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혁명에 대한 개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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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필 마플릿, Issue 137(Posted on 9th January 2013), http://isj.org.uk/never-going-back-egypts-continuing-revol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번역 김동욱

지난 35년간 이집트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실이었다. 세계 패권을 장악한 강대국과 금융기관들이 자신들의 세계경제 전략을 펼친 현지 국가였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개발도상국의 주요 자산을 통제하기 위한 정책을 예행연습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안와르 사다트와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을 지원했다. 공세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집단적 대응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2011년 1월 타흐리르 광장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판돈은 컸다. 세계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이집트에 구현하면서 대중을 후안무치하게 억눌러 온 질서, 국가기구에 이집트인들이 맞설 수 있을까? 운동의 구호와 염원이 전 세계에서 공명을 얻었다. 무바라크를 퇴진시키면서, 이집트 활동가들은 ‘타흐리르’(해방)를 더 광범한 저항의 동의어로 만들었다. 2년이 지난 지금[이 글은 2013년 1월에 발표됐다] 이집트 혁명은 여전히 끊임없는 이윤 추구를 뒷받침하는 국가기구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에 맞서는 투쟁에서 중심에 있다. 혁명은 오늘날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 혁명의 잠재력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1

유럽과 북아메리카 언론에서는 혁명이 죽었다는 부고장이 매일 나온다. 혁명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타흐리르 광장의 사건들이 “반사작용”이고, 기껏해야 단기간에 참가자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든 “반란”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암울한 현실이 이집트 운동을 가라앉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주의가 부흥하고, 야만적인 종교 경향이 민주주의의 염원을 짓밟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로버트 말리와 후세인 아가는 2011년 1월 이후 중동의 사건 전개를 분석하면서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하고 주장한다.

아랍 세계에 어둠이 드리우고 있다. … 사태의 포문을 열었던 평화 시위, 그들을 고무한 고귀한 가치들은 아득한 추억이 되고 … 유일하게 일관된 정치 강령은 종교적이며, 과거가 이를 제멋대로 휘두른다. 2

“혼돈과 불확실성 속에서 이슬람주의자들만이 친숙하고 진정성 있는 미래상을 제시한다.” 이집트의 경우, “무슬림형제단이 활개를 친다.” 3

2011년 12월 이집트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이기자, 많은 언론인들은 이를 두고 이집트 대중 운동의 실패를 뜻하는 사건이라고 논평했다. “아랍의 봄”이 “이슬람주의의 겨울”이 됐다는 것이다. 4 그들은 타흐리르 광장의 사건들은 그저 막간극이고, 종교적 반동의 토대만 마련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보수 언론과 싱크 탱크들은 무슬림형제단의 선거적 전진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 역력했는데, 아랍 무슬림 사회가 급진적 변화를 위한 대중 운동을 지속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아랍 국가들이 “진보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5 2012년 6월 무슬림형제단의 후보 무함마드 무르시가 대선 결선 투표에서 승리하자 이슬람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비난 글들을 썼다. 미국의 국제 정치 전문지인 《포린 폴리시》에 따르면, 이제 “이슬람주의 혁명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됐다. “지금은 이슬람주의의 해일로부터 미국의 이익을 방어하고 보호할 때”라는 것이다. 6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네오파시스트 정당 국민전선의 대표 마린 르펜의 발언을 보도했는데, “‘아랍의 봄’은 이슬람주의의 겨울로 바뀌었고”, 그 결과 아랍 국가들로부터 이민 물결이 있을 것이고 유럽인들을 질겁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7 자, 이제 타흐리르 광장은 세계적 저항의 진앙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집트의 사건들은 북아프리카의 변덕스럽고 후진적인 이슬람 문화가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회를 위협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상된 “문명의 충돌”의 새로운 라운드였다.

이집트의 경험은 종교적 “해일”이나 “이슬람주의의 겨울”이 아니었다. 2011년 1월 이래 이집트의 종교 활동가들은 복잡한 경험을 했는데, 선거적 성공이 심각한 후퇴와 결합됐기 때문이다. 특히 무슬림형제단은 대중 운동 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데, 대중 운동이 무슬림형제단, 살라피주의자들, 그 밖의 종교 조류들이 내세우는 권위주의적 방식을 점점 더 못 견뎌 하면서 계속 변화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사회를 이슬람 질서로 이끄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는커녕, 무바라크 시절에 이룬 응집력이 많이 약화돼 수많은 분열과 탈퇴를 겪고 있다. 2011년 주변적 지위에서 벗어나 선거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집트 살라피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세를 유지하는 데서 고전하고 있다. 한편, 독재 정권 시절 수십 년간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했던 세속파 중 일부가 살아나고 있다. 급진 민족주의가 되살아났고, 1940년대 이래 처음으로 새로운 좌파가 이집트 혁명적 운동 내 유기적 요소로 등장했다. 작업장·캠퍼스·지역사회에서 집단적 조직화 수준은 1940년대 이래 그 어느 때보다 발전했으며, 자력 해방과 혁명적 변화에 관한 사상들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 그러나 ─ 중요한 문제인데 ─ 혁명 운동의 핵심 행위자인 이집트 노동자들은 현재 권력자들에게 일관되게 맞서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오랜 탄압의 역사가 있는 이집트 국가는 손상되지 않다.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억압 기구들은 유지되고 있다. 군부는 여전히 체제의 심장부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고, 수십 년간 국내 정치를 장악해 온 엘리트 장교들이 통제한다. 이집트 자본주의는 민간과 국가의 이해관계가 공존하는 혼성체로, 불안정해지긴 했지만 아직 아래로부터의 운동으로부터 도전받지 않았다. 급진적 변화를 이룰 힘을 가진 더 많은 사람들이 대중 운동의 열망 — 거의 모든 파업과 시위에서 외쳐지는 ‘아이시, 후리야, 아달라 이그타마 에야’(“빵, 자유, 사회 정의”) 요구 — 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돼야 한다. 현재 중요한 문제는 새로운 종교 지도자들의 지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혁명이다. 활동가들이 과거의 정치를 현재 직면한 심각한 도전에 알맞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를 위해서다. 가장 긴급한 것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와 공산당의 유산이 야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개혁주의”가 야기하는 문제들이다. 노동자 운동을 억제하고, 활동가들의 의제를 단속하며, 가장 해롭게는 옛 정권 지지자들이 영향력을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것도 바로 이 문제들이다.

무르시와 위기

현재 많은 평가들에서 공통되는 것은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에서 아래로부터 벌어진 운동을 성공적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부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이를 목표했을 수는 있지만,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이 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어느 정부에게나 커다란 도전이 될 것이다. 군최고평의회SCAF 내 무바라크 후계자들은 실패했고, 무르시도 반혁명을 시작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무르시는 무바라크가 몰락하기 직전에 직면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경제적 압력에 직면해 있다. 무르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자본으로 눈을 돌렸고, 기본적 필요 충족과 혁명의 성과 보장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억누를 준비를 하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독립 이후 최대의 정치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무르시가 직면한 문제는 그가 빵 문제 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서 뚜렷이 드러난다. 이집트 아랍어에서 ‘아이시’는 “빵”과 “생명” 둘 다를 뜻하며, 빵 보조금은 지난 수십 년간 대부분의 노동계급, 농민, 빈민 가정의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현대 이집트 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빵 공급 가능 여부가 쟁점 중 하나였고, 무바라크 몰락 이후 빵 공급이 불안정해지며 불안한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 주식主食인 5피아스터 8 빵의 가격과 품질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매일 거론되는 문제로, 대선 이후 무르시가 발표한 우선순위와 공약 목록에서 맨 위에 있었다. 무르시는 자신이 “빵 서류철”을 만들었으며 공급 상황을 수시로 점검한다고 말한다. 2012년 10월 초 대중 집회 연설에서 무르시는 빵 부족 사태를 끝내기 위해 설정한 목표의 80퍼센트가 충족됐다고 주장했다. 9 정부 관료들은 전에 군과 경찰이 이용했던 “대형 빵집들”이 대중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끔 하라고 지시했다며, 그래서 “어떠한 부족 사태가 어디서 일어나든 즉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0 사람들은 매우 회의적인데, 대통령의 공약 이행도를 평가하는 온라인 사이트 “무르시미터”는 공식 발표에 의문을 제기한다. 11

심지어 무바라크도 이 문제가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봐 빵 보조금을 놓고 망설였다. 1977년 사다트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따르려고 빵 한 덩이의 크기를 줄이자, 전국에서 며칠 동안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정권을 위협했다. 사다트는 위험을 무릅쓰고 군대를 동원해 대중을 탄압하고 빵 크기를 이전으로 되돌리고서야 간신히 살아남았을 수 있었다. “빵의 인티파다[반란]” 이후 무바라크는 대중 시위 발발 위험을 IMF 등을 상대로 한 협상 카드로 써먹었는데, IMF가 1980~1990년대에 점점 더 강압적으로 보조금 삭감 압력을 가하는 데에 맞서 그렇게 했다. 12 현재 무르시도 세계 금융기관들의 압력을 받고 있다. 아주 전투적이고 기대감도 높은 대중도 무르시를 주시하고 있다. 1993년 이래 이집트는 IMF에서 차관을 끌어 오지 않았는데, 지금 IMF는 보조금 전면 삭감을 전제로 유로존 비회원국 중 최대인 48억 달러를 이집트에 차관할지 논의 중이다. 이집트 의회(현재 정지 상태)는 지난해 비슷한 전제가 달린 32억 달러 차관을 거부했다. IMF는 강하게 압박 중인데, 이집트를 중동 지역 차관의 시험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 저널〉는 이렇게 썼다. “이집트와의 협상을 통해 IMF는 실험실을 제공받을 것인데, IMF는 소위 아랍의 봄 반란으로 탄생한 새로운 민주 국가들을 지원하려 하기 때문이다.” 13 이번 차관은 무르시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IMF 차관의 금리는 1.1퍼센트로 예상되는데, 이는 이집트 정부가 막대한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내 은행에서 빌린 자금에 대해 매년 지불하는 ─ 하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는 ─ 금리 16퍼센트보다 훨씬 낮다. 재정 적자는 이미 2012~2013년 [회계연도] 예측치보다 60억 달러가 더 많아 약 300억 달러에 이른다(2012년 11월 기준). 14 관료들은 IMF 차관 협상이 타결되면 세계은행, 아프리카개발은행, 그리고 여러 중동 국가들로부터 추가로 재원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15 세계 금융기관들은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집트의 향후 5년간 채무 불이행 가능성이 27.3퍼센트에 이르러 세계에서 열 번째로 위험한 채무국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16

IMF는 무르시에게 국가 지출을 전반적으로 삭감하고 특히, 올해 예산의 30퍼센트를 차지하는 보조금을 삭감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17 2011년 이집트 정부는 5피아스터짜리 빵에 19.8피아스터의 보조금을 지급했고 2012년 보조금은 24.08피아스터가 될 텐데, 이것은 세계 시장에서 밀 가격이 오른 것을 반영한 것이다. 18 2011년에 정부는 국내 생산자들에게 지불되는 밀 가격을 두 배로 올려, 무바라크의 수출용 외래 환금 작물 생산 장려 정책에서 대폭 선회했다. 그러나 국내 생산량은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쳐서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19 이집트는 막대한 양의 곡물이 당장 필요한데, 이를 세계 시장에서 구해야만 한다. 지난 5년간 이집트는 연간 필요량의 평균 45퍼센트를 수입으로 충당했다. 20 곡물 가격이 더 가파르게 오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무르시에게는 최악의 시기다.

