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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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hris Harman, Cuba behind the myths, International Socialism, no.111(Summer, 2006)

이예송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서 투쟁이 분출한 여파 중 하나는 다시 한 번 쿠바에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의 이름이 우고 차베스와 에보 모랄레스와 한 묶음으로 취급되고 라틴아메리카 좌파들 대다수가 여전히 쿠바를 본보기로 여긴다. 옛 소련 붕괴와 함께 스러진 반스탈린주의자들조차 여전히 ‘쿠바식 사회주의’를 거론하기 일쑤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와 [볼리비아 행정수도] 라파스 거리에서 붉은 배너를 따라 행진하는 사람들 중 쿠바 사회를 비판하는 말을 듣고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쿠바를 넘어서야 한다는 인식도 있다. ‘21세기 사회주의’ 논의에는, 이른바 20세기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뤄야 한다는 얘기가 아직도 한결같이 포함된다(내가 보기에는 잘못된 견해다). 여기에 민주주의와 [대중] 참여의 필요성이 더해지는데 그렇다면 암묵적으로라도 이는 쿠바에는 없는 무언가를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언가를 어떻게 쟁취할 수 있을까? 쿠바에서 이루지 못한 무엇을 이뤄야 할까?

1959년 벽두에 일어난 쿠바 혁명을 다시 한번 살펴보지 않고 이런 물음들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 출간된 책 두 권이 쿠바 혁명을 돌아보려는 이들에게 유용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두 책의 지은이들은 서로 사뭇 다른 시각으로 쿠바 문제에 접근한다. 리처드 고트의 책**은 500년 전 스페인 식민 정착부터 현재에 이르는 쿠바 역사를 개괄한다. 샘 파버의 책***은 1959년 1월 혁명을 낳은 요인들과 혁명 직후 첫 두 해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룬다. 둘은 정치적 관점도 다르다. 고트는 쿠바 혁명뿐 아니라 카스트로 정권의 솔직한 지지자다. 고트는 (다른 많은 열성 쿠바 지지자들과는 달리) 카스트로 정권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카스트로를 위로부터 사회주의를 실현한 인물로 보고 그의 정치에 상당한 신뢰를 보낸다. 반면 파버는 보기 드문 유형의 쿠바 망명자이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다. 그는 쿠바 정권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1960년대 초반부터 거주한 미국에서 자본주의에 맞선 다양한 투쟁을 발전시키려 애써 온 인물이다. 파버는 1961년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미국 반대, 카스트로 반대, 쿠바 지지’라는 글을 기고해 쿠바 혁명에 관한 자신의 분석을 처음으로 제시했다.1 (그리고 카스트로를 미국 제국주의와 동급의 적으로 취급하는 [파버의] 입장에 반대하는 토니 클리프와 논쟁을 벌였다.2) 그러므로 그의 책은 쿠바 혁명의 지지자로서 혁명 이후 첫 십 년 동안 쿠바를 방문한 뒤 큰 실망만 안고 돌아온 반제국주의자 K.S. 캐롤3과 르네 듀몽4의 절판된 책들을 보충한다.

 

파버의 주장에 따르면 쿠바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독재자 바티스타가 노동자와 농민뿐 아니라 부르주아지 대다수의 지지를 잃었고, 그 결과 바티스타의 군대가 소수의 반란군에 의해 붕괴했기 때문이다. 압도 다수 대중은 새 정부를 지지했다. 확실한 개혁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국주의 지지자들에 의한 정부 전복을 막을 수 있었고 정부가 생산수단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들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반란군 지휘관 자리는 ‘몰락한’ 프티부르주아지 성원들로 채워졌다. 국가라는 중대한 문제에 관해 노동자·농민이 논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대중적·민주적 기관은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논의는 정권의 핵심부 안에서만 이뤄졌다.

이 모든 논점들은 중요하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에도 그곳의 혁명적 과정이 쿠바와 비슷한 경로를 밟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가 위로부터 통제력을 행사하고 노동자와 농민들에게는 통제가 아닌 “참여” 정도만 허용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쿠바 고문단이 차베스에게 조언하는 바인 듯하다. 그런 주장에는 보통 ‘베네수엘라와 쿠바는 다르다’는 단서도 붙는다. 국가의 통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메커니즘을 통해 이뤄져야 하며 산업 대부분을 사적 소유로 내버려 둘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핵심은 변화가 모두 위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쿠바에서 이런 변화를 불러 온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변화를 다른 곳에서도 재연할 수 있을까?

혁명의 기원

파버는 전작 《1933~1960년, 쿠바의 혁명과 반동》5 에서 그런 혁명이 가능했던 쿠바의 독특한 특징들을 지적한다. 이번 책에서는 이를 훨씬 풍부하게 설명한다.6 쿠바 혁명에 관한 대부분의 다른 설명 — 예컨대 리처드 고트의 책 — 과 달리 파버는 쿠바 혁명이 1933년의 유산된 혁명적 격변에서 시작된 주기적인 정치 불안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풍부하게 설명한다.

쿠바 경제는 1930년대 초 경제 위기로 황폐해졌다. 그 전에 쿠바 경제는 30년 동안 설탕 생산이 7배 늘어나며 크게 성장했고, 덕분에 인구 상당수가 높은 생활수준을 누려서 카리브해 지역의 다른 나라뿐 아니라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 많은 이민자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쿠바는 빈곤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개발도상국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쿠바의 경제적 번영은 설탕이라는 단일 생산물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에, 세계 시장이 침체하자마자 임금과 고용이 붕괴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40년 전,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맞서 일어난 쿠바인들의 반란은 미국에 의해 좌절됐다. 이후 미군 점령기가 이어졌고 이 “해방”됐다는 나라의 정치에 미국이 개입할 권리를 인정하는 헌법이 강요됐다. (이 “플랫 수정안”의 한 조항 덕분에 오늘날에도 미국은 관타나모에 악명높은 기지를 두고 있다. 관타나모는 99년 기한 조차지租借地이고 지금은 쿠바에 반환됐어야 하는데 말이다.) 미국 자본은 쿠바 설탕 산업을 지배할 기회를 붙잡았고, 미국 정부에게 유리한 무역 조약을 바탕으로 그 산업을 미국 시장 공급을 위한 경제적 기지로 이용했다.

그 결과 쿠바는 미국 경제가 1929년에 위기에 빠지자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더들리 시어스가 수년 전에 설명했듯 “쿠바 경제는 미국 경제에 너무나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여러 측면에서 미국 경제의 부속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여느 가난한 주와 달리 쿠바는 연방정부의 사회복지 서비스나 고용지원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한편, 앞서 말한 미국의 정책으로 인해 쿠바 부르주아지는 허약하고 응집력이 없었다. 이 점은 중앙아메리카와 비슷하고 남아메리카의 많은 곳과는 대조적이다. 클라우디오 카츠가 최근 지적했듯,7 남아메리카의 부르주아지는 제국주의 강국들을 서로 경쟁 붙여서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그런 점에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들을 가리켜 ‘반식민지’ 운운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우스꽝스럽게 비트는 것이다.)8

1928년에 쿠바 대통령 헤라르도 마차도는 이미 독재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 위기에 탄압으로 대처했다. 폭력 수위를 높이고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 학생과 노동자뿐 아니라 전통적 정치 세력들도 암살의 표적이 됐다. 1933년 7월 아바나의 버스 노동자들이 과중한 세금에 항의하며 벌인 파업이 정부에 맞선 총파업으로 발전하며 위기는 정점에 달했다. 이 총파업은 노동자들뿐 아니라 ‘상공업계’의 지지도 받았다.9 파업을 지지한 노동자들은 제당소와 철도역들을 점거하고, 관리자들을 억류하고, 스스로 ‘소비에트’라 부른 기구를 결성하고, 병사들, 경찰관들과 어울려서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10

1933년 운동은 낡은 정치 질서를 사실상 무너뜨렸지만 자신만의 권력을 세우기에는 응집력이 부족하고 의식적이지 않았다.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은 학생들이 주도하는 경향에서 왔다. 이들은 반제국주의와 민족 경제 발전을 결합한 모호한 포퓰리즘 이데올로기를 견지했다.(리더십의 일부는 노동조합과 스탈린주의 정당인 대중사회당PSP에서도 왔다. 그런데 이들은 양보안을 받고 파업을 중단시키길 선호했다.) 이처럼 혁명적 리더십이 부재한 탓에 군대 내 권력은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이끄는 한 무리의 하급 부사관들 손에 떨어졌다. 바티스타는 혁명에 연루된 다양한 세력들 사이에서 영리한 책략을 부리는 동시에, 혁명을 후퇴시키려고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1935년에 이르면 바티스타는 쿠바 정치를 주무르는 인물이 되고, 그의 통치는 이후 사반세기 동안 이어졌다. 바티스타 집권은, 쿠바 부르주아지가 직접 사회를 지배하기에는 너무 취약하고 분열된 한편, 쿠바 노동계급도 기회가 왔을 때 권력을 장악할 리더십과 의식이 부족한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하지만 바티스타의 군부 지배로는 부르주아지의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회복시킬 수 없었다. 쿠바 경제 상황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쿠바의 1인당 실질 국민총생산GNP은 1920년대와 같았다. 도시의 경제 발전으로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의 기반이 형성됐지만, 농촌의 고통스러운 가난을 뿌리 뽑지는 못했다. 실업률이 높았고(15퍼센트 이상)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노동자들도 일 년에 몇 달밖에 일하지 못했다.

