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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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쿠바의 경제적 번영은 설탕이라는 단일 생산물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에, 세계 시장이 침체하자마자 임금과 고용이 붕괴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40년 전,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맞서 일어난 쿠바인들의 반란은 미국에 의해 좌절됐다. 이후 미군 점령기가 이어졌고 이 “해방”됐다는 나라의 정치에 미국이 개입할 권리를 인정하는 헌법이 강요됐다. (이 “플랫 수정안”의 한 조항 덕분에 오늘날에도 미국은 관타나모에 악명높은 기지를 두고 있다. 관타나모는 99년 기한 조차지租借地이고 지금은 쿠바에 반환됐어야 하는데 말이다.) 미국 자본은 쿠바 설탕 산업을 지배할 기회를 붙잡았고, 미국 정부에게 유리한 무역 조약을 바탕으로 그 산업을 미국 시장 공급을 위한 경제적 기지로 이용했다.

그 결과 쿠바는 미국 경제가 1929년에 위기에 빠지자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더들리 시어스가 수년 전에 설명했듯 “쿠바 경제는 미국 경제에 너무나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여러 측면에서 미국 경제의 부속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여느 가난한 주와 달리 쿠바는 연방정부의 사회복지 서비스나 고용지원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한편, 앞서 말한 미국의 정책으로 인해 쿠바 부르주아지는 허약하고 응집력이 없었다. 이 점은 중앙아메리카와 비슷하고 남아메리카의 많은 곳과는 대조적이다. 클라우디오 카츠가 최근 지적했듯,7 남아메리카의 부르주아지는 제국주의 강국들을 서로 경쟁 붙여서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그런 점에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들을 가리켜 ‘반식민지’ 운운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우스꽝스럽게 비트는 것이다.)8

1928년에 쿠바 대통령 헤라르도 마차도는 이미 독재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 위기에 탄압으로 대처했다. 폭력 수위를 높이고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 학생과 노동자뿐 아니라 전통적 정치 세력들도 암살의 표적이 됐다. 1933년 7월 아바나의 버스 노동자들이 과중한 세금에 항의하며 벌인 파업이 정부에 맞선 총파업으로 발전하며 위기는 정점에 달했다. 이 총파업은 노동자들뿐 아니라 ‘상공업계’의 지지도 받았다.9 파업을 지지한 노동자들은 제당소와 철도역들을 점거하고, 관리자들을 억류하고, 스스로 ‘소비에트’라 부른 기구를 결성하고, 병사들, 경찰관들과 어울려서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10

1933년 운동은 낡은 정치 질서를 사실상 무너뜨렸지만 자신만의 권력을 세우기에는 응집력이 부족하고 의식적이지 않았다.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은 학생들이 주도하는 경향에서 왔다. 이들은 반제국주의와 민족 경제 발전을 결합한 모호한 포퓰리즘 이데올로기를 견지했다.(리더십의 일부는 노동조합과 스탈린주의 정당인 대중사회당PSP에서도 왔다. 그런데 이들은 양보안을 받고 파업을 중단시키길 선호했다.) 이처럼 혁명적 리더십이 부재한 탓에 군대 내 권력은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이끄는 한 무리의 하급 부사관들 손에 떨어졌다. 바티스타는 혁명에 연루된 다양한 세력들 사이에서 영리한 책략을 부리는 동시에, 혁명을 후퇴시키려고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1935년에 이르면 바티스타는 쿠바 정치를 주무르는 인물이 되고, 그의 통치는 이후 사반세기 동안 이어졌다. 바티스타 집권은, 쿠바 부르주아지가 직접 사회를 지배하기에는 너무 취약하고 분열된 한편, 쿠바 노동계급도 기회가 왔을 때 권력을 장악할 리더십과 의식이 부족한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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