IMF는 차관을 제공하기 전에 보조금 삭감을 합의하고자 한다. 다른 국제 금융기관들과 정부들은 이를 관망하는 중인데, 2012년 10월 유럽연합과 미국은 IMF와 이집트 정부 사이에 합의가 있기 전까지 총 10억 달러에 달하는 두 건의 원조금 지급을 유예하기로 했다. 무르시는 빵 문제에서 한편으로는 국제 금융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이집트 대중으로부터 도전받고 있는데, 처음에는 대중에게 양보하는 듯 보였다. 2012년 8월 무르시 정부의 관료들은 전보다 더 큰 10피아스터짜리 빵 ─ 품질도 더 좋을 것이라고 했다 ─ 이 곧 생산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더 작은 빵을 단계적으로 없앨 준비를 하면서 가격을 두 배로 올리려 한 것이었다. 무르시의 “빵 서류철” 담당자인 아흐메드 이사는 2012년 10월 이렇게 말했다. “사회 불안정을 유발할 수 있는 빵 가격 인상은 없을 것이다. 보조금이 지원되는 빵 가격은 5피아스터로 유지될 것이다.” 21

무르시는 연료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데, IMF는 이집트 정부가 연료 보조금도 대폭 삭감하기를 원한다. 대부분의 이집트 가정은 부탄가스를 사용해 요리한다. 가스통은 공식적으로 2.5이집트파운드에 판매되지만, 암시장 가격은 그 30배에 이르기도 한다. 인구의 40퍼센트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나라에서 빈곤한 가정이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다. 22 이집트 전역에서 연료 부족 사태가 반복되고 있는데, 성난 군중들이 배급소에서 시위를 벌이곤 한다. 휘발유와 경유도 사정은 비슷해 주유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고 배급을 받으려면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할 수 있다. (이집트의 모든 도시들에서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택시와 미니 버스가 줄지어 멈춰서고, 교통 대란이 일어난다. 연료 문제는 전반적 위기의 표출이라는 상징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시위가 빈발하고, 운전자가 경찰과 싸움을 벌이는 일이 거듭되고 도로와 철로를 점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23

“신앙심 대 편법”

무르시는 IMF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 2011년 1월 이래 이집트의 외환보유액은 급감했다. 당시 360억 달러에 이르던 보유액이 2012년 9월에는 150억 4000만 달러에 그쳐 겨우 석 달치 수입량만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24 이집트파운드는 경화硬貨 대비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데, 2012년 9월에는 7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미국 달러 대비). 25 IMF는 평가 절하를 요구 중이다. 이 글을 쓰는 2013년 1월 현재 이집트 중앙은행은 이집트파운드화 가치 하락을 용인하는 듯 보이는데, 이는 정부의 밀 수입 자금 조달 능력 등에 영향을 줄 화폐 가치 절하를 사실상 수용하는 것이다. 최근의 한 평가는 “이집트파운드화 가치 급락으로 경제적 재앙이 촉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6 카타르와 터키에서 빌린 차관 덕분에 일시적으로 숨통을 텄지만, 무르시가 국내 상황을 안정시키고 이집트 자본주의를 활성화시키겠다는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추구하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많은 이집트인들이 해외 차관 자체에 반대한다. 2011년 군최고평의회가 임명한 임시정부가 IMF와 32억 달러 규모의 차관 협상을 시도하자, 이집트부채줄이기대중행동Popular Campaign to Drop Egypt’s Debt 소속 학자와 활동가들이 무바라크 시절의 관행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차관 반대 활동을 벌여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정부가 국내외에서 끌어모은 대출금의 상환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바라크 정권이 그 돈을 함부로 썼고, 이집트인들이 그 돈을 대신 갚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의회에 서한을 보내, IMF 차관은 국민에게 다음 같은 용납할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 돈을 빌릴 것이고, 따라서 당신의 자녀와 손주들이 우리의 빚을 계속 갚아야 할 것이다.” 27 이후 세대에게 빚을 갚게 하는 것은 “위법”이고, “국민의 안녕”을 위한다면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8 한편, 많은 이슬람주의자들은 IMF에 이자를 지급하는 것이 ‘하람’, 즉 고리대금에 관한 이슬람의 원칙에서 금지된 것이라고 선언했다. 2012년 초 의회가 해산되기 전, 이슬람주의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원에서 365명 중 오직 6명만이 [현재 논의중인 것보다] 더 작은 규모의 차관 협상에 요구되는 조건에 찬성했다. 그 후 이슬람주의자 의원들은 “이 차관은 우리 모두를 지옥으로 이끌 것”이라고 선언했다. 29

하지만 무르시는 협상 강행을 고집하면서, 이 협상이 국익에 도움이 되고 이집트 경제를 발전·성장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몇 달 후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필요하다면 금지된 것은 허용된다”는 취지의 ‘샤리아’(이슬람 법전)를 인용하며, “차관을 거부하지 않기로 한 우리의 결정은 이집트의 지대한 경제적 이익에 근거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30 이집트의 유력 뉴스 사이트 〈아흐람 온라인〉은 이를 두고 “신앙심 대 편법”이라고 간명하게 논평했다. 31 무르시는 이후 줄곧 지지자들에게 차관의 필요성을 설득하려 애써 왔다. 2012년 10월 무르시는 한 대중 집회에서 IMF에 [이자를] 상환하는 것이 ‘리바’(고리대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리바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리바를 뜯어먹느니 차라리 굶어죽을 것이다.” 32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무바라크 정권의 정치인과 관료들을 ‘펠로울’(불신받은 체제의 “잔당”[이라는 뜻의 아랍어])이라며 거부하듯, 무바라크와 공범이었던 국제 기구들과의 협상에도 반대한다. IMF는 민영화, 규제 완화, [식민지 시대의 지주와 그 가족들에게] 토지 반환 등 무바라크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정책들의 주요 설계자였다. 33 이런 정책들의 부활을 암시하는 협상들에 대한 적대감이 광범하다. 새 정부에서 무바라크의 범죄 행위(그와 그의 일당들이 수감돼 있는 까닭)의 연장에 있는 일들이 승인된다는 생각에 많은 이집트인들이 역겨워한다. 더 많은 차관이 예상되면서, 무바라크 일당이 자산을 해외 은행 계좌에 수십억 달러씩 숨겨두거나 유럽, 특히 영국의 부동산에 투자했던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34 막대한 IMF 차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영국 등 IMF와 관련된 주요국들이 이집트인들의 자산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데 왜 이집트가 새로운 채무 관계를 맺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다.

IMF 차관은 이집트인들에게 많은 불쾌함을 떠올리게 한다. 무바라크의 범죄 행위, 해결되지 않은 ‘펠로울’의 혐의들, 외국의 국내 자원 수탈, 이집트·외국 은행들의 구실과 부당이득, 식민 점령의 유산과 오랜 국가 부채의 역사, 제국주의와 그것이 이집트 사회에 미친 영향 같은 것들 말이다.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가 2012년 8월 카이로를 방문했을 때, “정실 자본주의 반대”, “자본주의 타도하라”, “차관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가 라가르드를 맞이했다. 35 2012년 11월에는 17개 정치단체들 연합해 카이로 중심부에서 금융 “식민화”와 정부-IMF 비밀 회담을 규탄하며 IMF 협상 반대 행진을 벌였다. 36 나세르주의자인 함딘 사바히가 이끄는 이집트민중경향Egyptian Popular Current은 차관 조건과 관련해 IMF에 항의하는 이메일을 보내는 캠페인을 발족했다. 사바히가 IMF에 보낸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당신들의 차관이 우리가 가난한 원인이다. 우리 정치에[원문 그대로 — 마플릿] 개입하려는 당신들의 요구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당신들 기관과 차관의 역사는 우리 경제에 재앙이었다.” 37 사바히는 많은 노동자, 도시 빈민, 도시 중간계급 구성원들의 생각을 반영했다. 이 사람들은 혁명의 현 단계에서 근원적인 쟁점이 되는 구호를 이집트 전역에서 외치고 있다. “절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 파시즘”

막대한 차관을 새로 들여오는 것은 무르시에게 위험한 일이다. IMF의 예산 삭감, 보조금 삭감 요구에 대해 얼버무릴 때마다 무르시는 권위를 잃고 있다. 한 이집트인 학자이자 활동가는 이렇게 논평한다.

특히 무르시가 당선된 이래, 이크완[무슬림형제단 — 마플릿]의 영향력에 꼭 필요한 종교적 권위의 후광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무르시는 점점 더 수상쩍은 협상을 갑작스레 들고 나오는 별다를 것 없는 정치인으로 비치고 있다. 무바라크를 제거하기 위해 타흐리르 광장을 비롯해 곳곳에서 투쟁했던 형제단원들은 무르시가 가는 방향에 분노하고 있다. 하나의 정당으로서 무슬림형제단은 큰 문제에 봉착해 있는데, 권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권력을 도덕적 목적을 위해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38

이슬람주의 운동 전반, 특히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의심은 이집트 안팎에서 첨예한 쟁점이다. 지난 10년간 이슬람주의 운동이 ─ 특히 레바논·팔레스타인·튀니지·이집트 등 ─ 아랍 정치 전반에 걸쳐 중요한 흐름으로 재등장하면서, 그에 대한 점점 더 집요한 반발도 촉발됐다. 이슬람주의 운동은 “파시스트”며, 대중 운동 파괴에 골몰하고, 무바라크보다 훨씬 더 억압적인 정권을 세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널리 퍼져 있지만, 이집트 내에서도 특히 옛 공산당 출신들 중 일부가 그런 제기를 한다. 그렇다면 이슬람주의 운동의 성격은 무엇이고, 오늘날 혁명 과정에 어떤 함의를 주는가?