바티스타는 입헌 정치의 여지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 제2차세계대전 시기 대부분 동안 바티스타는 (스탈린주의 정당 PSP의 지지에 힘입어) 선출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통치했다. 1944~1952년에 1933년 운동에서 등장한 특정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정부를 운영했지만 이들은 금세 인기를 잃었다. 당시 특징적인 정치 분위기 하나는 대다수 국민이 정권에게서 느낀 배신감이었지만, 그 배신감은 수동적 성격을 띠었다. 또 다른 특징은 한때 단결했던 혁명운동 세력이 갈라져 생겨난 두 포퓰리즘 정당(‘아우텐티코’와 ‘오르토독소’), 학생운동의 다양한 분파들(이들은 국가를 상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무장 충돌을 벌였다)이 서로 격렬한 쟁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 내내 쿠바 자본가들은 안정적 정치 체제를 마련하지 못한 대가를 이중으로 치러야 했다. 하나는 자본가들과 이해관계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 갈수록 폭력배 비슷해지는 통치자에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또 다른 대가는, 최소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계급 부문에게는 임금 인상 요구를 들어 주고 산업 붕괴를 막기 위해 국가 개입을 수용하는 등 일정한 양보를 해야 했다는 점이다.

1952년에 바티스타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전 세계 설탕 가격이 하락해 쿠바의 1인당 소득이 일 년 만에 15퍼센트 감소하던 때였다. 군대와 경찰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덕에 바티스타는 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잡을 수 있었지만, 탄탄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 바티스타는 노동자와 농민에게서 적극적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쿠바 부르주아지가 원하는 조치를 노동자·농민에 강요할 만큼 막강하지도 않았다. 하층 중간계급/학생 집단들 사이에서 불만이 여전히 팽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티스타는 이런저런 정치 세력을 포섭하는 전략에 기댈 수 없게 됐고, 그래서 모든 세력을 거세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1956년 말,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비롯한 게릴라 200여 명이 쿠바 해안에 상륙할 무렵에는 쿠바 전역의 모든 정당, 사회 단체, 심지어 부르주아지와 연계된 곳들도 바티스타를 격렬히 반대했다.

저항, 반란, 게릴라

바티스타 전복의 결정적인 주도력은 이번에도 1933년 운동에서 일정한 구실을 한 포퓰리스트 정치 환경에서 나왔다. 파버가 설명하듯 “‘오르토독소’ 청년들은 카스트로가 이끄는 ‘7월 26일 운동’의 조직원을 충원하는 주요 원천이었다. 1940년대 말 피델 카스트로는 오르토독소의 중간 간부로서 당원들 사이에서 사회적으로 좀 더 급진적인 경향을 형성하려 했다.”11 노동자들은 봉기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노동조합은 국가가 지명한 인물이 운영했다. 다른 도전자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면 노동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 줘야 했지만 말이다. 노동조합 안에서 좌파적 저항을 주로 이끈 PSP는 바티스타 정권에 협조한 전력으로 위신이 떨어진 데다가 [바티스타에 의해 불법화돼] 비밀리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또, 농촌 노동자와 상대적으로 보호받는 여러 도시 노동자의 처지 사이에 현격한 불균형이 존재했다. 1958년 4월에는 총파업 시도가 처참히 실패했다. 주요 산업 부문 노동자들이 반란에 참가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난 셈이었다. 반면, 1930년대부터 전해 내려온 학생/중간계급의 포퓰리스트 전통은 무장 행동을 늘리며 상황에 호응했다. 상대적으로 작고 철저히 지하에서 활동하는 집단만이 비밀경찰을 피해 정권 반대 행동을 계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실행에 나서면 같은 배경의 사람들뿐 아니라 바티스타를 제거하길 간절히 원하는 쿠바 사회 내 모든 세력, 심지어 부르주아지 일부도 이들을 칭송했다.

카스트로는 1953년의 실패한 반란으로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카스트로는 소수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병영을 공격했다. 이런 전술을 편 것은 카스트로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그룹인 ‘학생혁명지도부’는 1957년 3월, 대통령궁을 공격해 바티스타를 암살하려 했다. 즉 1956년 12월에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소수의 핵심 게릴라 부대12를 이끌고 상륙했을 때, 이들은 그런 전술을 편 유일한 집단이 아니었다. 지하에서 투쟁을 벌이던 광범한 게릴라 네트워크가 존재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카스트로의 ‘7월 26일 운동’과 연계돼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게릴라들도 일부 있었다. 최근 줄리아 스웨이그는 이런 네트워크에 속한 다양한 반란 조직들이 1956~1958년에 도시에서 벌인 활동을 생생하게 설명했다.13 그들은 폭탄을 설치하고, 암살을 시도하고, 파업을 부추겼다. 도시를 중심으로 봉기를 촉발한다는 전망에서였다. 그들은 무기를 밀수해 쿠바 남동부(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는 카스트로의 소규모 게릴라에게 제공했다. 파버는 이렇게 쓴다. “신화와 달리, 도시에서의 투쟁은 ‘7월 26일 운동’이 벌인 대부분의 활동이자 가장 위험한 활동이었다.”14 1957~1958년에 도시에서 저항하다 사망한 조직원의 수는 1500~2000명에 이르렀다.15 이는 농촌 게릴라 사망자의 10배나 되는 숫자다.

바티스타 정권은 도시 게릴라를 분쇄했지만, 더 잔혹해진 탄압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정권에 등을 돌렸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후미진 지역에서 카스트로의 게릴라가 정권의 헛된 진압 시도에서 살아남는 사이, 카스트로의 게릴라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가 커져 갔다. 1957년 여름 즈음, 카스트로는 바티스타에 반대하는 주류 부르주아 정당의 지도적 인물들과 공통의 정책 기조를 협상하는 위치에 올랐다. 1958년 중반, 다른 모든 세력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카스트로는 쿠바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속에서 조직된 기반을 갖춘 유일한 정당인 PSP와도 협상을 벌일 수 있었다.

카스트로 세력이 수적으로 많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카스트로의 군대는 300명이었고 그들이 1958년 12월 쿠바의 주요 도시들로 들어왔을 때도 그 수는 기껏해야 2000~3000명에 불과했다.16 거대한 전투에서 바티스타의 군대를 무찌를 처지는 아니었다. 실제로는 바티스타 군대가 싸우기를 거부했다. 반란군이 진격하자마자 정부군은 무너져 버렸다. 미국 정부는 이미 바티스타의 정치 생명이 끝났음을 깨닫고 군사 쿠데타를 조직해 다른 인물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바티스타에 맞선 투쟁은 미국도 반란군도 예측하지 못한 결말을 맞았다. 독재 정권, 정규군, 따라서 쿠바 국가의 핵심 기구들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17

새로운 권력

반란군은 새 정부의 지배 세력이자 유일하게 조직된 무장세력으로서, 그리고 쿠바 각계각층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세력으로서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이번에는 총파업이 완전히 성공적으로 벌어졌다. 이 파업은 옛 정권의 몰락을 축하하는 동시에 반란군에게서 정권을 낚아채려는 일체의 시도가 거대한 대중 저항에 부딪힐 것임을 분명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이 권력 교체에는 이후 일어난 모든 일에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측면이 하나 있다. 새 정권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곧 그 정권에 대한 대중의 통제는 (심지어 참여조차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핵심 지도자들에게 부여된 (‘코만단테[사령관]’ 같은) 군대 직위가 보여 주듯, 반란군은 위계적으로 조직됐으며 효율적인 게릴라 군대들이 다 그렇듯 부대원들에게 극도로 엄격한 규율을 부과했다.18

