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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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위기가 심화하는 주요 순간마다 카스트로는 운집한 군중에 연설하며 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집회 참가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거나 주도권을 쥐지는 못하게 했다. 이런 집회들의 분위기는 뜨거웠을지 몰라도, 1917년 러시아 혁명 때처럼 대중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쿠바 혁명을 다룬 많은 역사서들이 1957~1958년 게릴라전과 그에 따른 정치적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노동자, 농업 노동자, 농민 대중이 말하고 행동한 것에는 초점을 두지 않는 까닭이다. 휴 토머스의 권위 있는 역사서는 바티스타 정권 몰락 이후 첫 몇 주 동안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과 단식 투쟁을 몇 문장으로만 다룬다.19 리처드 고트의 책에는 관련 내용이 더 적다.

물론 위로부터의 역사 서술에 주된 관심을 둔 저자들의 편견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혁명 지도자들의 행위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노동자·농민들이 스스로 사태를 결정하는 것은 다르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혁명 지도자들 또한 이들의 직접 행동을 고무하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공격했다. 당시 쿠바 경제 대부분이 민간 자본가의 수중에 놓여 있었는데도 말이다. 1959년 봄, 노동자들은 바티스타 정권의 몰락이라는 기회를 붙잡아 새로운 노동조합 지도부를 선출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7월 26일 운동’ 관련자들이었다. 하지만 그해 가을 노동부 장관이 개입해 새로 선출된 노동조합 지도부 절반을 제거한 뒤 다른 지도자를 뽑을 새로운 선거를 조직하지도 않았다.20 ‘7월 26일 운동’이 배출한 핵심 노동조합 지도자인 다비드 살바도르는 1960년에 체포됐다. 1960년대 쿠바에 대한 기록은 흔히 노동조합 활동이나 영향력이 사실상 전무했다고 논평한다. [쿠바 혁명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쿠바를 관찰한 좌파 케인스주의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은 〈먼슬리 리뷰〉에 이렇게 썼다. “노동조합은 … 노동자가 아니라 당과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21

농민과 농업 노동자들에게도 같은 태도가 적용됐다. PSP가 농민들에게 ‘자발적인 토지 몰수’를 통해 스스로 토지개혁을 이루도록 고무하자, 카스트로는 이를 격렬히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무질서한 토지 분배에 반대한다 … 농업법을 거스르는 토지 분배를 조장하는 행위는 … 모두 범죄다.’22 토지개혁 최종안이 마침내 시행될 때에도 농민과 무토지 노동자들은 그 과정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다. 카스트로의 농업 자문으로 (1960년대 초반과 후반) 쿠바를 두 번 방문한 좌파 농업 경제학자 르네 듀몽은 농업 협동조합 건설 계획이 마련되고 이후 협동조합이 사실상 국영 농장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농업 협동조합에 관한 법규들은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고 밀실에서 마련됐다 … 1960년 8월이 되면 … 협동조합 계획은 확실히 뒷전으로 밀렸다. 관련자들에게는 통보나 상의조차 없었다.23

지도자들의 말, 특히 카스트로의 말은 모두 그대로 실행됐다. 파버는 이렇게 쓴다.

대중은 대중조직으로 알려진 기구들에 지지를 보내고 참여했지만, 자기 운명은 차치하고 이 기구들의 운명도 실질적·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대중 집회는 지도자들이 연단을 통제하고 연설하고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였으며 청중들은 갈채를 보내지만 감히 수정안을 내거나 이견을 표할 수 없었다. 이런 집회는 새로운 정권의 상징이 됐다.24

듀몽은 1960년 초여름에 이르면 ‘격렬한 비판은 심지어 순전히 기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쿠바 언론들 사이에서 철 지난 것이 됐다’고 쓴다.25 파버는 이렇게 지적한다. “1960년 여름 즈음 일체의 반대파 및 독립 신문이 금지됐다. 당시 대다수 출판 및 시각 매체들은 정권을 지지했고 정부는 그 어떤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에 직면하지 않았다.”26 듀몽은 자신이 목격한 혁명 지도부의 태도를 이렇게 요약했다. “인민을 위한 정부였을지는 몰라도 인민에 의한 정부는 아니었다. 인민은 자기가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는 존재로 취급됐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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