헤즈볼라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군과 교전하던 2006년에 조지 W 부시는 헤즈볼라를 “실질적이고 뿌리깊은 이데올로기”인 “이슬람 파시즘”의 문제라고 연설했다. 39 이것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는 정치적 주변부에서, 이스라엘에서는 그보다 더 광범하게 지금까지 사용되는 표현들을 차용한 것이다. 이 표현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쟁은 애초에는 학술지에 국한돼 있었지만 곧 언론에 널리 보도되면서 이슬람 정치 운동은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는 관념이 널리 퍼졌다. 40 영국에서는 보수 칼럼니스트 재닛 데일리가 부시에게 박수를 보내며 자신의 주장을 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정확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파시즘적이다.” 41 데일리는 레바논 분쟁에서 ─ 데일리가 “서방의 대리인”이라고 묘사한 ─ 이스라엘을 강력히 지지할 것을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적[이슬람주의 — 마플릿]은 자신의 행동을 서양의 논쟁에서 허용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고 해명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이들은 명백히 인종차별주의적이고,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적이며, 뻔뻔하게도 비인간적이다….
지금은 결정적인 순간이다. 우리가 “자유 세계”라고 불러야 마땅할 세계는 양자택일에 직면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이해할 수도 없을 정도로 사악한 세력에 맞서 굳건히 단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회유책에 지나지 않는 허황된 부인을 넙죽 받아들이고 무릎을 꿇거나. 42

데일리 같은 이들은 이슬람주의 단체와 정당들 일체에 대해 깊은 적개심을 표출하는 것이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오래 확립된 유럽의 이슬람·무슬림 편견 전통, 즉 수 세기에 걸친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 지배 문화에 기대고 있었다. 이것은 냉전 이후 “문명의 충돌” 운운하는 주장으로 재개되고 선명해졌다. “문명의 충돌”은 미국의 보수주의 전략가 새뮤얼 헌팅턴이 정식화한 것이지만, 그 기원은 이스라엘을 열렬히 신봉하는 영국계 미국인 학자 버나드 루이스의 저작이었다. 1990년에 루이스는 나치 사상과 공산주의가 20세기 중엽 이슬람 사상에 영향을 미친 사례를 제시하면서 ─ 현대사에서 점점 더 빈번해지는 ─ 위기 시기에 무슬림의 불만이 “폭발적인 분노와 증오의 혼합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43 이슬람 행동주의/이슬람주의에 파시즘의 특징적 요소들이 포함돼 있고 그래서 증오와 폭력을 분출하게 된다는 생각이 점점 더 광범하게 통용되고 있으며, 특히 유럽에서는 다문화주의를 거부하고 배타적 이주민 정책을 옹호하는 데에 동원되고 있다. 44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시작되고 제3세계에서 새로운 저항의 물결이 일어나자, 그런 운동들을 매도하려는 더욱 체계적인 시도들이 있었다. 다국적 자본이 실패한 책임을 대신할 희생양을 찾는 자들이 그런 운동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시위, 파업, “폭동” 참가자들이 문화적 결함, 특히 이슬람의 영향을 받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45 토니 젓은 네오콘과 “자유주의” 지식인 모두로부터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데, 특히 자유주의자들이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침공, 2006년 레바논 분쟁을 “새로운 세계적 대립에서의 국지전”으로 보는 데에 주목했다. 46 그런 전쟁들은 “그들의 조부모가 파시즘에 맞서 싸운 전쟁, 그들의 부모가 냉전 때 국제 공산주의에 맞섰던 것에 견줘도 손색 없는 ‘선한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또다시 이념적으로 분단된 듯한 세계에서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마침내 목적 의식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슬람 파시즘’과 전쟁 중이다.” 47

이집트 좌파들의 파시즘 개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1940년대 공산당원들은 종종 무슬림형제단과 함께 영국 점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무슬림형제단과 사이가 틀어지자 그들을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48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와 급진 민족주의자들인 자유장교단이 파루크 왕정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조직하자, 주요 공산주의 단체들은 처음에는 이 결단을 환영했다가 그 뒤에는 나세르와 그의 동료들을 “파시스트 독재 정부”라고 비난했고, 49 최종적으로 나세르 정권을 진보 세력이자 소련의 동맹이라고 했다. 1965년 이집트공산당ECP은 나세르 정권이 “단독으로 혁명의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당을 해산했고, 지도적 당원들은 나세르의 아랍사회주의연합ASU에서 요직을 맡았다. 50 이런 자기 청산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는데, 이후 이집트에는 일관된 좌파가 존재하지 않게 됐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 애초에는 지하드주의 경향의 급진적 부위였던 ─ 이슬람주의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넓은 공간이 열리게 됐다. 1975년 공산당 잔존 세력들은 타감무(“집회”라는 뜻, 국민진보연합당)의 핵심을 이뤘다. 타감무는 무슬림형제단이 반합법半合法이었던 때에 사다트가 활동을 허용한 껍데기만 정당 같은 “연단” 또는 “설교단”(‘마나비르’) 중 하나였다.

1980년대 무슬림형제단이 대중 조직으로 성장하자, 타감무는 이슬람주의자들에 맞서 국가의 편을 들었다. 수많은 무슬림형제단 회원들과 지지자들이 수감돼 있는 상황에서, 공산당 잔존 세력은 정권과 타협해 정부에서 한 자리를 맡길 희망한 것이다(좌절됐지만 말이다). 이들 선임 공산당원들은 브라이스크가 “저강도 민주주의”라고 51 부른 체제에 존재하는 취약한 좌파였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장려하는 이 체제에서는 공식적으로 선거와 정치적 다원주의를 약속하면서도 체계적 억압이 함께 이뤄졌다. 52 무바라크가 몰락하자 타감무는 분열했는데, 다수파는 자유주의적 자본가 정당들, 특히 억만장자 나기브 사위리스가 만든 자유이집트인당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무슬림형제단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타감무의 지도자 리파트 알사이드는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와 이집트 국민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53 2012년 대선 결선 투표에서 타감무는 무르시를 반대해 군최고평의회가 내세운 후보 아흐메드 샤피크를 지지하면서, 이것이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가 되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54

스탈린주의 공산당은 1989년과 그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의 격변들로 인해 해체돼 세계적 규모에서는 더는 조직된 세력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이데올로기적 반감기半減期는 오래 유지되고 있다. 이집트에서 공산당 잔존 세력들은 “진보적” 부르주아지를 찾는 역사적 탐색을 지속하는 중이다.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에 퇴짜를 맞은 역사가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이집트에서 가장 부유하며 군부 엘리트들과 연계가 있는 기업가 가문과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무슬림형제단에 반대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이슬람 혐오를 흉내내며 활동을 하는데,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 파시즘” 운운하며 못마땅해 하는 자들은 대개 신자유주의의 열혈 신봉자며 세계 곳곳에서 자본이 드러낸 결함들을 그 희생자들에게 전가하려는 자들이다. 이집트 국내 정치로 오면, 타감무는 스탈린주의 좌파의 실패를 이슬람 활동가들 탓으로 돌린다. 이슬람주의를 중앙 무대로 불러들이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했던 타감무 지도자들이 이제는 무바라크 퇴진과 그 뒤 국가에 맞선 전투에서 핵심 구실을 하는 운동과 많은 활동가들을 악마로 만들고 있다.

노동자들 ─ 불균등한 운동

무슬림형제단은 2011년 11월과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2012년 6월에는 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무슬림형제단이 20세기 유럽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경험했던 파시스트 운동의 전형적 행태들을 보인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는 전혀 없다. 대대적인 노동계급 공격, 정적들을 상대로 준군사 조직과 자경단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민족 정체성과 국가에 대한 집착, 인종적 소수자나 다른 소수자에 대한 배척 같은 것은 없다.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RS의 한 지도적 회원은 이렇게 말한다.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반동적이지만 파시스트는 아니다. 만약 그들이 파시스트였다면 우리는 지금쯤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무슬림형제단에 어떠한 환상도 없지만 그들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 쓸모없는 짓이다. 이는 좌파가 이슬람주의의 진정한 문제점을 다루지 못하게 만든다.” 55

이집트의 노동계급 운동은 여전히 매우 활발하다. 2011년 1월과 2월의 사건들 때문에 이집트 사회 전반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파업이 무바라크 퇴진에서 핵심 구실을 했고, 무바라크 퇴진 직후 자신감에 가득 찬 노동자들은 1940년대 이래 가장 광범하고 지속적인 노동 쟁의에 나섰다. 56 많은 파업이 성공한 듯했다. 민간·국영 부문 고용주들한테서 임금·상여금·연금·고용안정 등 여러 양보를 따낸 것이다. 일부는 더 광범한 목표를 추구해, 상공업 핵심 분야를 맡고 있는 지역 정치인과 관료들, 경찰과 보안경찰, 국가가 통제하는 노조의 핵심 인물들을 몰아내려 했다. 2011년 1월 30일 이집트독립노조연맹EFITU이 새롭게 결성됐는데, 이 연맹은 50년 넘게 노동자 투쟁을 억누르고 구 좌파가 국가로 편입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 공식 노조 기구를 이집트 전역에서 대체할 잠재력이 있었다. 〈뉴욕 타임스〉조차 이 운동이 “군부와 임시정부에 대한 도전자로 성장하는 중”이라고 인정했다. 57 이집트독립노조연맹은 조합원이 약 250만 명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012년 10월 기준). 58

수많은 노동자들이 난생 처음 집단 행동에 나서면서 많은 투쟁들이 벌어졌다. 전국적 파업이 연이어 벌어지는데, 공공부문이 뚜렷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2011년 교사들이 1951년 이후 처음 벌인 투쟁으로 인해 전국 대부분의 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59 1년 뒤에 의사들은 보건 부문 최초로 전국적 파업을 조직했다. 상대적으로 차분한 시기에 이어 투쟁의 물결이 뒤따르곤 하는데, 소강기였던 라마단 기간 **이 지난 2012년 8~9월에 전국적으로 파업이 1500여 건 벌어져 무바라크 몰락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노동 쟁의가 쏟아졌다. 60 많은 파업이 각지의 노동자들을 단결시켰다. 카이로의 버스 운전사들은 시내 차고지 대부분에서 선동을 벌였고,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매우 효과적인 파업 대체 인력 투입 저지 행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투쟁은 아직 불균등하다. 몇몇 투쟁은 실제로 얻어낸 것이 있었고 파업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고양시켰지만, 몇몇은 약속만 받았을 뿐이다. 무바라크 몰락 직후 벌어진 많은 투쟁은 고용주들의 양보로 해결된 듯했지만 당시 합의가 모두 이행된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이웃한 공장·학교·병원에서 벌어진 투쟁에서 배우는 등 연대와 본받기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 적잖은 투쟁들이 고립된 채로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집트에서 작업장 민주주의가 전국의 노동자 대표 위원회나 행동 위원회 간의 연락망을 형성할 조짐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2011년 1월 이후 격동적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지만, 소비에트의 맹아 같은 기구가 건설돼 정치적 어젠다를 더 광범하게 발전시킬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 1980년대 브라질에서 급속히 성장한 종류의 노동자 정당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2011년 초 결성됐고 이후에 민주노동자당으로 알려진) 노동자 정당 건설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61 이집트 운동은 보기 드물게 활력이 넘치지만, 노동자들의 집단적 이익을 증대시킬 조직화와 정치적 지향은 충분치 못하다. 운동은 2011년 2월 무바라크에 맞서 벌어진 대중 파업에 담긴 더한층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이 운동은 1973년 칠레, 1974~1975년 포르투갈, 1979년 이란, 1980~1981년 폴란드 등 지난 50년간 벌어진 다른 정치적 격변들과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억제돼 있다. 지도적 활동가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어젠다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는 단지 정당만 없는 것이 아니라(이는 많은 혁명적 격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나리오다), 연대의 네트워크조차 발전하지 못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옛 질서의 저항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이집트노총ETUF은 50년 이상 작업장 조직을 통제했다. 1957년 나세르 정권 하에서 국가의 일부로 설립된 이집트노총은 산업 투쟁을 억누르고 활동가들을 포섭하거나 고립시키는 구실을 했다. 잠재적 반대파 후보들은 노조 선거 출마가 금지됐고 투표 결과는 조작되기 일쑤였다. 약 60년 동안 23개 산별노조의 집행위원회나 이집트노총 집행위원회에서 직접 선거는 없었다. 62