그렇다고 해서 반란군 지도자들, 특히 카스트로가 다른 사회 세력이나 대중 정서를 무시할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1959년 쿠바 혁명 직후 몇 개월 동안 아바나에서 나타난 생동감 넘치는 혼란 과정에서 반란군 지도자들이 아래로부터의 변화 염원을 무시했다면 ─ 예컨대, 바티스타 정권에 복무한 고문자들과 비밀경찰(이들은 공개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을 처단하지 않거나, 임금과 복지를 개선하지 않거나, 농촌 대중을 대지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토지 개혁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 새 정부는 단 며칠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기층 운동의 조직화 수준은 혁명 지도자들의 행동을 직접 통제할 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혁명 이후 첫 8개월 동안 카스트로는 매우 영리하게도 반란군을 지도한 집단의 지위를 사실상 문제 삼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와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PSP와 ‘7월 26일 운동’의 더 급진적 부위에 대해 느끼던 두려움을 이용해, 자신을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는 유일한 인물로 내세웠다. 동시에 카스트로는 ‘7월 26일 운동’ 내 무정파들과 PSP 지도자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어, 어느 쪽이든 영향력을 획득하려면 자신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정치 위기가 심화하는 주요 순간마다 카스트로는 운집한 군중에 연설하며 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집회 참가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거나 주도권을 쥐지는 못하게 했다. 이런 집회들의 분위기는 뜨거웠을지 몰라도, 1917년 러시아 혁명 때처럼 대중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쿠바 혁명을 다룬 많은 역사서들이 1957~1958년 게릴라전과 그에 따른 정치적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노동자, 농업 노동자, 농민 대중이 말하고 행동한 것에는 초점을 두지 않는 까닭이다. 휴 토머스의 권위 있는 역사서는 바티스타 정권 몰락 이후 첫 몇 주 동안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과 단식 투쟁을 몇 문장으로만 다룬다.19 리처드 고트의 책에는 관련 내용이 더 적다.

물론 위로부터의 역사 서술에 주된 관심을 둔 저자들의 편견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혁명 지도자들의 행위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노동자·농민들이 스스로 사태를 결정하는 것은 다르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혁명 지도자들 또한 이들의 직접 행동을 고무하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공격했다. 당시 쿠바 경제 대부분이 민간 자본가의 수중에 놓여 있었는데도 말이다. 1959년 봄, 노동자들은 바티스타 정권의 몰락이라는 기회를 붙잡아 새로운 노동조합 지도부를 선출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7월 26일 운동’ 관련자들이었다. 하지만 그해 가을 노동부 장관이 개입해 새로 선출된 노동조합 지도부 절반을 제거한 뒤 다른 지도자를 뽑을 새로운 선거를 조직하지도 않았다.20 ‘7월 26일 운동’이 배출한 핵심 노동조합 지도자인 다비드 살바도르는 1960년에 체포됐다. 1960년대 쿠바에 대한 기록은 흔히 노동조합 활동이나 영향력이 사실상 전무했다고 논평한다. [쿠바 혁명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쿠바를 관찰한 좌파 케인스주의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은 〈먼슬리 리뷰〉에 이렇게 썼다. “노동조합은 … 노동자가 아니라 당과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21

농민과 농업 노동자들에게도 같은 태도가 적용됐다. PSP가 농민들에게 ‘자발적인 토지 몰수’를 통해 스스로 토지개혁을 이루도록 고무하자, 카스트로는 이를 격렬히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무질서한 토지 분배에 반대한다 … 농업법을 거스르는 토지 분배를 조장하는 행위는 … 모두 범죄다.’22 토지개혁 최종안이 마침내 시행될 때에도 농민과 무토지 노동자들은 그 과정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다. 카스트로의 농업 자문으로 (1960년대 초반과 후반) 쿠바를 두 번 방문한 좌파 농업 경제학자 르네 듀몽은 농업 협동조합 건설 계획이 마련되고 이후 협동조합이 사실상 국영 농장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농업 협동조합에 관한 법규들은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고 밀실에서 마련됐다 … 1960년 8월이 되면 … 협동조합 계획은 확실히 뒷전으로 밀렸다. 관련자들에게는 통보나 상의조차 없었다.23

지도자들의 말, 특히 카스트로의 말은 모두 그대로 실행됐다. 파버는 이렇게 쓴다.

대중은 대중조직으로 알려진 기구들에 지지를 보내고 참여했지만, 자기 운명은 차치하고 이 기구들의 운명도 실질적·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대중 집회는 지도자들이 연단을 통제하고 연설하고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였으며 청중들은 갈채를 보내지만 감히 수정안을 내거나 이견을 표할 수 없었다. 이런 집회는 새로운 정권의 상징이 됐다.24

듀몽은 1960년 초여름에 이르면 ‘격렬한 비판은 심지어 순전히 기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쿠바 언론들 사이에서 철 지난 것이 됐다’고 쓴다.25 파버는 이렇게 지적한다. “1960년 여름 즈음 일체의 반대파 및 독립 신문이 금지됐다. 당시 대다수 출판 및 시각 매체들은 정권을 지지했고 정부는 그 어떤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에 직면하지 않았다.”26 듀몽은 자신이 목격한 혁명 지도부의 태도를 이렇게 요약했다. “인민을 위한 정부였을지는 몰라도 인민에 의한 정부는 아니었다. 인민은 자기가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는 존재로 취급됐다.”27

당시 체 게바라가 발표한 입장들에서도 이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61년 4월 연설에서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 지도자들이 … 민중을 제 몸처럼 위하는 가운데 무엇이 민중에게 최선인지 고민하고 수치화해 … 위에서 밑으로 내려보낸다.”28 또, 이렇게 불평하기도 했다. “대중과 연관 맺어야 할 절실하고 시급한 필요성은 … 우리 지도부만의 잘못이 아니다. 대중과 지도부 양쪽 모두의 잘못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힘과 의무, 권리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29 계획이 “위로부터 관료적으로” 수립된다면 “그것은 대중의 잘못이다.”30 게바라의 해결책은 아래로부터의 논의를 기반으로 지도부가 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노력으로 지도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혁명에 깊은 열의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31 “노동자들에게 공동 소유나 집단적 소유를 이해시키는 것은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혁명적 의식을 발전시켜서 혁명에 완전히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32

1965년에 혁명의 경험을 반추하며 게바라는 “대중과 좀더 구조적인 연계가 필요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향후 몇 년에 걸쳐” (십중팔구 위로부터) 개선할 일이었다.33 그러기 전까지는 “사회 전체를 … 하나의 거대한 학교로” 탈바꿈시켜 대중을 “교육”해야 한다.34 “대중은 자극과 압력에 노출돼야 한다 …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패배한 계급뿐 아니라 승리한 계급의 개개인에게도 행사되는 것이다.”35

사회주의 사회를 성취하고자 한 게바라의 선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게바라의 시각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근본에 놓는 마르크스의 관점과 달랐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이런 종류의 관점을 격하게 비판하며, 이런 관점은 사회를 둘로 나눠 “한쪽을 나머지보다 우월한 일부”로 여기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함”을 망각하는 “교리”라고 비판했다. 그런 “교리”에 따르면, 소수의 지도층이 모든 사회 세력의 압력에서 벗어나 대중을 위해 새로운 사회를 도입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쿠바 혁명의 결정적인 초기 몇 년 동안 이 지도층의 체계적인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반란군 지도자들은 더 광범한 ‘7월 26일 운동’을 대표해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7월 26일 운동’은 지부, 협의회, 선출된 지도부를 갖춘 일관된 조직으로 발전한 적이 없었다. 파버가 주장하듯, “카스트로는 ‘7월 26일’ 운동을 이데올로기·강령·조직을 갖춘 보통의 정당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다 … 피델 카스트로는 ‘7월 26일 운동’이 조직적으로 퇴화하도록 내버려 둬서 1960년대 중반 새로 재편된 공산당으로 흡수되게 했다.”36 이 새로운 정당은 1975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당대회를 열었는데, 쿠바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모든 핵심적인 결정이 이뤄진 지 한참 뒤였다.

