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신화에 가려진 쿠바

크리스 하먼 25 37
378 10 8
9/18
프린트하기 전체 보기 PDF 보기

아래로부터의 논쟁과 통제 없이 위로부터 이뤄진 개혁이 직접적으로 낳은 모순된 결과 하나는 개혁이 엄청난 경제적 문제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노동자·농민들이 개혁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할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가 공개적인 논의에 부쳐지지 않으니 낡은 질서에서 고통받던 이들은 당연하게도 그저 더 많은 개혁을 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한편, 쿠바 사회를 위로부터 변화시키려 한 이들은 산업과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돈이 드는 계획을 내놓았다. 1961년 8월에는 연 성장률 10퍼센트를 목표로 한 4개년 계획을 도입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목표를 달성할 자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이 국유화에 대한 보복으로 쿠바산 설탕 구매를 거부하고 쿠바 금수령을 내린 터라 더욱 그랬다. 혁명 정부는 자국 내 사유재산을 국유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쿠바의 소규모 경제는 여러 소비재를 나머지 세계 체제에 의존했다. 산업화를 하려면 자본재도 의존해야 했다. 혁명 정부는 이런 의존을 깨뜨릴 수 없었다. 생활 수준 향상의 많은 부분이 기본재 부족과 배급으로 상쇄됐다.

새로운 의존

소련이 미국이 정한 가격보다는 조금 낮지만 자유 시장 가격보다는 높은 가격으로 쿠바 사탕수수 수확량을 구매하고 그 대가로 많은 기본재를 공급하기로 하면서 미국의 봉쇄로 인한 고통이 얼마간 완화됐다. 이는 흔히 소련이 쿠바에게 보조금을 준 것처럼 묘사된다. 소련 지지자들은 한 ‘사회주의’ 국가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게 ‘우호적’ 원조를 제공했다고 묘사했다. 토니 클리프 같은 비판자들은 유고슬라비아가 1948년에 소련에서 떨어져 나오자 미국이 원조를 제공한 것처럼, 소련도 냉전 시기에 전략적 우위를 점하려고 쿠바를 원조하는 것이라고 봤다.40 다른 논평가들이 지적하듯 당시 소련은 국내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식료품 수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 시장 가격보다 높게 책정된 정가 계약으로 설탕을 공급하는 것은 당시 세계 설탕 시장에서 일반적이었기에 소련이 지불한 설탕 가격도 일반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41 고트는 ‘보조금’론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해석이야 어떻든, 쿠바 혁명가들이 미국의 봉쇄 때문에 시장에 대한 의존을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가들에 대한 의존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66년 쿠바 무역의 80퍼센트가 동구권과의 무역이었고, 그중 절반은 소련과의 무역이었다.

소련과의 경제적 관계는 결국 쿠바가 소련 모델을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가야 할 길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아갔다.

쿠바 혁명가들의 핵심 목표는 쿠바 경제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변덕스러운 세계 설탕 시장에 덜 의존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농업을 다변화하는 한편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해서 목표를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2년에 이르면 식량 부족이 “극심”해졌고42, 이를 극복할 방안을 둘러싸고 지도부 안에서 이견이 드러났다. 옛 공산당 인사인 카를로스 라파엘 로드리게스를 지지하는 분파는 국유 경제의 특정 부문들에 수익 목표를 설정하는 최신 소련식 접근법을 추구했다. 체 게바라를 지지하는 다른 분파는 더 열심히 일하라고 제공하던 인센티브를 “사회주의 도덕”으로 대체하려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어려움을 타개하지 못했다. 1965년 1인당 국민총생산은 1962년보다 낮았다.43

닫기
x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