조엘 베이닌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는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을 “무엇보다도 안보 문제”로 간주했고 1954년부터 2009년까지 합법 파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63 이집트노총은 정권에 통합돼 있었다. 노조 관료들은 국가 기구의 일부였고, 국민민주당NDP은 방대한 지원망을 운용해 노조 관료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활동가이자 급진 언론인 하니 슈크랄라는 이집트노총을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소련 식의 낡은 공룡 조직이며 … 노동조합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묘사했다. 64 2011년 8월 이집트노총은 공식적으로 해체됐지만, 그 결정이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다. 군최고평의회는 노동운동을 통제할 목적으로 옛 질서의 노조 관료들이 이전처럼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많은 관료들이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그대로 유지했고, 독립노조 활동을 저지하는 데 필요한 자원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이는 경영진·노조·보안경찰 사이의 구분이 자주 모호해지는 국영 부문에서 특히 중요하다. 이집트노총 관료들이 사내 복지 제도인 ‘사나디크 하스르’(“개인 상자”)를 통제한다는 것도 중요한데, 이 제도는 건강 악화, 결혼 등 지출이 많은 일에 돈을 지원해 줘서 대부분의 가정에 사활적이다. 반란과 뒤이은 대중 파업으로 흔들렸을지언정, 옛 노조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마할라알쿠브라 직물 공장, 헬완 철강 공장처럼 역사적으로 투쟁의 중심이었던 일부 대규모 작업장에서 독립노조 활동가들이 이집트노총 산하 노조를 대체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슬람 “개혁주의”

이집트독립노조연맹 지도자들은 전국적 노조 구조를 새롭게 확립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 이는 당면한 핵심 문제가 작업장 내 행동을 강화하고 일반화하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두 배로 어려운 일이다. 노동계급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정치 경향이 없는 데서 그들 역시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슈크랄라는 무바라크 탄압의 영향으로 “정치가 박멸됐고”, 노동운동 활동가를 비롯한 좌파 활동가들은 자그마한 서클과 지하 조직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이후 노동운동이 부활했을 때조차 이전의 역사적 손실을 메우지 못했다. “독재 정권은 정치를 배척했고,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를 사람들을 고립시켰다. 그 결과 혁명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 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관 맺을 수 있을 만한 규모의 좌파 단체가 존재하지 않게 됐다.” 65 그러나 이는 단지 탄압의 결과만은 아니며,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지 않는 정치 경향이 수십 년간 영향을 끼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경향은 이슬람주의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왔는데, 특히 그들의 반식민주의 투쟁의 역사, 반제국주의적 언사, 복지 활동 덕분이었다. 무슬림형제단의 뿌리는 19세기 말 반식민주의 운동과, 인도와 중동에서 정치 활동을 했던 이란인인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의 사상에 있다. 아프가니는 주로 이집트에서 활동했고, 1882년에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인 우라비 항쟁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66 아프가니는 범이슬람 사상을 식민주의에 맞선 저항의 전략으로 정식화했는데, 이슬람 전통에 내재된 개념(신앙 공동체 ‘움마’ 내에서 무슬림들이 공유하는 정체성과 이해관계)이야말로 유럽 열강이 아시아·아프리카·중동을 식민지로 분할하면서 뿌려 놓은 민족·종파·언어·“인종” 간 차이를 해소할 열쇠라고 주장했다. 아프가니는 무슬림들이 당대 신앙인들의 조상 또는 선조인 ‘살라프’의 원칙과 관습, 그중에서도 특히 7세기 예언자 무함마드의 공동체에서 무슬림들이 행한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67 무함마드는 식민지의 존재에 적극 반대했고, (실패했지만)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저항을 조직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종교 전통을 정치 행동과 결합시킨 정치 조류인 이슬람주의는 1920년대 후반까지는 효과적인 운동으로 정착하지 못했지만, 이후 하산 알반나가 ‘알이크완 알무슬리민’(무슬림형제협회 또는 무슬림형제단)을 창립했다. 이 단체는 문화 협회로 시작했지만 곧 정치적 어젠다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무슬림형제단은 영국 점령에 맞서며 조직 체계를 갖췄고, 토지 개혁과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요구했으며, 영국과 시온주의 운동에 맞서 투쟁을 벌이던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투사들을 보냈다. 68 무슬림형제단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리처드 미첼에 따르면, 무슬림형제단은 창립 20년 만에 2000개의 지부, 50만 명의 회원, 그 비슷한 규모의 지지자들을 확보했고, 아랍 세계 최초로 진정한 대중 조직으로 발돋움했다. 69 무슬림형제단은 식민주의 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영국 제국, 말랑말랑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인 와프드당, 파루크 왕정 모두에 커다란 골칫거리가 됐다. 그러나 이 단체는 모순으로 뒤범벅돼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영국과 정권에 대한 단호한 반대와 타협 사이에서 오락가락했고, 이집트 대중이 반식민지 투쟁에 적극 참가할 것을 호소하면서도 그 지도부는 권위주의적이고 매우 엘리트주의적이었으며, 노동자와 빈농을 비롯해 많은 소외된 사람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켰지만 중핵(과 지도부)은 비교적 부유한 상업 프티부르주아지 성원들이 장악했다. 무슬림형제단은 계급을 가로지르는 운동이었고, 군사적 점령의 현실, 식민지 경제의 왜곡된 성격, 세속적 민족주의의 실패, 팔레스타인 문제 등 때문에 성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이 국가 권력에 도전할 능력이 없었기에, 결국 나세르와 자유장교단이 1952년 7월 쿠데타를 일으킬 기회를 잡았다.

나세르는 무슬림형제단을 금지하고 활동가들을 탄압했다. 이후 40년 동안 무슬림형제단은 몇 가지 구별되는 국면들을 거쳤다. 나기브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운동이 나세르 이전에 겪은 역사와 1980~1990년대의 전개 둘 다를 보면, 무슬림형제단 같은 단체가 발전 과정에서 각각 국면마다 뚜렷이 상이한 사회 집단들을 대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무슬림형제단의 역사는 변화와 모순, 체계적이면서 동시에 반체계적인 면으로 가득하다. … 무슬림형제단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인데, 운동의 사회적 구성이 내부 모순과 변화를 겪으면서 전략·전술·담론·강령의 변화를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70

한 세대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70년대 초 이집트로 돌아온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적 회원들은 훨씬 더 보수적인 어젠다를 제시했다. 기업인, 특히 이슬람 은행과 관련된 이들이 주를 이뤘는데, 이들은 소련 진영에서 미국-이스라엘 진영으로 말을 갈아타려던 사다트와 관계를 맺고 시장화 계획, 즉 ‘인피타’(“개방”)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와 동시에, 젊은 회원들(다수는 오늘날 무슬림형제단의 지도부를 맡고 있다)은 학생과 청년들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했다. 1980~1990년대 무바라크가 급진 지하드주의를 혹독하게 탄압해 이들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무슬림형제단은 또다시 대중 조직으로 성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은 특히 캠퍼스와 직능 단체들 속에서 성장했고, 지역 복지 협회, 진료소, 학교에 기반을 둔 광범한 사회 프로그램을 통해 빈민 가정들에 서비스를 제공했다. 무슬림형제단은 곧 정권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야당이 됐고,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창했으며, 공무원들의 부패와 무바라크의 경찰 국가를 비판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창하던 친시장 담론 안에 포함된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포퓰리즘적 비판”을 했다. 71 좌파가 독자적 세력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여전히 마비돼 있는 상황에서, 무슬림형제단은 모든 이집트인, 적어도 모든 무슬림들(적잖은 소수인 기독교인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은 부유층, 프티부르주아지,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 다양한 부문에서 회원을 충원했다.

무슬림형제단의 선거 공약은 이슬람 원리에 따른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2011년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은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개혁주의 어젠다를 내놓았다.

우리 선거 공약은 사회 정의를 달성하고, 경제 활동에서 나오는 수익을 분배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무의 일부[인 — 마플릿] 정의와 평등과 기회의 균등을 이뤄낼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을 알고 있는 우리는 선거 공약에서 고물가 문제 해결, 빈곤과 실업 해소, 교육, 의료, 대중교통 및 기타 서비스와 공공시설 등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 제공,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 조건 개선, 독신녀[원문 그대로 — 마플릿]와 길거리 아이들과 장애인 같은 사회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 해결책 찾기, 입양 가족 지원, 연금 수령자들의 수익 증대 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모든 시민들을 위한 정의를 실현하려 노력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 같은 것들을 고려할 것이다. 국가 재정에서 빼돌린 돈들을 되찾아 오고, 세금 제도를 개혁하며, ‘자카트’와 ‘와크프’(전국적 기부와 자선 신탁) 제도를 촉진시키고, 부패 및 국가 자원의 의도적 낭비와 탕진에 맞서 싸운다. 그러면 모든 시민들이 바라는 사회 정의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72

전 세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공약을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자카트’와 ‘와크프’에 관한 언급만 빼면, 유럽의 정당들이 제시하는 개혁주의 어젠다와 다를 바 없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제 여러 협회들(의사, 치과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언론인들의 협회)뿐 아니라, 모든 캠퍼스에서 이슬람주의 정치를 유력한 경향으로 만든 대규모 학생 단체들을 통해 광범한 지지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한편, 그들은 또 다른 부류의 개혁주의인 옛 좌파의 위기로부터 득을 봤다.