지도자들은 기층의 조직 노동계급이나 농민의 일원이 아니었다. 물론 몇몇은 노동계급이나 농민 집안 출신이거나, 학생 내지 급진적 중간계급 배경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투쟁 경험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집단적 대중 투쟁이 아니라 위계적으로 조직된 게릴라 그룹의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쿠바 공산당이 마침내 창당됐을 때, 당 중앙위원 100명 중 혁명 이전에 노동자를 조직하는 전통에 몸담았던 이들은 4명에 불과했다.37

체계적인 조직이나 논쟁이 부재한 가운데 핵심 결정들은 카스트로 중심의 작은 파벌에 의해 내려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진심으로 추구한 이상들을 실현하려고, 상이한 사회적 압력에 반응하며 위로부터 책략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다른 사회 세력들에 실용적으로 대처하며 그들을 이런저런 방향으로 몰아갔지만, 자신들의 애초 이상에서 크게 벗어난 최종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개혁과 급진화

혁명 초기에는 다른 압력에 대한 실용적 대응이 혁명의 급진화를 낳았다. 쿠바 대중은 개혁을 요구했고, 새로운 정부가 이런 요구를 외면하려면 바티스타가 벌인 최악의 행태를 따라 대대적인 탄압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도 새 정부는 훨씬 우파적인 정부로 빠르게 교체됐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1933년 혁명이 낳은 포퓰리스트 정부의 운명이었다). 비록 대중이 혁명 권력을 통제하지는 못했지만 혁명가들의 이상은 대중의 염원과 일치했다. 시어스가 강조하듯 “특히 쿠바 혁명 초기 3년 동안 대부분의 투자는 생산 투자가 아니라 사회 투자였으며 이 덕분에 다양한 측면에서 생활 수준이 향상됐다.”38 도시는 물론 농촌 노동자 대중에게도 의료 서비스를 저렴하게, 결국에는 무료로 제공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문맹률을 낮추려는 정책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 기회를 누리고, 일 년 중 많은 기간을 실업자로 지내던 이들에게 (주로 중소 도시에서) 일자리가 제공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버가 분명하게 지적하듯, 이런 개혁은 미국 제국주의 및 쿠바 자본주의 주요 부문의 이해관계와 어긋났다.39 개혁이 추진되자 혁명 정부 안에 있던 주류 자본가 인사들이 하나둘씩 사임했고 상층 중간계급 대다수가 미국 마이애미로 도망갔다. 조만간 혁명 정부가 붕괴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사태는 이런 기대와 매우 다르게 흘러갔다. 이들이 도망친 까닭에 개혁에 반대하는 사회적 기반이 약화됐고 그리하여 급진화가 더한층 심화됐다.

개혁이 미국 주요 기업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하자 미국은 쿠바 정부를 물러서게 하려고 경제적 조처를 취했다(가장 유명한 예로, 미국 석유기업들이 러시아산 원유를 정제하지 못하게 했다). 쿠바 정부는 미국 기업, 뒤이어 쿠바 기업들을 인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61년 초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혁명 정부를 전복하려 한 피그스만 상륙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쿠바 정권은 유례없이 큰 지지를 받았다.

[피그스만 상륙작전 실패 후] 포퓰리스트 혁명에서 민간 자본가들의 이윤을 공격하는 쪽으로 바꾼 것이 애초 카스트로의 의도였는지를 두고 이후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파버는 이것이 진정한 쟁점이 아님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카스트로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1959~1961년 상황에서 개혁을 고수하는 논리는 미국 제국주의와 뒤얽힌 쿠바 자본주의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쿠바 경제의 주요 부문(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대농장, 가장 영세한 산업 및 서비스 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이 혁명 이후 3년 안에 모두 국유화됐다. 물론 노동자들은 이를 조금도 통제하지 못했다.

아래로부터의 논쟁과 통제 없이 위로부터 이뤄진 개혁이 직접적으로 낳은 모순된 결과 하나는 개혁이 엄청난 경제적 문제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노동자·농민들이 개혁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할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가 공개적인 논의에 부쳐지지 않으니 낡은 질서에서 고통받던 이들은 당연하게도 그저 더 많은 개혁을 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한편, 쿠바 사회를 위로부터 변화시키려 한 이들은 산업과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돈이 드는 계획을 내놓았다. 1961년 8월에는 연 성장률 10퍼센트를 목표로 한 4개년 계획을 도입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목표를 달성할 자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이 국유화에 대한 보복으로 쿠바산 설탕 구매를 거부하고 쿠바 금수령을 내린 터라 더욱 그랬다. 혁명 정부는 자국 내 사유재산을 국유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쿠바의 소규모 경제는 여러 소비재를 나머지 세계 체제에 의존했다. 산업화를 하려면 자본재도 의존해야 했다. 혁명 정부는 이런 의존을 깨뜨릴 수 없었다. 생활 수준 향상의 많은 부분이 기본재 부족과 배급으로 상쇄됐다.

새로운 의존

소련이 미국이 정한 가격보다는 조금 낮지만 자유 시장 가격보다는 높은 가격으로 쿠바 사탕수수 수확량을 구매하고 그 대가로 많은 기본재를 공급하기로 하면서 미국의 봉쇄로 인한 고통이 얼마간 완화됐다. 이는 흔히 소련이 쿠바에게 보조금을 준 것처럼 묘사된다. 소련 지지자들은 한 ‘사회주의’ 국가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게 ‘우호적’ 원조를 제공했다고 묘사했다. 토니 클리프 같은 비판자들은 유고슬라비아가 1948년에 소련에서 떨어져 나오자 미국이 원조를 제공한 것처럼, 소련도 냉전 시기에 전략적 우위를 점하려고 쿠바를 원조하는 것이라고 봤다.40 다른 논평가들이 지적하듯 당시 소련은 국내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식료품 수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 시장 가격보다 높게 책정된 정가 계약으로 설탕을 공급하는 것은 당시 세계 설탕 시장에서 일반적이었기에 소련이 지불한 설탕 가격도 일반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41 고트는 ‘보조금’론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해석이야 어떻든, 쿠바 혁명가들이 미국의 봉쇄 때문에 시장에 대한 의존을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가들에 대한 의존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66년 쿠바 무역의 80퍼센트가 동구권과의 무역이었고, 그중 절반은 소련과의 무역이었다.

소련과의 경제적 관계는 결국 쿠바가 소련 모델을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가야 할 길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아갔다.

쿠바 혁명가들의 핵심 목표는 쿠바 경제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변덕스러운 세계 설탕 시장에 덜 의존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농업을 다변화하는 한편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해서 목표를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2년에 이르면 식량 부족이 “극심”해졌고42, 이를 극복할 방안을 둘러싸고 지도부 안에서 이견이 드러났다. 옛 공산당 인사인 카를로스 라파엘 로드리게스를 지지하는 분파는 국유 경제의 특정 부문들에 수익 목표를 설정하는 최신 소련식 접근법을 추구했다. 체 게바라를 지지하는 다른 분파는 더 열심히 일하라고 제공하던 인센티브를 “사회주의 도덕”으로 대체하려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어려움을 타개하지 못했다. 1965년 1인당 국민총생산은 1962년보다 낮았다.43

게다가 쿠바 지도자들은 1962년 10월 미사일 위기 이후 소련에 대한 의존도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미국의 공격에 맞서 안보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가, 이후 쿠바를 배제한 채 미국과 협상을 하고는 핵미사일을 철수했다. 고트는 “위기에 관한 쿠바 공식 역사가로서 카스트로의 시각을 반영한” 토마스 디에스 아코스타의 말을 인용한다. “이 시기 사건들은 환멸과 쓰라림만을 남겼다.”44

1965년, 적어도 체 게바라만큼은 소련의 지원이 있든 없든 쿠바 혁명이 고립된 채 성취할 수 있는 것의 한계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고립을 극복하려고 혁명을 다른 곳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쿠바를 영원히 떠났다.45

카스트로는 여러 장애물이 있긴 하지만 한 나라에서 급속한 경제 발전을 밀어붙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경제 모델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벌어진 마지막 무대였던 잡지 《쿠바 소시알리스타》를 폐간했다 (한때 체 게바라는 이 잡지에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샤를 베틀렝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46 카스트로는 쿠바 경제의 30퍼센트에 달하는 투자를 추진했는데, 이는 남한이나 중국 같은 독재 정권에서 밀어붙인 것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투자 자금은 설탕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생산하고 수출해서 마련하려 했다. 1970년의 생산 목표는 1000만 톤에 달했다. 목표치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전의 농업 다변화 논의는 잊혀졌고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됐다. 1969년 발표된 법령에 따라 심지어 소상점까지 포함한 모든 민간 기업이 사라졌고 농민의 손에 있던 토지 대부분이 국가에 인수됐다.47

당시 쿠바에 머물렀던 듀몽은 이러한 하향식 모델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모든 주요 직위를 군대가 차지했고, 모든 주요 기업들을 소령·대위·중위들이 이끌었다.”48 1969년에는 소련처럼 모든 노동자에게 노동 규율 위반 사항을 기록하는 작업 일지를 들고 다니도록 했다.49 “점유지에 대한 무장 강도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사형제가 도입됐다. 카스트로는 16세에게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미성년자 규정을 수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50 한 젊은 노동자는 소들이 벼를 뜯도록 내버려 뒀다는 이유로 15년 징역형에 처해졌다.51 작가인 에베르토 파디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썼다는 이유로 “반혁명분자”로 비난받고 가택에 연금됐다. “그 시인을! 그를 내쫓으라! 그는 절대 기적을 보지 못한다.” 같은 해 쿠바의 지배 집단이 나머지 인구와 괴리돼 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 있었다. 대다수 쿠바 대중이 여러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워 발을 동동 구르던 때에, 상당한 가격으로 수입된 최고급 알파 로메오 자동차가 공산당 지도자 600명에게 공짜로 지급된 것이다.52

