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3호 2020년 3~4월호)

지난 호

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이집트 민주화 운동

라밥 엘 마흐디 70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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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밥 엘 마흐디는 이집트의 사회주의자다.

번역: 조명훈 / 교열·감수: 이수현·천경록

새로운 조류들

이집트 활동가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중 앞에 자신의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박탈당했다. 인쇄 매체는 강력히 통제되고 집회와 로비 활동은 긴급조치법으로 금지됐다. 집회나 행진을 조직하는 사람들은 폭행이나 구속이나 투옥이나 그 이상의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2000년 이래 저항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잇따른 운동들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2004년 민주화 활동가들은 안정적으로 보이는 무바라크 정권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키파야(충분하다!)’란 구호로 알려진 ‘변화를 위한 이집트 운동’과 ‘변화를 위한 운동들’이라고 알려진 그 자매 단체들은 이집트 국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운동은 정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중동 바깥에서 널리 퍼진 관점, 즉 아랍 세계는 근본적으로 민주화를 거부한다는 생각에 도전하는 등 많은 금기를 깨뜨렸다. 그러나 이 운동은 상승세를 타다 갑자기 추락하며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과 이 운동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을 좌절과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급격한 변화의 이유는 무엇이고, 이것이 더 넓은 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무엇인가?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은 흔히 예고없이 나타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은 특히 유럽 언론에서 두드러진다. 예컨대 영국의 <가디언>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난 키파야 운동의 기층 참가자들”이라고 보도한 바 있고, 독일의 <슈피겔>은 “‘변화를 위한 운동’, 즉 키파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사실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은 시위들의 연속적인 흐름이라는 사슬 속의 한 고리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집트 사회 운동을 다룬 여러 문헌에서는 이를 두고 ‘시위의 주기들’이라고 불렀다.[1] 이 시위들은 서로 다르지만 상호보완적인 활동들을 지속해 왔고, 현대 이집트 정치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었을 만큼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게다가 이 국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2]

운동의 등장

1952년 쿠데타 이후 존속한 이집트 헌법을 보면,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거쳐 ‘재선’할 수 있고 국민투표에는 의회에서 추천한 단 한 명이 후보로 오른다고 돼 있다. 이 절차야말로 대통령과 연계된 유일정당이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 체제의 핵심이다. 여당은 그동안 ‘해방당’에서 ‘국민연합’, ‘사회주의연합’, 가장 최근에는 ‘국민민주당NDP’까지 다양한 이름을 내걸었다. 국민민주당은 1976년, 명목상 다당제 내 여러 정당들 중 하나로 출범했다. 사실 이 정당은 이전의 집권당한테서 모든 권력을 이어받았다. 장기 집권한 이집트 대통령들은 셋 다 국민민주당 내 핵심 인사들이었고, 덕분에 이 정당은 브라운리가 칭한 것처럼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오래된 권위주의 정권들 중 하나”(Brownlee, 2007: 3)인 이집트 정부를 지금도 장악하고 있다.

1976년에서 2005년 사이 치러진 여덟 번의 총선에서 국민민주당은 민중의회(하원)의 다수당 지위를 여유롭게 유지했고, 당선이 보장된 대통령 후보를 거듭거듭 내세웠다. 그러나 무바라크에게 다섯 번째인 6년의 새로운 임기를 허락할 국민투표가 있기 직전인 2004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변화를 위한 대중 운동(프리덤 나우)’과 키파야는 “무바라크의 5선 연임과 … 향후 무바라크의 둘째 아들 가말의 ‘권력 승계’를 거부한” 여러 단체들 중 가장 먼저 생겨난 단체였다.(Shehata, 2004: 4) 이 단체에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여성들(거리는 우리의 것)’, ‘변화를 바라는 청년들’, ‘변화를 바라는 기자들’, ‘변화를 바라는 예술가들’, ‘변화를 바라는 노동자들’ 등이 속해 있었다. 이런저런 차이가 있었어도 이 단체들은 몇 가지 근본 원칙들에 동의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바라크의 대통령직 연장 거부, 무바라크 일가의 권력 세습 반대, 선거 민주주의 지지였다.

2004년 12월 12일, 키파야는 첫 (침묵)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마르크스주의자, 나세르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고참 활동가 일곱 명이 저녁 모임에서 새로운 대중 운동 단체에 관한 생각과 ‘키파야’라는 구호를 처음 논의하고 난 뒤 석 달도 안 돼 성사됐다.[3] 키파야 운동은 계속해서 거리 집회, 대학 내 집회, 다양한 모임, 거리 행진 등 여러 가지 공개 활동을 조직했다. 이 운동의 정치적 불복종 전략은 곧 활동가들이 구속과 탄압의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을 뜻했다. 경찰은 때때로 집회가 보이지 않고 또 집회의 주장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회 대열을 완전히 고립시켰다(진압 경찰이 집회 대열을 겹겹이 에워싸서 오직 결의 수준이 높은 활동가들만 집회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키파야 운동은 1년 만에 단체 결성 선언문에 동의하는 1천8백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공개적으로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곧 보안 당국의 밀착 감시 대상이 된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집트 사회에서 이 숫자는 아주 인상적인 것이었다.(Kifaya 2004) 키파야 결성 선언문에는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원칙들이 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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