스탈린주의의 유산

1960년대 이후 이집트 좌파의 전력은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역사에서 가장 형편없는 축에 든다. 1965년 이집트공산당이 해산하자 지도적 당원들이 이집트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던 나세르의 아랍사회주의연합에 입당했다. 이 당은 이론상으로는 마을, 도시, 직장·교육 기관마다 지부가 있는 대중 당원 조직이었지만, 실제로는 껍데기뿐인 조직이었다. 당내 활동은 전혀 없었고, 당원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세르 자신도 결국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 당의 내부 조직 체계는 장부에만 존재할 뿐이다.” 73 노조는 국가 기관 — 모든 국내 정치 활동을 통제하는 관료와 군대 장교들이 운영하는 — 에 지나지 않았다. 작업장에서 아랍사회주의연합의 공식적 임무는 교육을 촉진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보안 기구의 일부로 운영됐으며 노동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역 관리자도 감시했다. 나세르의 최측근이자 언론인이었던 무하마드 하사네인 헤이칼은 아랍사회주의연합이 산업에서는 주로 스파이 조직으로 운영된다고 말한 바 있다. 74

공산당 잔존 세력은 아랍사회주의연합에 입당하면서 독자적 조직을 완전히 버렸고, 독재의 옹호자가 됐다. 그들은 1970년대 노동자 투쟁에서 의미 있는 구실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단명한 노동자공산당을 결성한 젊은 활동가들이 그 손실을 메우려 했지만, 이들은 이집트공산당의 붕괴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 활동해야 했다. 1980년대에 공산당 잔존 세력은 타감무에서 확고하게 터를 잡았다. 초기에 타감무의 당원은 15만 명이고 그중 핵심 활동가가 2만 명이 됐고, 당 주간지인 〈알아할리〉는 발행 부수가 13만 부였다고 한다. 75 이 수치들이 과장됐다고 해도, 사회 혼란의 시기에 타감무의 청중이 많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타감무는 어김없이 이 청중을 무바라크에 순응시키는 방향으로 끌고갔다. 타감무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항의한다는 것 말고는 고유한 방침이 없었다. 타감무 지도자들은 이슬람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았고, 정권이 무슬림 활동가들에게 노골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지지할 태세가 돼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타감무 사무총장 리파트 알사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집권당의 정책이 틀리고 이 나라에 위험하다고 보지만,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더 틀리고 더 위험하다.” 76 정권은 타감무를 기꺼이 활용했는데, 관료들이 무슬림형제단의 활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타감무에 유리하게 선거를 조작했다는 혐의가 종종 제기됐다. 77

1999년 알사이드는 이집트의 합법 정당들이 “이집트 정치에서 어떤 것도 대표하지 않으며 이집트 국민들 사이에서 아무런 명망도 없다”는 희한한 고백을 했다. 78 그는 ─ 자기 단체를 비롯해 ─ 모든 단체들이 “사회의 표면에 떠 있는 개인들의 집합일 뿐”이라고 말했다. 79 2011년 타감무는 모든 종류의 정치적 이상에 헌신하겠다고 공약했다. 민주주의, 자유, 시민사회, 정의와 평등을 지지하며, 가난과 탄압, 폭정, 부패, 가격 담합, 실업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80 이것은 또 다른 개혁주의였다. 1930~1940년대 공산당 운동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개혁주의, 그리고 오랫동안 그 의미를 잃어버린 급진주의로서의 개혁주의 말이다. 이는 이슬람주의적 개혁주의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둘 다 대중을 자신들의 정치적 프로젝트의 대상으로 간주했고, 독립적 행동과 국가에 대한 도전을 단속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붕괴가 만들어 낸 아주 끔찍한 상황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여러 협회와 복지 사업을 통해 한 활동과 수많은 활동가들이 당했던 탄압 때문에 이슬람주의는 정치적 프로젝트로서 신뢰를 받았다.

이슬람주의와 좌파

혁명은 이슬람주의와 옛 좌파 정치 모두로부터의 단절을 동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패배주의 정치와 관련된 제약들을 벗어던지고 거리를 점거하고 대중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여전히 과거 전통에 발목이 잡혀 있다. 어떻게 전진할 수 있을까? 특히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선거적 지지가 광범한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지난 10년간 일부 정치 활동가들, 특히 청년들이 이슬람주의에서 벗어나 급격히 좌경화했다. 이슬람주의 어젠다에 영향을 받는 이집트인들이 세속적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행동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이것은 2000년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에 연대하는 중요한 운동이 등장한 이후부터 반전 운동,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지역운동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라바브 엘 마흐디는 2000~2010년에 벌어진 각각의 투쟁 과정들이 자신감을 키우고 그 결과로 더 많은 행동을 촉발하는 식으로 국가에 맞선 저항이 반복되는 “파급” 효과가 나타났음을 지적한다.

[해당자들은 다음 같다 — 마플릿] 많은 산업 부문과 공공 영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 벽촌의 교육 환경에 항의해 농성을 벌이는 학부모들, 도시 정리 계획 때문에 쫓겨난 빈민가 거주민들, 자식을 고문하는 경찰에 맞서 단식 투쟁을 벌이는 어머니들, 깨끗한 물을 마실 권리를 요구하며 행진하는 수많은 마을 주민들. 81

1980~1990년대 내내 무슬림형제단은 무바라크 정권 반대 운동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2000년에 시작된 투쟁에서 많은 이슬람주의자들은 독립적 좌파 활동가들을 처음 만났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이슬람주의의 이념과 관습이 체계적으로 시험대에 오르고 있던 캠퍼스에서 그랬다. 새로운 좌파는 서서히 자리를 잡았고, 예전 같았으면 이슬람주의 집단 내에 머물렀을 청년들을 끌어당겼다. 이들의 핵심 전략은 이스라엘, 제국주의 전쟁, 경찰, 지역 고용주, 대학 총장들에 맞서는 투쟁을 무슬림 활동가들과 가능한 한 함께 하는 것이었다. 특히 1990년대 내내 지하에서 활동했던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RS는 국가에 일관되게 반대하면서 싸울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전략의 핵심 기본으로 삼았다.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는 “이슬람주의자들과는 가끔씩 함께하지만, 국가와는 절대로 함께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독자적 정치를 항상 유지했다. 82 이런 입장은 공동전선 전략의 근저에 있는 핵심 원칙들을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는데, 공동전선은 국가와 더 나아가 제국주의에 맞서 이집트 대중의 즉각적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공동 투쟁에서 다른 세력들과 직접 관계 맺는 수단이었다. 2012년에 나기브는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접근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양한 이슬람주의 조류의 내부와 그들 사이의 모순, 부르주아 지도자들과 프티부르주아 구성원들과 광범한 노동계급·빈민 지지층 사이의 모순에 주목해 분석했다. 그런 모순들은 항상 모호한 종교적 구호로 억눌렸고, 이슬람주의자들이 정권에 거듭 순응했음에도 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대중의 많은 부분이 그들을 유일하게 진지한 반대 세력으로 여겼다. 83

무슬림형제단의 청년 회원들과 지지자들은 수십 년간 좌파가 공개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둘러싼 논쟁과 행동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개중에는 종교적 종파주의의 본질, 시온주의 반대와 유대인 혐오 문제, 여성의 권리, 민주주의의 본질 등 지극히 논쟁적인 쟁점도 있었다. 이슬람주의자들과 반전 운동가들이 이라크인과 팔레스타인인 지지라는 주제로 함께 모인 대규모 국제 회의들에서도 이런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84 만약 좌파가 (정치수 석방 운동, 이스라엘 침략 피해자 연대 운동 등에서) 무슬림형제단의 주도권을 무시하고 이슬람주의자들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며 논쟁을 회피했다면, 이는 자살 행위였을 것이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의 비극에서 배운 것이 전혀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개입의 결과로 개별 활동가들의 이동 방향이 이슬람주의에서 좌파로 향하게 됐다. 이슬람주의 정치의 심각한 모순을 반영하는 전개 과정이다. 곧이어 투쟁 수위가 높아지면서 그런 모순들이 더 완전하게 나타났다.

무슬림형제단의 곤경은 사태 초기부터 분명했다. 2011년 1월 25일 시위가 있기 며칠 전 그 단체의 가장 저명한 인사인 에삼 엘에리안은 무슬림형제단이 대중 동원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85 (지금은 대통령인) 무함마드 무르시는 무슬림형제단이 “한 무리의 어린애들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활동가들에게 말했다. 86 1월 25일 시위의 규모와 정권의 대응 때문에 많은 무슬림형제단 회원들이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지도부는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꿔, 1월 28일 금요일이 “인티파다의 날”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87 이날 많은 활동가들이 살해당했고 야만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의 한 회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이크완 지도자들은 애초에는 회원들에게 시위에 참가하지 말라고 해 자기 조직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크완은 오랫동안 무바라크에 반대해 왔지만, 마침내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사실 지도자들은 [이크완의 — 마플릿] 평범한 형제자매들을 통제할 수 없었고 어쨌거나 그 형제자매들은 우리와 함께 투쟁했다. 특히 1월 28일에 대거 동참했다. 우리는 그들이 이크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민중과 함께,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싸웠다. 그들은 조직돼 있었고 매우 유능했다. 우리는 종교나 조직과 상관없이 단결했지만, 이크완은 민중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88

수십 년간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정권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집트의 감옥은 무슬림형제단 회원들로 가득 찼고, 심지어 무바라크는 운동에서 적극적 구실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된 80대 노인들조차 시범타로 감옥에 가뒀다. 무슬림형제단 모임은 금지되거나 일상으로 공격받았고, 인기 있는 이슬람주의자 후보가 선거에 출마한 지역의 투표소에서는 야만적 폭력이 벌어졌다. 89 무슬림형제단은 반전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면서 이에 대응할 기회들이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도부는 그 기회를 거부했다. 그 때문에 많은 회원들, 특히 청년 회원들이 분노했다.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장기전을 벌이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결코 주도권을 잡을 때가 아니며, 주도권은 운이 좋을 때 ‘신의 뜻으로’(’인샬라’) 오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전략에 확신이 없게 되자 무슬림형제단은 더한층 소심한 노선으로 후퇴했다. 2009년 보수파 무함마드 바데이가 이끄는 파벌이 무슬림형제단을 장악해, 단체 내 정치 활동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권은 기고만장해졌다. 2010년 선거에서는 투표 조작과 폭력이 너무 저열한 수준으로 난무해, 무슬림형제단조차 그 굴욕에 격분해 후보를 사퇴할 정도였다. 무슬림형제단은 2011년 1월 25일 혁명이 시작되고 그 물결에 휩쓸려 거리로 나왔을 때도 여전히 과거의 고통을 참고 견디고 있었다.