설탕 수확량 목표는 지나치게 야심찼다. 카스트로는 이를 시인한 설탕부 장관을 해임했지만53, 단지 위에서 압력을 가한다고 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또, 목표 수확량을 채우기 위해 재원이 설탕 수확으로 집중되면서 경제의 나머지 부문이 타격을 입었다.54 예를 들어, 카스트로는 1965년 우유 생산이 몇 년 안에 4배 증가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1972년 우유 생산은 이전보다도 줄었다.55 식량 부족은 10년 전과 똑같이 심각했다.56

그러나 쿠바 지배자들은 하향식 “발전” 모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제 모델이 또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브레즈네프가 이끄는 동유럽 블록에서 우세한 모델로 향했다. “카스트로는 이제 쿠바 경제를 새로운 소련 고문단의 손에 넘겼고”57, 당시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1만 명가량의” 러시아인들이 머물렀다.58

관료화

이제 1959~1961년의 유동성은 사라졌고 사회 구조가 고착됐으며, 동유럽과 소련은 쿠바가 모방해야 할 본보기로 여겨졌다. 그 모방이 불완전했다면, 그것은 소련 군대가 권력을 쥐어 준 동유럽 정권들(유고슬라비아는 제외)과 달리 쿠바에는 혁명의 발자취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바에는 소련식 일당 국가가 거느리고 있을 법한 온갖 기구들이 넘쳐났고, 당원들 사이에서든 소위 “민중 권력” 기관들에서든 진정한 논쟁이 벌어질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트가 말하듯 “쿠바는 … 소련이라는 틀에 맞추어 사회를 재구성”하려 했고 1970년대 중반에 그 과정이 완수된다.59

물론 이 시기 쿠바의 불평등은 1959년 이전의 쿠바나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보다 덜했다. 혁명 초기에 성취한 의료 및 교육 부문의 성과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혁명 이후 쿠바를 떠난 의사 2500명을 대체할 의사들이 다른 라틴아메리카 나라들로부터 충원됐고, 1959년 혁명 이전과 달리 도시 지역만이 아니라 농촌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까지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대한 사회 분단선이 존재했다. 1973년 상위 20퍼센트의 소득은 하위 20퍼센트의 4.8배였으며(1958년에는 10배가 넘었다), 상위 10퍼센트의 소득은 하위 10퍼센트의 10배였다.60 이 비율은 대다수 서구 자본주의 나라들보다는 낮지만 같은 시기 대만과 매우 비슷했다. 하지만 이 수치도 사회 최상층의 극소수가 나머지와 얼마나 동떨어진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듀몽은 쿠바를 방문해 최상층 쿠바인들과 섞여 지낸 뒤 이렇게 썼다.

정부 고위 관리들과 그 가족들은 멋진 별장과 아름다운 베라데로 해변에서 공짜 휴가를 보냈다. 새로운 지배 카스트가 쿠바에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호의적이지만 온정주의적으로 호의를 베푼다. 특권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고 결핍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이 새로운 계급은 대중의 물질적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61

심지어 사탕수수 수확을 위해 징집된 “자원자” 팀 내에도 격차가 존재했다. “공용 숙소에 머무는 젊은이들에게 제공되는 가장 흔한 메뉴는 곤죽 한 국자였지만, 고위 관리들은 닭고기·쌀·아보카도·시가·커피를 즐겼다.”62

다수 대중은 카스트로가 몇 시간이고 연설하는 정례 대규모 집회에 참가해 정권에게 지지를 보내야 했다. 분명 실제로 많은 이들이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집회 참가는 그다지 자발적이지 않았다. 듀몽은 이렇게 지적한다. “일손을 놓고 집회에 참가하는 것은 의무였다 …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모든 쿠바인들이 카스트로를 지지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열렬한 지지자가 그보다 적었다.”63 1960년대 말 꼴을 갖춘 새로운 공산당은 노동자들을 당원으로 충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동자들은 당위원회가 지명하고 대중 집회에서 인준받은 “모범” 노동자들이었다. 평당원들은 경제 계획 목표치, 소비 대 축적의 비율, 지배 집단과 나머지 인구 사이에서 희소 소비재 분배 등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중대한 결정에 관해 발언권이 전혀 없었다.

이는 지배 집단 안에서 분열이 일어날 때마다 극명해졌다. 1965년 게바라가 결국 쿠바를 떠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논쟁은 비공개로 이루어졌고, 혁명을 옹호하는 평범한 활동가들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1968년 노련한 공산당 지도자 에스칼란테의 극적인 체포와 15년 징역형으로 이어진 논쟁도 마찬가지였다. 카스트로는 에스칼란테가 “극소수 분파”를 형성하려 했고 “당 기구를 온갖 종류의 특권과 청탁이 난무하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20년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5년] 앙골라에 파견된 쿠바군을 이끌었으며 “혁명의 영웅”으로 불리운 선임 게릴라이자 장성이었던 아르날도 오초아가 아바나 군관구 군사령관으로 임명되기 하루 전날, 갑작스럽게 체포돼 재판을 받고 ‘반역죄’와 ‘부패죄’로 4일 만에 [1989년 7월 13일] 즉결 처형됐다. 전체 당원과 다수 대중에게 ‘참여’란 이미 밀실에서 내려진 결정을 승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 시장에 갇히다

이런 통치 방식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엄격하고 위계적인 규율을 부과하는 게릴라 전통이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핵심은 권력을 잡은 혁명 지도자들이 덫에 걸린 데에 있다. 이들은 쿠바 경제를 발전시키고 수십 년의 정체를 극복하길 원했지만, 자본주의 논리로 조직되는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작은 섬나라의 국유 경제로는 그런 압력을 제거할 수 없었다. 쿠바 국가는 살아남기 위해 세계 시장에 상품을 판매해야만 했다. 혁명 정부는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정부였다. 1977년에 카스트로도 1960년대 초의 도취적인 시절에 “가치 법칙”을 고려하지 못한 실수가 있었다며 사실상 이를 인정했다.64

대중은 상품 판매를 위한 경쟁의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다수 대중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 일체에 대한 체계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적은 없다”고 말한 시인이 위협적 존재로 취급된 것이다.

그러나 쿠바 정부가 경제 목표를 이루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 때문에 그런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71~1975년에는 경제가 성장해 1인당 산출량이 1967년(그리고 1957년) 수준보다 높아졌다.65 하지만 1975~1980년 계획은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했다. 카스트로가 말했듯이 “설탕 가격 급락, 세계적 인플레, 무역 관계 악화, 세계경제 위기 심화” 때문이었다.66 1980년대 내내 지속된 세계경제 위기도 쿠바에 영향을 미쳤다. 고트가 말하듯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쿠바는 비공산주의권과의 경제 관계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67 쿠바의 1인당 산출량은 1984~1989년 동안 정체했다. 1980년대 동안 (1인당 산출량이 매년 0.7 퍼센트 감소한) 라틴아메리카 지역 대부분의 경제 상황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혁명 직후에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난의 “특별한 시기”

그러다가 세계 체제에 대한 쿠바의 의존을 최종적으로 입증한 사건이 벌어졌다. 1989~1991년에 동구권이 붕괴한 것이다. 이와 함께 소련의 사탕수수 구매가 크게 줄었다.68 쿠바가 받은 가격은 1990년 1톤당 602달러에서 1992년 200달러로 떨어졌다. 1991년 쿠바 국민총생산GNP은 10퍼센트 감소했고, 1992년에는 11퍼센트, 1993년에는 14.9퍼센트 감소했다.69 1990~1993년에 1인당 국민산출량은 3분의 1 넘게 줄어들었다.

