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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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 정권은 도시 게릴라를 분쇄했지만, 더 잔혹해진 탄압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정권에 등을 돌렸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후미진 지역에서 카스트로의 게릴라가 정권의 헛된 진압 시도에서 살아남는 사이, 카스트로의 게릴라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가 커져 갔다. 1957년 여름 즈음, 카스트로는 바티스타에 반대하는 주류 부르주아 정당의 지도적 인물들과 공통의 정책 기조를 협상하는 위치에 올랐다. 1958년 중반, 다른 모든 세력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카스트로는 쿠바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속에서 조직된 기반을 갖춘 유일한 정당인 PSP와도 협상을 벌일 수 있었다.

카스트로 세력이 수적으로 많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카스트로의 군대는 300명이었고 그들이 1958년 12월 쿠바의 주요 도시들로 들어왔을 때도 그 수는 기껏해야 2000~3000명에 불과했다.16 거대한 전투에서 바티스타의 군대를 무찌를 처지는 아니었다. 실제로는 바티스타 군대가 싸우기를 거부했다. 반란군이 진격하자마자 정부군은 무너져 버렸다. 미국 정부는 이미 바티스타의 정치 생명이 끝났음을 깨닫고 군사 쿠데타를 조직해 다른 인물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바티스타에 맞선 투쟁은 미국도 반란군도 예측하지 못한 결말을 맞았다. 독재 정권, 정규군, 따라서 쿠바 국가의 핵심 기구들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17

새로운 권력

반란군은 새 정부의 지배 세력이자 유일하게 조직된 무장세력으로서, 그리고 쿠바 각계각층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세력으로서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이번에는 총파업이 완전히 성공적으로 벌어졌다. 이 파업은 옛 정권의 몰락을 축하하는 동시에 반란군에게서 정권을 낚아채려는 일체의 시도가 거대한 대중 저항에 부딪힐 것임을 분명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이 권력 교체에는 이후 일어난 모든 일에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측면이 하나 있다. 새 정권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곧 그 정권에 대한 대중의 통제는 (심지어 참여조차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핵심 지도자들에게 부여된 (‘코만단테[사령관]’ 같은) 군대 직위가 보여 주듯, 반란군은 위계적으로 조직됐으며 효율적인 게릴라 군대들이 다 그렇듯 부대원들에게 극도로 엄격한 규율을 부과했다.18

그렇다고 해서 반란군 지도자들, 특히 카스트로가 다른 사회 세력이나 대중 정서를 무시할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1959년 쿠바 혁명 직후 몇 개월 동안 아바나에서 나타난 생동감 넘치는 혼란 과정에서 반란군 지도자들이 아래로부터의 변화 염원을 무시했다면 ─ 예컨대, 바티스타 정권에 복무한 고문자들과 비밀경찰(이들은 공개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을 처단하지 않거나, 임금과 복지를 개선하지 않거나, 농촌 대중을 대지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토지 개혁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 새 정부는 단 며칠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기층 운동의 조직화 수준은 혁명 지도자들의 행동을 직접 통제할 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혁명 이후 첫 8개월 동안 카스트로는 매우 영리하게도 반란군을 지도한 집단의 지위를 사실상 문제 삼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부르주아지와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PSP와 ‘7월 26일 운동’의 더 급진적 부위에 대해 느끼던 두려움을 이용해, 자신을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는 유일한 인물로 내세웠다. 동시에 카스트로는 ‘7월 26일 운동’ 내 무정파들과 PSP 지도자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어, 어느 쪽이든 영향력을 획득하려면 자신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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