2011년 2월 무바라크가 퇴진하자,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머지 않았으며 이집트의 권좌에 오르는 순간이 80여 년 만에 코앞에 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는데, 바로 군부 엘리트와 대중이었다. 무바라크를 밀어낸 군부 지도자들은 국가를 통제하는 기구로 군최고평의회를 설치했다.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재빠르게 자신들의 활동을 재조정했다. 수십 년에 걸친 관성에 따라 그들은 장군들의 환심을 사려 하면서 새로운 권력자들에게 순응했다. 타렉은 2011년 초기 몇 달간 세속적 활동가들이 보기에 “무슬림형제단과 군최고평의회가 합심한 듯했다”고 전했다. “양측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는, 막후에서 이뤄지는 거래, 합의, 또는 협상”, 즉 “밀월”을 즐겼다는 것이다. 90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선거 준비와 새 헌법 제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부여받는 등 군최고평의회가 주는 특혜를 대가로 대중 운동을 진정시킬 준비가 돼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의 유력 인물들은 자신들이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을 것이며 의회 의석의 25퍼센트만 놓고 경쟁할 것이라고 말해, 군부의 뜻을 존중하고 군부를 따를 것임을 넌지시 비쳤다. 엘에리안은 무슬림형제단이 정당이 아니며 권력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국민과 함께 한다. 우리의 목표는 국민이지, 권력이 아니다.” 91 엘에리안은 대통령 선거 문제에 관해서도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남자든 여자든 후보는 단 한 명도 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후보를 낼 생각이 전혀 없다.” 92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무바라크 시절에 격하게 반대했던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문제를 회피했고, 민간인들이 군사 재판을 받는 문제(자신들의 지도자 상당수가 군사 재판을 받고 수감됐다)도 회피했다. 한편 대중은 계속 시위를 벌여 무바라크와 ‘펠로울’ 재판, 국가 기구 내 적폐 세력 숙청, 항쟁 순교자에 대한 정의 등을 요구했다. 산업 전반에 걸쳐 파업이 일어나 온갖 종류의 경제 문제를 제기했고, ‘타흐리르’[해방]를 지향하며 부패한 관리자와 기업 소유주, [혁명에] 적대적인 어용 노조 관료들을 일소하고자 했다. 경찰이 거리 행동과 파업을 공격하는 일들이 늘었는데, 이는 명백히 군최고평의회가 승인한 것이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에 대해 대체로 침묵하며 새롭게 자행되는 탄압을 사실상 용인했고, “제2의 분노의 날”(“1월 25일 혁명의 목표 실현”을 촉구하며 2011년 5월에 호소됐다) 같은 상징적 의미가 있는 행동을 비롯해 주요한 전국적 시위들과 거리를 뒀다. 93 무슬림형제단의 청년 회원들이 지도부를 거슬러 ‘분노의 날’ 행동에 대거 참가하자 단체 내부의 긴장감이 표면화됐다.

최근 무슬림형제단에서 탈퇴가 줄이었다. 특히 이집트 밖에서는 오랫동안 무슬림형제단이 종교적 믿음과 조직적 충성에 충실한 충성파 일색인 조직으로 여겨졌다. 이런 관점은 이슬람주의 단체와 정당들을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집단과 매우 비슷하게 묘사하려는, 즉 엄격한 지도부에 대해 어떤 의심도 없이 충성하는 구성원들로 이뤄진 균질적인 집단으로 묘사하려는 의도에 부합한다. 2011년 1월 항쟁 이후 《포린 어페어스》(미국외교협회가 발행하는 저널)가 작성한 분석을 보면, 이크완은 여전히 “깨질 수 없는 무슬림형제단”이며 “회원들은 전국적 지도부의 목표를 지역적 수준에서 충실히 이행”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지지자들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다. 94 이는 명백히 잘못된 관점이었다. 1996년에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지도부를 비판한 탈퇴파들이 와사트당을 창당했다. 2010년에도 반대파들이 ‘개혁 전선’을 결성해 당내 구조를 개방적으로 재편하라고 요구했다. 2011년 1월 혁명이 시작됐을 때 많은 회원들이 지도부를 무시했다. 직장 동료, 학교 친구, 이웃, 가족, 친구와의 연대감이 무슬림형제단의 ‘막타브 알이르샤드’, 즉 주요 의사결정 기구인 ‘지도국’의 어르신들에 대한 충성심보다 더 컸다. 무르시의 말을 뒤집으면, 무슬림형제단 회원들은 “어린애들을 따라”갔던 것이다. 무바라크 퇴진 이후 민주적 활동이 만개한 동안, 평회원들은 각종 거리 시위와 파업에 참가했고 학생과 지역사회 속에서 주도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사회 전반의 집단적 자신감 상승에 크게 영향 받아, 구질서와 군최고평의회 또는 [무슬림형제단] 지도국의 권위를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는 단체의 청년들 사이에서 지도부 반대파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3월 능동적 활동가들이 새로 창당한 나흐다(부흥)당에 대한 지지를 모으기 위해 온라인 운동을 시작했는데, 혁명의 요구에 맞는 경제 계획, 여성과 기독교도들의 권리 보장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됐다. 2011년 3월 그들은 대중 운동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주제로 젊은 회원들과 토론을 하는 대회를 조직했다. 몇 개월 동안 긴장이 고조된 뒤 청년 활동가 수백 명이 무슬림형제단을 탈퇴해 이집트물결당을 창당했다. 이집트물결당은 2011년 11월 기준 당원이 수천 명이라고 했는데, 이 당원들은 대중 운동과 더 급진적인 변화를 위해 헌신했다. 95 무슬림형제단의 최고 지도자 96 무함마드 바디에는 반대파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무슬림형제단 회원들은 새로 창당한 자유정의당FJP에만 가입하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슬림형제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명됐는데, 그중에는 무함마드 하비브, 압델 모네임 아부 엘포투(그 뒤 무슬림형제단 후보에 맞서려고 대선에 출마했다)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지도부 출신들도 있었다.

선거, 의회, 군최고평의회

로렌조 비디노는 이런 불화들이 무슬림형제단의 분열이 아니고, 붕괴는 더더욱 아니라고 주장한다. 97 이는 옳은 말이지만, [무바라크 퇴진 이후] 지속적 탄압이 가하는 규율 압박이 없어진 데다 대중 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무슬림형제단은 불안정해지고 있고 그 구성원들은 계급에 따라 점점 더 뚜렷하게 분화하고 있다. 평회원들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는 반면, 부르주아 엘리트들은 확고한 전략을 발전시키는 중이며, 그 전략이 지도부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로 터키 식 모델을 따라 “이슬람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는 전략이다.

터키의 정의개발당AKP은 2002년 첫 선거 승리를 거둔 이래 중동 전역의 이슬람주의자들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정의개발당은 이슬람 색채를 띤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한편으로는 기업 자본과 세계 금융기관들의 요구를,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발리 나스르는 이렇게 논평한다.

최근 10년 사이 터키에서 자본주의적 성장이 크게 이뤄지고 정치적 다원주의가 확대된 것은 권위주의적 지도부의 자비나 오일 머니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 지역 전체에서 성장하고 있는 편협하고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신흥 중간계급에게 기업가적 에너지를 자극시킨 자유화와 자유 시장 개혁이 터키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98

외메르 타슈프나르는 최근 터키의 성장은 주로 정의개발당이 “기업가 무슬림 부르주아지”를 고무한 덕분이라고 시사한다. 99 정의개발당의 “역동적 실험”이 “아랍 세계에 중대한 교훈”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100 무슬림형제단의 핵심 인물들은 터키가 군부와 관료들이 통치하던 형태(이집트의 역대 정권들과 유사하다)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난 듯 보이는 데 매료됐고, 그래서 정의개발당을 따라가려 한다. 터키 언론에 따르면, 무슬림형제단은 정의개발당을 본떠 자유정의당을 만들었고, 정책은 물론 당명까지 그대로 가져왔다. 101 2011년 4월에 결성된 자유정의당은 중동 전역, 특히 터키에서 동맹을 발전시켜 이집트 자본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2년 자유정의당의 지도적 당원들은 이집트사업개발협회EBDA를 결성했는데, 이 협회의 출범식에는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미국의 기업 경영진들이 참여했고, “무슬림형제단 기업인들의 데뷔 축하 파티”로 묘사됐다. 102 한센은 무슬림형제단의 엘리트 사업가들을 “1퍼센트의 형제들”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무바라크 시대에 소외됐던 기업인과 금융인들이며 이제 부에 걸맞는 권력을 얻길 바란다. 대개 갑부인 이들은 1980~1990년대 ‘인피타’ 시대에 이슬람 금융이 번창했을 때, 그리고 더 최근에는 터키와 무역을 늘리면서 성공을 거뒀다. 이들의 비공식적 지도자는 카이라트 알샤티르인데, 과거에 무슬림형제단 부대표를 맡다가 무바라크에 의해 투옥됐던 인물이다. 샤티르는 정권에 자산을 압류당했던 2007년에 최소 1300만 달러 규모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103

이것이 무슬림형제단이 군최고평의회와 협력하는 “밀월”에 들어선 배경이다. 장군들은 대중 운동을 통제하고 무슬림형제단의 권위를 제약할 수단을 찾았고,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집권을 위한 역사적 기회를 붙잡고자 자유정의당에 최상의 기회가 될 선거 협약을 맺고자 했다. 군최고평의회가 조기 선거에 동의한 것은, 다른 정치 경향들이 공식 정당과 전국적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황에 견줘 무슬림형제단에 크게 유리했다. 그 대가로 무슬림형제단은 대중 행동을 단속하겠다고 합의해 줬다.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시위를 자제하라고 요구했고, 무슬림형제단 충성파들은 전투적 행동을 저지할 목적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나 “밀월”은 권력 투쟁이기도 했는데, 로버트 스프링보그는 이 기간에 역사적인 적수인 “코브라와 몽구스”가 서로 이익을 얻고자 “목숨을 건 투쟁”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104 이 시기 무슬림형제단에 더 많은 문제를 안겨 준 것은 대중 운동의 활력이었다. 2011년 10월 카이로 중심부에서 기독교인들과 급진적 활동가들이 벌인 시위를 경찰이 야만적으로 공격하자 그 뒤 더 많은 시위가 벌어졌고 진압 부대가 시위 참가자 수십 명을 살해했다.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대중 운동 지지에 뜨뜻미지근했지만 회원들을 거리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총선에 주력하려 해도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1월과 12월 하원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은 40퍼센트를 득표했고, 자유정의당의 선거 전략이 명백히 승리한 듯했다.

