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378 1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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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지배 집단 안에서 분열이 일어날 때마다 극명해졌다. 1965년 게바라가 결국 쿠바를 떠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논쟁은 비공개로 이루어졌고, 혁명을 옹호하는 평범한 활동가들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1968년 노련한 공산당 지도자 에스칼란테의 극적인 체포와 15년 징역형으로 이어진 논쟁도 마찬가지였다. 카스트로는 에스칼란테가 “극소수 분파”를 형성하려 했고 “당 기구를 온갖 종류의 특권과 청탁이 난무하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20년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5년] 앙골라에 파견된 쿠바군을 이끌었으며 “혁명의 영웅”으로 불리운 선임 게릴라이자 장성이었던 아르날도 오초아가 아바나 군관구 군사령관으로 임명되기 하루 전날, 갑작스럽게 체포돼 재판을 받고 ‘반역죄’와 ‘부패죄’로 4일 만에 [1989년 7월 13일] 즉결 처형됐다. 전체 당원과 다수 대중에게 ‘참여’란 이미 밀실에서 내려진 결정을 승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 시장에 갇히다

이런 통치 방식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엄격하고 위계적인 규율을 부과하는 게릴라 전통이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핵심은 권력을 잡은 혁명 지도자들이 덫에 걸린 데에 있다. 이들은 쿠바 경제를 발전시키고 수십 년의 정체를 극복하길 원했지만, 자본주의 논리로 조직되는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작은 섬나라의 국유 경제로는 그런 압력을 제거할 수 없었다. 쿠바 국가는 살아남기 위해 세계 시장에 상품을 판매해야만 했다. 혁명 정부는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정부였다. 1977년에 카스트로도 1960년대 초의 도취적인 시절에 “가치 법칙”을 고려하지 못한 실수가 있었다며 사실상 이를 인정했다.64

대중은 상품 판매를 위한 경쟁의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다수 대중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 일체에 대한 체계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적은 없다”고 말한 시인이 위협적 존재로 취급된 것이다.

그러나 쿠바 정부가 경제 목표를 이루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 때문에 그런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71~1975년에는 경제가 성장해 1인당 산출량이 1967년(그리고 1957년) 수준보다 높아졌다.65 하지만 1975~1980년 계획은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했다. 카스트로가 말했듯이 “설탕 가격 급락, 세계적 인플레, 무역 관계 악화, 세계경제 위기 심화” 때문이었다.66 1980년대 내내 지속된 세계경제 위기도 쿠바에 영향을 미쳤다. 고트가 말하듯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쿠바는 비공산주의권과의 경제 관계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67 쿠바의 1인당 산출량은 1984~1989년 동안 정체했다. 1980년대 동안 (1인당 산출량이 매년 0.7 퍼센트 감소한) 라틴아메리카 지역 대부분의 경제 상황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혁명 직후에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난의 “특별한 시기”

그러다가 세계 체제에 대한 쿠바의 의존을 최종적으로 입증한 사건이 벌어졌다. 1989~1991년에 동구권이 붕괴한 것이다. 이와 함께 소련의 사탕수수 구매가 크게 줄었다.68 쿠바가 받은 가격은 1990년 1톤당 602달러에서 1992년 200달러로 떨어졌다. 1991년 쿠바 국민총생산GNP은 10퍼센트 감소했고, 1992년에는 11퍼센트, 1993년에는 14.9퍼센트 감소했다.69 1990~1993년에 1인당 국민산출량은 3분의 1 넘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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