 의존하게 될 것이었다. 그 충돌의 결과는 전혀 예정돼 있지 않았다. 3

따라서 소련은 여전히 노동자 국가였다. 핵심 척도는 개혁 가능성이었는데, 이는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노동자 운동 내의 중도주의적 경향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현재의 소련 국가를 노동자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무장봉기를 통해서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소련 프롤레타리아가 관료를 굴복시킬 가능성, 당을 부활시킬 가능성,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재건할 가능성을 아직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도 뜻한다. 이것은 새로운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방법과 진로를 통해서 성취될 것이다. 4

이런 주장은 러시아 [좌익]반대파 내 극좌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고참 볼셰비크의 가장 빼어난 대표자인 고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의 주장에 따르면, 산업화가 지연되고, 쿨라크와 네프맨이 성장하고, 이들과 관료 사이에 연계가 생기고, 당이 변질하는 바람에 새로운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적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이 됐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미 권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5

이미 1926년에 스미르노프, 사프로노프, 오신스키 등 “민주집중파”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됐다고 주장했다. 핵심 문제는 권력 문제였다. 임금 제도, 상품 생산, 사회 계급이 러시아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시 됐기에(모든 경향이 인정하는 바였다) 문제는 어느 계급이 관료를 통해 실제로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민주집중파”는 궁극적으로 부르주아지라고 봤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노동계급이라고 봤다. 그래서 개혁(트로츠키)과 혁명(스미르노프)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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