쿠바는 설탕에 집중한 탓에 많은 식량을 수입했다. 쿠바 다수 대중은 극심한 결핍에 시달렸다. “식량과 연료의 공급이 절망적으로 부족했다. 비록 글자 그대로의 기아 상태는 겨우 막을 수 있었지만 여러 세대 동안 쿠바에서 사라졌던 영양실조가 다시 만연했다.”70 “식량 소비가 36퍼센트 감소했다. [1인당] 1일 칼로리 섭취량은 1980년대의 2908칼로리에서 1863칼로리로 줄어들었다.”71

하지만 정권은 살아남았다. 쿠바 정권의 몰락을 전망한 사람들은 쿠바와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쿠바 또한 동유럽 국가들처럼 경쟁력 있는 산업과 농업을 건설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제약에서 벗어나려 했다가 실패한 작은 나라였다. 하지만 동유럽과 달리 쿠바 혁명은 국내에 뿌리가 있었고 대중에게 진정한 개혁을 일부 제공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들조차 설문 조사에서 쿠바의 보건·교육 체계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답했다.72 이와 동시에 미국의 계속된 압박 탓에 쿠바 정권은 과거에 미국이 쿠바에서 저지른 만행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민족주의적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쿠바 정권이 단지 1989년에 동유럽 정권들이 누리지 못한 지지의 잔재 덕분에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지난 30년간의 소련 의존에서 벗어나 서방 자본주의를 일부 수용하려는 시도도 한몫했다. 쿠바는 “평시 특별 기간”을 선언하고 산업과 일부 서비스를 외국 자본에 개방했다. 고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1992년 정부의 해외 무역 독점이 폐지됐고, 국유 재산을 해외 파트너들과의 합작 사업으로 이전할 수 있도록 헌법이 수정됐다. 새로운 해외 투자법이 작성됐다. … 느슨한 법 조항에 따라 해외 기업은 합작 사업의 49퍼센트까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외국인 임원을 고용하고, 세금 대부분을 면제받고, 이윤을 경화硬貨로 자국에 송금할 수 있었다.73

2001년에는 405개의 합작 사업과 파트너십 계약이 체결됐고, 약속된 해외 투자 금액이 54억 달러에 이르렀다.74 투자는 관광 부문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아주 중요한 니켈 산업, 전화 시스템(멕시코의 그루포도모스사에 매각됐다), 아바나 상수도 시스템(프랑스 기업 수에즈의 자회사와 공공-민간 파트너십PPP으로 운영됨)도 포함됐다. “이들 해외 기업 중 140개 이상이 이른바 ‘자유무역’ 지대에서 활동했다.”75 해외 투자자들이 매달 외화로 각 노동자의 임금을 정부에게 지불하면 정부는 그것의 극히 일부만을 자국 통화로 노동자들에게 지급했다.76 해외 투자는 전체 투자의 대략 6퍼센트를 차지했고 노동자 10만 명이 이를 통해 고용됐다. 해외 투자가 허용되자 미국 달러화 소유와 사용을 허용하는 법률이 제정됐고, 15만 명의 개인 농장주들과 15만 명의 자영업자들이 생겨났다. 또한 국영 기업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느슨해지면서 기업 관리자들이 이전보다 훨씬 큰 재량권을 누렸다. 관광업을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주도면밀한 노력이 있었고, 관광업은 수입 대금을 지불하는 소득의 주요 원천이 됐다. 고트가 말한 의료진 ‘수출’도 있었다.77 이는 (다른 나라들이 해외 계약으로 건설 업체들을 파견하는 것처럼) 의사들을 해외로 파견해 정권에게 필요한 경화硬貨를 벌어들인 것이다.78

돌아온 불평등

“특별한 시기”에 영양 수준만 하락한 게 아니었다. 실업이 증가했다. 특히 육체 노동자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늘었다. 산모 사망률과 65세 이상 인구 사망률이 올라갔다. 소득 불평등이 크게 증가했다. 이를 나타내는 주요 통계 지표인 ‘지니계수’는 “쿠바 자체와 해외의 추정치 모두” “1986년 0.22에서 1999년 0.407”로 상승했고, 가장 부유한 20퍼센트와 가장 가난한 20퍼센트의 [소득] 비율은 1989년 3.8에서 1999년 13.5로 높아졌다.79 달러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의 형편이 나머지 쿠바 사람들보다 갑자기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해외에 나간 친척들이 달러를 송금해 주는 사람들이나 관광업에 종사하는 소기업주들이 그랬다. 국영 산업의 상층부에 있어서 업무상 해외 투자자들과 접촉하게 되는 자들도 부가 늘었다. 관광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결과 혁명 이전의 쿠바를 어지럽힌 두 가지 병폐가 다시 살아났다. 가난한 여성들이 성매매에 종사하게 되고 사회 최상층부에 부패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소식통에 따르면 국영 산업을 관리하는 고위직들은 동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발적 민영화”를 통해 그 산업의 소유주로 변신하고 있었다.80

1990년대 초반의 경제적 변화와 함께, 지난 수십 년을 지배한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적 [통치] 방식이 일부 완화됐다. 소설가와 시인들이 이전에는 누리지 못한 자유를 누렸다. 비록 페드로 후안 구티에레스와 레오나르도 파두라81는 쿠바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을 국내에서 출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런 작품을 쓰고도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으며 해외에서 작품을 출판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잠깐이지만 선거 정치 참여를 개방하자는 논의가 쏟아졌던 적도 있었다. 쿠바 공산당 정치위원인 카를로스 알다나는 ‘야당’ 지지자들이 쿠바 지방의회와 국회의 일원으로 선출될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상황이 일단 안정되자 이런 논의는 금세 사라졌고 알다나는 ‘부패’ 혐의로 지도부에서 제거됐다. “민중 권력” 기구들의 직책을 맡을 후보자들은 후보선출위원회에 의해 지명되고 다수 대중은 그에게 표를 던지도록 촉구받는다. 쿠바 국회[전국인민권력회의]는 1년에 두 번, 며칠 동안만 열린다. 쿠바 공산당원 수는 1990년대 내내 늘었고 당원 가입 자격 제한도 완화됐다. 하지만 공산당은 여전히 상명하달 기구고 당 상층이 아랫사람들에게 인준받을 정책을 모두 결정할 때까지 당대회가 수년 동안 연기됐다. 그래서 이미 한두 해 전에 열렸어야 할 제 6차 당대회는 이 글을 쓰는 지금[2006년]까지도 개최되지 않았으며 [6차 당대회는 2011년에야 열렸다 ─ 역주] 이제 제 5차 당대회가 열린 지 9년이 되고 있다.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한 핵심 지도층 인사들은 대중이 정치적 논의에 진정으로 관여하는 것을 허용하는 데에 여전히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불만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 혹독한 탄압으로 대응해 왔다. 3년 전, 배를 탈취해 쿠바를 탈출하려 했던 아프리카계 쿠바인 3명을 처형하고, 평화적인 항의 활동을 하던 사람들(그중에는 선임 공산당 지도자인 블라스 로카의 아들도 있었다)에게 무거운 징역형을 내린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국제적으로 좌파 전부가 이런 조처를 지지했다. 제국주의의 영향력에서 쿠바를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라며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혹독하게 굴어야 한다고 느끼는 정권은 스스로의 강함이 아니라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취약함의 근원은 지난 47년간의 모든 노력에도 쿠바가 세계 체제 안에 편입돼 겪을 수밖에 없는 가난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혹독한 현실에 있다. 쿠바는 결국 1990년대 초반에 최악의 물자 부족과 굶주림에서 벗어나 1인당 국민산출량을 1977년 수준으로 회복했다. 하지만 이는 1957년 수준보다 아주 약간 더 높은 것에 불과했다. 프랭크 W 톰슨은 쿠바 혁명 이후 시기 전반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쿠바 경제는 거의 반세기 동안 성적이 좋지 못했다. 1인당 GNP 통계에 비추어 보면 어떤 시기는 더 나았고 어떤 시기는 더 못했다. 쿠바의 평균 경제 성적은 이제서야 기껏해야 1957년 수준보다 약간 더 나아졌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자메이카와 니카라과만이 경제가 더 나빠졌다.82

절대적 수준에서 보면, 쿠바의 생활 수준은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많은 곳들보다 높다. 그러나 이는 1959년 이전에도 그랬다. 사실 쿠바 혁명은, 늘상 가난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세계 체제로 인해 정체를 겪으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복지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 통계에 따르면 보건과 교육에 관한 한 “쿠바는 다른 가난한 나라들보다 상황이 나았다.”83 하지만 대중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것들, 예컨대 주택 공급 문제에서 쿠바가 그만큼 잘했다고 말하는 어렵다. 인간개발지수HDI 통계를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과 비교해 보면, 쿠바는 기껏해야 뒤쳐지지 않은 정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톰슨은 결론짓는다.84

고립의 대차대조표

지난 47년간 유지된 카스트로 정권은 쿠바 대중 다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에 의한 독재나 다름없었다. 즉, 현대의 ‘계몽 독재자’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도록 대중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혁명이 고립됐기 때문에 쿠바는 사실상 상품 생산자로서 세계 체제의 다른 곳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처지에 다시 매일 수밖에 없었다. 정권의 통제력을 유지하려면 관리 구조를 세워 대중을 압박해 노동하게 해서 필요한 상품을 생산하고, 상품 생산비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잉여를 축적해야 했다. 세계 체제의 다른 부위들을 앞지르기 위한 분투의 연속이었다. 쿠바는 1990년대 말의 “특별한 기간”에서 살아남았지만, 2001~2002년 세계 경기 하강으로 다시 한 번 타격을 입었다. 경제 성장률이 둔화하고 부채가 늘어났다. 수입(주로 식량과 연료)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단기 대출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낮은 신용 등급, 경화 110만 달러에 이르는 부채, 투자 리스크 때문에 쿠바의 금리는 한때 무려 22퍼센트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중이 계속 불만을 품게 될 것이다. 경영자층, 특히 다국적 기업과 협력하는 경영자들이 자신의 의지와 점점 더 늘어나는 부패 행위를 사회 전체에 관철시키려 할 것이다. 1958년에 이상을 품고 혁명을 만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말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카스트로는 혁명의 미래에 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만약 우리가 수많은 악행, 즉 수많은 강도짓, 비행, 신흥 부자들의 여러 부의 원천을 없애지 못한다면 … 이 나라는 자멸할지도 모른다. … 우리 사회는 완전한 변화로 나아가고 있다. … 불평등과 불의가 생겨나는 어려운 시기에 있기 때문에 다시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단 한 치의 불의도 범하지 않고 변화를 이룰 것이다.85

하지만 사회 최상층에 위치한 집단은 자신이 지배하는 경제 구조 자체에서 발생하는 사회 변화를 무한정 막을 수 없다.