많은 이집트인들은 무슬림형제단이 오랫동안 무바라크에 맞선 것을 보상해 주고, 또 무슬림형제단의 복지 개혁 약속이 자신들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리라는 희망에서, 믿을 만한 유일한 전국 정당이었던 자유정의당에 투표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마자 무슬림형제단은 대중 운동의 갈망과 분노가 폭발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자유정의당은 개혁된 자본주의를 원했다(대중을 향해서는 다른 제스처를 취했지만). 그러나 대중은 빵, 자유, 사회 정의를 원했다. 2012년 1월 25일 혁명 기념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메웠다. 항쟁 기념식에 참여한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에게는 공포스럽게도 대중은 더 많은 변화를 요구했다. 이틀 후 커다란 시위가 또 벌어졌고 대중은 무슬림형제단의 권력 파트너로 널리 인식되던 군최고평의회를 비난했다. “군사 정권 타도하라”, “군부 말고 문민[정부 — 마플릿]을 원한다” 같은 구호가 울려퍼졌다. 105

무슬림형제단의 계급을 가로지르는 성격과 그 내부 모순이 점점 더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2012년 4월 무슬림형제단 대표단은 워싱턴을 방문해 자신들이 미국의 중동 계획에서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고 미국의 정치인·전략가·사업가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한편, 자유정의당은 정의개발당과 긴밀하게 협력해 중동 지역 사업들의 연계를 강화하려고 했다. 2012년 9월 터키 정부는 이집트에 10억 달러 차관을 비롯해 20억 달러 지원을 약속했는데, 이는 막대한 재정 적자를 벌충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고, 무르시가 IMF 차관을 끌어올 시간을 벌어 줄 것이었다. 수십 년간의 쟁투 끝에 무슬림형제단은 지도적 회원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변형된 신자유주의 어젠다를 추진하는 데 열중하는 시장경제의 대변자가 됐다. 그러나 2012년 6월 대선이 다가오면서 다른 정치 조류들도 전진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슬림형제단의 방향에 대한 반대가 거세지는 가운데, 자유주의적 이슬람주의자들과 세속적 조류 모두 빠르게 성장했다. 압델 모네임 아부 엘포투는 자신의 대선 출마를 지원해 줄 연합체를 만들었고, (이때까지 주변적 정치 세력이었던) 나세르주의 정당 카라마당의 함딘 사바히는 노동자, 도시 중간계급, 도시 빈민의 폭넓은 지지를 모았다. 5월에 치러진 1차 투표에서 사바히는 21퍼센트 넘게 득표하며 주요 도시들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해 무르시 후보와 군최고평의회의 아흐메드 샤피크 후보(각각 [전체] 1위와 2위)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것은 분명히 계급 투표였으며, 주요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해 혁명을 전진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보여 줬다. 사바히는 2000~2010년 반정부 운동을 벌였는데, 그 덕분에 그는 무바라크를 원칙적으로 반대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타감무의 부역 행위에 오염되지 않은 좌파적 선거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사바히는 더 많이 득표할 수도 있었다. 일부 활동가들, 특히 타흐리르 광장 점거와 수 개월 동안 이어진 경찰과의 대치에서 핵심 구실을 했던 청년들 사이에서 선거 보이콧 캠페인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들은 선거 과정에 결함이 있어 이 선거로는 국내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회피적 정책을 택했다. 이는 새로운 좌파가 직면한 문제들 중 일부가 반영된 것인데, 수십 년간 투표 조작, 사기와 기만이 횡행한 역사를 거치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발전시킨 선거 전략들이 대부분 잊혀졌기 때문이다. 선거 참여의 필요성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 속에서 결선 투표가 치러졌고, 무르시는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다. 106

무슬림형제단의 득표는 6개월 전에 치러진 총선에 비해 반토막났다. 총선 때 자유정의당은 약 1050만 표를 얻었지만, 대선 1차 투표에서 무르시는 겨우 570만 표를 얻었다. 결선 투표에서 무르시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는데, 군최고평의회가 샤피크의 승리를 대중 운동을 정면 공격할 허가증으로 삼을 것을 우려한 무슬림형제단의 경쟁자 대부분이 결선 투표에서 무르시에 투표했는데도 그랬다. 자유정의당은 이제 대중의 이익과는 거리가 먼 이해관계를 가진 정당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의회 활동, 대통령 후보 출마와 관련한 부정직함, 친기업 정책, IMF 차관을 끌어들이기에 열심인 지도자들, 팔레스타인과 가자 지구 문제 해결 꺼리기 등 수많은 문제점들 때문에 자유정의당의 권위는 약화됐고, 만약 대선 결선 투표에 걸린 판돈이 그토록 크지 않았다면 무르시의 득표는 훨씬 더 적었을 것이다.

혁명은 계속된다

선거 이후 무르시는 전격적인 조처를 단행했는데, 군최고평의회를 설득해 그 기구의 지도자인 육군 원수 탄타위와 그의 최측근들을 군 지도부에서 사퇴시키고 문민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활동을 중단시켰다. 대중은 이 조처에 열광했는데, 전에 무르시가 장군들의 졸개일 뿐이라고 비난했던 사람들조차 그랬다. 이것은 무슬림형제단이 균질적인 집단이 아닌 것처럼 군부 엘리트도 분화하는 중이고 그중 일부 파벌은 무르시의 노선에 호의적이라는 점을 보여 줬다. 무르시는 군부의 특권을 보장해 주고 특히 위험 부담이 큰 대규모 투자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대신에 문민 정부에 더 많은 정치적 여지를 인정해 달라고 고위 장교들을 설득한 듯하다. 107 엘고바시는 무슬림형제단이 이런 조처를 통해 “이집트의 양대 과두 정부인 문민과 군부” 사이에 맺어진 양자 협정의 한 당사자로서 권력의 심장부로 진입하게 됐다고 논평한다. 108

군부에게는 후퇴고, 혁명의 에너지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혁명 3년차에 들어 무슬림형제단과 군부는 변형된 신자유주의 어젠다를 추진하고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강하게 압박해 이집트 자본주의를 구출하는 데 힘을 합치겠다고 잠정 합의한 듯하다. 2012년 10월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은 노동운동을 기습 공격했는데, 카이로 버스 운전사들이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파업이 “불법”이고 “범죄”라고 주장한 것이다. 109 정부 관료들은 집단 행동을 억제할 새 노동법을 마련했는데, 무르시가 IMF와 협상을 하면 분명 수천만 명에게 영향을 미칠 긴축 조처를 취하게 될 것이고 그에 대한 반발이 클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슬림형제단과 군최고평의회는 조심하는 중이다. 대중 운동의 강점이 무엇인지, 직접 나서 운동을 저지하는 데 따르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성을 약화시키고 고립시킬 방안을 모색 중이다. 국가의 형태를 띤 이집트 자본이 결국 대중 운동과 직접 맞붙을 것임은 확실하다. 여기에는 군부 엘리트와 민간 자본이 모두 포함될 것인데, 이 둘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2011년 1월 이후의 사건들을 보면 이들 모두 내부적으로 분화하는 중임을 알 수 있고, 이들 간의 경쟁하는 이해관계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제각기 반응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국가도 약점이 있다. 여태껏 군부가 대중 운동을 공격하는 데 징집병을 투입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거리 행동만으로는, 또는 선거 운동이나 지역사회 운동에 열중하는 것만으로는 급진적 사회 변화를 확대하지 못할 것이다. 조만간 작업장의 정치적 의지가 시험대에 오를 것인데, 이집트 노동자들이 계급의 이익을 스스로 표현하는 조직 형태를 발전시켰는지가 결정적일 것이다.

혁명적 활동가들에게는 시급한 과제들이 있는데, 바로 노동자 조직을 굳건히 하고 노동자 투쟁을 일반화하는 것, 작업장 투사들과 새로운 좌파 사이에 유기적 연결 고리를 발전시키는 것, 노동자 운동을 제약하는 ─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 개혁주의 조류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혁주의의 영향력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더욱 긴밀하게 관계를 맺어야 한다. 단결된 행동을 더 많이 하면서도,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노동자 권력,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위한 투쟁 같은 사상을 전파하는 주장을 더 많이 해야 한다. 110

이브라힘 엘후다이비는 전에 무슬림형제단의 회원이었고, 혁명적 활동가이기도 한 이슬람주의자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집트 국가는 노동계급을 희생시키고 기업인과 고위 관료들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있다. … 시위대의 요구는 날마다 대중의 삶에 와 닿는 진실한 사회적 불만에 바탕을 두고 있다.” 후다이비는 다수의 의지를 강제할 “진정한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11 집단적 행동이 계속되면서 후다이비 같은 사람들 수백만 명의 의식이 변화하고 있으며, 수 세대 동안 이집트 정치를 지배했던 전통들을 재평가하는 중이다. 관건은 새로운 투사들이 밟을 정치적 궤적이 무엇일지, 그들이 더 광범한 운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후기

2012년 11월 말 혁명은 더욱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번 사건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으로 촉발됐는데, 무르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를 중재하려 했다. 양측이 휴전 협상을 하면서 무르시는 국제적으로 ─ 특히 미국으로부터 ─ 칭찬을 받았지만, 이집트 국내에서는 무르시가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하지 않고 특히 가자 지구 국경 개방을 거부한 것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무슬림형제단의 최고위 인사인 무함마드 바디에는 회담 결과를 비난하고, 무슬림들이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킬 지하드[성전]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적들은 힘의 언어밖에 모른다”면서 “저들이 평화협정이라고 포장하는 거대한 사기극을 경계하라” 하고 말했다. 112 [무슬림형제단의 최고위 인사가] 무르시를 이토록 노골적으로 질책한 것은, 팔레스타인을 두고 이슬람주의 운동 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며, 무르시의 국내 정책에 대한 동요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음이 반영된 것이었다.

무르시는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무슬림형제단을 결속시키려고 판돈을 키웠다. 대통령의 결정은 어떠한 사법적 권한으로도 뒤집힐 수 없으며, 이집트의 제헌의회와 슈라위원회(상원) 또한 사법기관이 임의로 해산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조처들은 쿠데타이자 대통령에게 “파라오”의 권력을 안겨 주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나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을 비난했다. 급진적 활동가들은 2011년 1~2월의 “18일” 동안 나왔던 “대중은 정권의 몰락을 원한다”와 “퇴진하라” 같은 구호를 다시 꺼내들었고, “제2의 혁명[을 일으켜라 — 마플릿]” 같은 구호도 시위에서 울려퍼졌다. 113 무르시가 이슬람주의자들에 유리한 새 헌법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갑작스럽게 발표하자, 약 75만 명이 카이로의 대통령궁으로 행진했고, 주요 산업 중심지 마할라알쿠브라 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무슬림형제단은 자신들의 권위가 위태로워지자 상이집트[나일강 상류 지역] 전역에서 지지자들을 버스에 태워 카이로에서 열린 집회에 동원했고, 회원들로 이뤄진 파견대가 반무르시 시위대를 공격했다.

대다수 활동가들은 이제 무르시와 무슬림형제단을 기본적 요구와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는 데에 장애물로 여긴다. 무르시의 헌법이 가장 문제가 됐다.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는 개헌안이 “사회적·경제적 권리를 명시하지 않고, 언론인 구금을 정당화하며, 민간인이 군사 재판을 받게 될 문을 다시 열어 주고, 이집트의 억압받는 여성들과 기독교도들을 소외시키려 하는” 등 대중에 공세를 가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114 ‘펠로울’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정치 조류들이 시위로 몰려들었다. 민족주의적인 카라마당의 함딘 사바히는 자유주의 정당 데스투르당의 무함마드 엘바라데이와 함께하면서 무바라크 시절 외교부 장관을 지낸 아므르 무사를 ‘구국전선’에 영입했다. 좌파는 구질서의 지지자들을 운동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타흐리르 광장에 걸린 현수막에는 “펠로울을 위한 자리는 없다”, “펠로울을 쫓아내라”라고 적혀 있었다. 115

무슬림형제단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듯했다. 카이라트 알샤티르는 “우리가 국민이고 우리가 다수다”라고 주장했다. 116 하지만 무르시 반대 시위들이 전국적으로 벌어진 것과 무슬림형제단이 카이로 중심의 집회들을 조직한 것 사이에는 대비되는 면이 있었다. 무르시의 동맹 대부분은 이제 살라피주의와 지하드주의 조류에 속한다. 무바라크 시절 무슬림형제단으로 이끌린 더 진보적인 지지자들 중 다수는 일찌감치 탈퇴했거나, 혁명적 운동 때문에 자신들의 근본적 이해관계를 더 명확히 이해하게 되면서 사분오열했다.

