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3호 2020년 3~4월호)

지난 호

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좌절

앤 알렉산더 67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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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천경록

때는 1956년 7월 26일. 수십만 명의 인파가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의 연설을 들을려고 알렉산드리아 만시야 광장에 몰려들었다. 긴장된 분위기였다. 나세르가 나일강에 댐을 지을려고 미국에 차관을 요청했다가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굴욕적인 거절을 당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다. 이집트는 그 전 해인 1955년 체코공화국에게 무기를 지원받은 바 있었다. 덜레스의 의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반식민주의 언사로 중동 전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나세르의 콧대를 꺾어놓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 냉전 체제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나세르는 연설 중에 세계은행 총재 유진 블랙을 “모기지 대출 식민주의mortgage colonialism” 장사꾼에 비유하며 청중을 웃게 했다. 그는 유진 블랙을 19세기에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회사의 사장이었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 비유했다.[1] 청중이 웃고 환호하는 동안 포트 사이드에서는 이집트 특공대원들이 수에즈운하회사 본사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드 레셉스”라는 고유명사가 특공대에게 작전 개시를 명령하는 암호였던 것이다.[2] 나세르는 연설을 다음과 같은 간결한 선언으로 끝맺었다.

우리가 굶어 죽는 동안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세했던 그 제국주의 회사가 우리에게서 강탈해 간 모든 것을 우리는 되찾을 것입니다. …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수에즈운하회사를 국유화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집트의 이름으로 공화국 대통령은 수에즈운하회사가 이집트 기업이 됐음을 선포합니다.[3]

알렉산드리아의 군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마침내 식민 지배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실감했다. 이제 더는 세계 열강들이 이집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못할 터였다. 덜레스의 거절에 대한 나세르의 이 같은 응수는 워싱턴을 충격에 빠뜨렸다. 덜레스는 영국 보수당 정부 수상 앤서니 이든에게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토해내야 한다”고 말했다.[4] 그러나 옛 제국주의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 지배자들의 격분에 대면 덜레스의 반응은 오히려 담담한 편이었다. 런던과 파리에서는 정치인들이 서로 경쟁하듯 나세르를 비난하고 나섰다. 노동당(당시 야당이었던) 당수 휴 게이츠켈은 나세르를 히틀러에 비유했다. 앤서니 이든도 나세르를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이것이 파시스트 정부의 행태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고, 파시즘에 양보했을 때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우리는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다”고 경고했다.[5]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사실 그 전부터 나세르를 손봐 줄 명분을 찾고 있었다. 프랑스 군대는 알제리에서 민족 해방 투쟁을 분쇄하려고 야만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지도자들은 카이로를 은신처로 삼았고 나세르가 이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이든은 그 나름으로 나세르에 대한 강렬한 개인적 증오를 키웠다. 1956년 3월 그는 외무부 부장관 앤서니 너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나세르를 고립시킨다거나 “중립화”한다는 둥의 헛소리는 다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나세르의 파멸이라는 걸 모르겠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나세르 제거이고, 만약 자네나 외무부가 그 점에 이의가 있다면 각료 회의에 나와서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걸세.[6]

이든의 진노는 중동이 영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위기감의 반영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이집트·이라크·요르단은 친영 왕정이 통치하고 있었다. 수십만에 이르는 영국 병력이 중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인도와 기타 영국 식민지로 통하는 길목인 수에즈 운하는 영국이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여 만에 나세르가 이끄는 민족주의 군 장교들이 이집트 왕정을 타도하고, 영국군이 오랜 게릴라 전투와 대중 시위 끝에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고, 요르단에서는 후세인 국왕이 대중의 압력에 떠밀려 요르단 군의 영국인 사령관 존 베이곳 글럽을 해임하기에 이른 것이다.[7] 오직 이라크 정부만이 변함없이 영국에 충성을 바쳤다. 그래서 영국 관리들도 이라크를 이용해 중동 전역에서 들끓고 있던 민족주의 움직임을 견제하려 했다. 이라크·이란·터키·파키스탄·영국이 1955년에 체결한 군사 동맹인 바그다드 협정을 고안한 인물도 이라크 총리 누리 알 사이드였다. 이든은 나세르를 재빨리 타격하면 세력 균형이 다시 영국 편으로 기우리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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