쿠바 바깥의 많은 사람들은 카스트로를 미국 제국주의에 오랫동안 맞선 인물로서 존경한다. 하지만 단지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쿠바의 경우, 그런 생존 과정에서 애초 쿠바 혁명에 기름을 끼얹은 계급 분단과 부패가 다시 커지는 과정이 뒤따랐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자들은 1960년의 격동기에 미국의 침략 위협에 맞서 쿠바 혁명을 이렇게 옹호했다(미국의 위협은 이로부터 세 달 뒤에 현실화됐다):

첫째, 쿠바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의 중대한 패배다. … 둘째, 현재 사회 형태를 어떻게 규정하든 이들은 분명 저항에 나선 민중이다. … 그들이 만들어 낸 혁명은 사유재산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여느 부르주아 혁명과 다르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도 아니다. 대중 참여를 … 상시적으로 구현하는 정치 기구를 아직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 셋째, 소련 공산당과 미국 국무부 모두 제국주의에 맞선 쿠바 민중의 투쟁을 냉전과 결부시키려 할 것이다. … 쿠바인들은 … 소련의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는 … 처지에 놓여 있다. 쿠바를 소련 블록으로 통합하려는 압력은 혁명의 관료화를 낳을 것이다. … 쿠바인들은 그들이 의지할 국제 노동계급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에 소련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86

쿠바 혁명의 사례를 라틴아메리카로 확산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서 혁명은 고립됐고, 카스트로는 한때 그와 게바라가 비판했던 기존 라틴아메리카 공산당들의 개혁주의적 정책에 의존하는 소련의 정책을 묵인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쿠바 정권은 처음에는 주로 동구권 블록을 대상으로, 그리고 지금은 전체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상품을 생산할 필요라는 제약 속에서 움직여야 했다. 경쟁적 축적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구조가 등장했고, 그 대가는 쿠바 대중이 치렀다. 그와 더불어 계급과 착취의 구조가 형성됐다. 카스트로는 말로는 이런 것들을 강하게 규탄하곤 했지만, 그에 맞서 노동자들이 뭉치지 못하게 하려고 억압적인 조처들을 도입했다.

쿠바 혁명의 고립은 중요한 현실을 반영했다. 쿠바 경제가 195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그리 사정이 좋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주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여전히 경제가 성장했다. 그 결과 이 국가들에서는 자신감 있는 부르주아지가 등장해 자기 의지를 사회 전체에 관철시킬 수 있었다. 반면 쿠바 부르주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쿠바가 1930년대 초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멕시코는 위기를 벗어났다. 심지어 (1968년 1월 히메네스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벌어진) 베네수엘라도 위기를 벗어났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혁명이 실질적 가능성으로 떠오른 것은 쿠바 혁명이 성공한 지 15년이 지나서였다.

 

다른 모델은 가능하다

이 점은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 지난 20년 동안 사실상 라틴아메리카 전체에서 그곳의 부르주아지가 난관에 봉착했고 노동자와 농민 모두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이 됐고 1990년대에는 신자유주의의 충격이 이어졌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1989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소’ 반란, 2000년 에콰도르 항쟁, 2001년 말 아르헨티나 정권 전복, 2002~2003년 차베스 정부를 지켜 낸 대중 반란, 2003·2005년 볼리비아 항쟁 등 대중의 불만이 갑작스레 폭발하며 발생한 정치적 충격에서 회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의 혁명적 과정은 쿠바처럼 고립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현재 이곳은 대중 참여나, 아래로부터 권력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수준이 이미 쿠바보다 높다. 모랄레스를 대통령직에 앉히고 차베스 정부를 지켜 낸 것은 상명하달식 게릴라 집단의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 대중 운동이 아래로부터 가하는 엄청난 압력이었다.

하지만 이 혁명적 과정들은 위험에 직면해 있다. 그 위험은 단지 외부에서, 미국에서, 자신의 무제한적인 지배를 다시 수립하려는 그 지역 자본가 계급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위험은 내부로부터도 오고 있다. 즉, 쿠바 모델을 따라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제약하고 기존에 확립된 관료적 틀 안으로 혁명적 과정을 돌리려는 이들에게서 오는 위험이 있다. 쿠바에서는 승리한 반란군이 수립한 새로운 국가 기구가 그런 길을 닦았다면,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에서는 국내 부르주아지가 수립했고 이들의 지배와 밀접한 기존 국가 기구가 그런 길에 해당한다. 역설적이게도 쿠바를 대안으로 보는 이들은 쿠바의 길을 추구하면서도 쿠바 혁명만큼 전면적으로 자본주의 사유 재산을 공격하지는 않으려 한다.

쿠바 정부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나라의 대중 운동을 그저 기존 자본주의 정부들에게 쿠바와 잘 지내라고 압력을 넣는 수단쯤으로 보아 왔다. 1970년대 초반 카스트로는 아옌데와 함께 칠레를 순방하면서 칠레의 운동이 혁명적 방향이 아닌 의회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지했으며, 1980년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 정부를 자제시키려 했다. 고트가 주장하듯 “카스트로는 산디니스타가 미국을 불필요하게 적대하지 않도록 설득하려고 애썼다. 카스트로는 혼합 경제와 다원주의적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데에 집중할 것을 [산디니스타에] 권했다.”87

오늘날 베네수엘라 대중 운동이 자국 자본가들에 반대하거나 다국적 기업들과 진정으로 결별하는 것을 쿠바 혁명의 명망을 이용해 막으려는 시도가 있다. 베네수엘라 안에서 보면, 이는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수사를 사용하지만 사실상 사회민주주의 혼합 경제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베네수엘라를 끌고 가는 것이다. 또, 국제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에 확실하게 충성하는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정부와 쿠바·볼리비아 정부를 묶는 블록을 건설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개중에는 쿠바식 상명하달을 이용해서, 베네수엘라의 혁명적 과정에 뛰어든 사람들, 즉 노동자·농민·빈민·원주민들에게 철저히 혁명적인 방식으로 싸워서 자신들의 요구를 쟁취하라고 고무하는 사람들을 고립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베네수엘라산 석유를 대가로 쿠바 의료진을 보내는 상업 거래는 “사회주의 연대”로 포장되는데, 이는 오늘날 베네수엘라를 혁명의 가능성에서 탈선시키는 데에 이용된다. 46년 전 러시아 석유와 쿠바산 사탕수수를 맞바꾼 거래가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앞에는, 쿠바 혁명이 고립되고 상명하달식 지배가 제도화되면서 쿠바가 걸었던 길과는 사뭇 다른 길이 열려 있다. 두 나라의 노동조합과 사회 운동에 뛰어든 수많은 사람들은 지난 6년 동안 벌어진 위대한 투쟁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의사 결정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가장 열성적인 차베스·모랄레스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민주주의와 대중 참여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이유다. 이들이 벌이는 투쟁은 쿠바의 1958년 혁명이 결코 해내지 못한 일, 즉 국경 너머 라틴아메리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는 사례, 즉 혁명적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사례를 만들어낼 잠재력이 있다. 그 잠재력을 실현하다 보면, 오늘날 결핍과 부패 속에서 고통과 불만이 쌓이지만 47년간의 고립이 미국의 지배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 쿠바 대중에게 진정한 목표를 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혁명적 돌파구는 결코 자생적인 투쟁의 분출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 돌파구는 투쟁 안에서 가능성과 방향을 둘러싸고 벌이는 논쟁에 달려 있기도 하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에서 중요한 논쟁은 쿠바를 본보기 삼아 혁명적 과정을 멈추려는 이들에 맞서는 논쟁이다.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미국의 협박과 금수령에 맞서 쿠바를 지지하더라도, 새로운 혁명적 운동에 보탤 것이 전혀 없는 쿠바식 모델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

