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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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체 게바라가 발표한 입장들에서도 이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61년 4월 연설에서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 지도자들이 … 민중을 제 몸처럼 위하는 가운데 무엇이 민중에게 최선인지 고민하고 수치화해 … 위에서 밑으로 내려보낸다.”28 또, 이렇게 불평하기도 했다. “대중과 연관 맺어야 할 절실하고 시급한 필요성은 … 우리 지도부만의 잘못이 아니다. 대중과 지도부 양쪽 모두의 잘못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힘과 의무, 권리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29 계획이 “위로부터 관료적으로” 수립된다면 “그것은 대중의 잘못이다.”30 게바라의 해결책은 아래로부터의 논의를 기반으로 지도부가 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노력으로 지도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혁명에 깊은 열의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31 “노동자들에게 공동 소유나 집단적 소유를 이해시키는 것은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혁명적 의식을 발전시켜서 혁명에 완전히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32

1965년에 혁명의 경험을 반추하며 게바라는 “대중과 좀더 구조적인 연계가 필요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향후 몇 년에 걸쳐” (십중팔구 위로부터) 개선할 일이었다.33 그러기 전까지는 “사회 전체를 … 하나의 거대한 학교로” 탈바꿈시켜 대중을 “교육”해야 한다.34 “대중은 자극과 압력에 노출돼야 한다 …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패배한 계급뿐 아니라 승리한 계급의 개개인에게도 행사되는 것이다.”35

사회주의 사회를 성취하고자 한 게바라의 선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게바라의 시각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근본에 놓는 마르크스의 관점과 달랐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이런 종류의 관점을 격하게 비판하며, 이런 관점은 사회를 둘로 나눠 “한쪽을 나머지보다 우월한 일부”로 여기고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함”을 망각하는 “교리”라고 비판했다. 그런 “교리”에 따르면, 소수의 지도층이 모든 사회 세력의 압력에서 벗어나 대중을 위해 새로운 사회를 도입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쿠바 혁명의 결정적인 초기 몇 년 동안 이 지도층의 체계적인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반란군 지도자들은 더 광범한 ‘7월 26일 운동’을 대표해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7월 26일 운동’은 지부, 협의회, 선출된 지도부를 갖춘 일관된 조직으로 발전한 적이 없었다. 파버가 주장하듯, “카스트로는 ‘7월 26일’ 운동을 이데올로기·강령·조직을 갖춘 보통의 정당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다 … 피델 카스트로는 ‘7월 26일 운동’이 조직적으로 퇴화하도록 내버려 둬서 1960년대 중반 새로 재편된 공산당으로 흡수되게 했다.”36 이 새로운 정당은 1975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당대회를 열었는데, 쿠바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모든 핵심적인 결정이 이뤄진 지 한참 뒤였다.

지도자들은 기층의 조직 노동계급이나 농민의 일원이 아니었다. 물론 몇몇은 노동계급이나 농민 집안 출신이거나, 학생 내지 급진적 중간계급 배경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투쟁 경험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집단적 대중 투쟁이 아니라 위계적으로 조직된 게릴라 그룹의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쿠바 공산당이 마침내 창당됐을 때, 당 중앙위원 100명 중 혁명 이전에 노동자를 조직하는 전통에 몸담았던 이들은 4명에 불과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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