2012년 12월 8일 무르시는 자신의 헌법 선언을 취소했다. 무르시는 논란의 국민투표는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저널[《인터내셔널소셜리즘》 137호]이 인쇄에 들어간 현재) 이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 무르시는 IMF의 요구를 따르기 위해 여러 보조금을 삭감하고 세금을 인상할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자유정의당 주요 인사들의 압력을 받아 24시간 만에 그 선언을 취소했다. 117 “깨질 수 없는” 무슬림형제단은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지 못했고, 이제는 앞뒤가 맞는 정책을 내놓으려 몸부림치고 있다. 대중 운동은 온전한 상태로 혁명 3년차에 접어들었다.

MARX21

후주

1 많은 정치적 통찰을 제공해 준 이집트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 회원들, 이집트의 새로운 언론, 특히 하니 슈크랄라와 오늘날 이집트의 권위 있는 언론인 〈아흐람 온라인〉의 기자들에게 감사하다. 이 글의 초안에 논평해 준 와심 와그디, 존 로즈, 앤 알렉산더, 알렉스 캘리니코스, 조니 존스에게도 감사하다.
2 Agha and Malley, 2012, pp71-72.
3 Agha and Malley, 2012, p72.
4 이 진부한 헤드라인은 2011년 여름 《포린어페어스》에 실린 글 “아랍의 봄, 페르시아의 겨울”(Kaye and Wehrey, 2011)에서 (최소한 현재 용례로는)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표현은 2011년 12월 〈워싱턴 포스트〉에서 “아랍의 봄-이슬람주의의 겨울”로 등장했고, 이후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 언론에 일상적으로 등장 중이다. Byman, 2011을 보시오.
5 Mitnick, 2011을 보시오.
6 이스라엘의 전 국방차관 에프라임 스네가 《포린폴리시》에 쓴 글(Sneh, 2011).
7 Le Monde, 2012.
8 영국 파운드화로 0.5펜스, 미국 달러화로 0.75센트 정도다. [한국 원화로는 8원 정도다.]
9 Hussein, 2012.
10 Hussein, 2012.
11 무르시미터는 아랍어로는 www.Mursimeter.com 에서 영어로는 www.Mursimeter.com/en 에서 볼 수 있다.
12 Momani, 2005.
13 Reddy and Bradley, 2012.
14 Hyde, 2012b.
15 Wroughton, 2012.
16 스탠더드앤드푸어스의 평가(Hyde, 2012c).
17 Hyde, 2012a.
18 Hyde, 2012a.
19 이집트경제연구센터Egyptian Center for Economic Studies 책임자 매그다 캔들이 쓴 표현을 Detrie, 2012에서 인용.
20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수치를 보시오(FAO, 2012).
21 Hussein, 2012.
22 Marroushi and Shahin, 2012, Ahram Online, 2011.
23 Al Masry Al Youm, 2012a.
24 Ahram Online, 2012a에 나와있는 〈로이터〉의 수치를 보시오. Samhouri, 2012도 보시오.
25 Haddad, 2012를 보시오.
26 Samhouri, 2012.
27 Elmeshad, 2012.
28 www.dropegyptsdebt.org/ 를 보시오.
29 Alabass, 2012.
30 Alabass, 2012.
31 Alabass, 2012.
32 AFP, 2012.
33 1992년의 토지반환법에 따라, 식민지 시대 토지 소유주였던 가문들은 나세르 시절 토지 개혁으로 분배된 토지를 되찾을 수 있는 법적 권한을 얻게 됐다. Bush, 2009를 보시오.
34 Shenker, 2012.
35 Mourad and Feteha, 2012.
36 Kalin, 2012.
37 Ahram Online, 2012d.
38 2012년 9월 카이로에서의 인터뷰.
39 Greene, 2006.
40 예시로는 Judt, 2006과 Hitchens, 2007을 보시오. 히친스는 “이슬람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90년 말리스 러스벤의 글이었다고 본다. 대니얼 파이프스에 따르면 이 용어는 우파 공화당 상원 의원 릭 샌토럼이 처음으로 미국 주류 정치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파이프스는 다양한 출처를 인용하는데, 이 출처들이 부시가 이 용어를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취지에서다(Pipes, 2006a). 특히 북아메리카의 우파 정치인과 논평가들 사이에서 이 용어의 의미와 적절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논쟁에 대한 설명으로는 Pipes, 2006b도 보시오.
41 Daley, 2006.
42 Daley, 2006.
43 Lewis, 1990.
44 예시로는 독일에 끼친 영향에 대한 벤하비브의 논의를 보시오(Benhabib, 2012).
45 “IMF 폭동”에 관해서는 Marfleet, 2006을 보시오.
46 Judt, 2006.
47 Judt, 2006.
48 Meijer, 2002, p118.
49 Agwani, 1969, p50.
50 Agwani, 1969, p86을 보시오.
51 Brysk, 2002, p12.
52 “저강도” 체제들의 영향에 대해서는 Marfleet, 2006을 보시오.
53 Jadaliyya, 2011.
54 Ahram Online, 2012c. (무바라크의 마지막 총리였던) 샤피크는 2012년 6월 대선 이후 부패 혐의로 기소돼 있다. 그는 아랍에미리트연합으로 도피했고, 2012년 11월 현재 궐석 재판 중이다.
55 2012년 9월 카이로에서의 인터뷰. 이슬람주의 운동의 일부는 정치적 경쟁자들에 대해 공공연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슈크랄라가 “이따금 파시즘적인 기질”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Shukrallah, 2012b). 하지만 그러한 우발적 사건들과 정치적 전략의 일환으로서 조직된 체계적 폭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56 Alexander, 2011, 2012를 보시오.
57 Shadid, 2011.
58 Charbel, 2012.
59 Ali, 2011.
60 Naguib, 2012a.
61 이 당은 노동자 투사들의 활동을 조율하고 총선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됐지만, 전략적 핵심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문제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62 Beinin, 2009, p69.
63 Beinin, 2009, p69.
64 Shukrallah, 2012a.
65 2012년 9월 카이로에서의 인터뷰.
66 아프가니의 복잡하고 특이한 정치 경력에 관한 설명으로는 Keddie, 1972를 보시오.
67 살라피야는 초기 이슬람의 신앙과 관습을 환기시키는 이념적이면서도 행동주의적인 지침들을 말할 때 쓰는 용어인데, 그 참가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는 대개 “살라피주의자”로 번역된다.
68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무슬림형제단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쪽 갈래인 하마스에 대해 특히 적대감을 보이는 핵심적 까닭이다.
69 Mitchell, 1969, p328.
70 Naguib, 2009, p105.
71 Naguib, 2009, p116.
72 Muslim Brotherhood, 2011.
73 Baker, 1978, p96에서 인용.
74 Baker, 1978, p189에서 인용.
75 Jadaliyya, 2011.
76 Al-Ahram Weekly, 1995.
77 Jadaliyya, 2011.
78 Hussein, Al-Said and Al-Sayyid, 1999, p77에서 “이집트에서 20년간의 다당제”를 주제로 한 토론의 일환으로 제시된 견해다.
79 Hussein, Al-Said and Al-Sayyid, 1999, p77에서 인용.
80 Tagammu’, 2011.
81 El Mahdi, 2009, p100.
82 Harman, 1994에서 제시된 접근법.
83 Naguib, 2012b.
84 카이로 회의는 2003년과 2008년 사이에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수백 명의 국제 대표단을 포함해 수천 명이 참가했다.
85 Fahmy, 2011.
86 Al Masry Al Youm, 2012b.
87 Mekhennet and Kulish, 2011.
88 2011년 4월 카이로에서의 인터뷰.
89 Marfleet, 2009.
90 Tarek, 2011.
91 Cairo Review, 2011, p95.
92 Cairo Review, 2011, p100.
93 Ezzat, 2001. [Ezzat, 2011의 오기로 보인다.]
94 Trager, 2011, pp119 and 115.
95 Ahram Online, 2011a.
96 ‘무르쉬드’(인도자 또는 교사)는 주로 “최고 지도자”로 번역된다.
97 Vidino 2011, p12.
98 Nasr, 2009, pp233-234.
99 Taşpınar, 2012.
100 Taşpınar, 2012.
101 Akyol, 2011.
102 Hansen, 2012.
103 Feteha, 2012.
104 Springborg, 2012.
105 Marfleet, 2012a.
106 사메 나기브는 대선 직후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다가오는 정치 및 선거 전투에서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켜선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구체적이고 일반적인 정치적 요구들을 제기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Naguib, 2012b.
107 이집트의 군부 경제에 대해서는 Marshall and Stacher, 2012와 Marfleet, 2012b를 보시오.
108 El-Ghobashy, 2012.
109 Ahram Online, 2012f.
110 2012년 11월 노동자 운동에서 조직화가 더 실질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조짐이 보였는데, 카이로 지하철 노동자들이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고위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끝에 빠르게 승리를 거둔 것이다. 철도와 버스 운전사들이 지하철 노조와 연대 파업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자 정부는 양보했다. Ahram Online, 2012f를 보시오.
111 El-Houdaiby, 2012.
112 Associated Press, 2012.
113 MENA-Egypt Independent, 2012.
114 Revolutionary Socialists, 2012.
115 Daily News Egypt, 2012a.
116 Daily News Egypt, 2012a. [Daily News Egypt, 2012b의 오기로 보인다.]
117 Ahram Online, 2012g.
* 출처: International Socialism, Issue 137(Posted on 9th January 2013), http://isj.org.uk/never-going-back-egypts-continuing-revolution/, 번역 김동욱
** 이슬람교에서는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하는 시간을 1년에 한 달씩 갖는데, 이를 라마단이라고 한다. 이슬람력은 순태음력으로 윤달을 전혀 두지 않아 역일과 계절이 맞지 않고, 라마단 시기도 매년 달라진다. 2012년 라마단은 양력 7월 19일부터 8월 18일까지였다.
*** 새 헌법 승인 국민투표는 결국 2012년 12월 22일에 치러졌는데, 투표율은 32퍼센트로 6월 대선보다 한참 낮은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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