MARX21

후주

1 샘 파버는 세르지오 훙코라는 가명으로 이 글을 썼다. International Socialism 7 (first series) (Winter 1961), pp.23-28.
2 이 글은 (SWP의 전신인) ‘소셜리스트리뷰 그룹’이 제작한 유일한 내부 회보에 실렸다. 하지만 이 시기에 펴낸 문서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는 듯하다.
3 K.S. Karol, Guerrillas in Power (London 1971).
4 R. Dumont, Is Cuba Socialist? (London 1974).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한 분석을 원한다면 1980년 본지 8호에 실린 마이크 곤살레스와 피터 빈스의 글, ‘쿠바, 카스트로, 사회주의’를 참조하라. www.marxists.de/statecap/cuba/80-cucas.htm.
5 Wesleyan University Press, 1976.
6 이전 저작에서는 미국 제국주의가 쿠바 경제에 끼친 악영향과 그것이 1930년대 초반 이후 지속된 쿠바의 정치적 불안정을 낳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7 C. Katz, Mercosur: Crisis o Resurgimiento, 카츠의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www.netforsys.com/claudiokatz.
8 레닌이 제1차세계대전 당시 부하린과 퍄트니츠키와 벌인 논쟁에서 주장했듯이, 식민주의는 직접적인 정치 지배 관계이며, 순전히 경제적인 관계와 혼동해선 안 된다. 전체 주장을 보려면 다음 글의 미주 11번을 참조하라. C. Harman, Argentina in Revolt, International Socialism 94 (Spring 2002), pp.43-45.
9 S. Farber, Revolution and Reaction in Cuba, 1933-1960, p.37에서 인용한 언론 보도 재인용.
10 앞의 책, p.37.
11 S. Farber, The Origins of the Cuban Revolution Reconsidered (Chapel Hill, 2006), p.47.
12 전설에 따르면 게릴라 12명이 붙잡히지 않고 상륙작전에서 살아남았다지만, 실제 수치는 이보다 많았다고 고트는 지적한다. R. Gott, Cuba: A New History (Yale, 2005), p.155.
13 J. Sweig, Inside the Cuban Revolution: Fidel Castro and the Urban Underground (Harvard 2003).
14 S. Farber, The Origins ..., 위의 책.
15 휴 토머스의 권위 있는 역사서 Cuba (London 1971), p.1044에 수록된 수치다.
16 앞의 책.
17 S. Farber, The Origins ..., 위의 책, p.75
18 예컨대, Che Guevara Speaks (New York 1996)에 수록된 Che Guevara, Guerrilla Warfare: A Method, p.89에 나오는 ‘통일된 지휘부’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를 보라. 또한 시에라 마에스트라 지역 게릴라의 규율이 어떻게 적용됐는지 궁금하다면 Jon Lee Anderson, Che Guevara: A Revolutionary Life (London 1997), pp.230, 232, 236∼237, 282∼286를 참조하라.
19 H. Thomas, 위의 책, p.1196.
20 S. Farber, The Origins ..., 위의 책, p.122.
21 J. Robinson in Monthly Review, February 1966.
22 S. Farber, The Origins ..., 위의 책, p.121에서 인용
23 R. Dumont, 위의 책.
24 S. Farber, The Origins ..., 위의 책, p.133.
25 R. Dumont, 위의 책, p.29.
26 S. Farber, The Origins ..., 위의 책, p.133.
27 R. Dumont, 위의 책, p.22.
28 Che Guevara, Cuba’s Economic Plan, in Che Guevara Speaks, 위의 책, p.42.
29 앞의 책.
30 같은 책, p.43.
31 같은 책, p.44.
32 R. Dumont, 위의 책에서 재인용.
33 Che Guevara, Man and Socialism, in Che Guevara Speaks, 위의 책, pp.124∼135.
34 같은 책, p.127.
35 같은 책, p.129.
36 S. Farber, The Origins ..., 위의 책, p.122.
37 A. Suarez, Leadership, Ideology and Party, in C. Mesa-Lago (ed), Revolutionary Change in Cuba (Pittsburgh 1971).
38 D. Seers (ed.), Cuba: The Economic and Social Revolution (Chapel Hill, 1964).
39 그의 전작 Revolution and Reaction in Cuba 비교해 최근작의 장점은 카스트로 정권의 발전을 단순히 카스트로의 책략과 조종 능력의 산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점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40 T. Cliff, Permanent Revolution, in International Socialism 12 (first series), Spring 1963, reprinted in T. Cliff, Marxist Theory After Trotsky (London 2003).
41 A. Zimbalist and C. Brundenius, The Cuban Economy (John Hopkins, 1989), p.151의 논의를 보시오.
42 R. Dumont, 위의 책, p.58.
43 F.W. Thompson, Cuban Economic Performance in Retrospect, in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vol.37, no.3 (Summer 2005)에 제시된 수치다. A. Maddison, The World Economy: Economic Statistics (Paris OECD, 2003)의 수치를 근거로 한다.
44 R. Gott, 위의 책, p.208.
45 더 긴 설명을 보려면, M. Gonzalez, Che Guevara and the Cuban Revolution (London 2004) [국역: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 책갈피]를 참조하라.
46 R. Dumont, 위의 책, p.122.
47 R. Gott, 위의 책, p.240; R. Dumont, 위의 책, p.63도 보라.
48 앞의 책, p.96.
49 같은 책, p.113.
50 같은 책, p.114.
51 같은 책, p.115.
52 같은 책, p 127.
53 같은 책, p.240.
54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면, 당시 상황에 대한 나의 분석을 참조하라: C. Harman, Cuba, The End Of A Road?, International Socialism 45, first series (November-December 1970).
55 R. Dumont, 위의 책, p.152.
56 같은 책, p.58.
57 R. Gott, 위의 책, p.242.
58 같은 책, p.243.
59 같은 책, pp.230∼240; 같은 책, p.246도 보라.
60 C. Mesa-Lago, The Economy of Socialist Cuba (Albuquerque 1981), p.144.
61 R. Dumont, 위의 책, p.128.
62 앞의 책, p.60.
63 같은 책, p.59.
64 P. Ruffin, Capitalism and Socialism in Cuba (Macmillan, 1990), p.132에서 재인용.
65 F.W. Thompson, 위의 책에 제시된 수치다.
66 P. Ruffin, 위의 책, p 154에서 재인용.
67 R. Gott, 위의 책, p.174.
68 세계 체제에 대한 쿠바 모델의 종속과 관련한 최신 분석은 M. Gonzalez, Can Castro Survive? in International Socialism 56 (September 1992) 을 참조하라.
69 R. Gott, 위의 책, p.288.
70 위와 같음.
71 Economic Research Service, USDA, Cuba’s Agriculture, Agricultural Outlook (October 1998).
72 W. LeoGrande, The Cuban Communist Party and Electoral Politics (Cuba Transition Project, Miami, 2002), p.37를 보시오.
73 R. Gott, 위의 책, p.290.
74 Economic Commission for Latin America and the Caribbean, Survey Cuba, 2002.
76 예컨대 다음 기사를 보시오. Cuban Economy Benefits From Foreign Investment, UF News, https://news.ufl.edu/archive/2002/08/cuban-economy-benefiting-from-foreign-investment.html.
77 R. Gott in the Guardian, 18 April 2006.
78 쿠바에 값싼 석유를 현물로 지불한 베네수엘라가 가장 잘 알려진 최신 사례다. 하지만 쿠바 의사들이 짐바브웨 같은 곳으로 파견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79 C. Mesa-Lago, Social and Economic Policy in Cuba, on www.realinstitutoelcano.org/analisis/881.asp.
80 F. Gonzalez and K.F. McCarthy, Cuba After Castro (RAND Corporation, 2004).
81 P.J. Guttiérez, Anclado en Tierra de Nadie (Barcelona 1998)와 L. Padura, Havana Red (London 2005)를 보시오.
82 F.W. Thompson, 위의 책.
83 F.W. Thompson, 위의 책, p.317에서 인용한 수치.
84 같은 책, p.217.
85 Interview with Ignacio Ramonet, El Pais, 2 April 2006 (필자가 번역함).
86 Revolution in Cuba, International Socialism 3, (first series) (Winter 1960-61) (편집 과정의 실수로 표지에는 6호로 나와 있다).
87 R. Gott, 위의 책, p.270.
*출처 Chris Harman, ‘Cuba behind the myths’, International Socialism, no.111(Summer, 2006). 번역 이예송
** Richard Gott, Cuba: A New History, Yale, Nota Bene series, 2005.
*** Sam Farber, The Origins of the Cuban Revolution Reconsidered,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