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378 1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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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의 경제적 변화와 함께, 지난 수십 년을 지배한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적 [통치] 방식이 일부 완화됐다. 소설가와 시인들이 이전에는 누리지 못한 자유를 누렸다. 비록 페드로 후안 구티에레스와 레오나르도 파두라81는 쿠바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을 국내에서 출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런 작품을 쓰고도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으며 해외에서 작품을 출판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잠깐이지만 선거 정치 참여를 개방하자는 논의가 쏟아졌던 적도 있었다. 쿠바 공산당 정치위원인 카를로스 알다나는 ‘야당’ 지지자들이 쿠바 지방의회와 국회의 일원으로 선출될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상황이 일단 안정되자 이런 논의는 금세 사라졌고 알다나는 ‘부패’ 혐의로 지도부에서 제거됐다. “민중 권력” 기구들의 직책을 맡을 후보자들은 후보선출위원회에 의해 지명되고 다수 대중은 그에게 표를 던지도록 촉구받는다. 쿠바 국회[전국인민권력회의]는 1년에 두 번, 며칠 동안만 열린다. 쿠바 공산당원 수는 1990년대 내내 늘었고 당원 가입 자격 제한도 완화됐다. 하지만 공산당은 여전히 상명하달 기구고 당 상층이 아랫사람들에게 인준받을 정책을 모두 결정할 때까지 당대회가 수년 동안 연기됐다. 그래서 이미 한두 해 전에 열렸어야 할 제 6차 당대회는 이 글을 쓰는 지금[2006년]까지도 개최되지 않았으며 [6차 당대회는 2011년에야 열렸다 ─ 역주] 이제 제 5차 당대회가 열린 지 9년이 되고 있다.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한 핵심 지도층 인사들은 대중이 정치적 논의에 진정으로 관여하는 것을 허용하는 데에 여전히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불만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 혹독한 탄압으로 대응해 왔다. 3년 전, 배를 탈취해 쿠바를 탈출하려 했던 아프리카계 쿠바인 3명을 처형하고, 평화적인 항의 활동을 하던 사람들(그중에는 선임 공산당 지도자인 블라스 로카의 아들도 있었다)에게 무거운 징역형을 내린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국제적으로 좌파 전부가 이런 조처를 지지했다. 제국주의의 영향력에서 쿠바를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라며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혹독하게 굴어야 한다고 느끼는 정권은 스스로의 강함이 아니라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취약함의 근원은 지난 47년간의 모든 노력에도 쿠바가 세계 체제 안에 편입돼 겪을 수밖에 없는 가난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혹독한 현실에 있다. 쿠바는 결국 1990년대 초반에 최악의 물자 부족과 굶주림에서 벗어나 1인당 국민산출량을 1977년 수준으로 회복했다. 하지만 이는 1957년 수준보다 아주 약간 더 높은 것에 불과했다. 프랭크 W 톰슨은 쿠바 혁명 이후 시기 전반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쿠바 경제는 거의 반세기 동안 성적이 좋지 못했다. 1인당 GNP 통계에 비추어 보면 어떤 시기는 더 나았고 어떤 시기는 더 못했다. 쿠바의 평균 경제 성적은 이제서야 기껏해야 1957년 수준보다 약간 더 나아졌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자메이카와 니카라과만이 경제가 더 나빠졌다.82

절대적 수준에서 보면, 쿠바의 생활 수준은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많은 곳들보다 높다. 그러나 이는 1959년 이전에도 그랬다. 사실 쿠바 혁명은, 늘상 가난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세계 체제로 인해 정체를 겪으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복지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 통계에 따르면 보건과 교육에 관한 한 “쿠바는 다른 가난한 나라들보다 상황이 나았다.”83 하지만 대중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것들, 예컨대 주택 공급 문제에서 쿠바가 그만큼 잘했다고 말하는 어렵다. 인간개발지수HDI 통계를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과 비교해 보면, 쿠바는 기껏해야 뒤쳐지지 않은 정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톰슨은 결론짓는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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