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이집트 혁명에 대한 개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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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형제단의 곤경은 사태 초기부터 분명했다. 2011년 1월 25일 시위가 있기 며칠 전 그 단체의 가장 저명한 인사인 에삼 엘에리안은 무슬림형제단이 대중 동원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85 (지금은 대통령인) 무함마드 무르시는 무슬림형제단이 “한 무리의 어린애들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활동가들에게 말했다. 86 1월 25일 시위의 규모와 정권의 대응 때문에 많은 무슬림형제단 회원들이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 지도부는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꿔, 1월 28일 금요일이 “인티파다의 날”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87 이날 많은 활동가들이 살해당했고 야만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혁명적사회주의자단체의 한 회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이크완 지도자들은 애초에는 회원들에게 시위에 참가하지 말라고 해 자기 조직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크완은 오랫동안 무바라크에 반대해 왔지만, 마침내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사실 지도자들은 [이크완의 — 마플릿] 평범한 형제자매들을 통제할 수 없었고 어쨌거나 그 형제자매들은 우리와 함께 투쟁했다. 특히 1월 28일에 대거 동참했다. 우리는 그들이 이크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민중과 함께,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싸웠다. 그들은 조직돼 있었고 매우 유능했다. 우리는 종교나 조직과 상관없이 단결했지만, 이크완은 민중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88

수십 년간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정권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집트의 감옥은 무슬림형제단 회원들로 가득 찼고, 심지어 무바라크는 운동에서 적극적 구실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된 80대 노인들조차 시범타로 감옥에 가뒀다. 무슬림형제단 모임은 금지되거나 일상으로 공격받았고, 인기 있는 이슬람주의자 후보가 선거에 출마한 지역의 투표소에서는 야만적 폭력이 벌어졌다. 89 무슬림형제단은 반전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면서 이에 대응할 기회들이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도부는 그 기회를 거부했다. 그 때문에 많은 회원들, 특히 청년 회원들이 분노했다.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장기전을 벌이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결코 주도권을 잡을 때가 아니며, 주도권은 운이 좋을 때 ‘신의 뜻으로’(’인샬라’) 오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전략에 확신이 없게 되자 무슬림형제단은 더한층 소심한 노선으로 후퇴했다. 2009년 보수파 무함마드 바데이가 이끄는 파벌이 무슬림형제단을 장악해, 단체 내 정치 활동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권은 기고만장해졌다. 2010년 선거에서는 투표 조작과 폭력이 너무 저열한 수준으로 난무해, 무슬림형제단조차 그 굴욕에 격분해 후보를 사퇴할 정도였다. 무슬림형제단은 2011년 1월 25일 혁명이 시작되고 그 물결에 휩쓸려 거리로 나왔을 때도 여전히 과거의 고통을 참고 견디고 있었다.

2011년 2월 무바라크가 퇴진하자,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머지 않았으며 이집트의 권좌에 오르는 순간이 80여 년 만에 코앞에 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는데, 바로 군부 엘리트와 대중이었다. 무바라크를 밀어낸 군부 지도자들은 국가를 통제하는 기구로 군최고평의회를 설치했다.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재빠르게 자신들의 활동을 재조정했다. 수십 년에 걸친 관성에 따라 그들은 장군들의 환심을 사려 하면서 새로운 권력자들에게 순응했다. 타렉은 2011년 초기 몇 달간 세속적 활동가들이 보기에 “무슬림형제단과 군최고평의회가 합심한 듯했다”고 전했다. “양측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는, 막후에서 이뤄지는 거래, 합의, 또는 협상”, 즉 “밀월”을 즐겼다는 것이다. 90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선거 준비와 새 헌법 제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부여받는 등 군최고평의회가 주는 특혜를 대가로 대중 운동을 진정시킬 준비가 돼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의 유력 인물들은 자신들이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을 것이며 의회 의석의 25퍼센트만 놓고 경쟁할 것이라고 말해, 군부의 뜻을 존중하고 군부를 따를 것임을 넌지시 비쳤다. 엘에리안은 무슬림형제단이 정당이 아니며 권력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국민과 함께 한다. 우리의 목표는 국민이지, 권력이 아니다.” 91 엘에리안은 대통령 선거 문제에 관해서도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남자든 여자든 후보는 단 한 명도 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후보를 낼 생각이 전혀 없다.” 92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무바라크 시절에 격하게 반대했던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문제를 회피했고, 민간인들이 군사 재판을 받는 문제(자신들의 지도자 상당수가 군사 재판을 받고 수감됐다)도 회피했다. 한편 대중은 계속 시위를 벌여 무바라크와 ‘펠로울’ 재판, 국가 기구 내 적폐 세력 숙청, 항쟁 순교자에 대한 정의 등을 요구했다. 산업 전반에 걸쳐 파업이 일어나 온갖 종류의 경제 문제를 제기했고, ‘타흐리르’[해방]를 지향하며 부패한 관리자와 기업 소유주, [혁명에] 적대적인 어용 노조 관료들을 일소하고자 했다. 경찰이 거리 행동과 파업을 공격하는 일들이 늘었는데, 이는 명백히 군최고평의회가 승인한 것이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에 대해 대체로 침묵하며 새롭게 자행되는 탄압을 사실상 용인했고, “제2의 분노의 날”(“1월 25일 혁명의 목표 실현”을 촉구하며 2011년 5월에 호소됐다) 같은 상징적 의미가 있는 행동을 비롯해 주요한 전국적 시위들과 거리를 뒀다. 93 무슬림형제단의 청년 회원들이 지도부를 거슬러 ‘분노의 날’ 행동에 대거 참가하자 단체 내부의 긴장감이 표면화됐다.

최근 무슬림형제단에서 탈퇴가 줄이었다. 특히 이집트 밖에서는 오랫동안 무슬림형제단이 종교적 믿음과 조직적 충성에 충실한 충성파 일색인 조직으로 여겨졌다. 이런 관점은 이슬람주의 단체와 정당들을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집단과 매우 비슷하게 묘사하려는, 즉 엄격한 지도부에 대해 어떤 의심도 없이 충성하는 구성원들로 이뤄진 균질적인 집단으로 묘사하려는 의도에 부합한다. 2011년 1월 항쟁 이후 《포린 어페어스》(미국외교협회가 발행하는 저널)가 작성한 분석을 보면, 이크완은 여전히 “깨질 수 없는 무슬림형제단”이며 “회원들은 전국적 지도부의 목표를 지역적 수준에서 충실히 이행”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지지자들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다. 94 이는 명백히 잘못된 관점이었다. 1996년에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지도부를 비판한 탈퇴파들이 와사트당을 창당했다. 2010년에도 반대파들이 ‘개혁 전선’을 결성해 당내 구조를 개방적으로 재편하라고 요구했다. 2011년 1월 혁명이 시작됐을 때 많은 회원들이 지도부를 무시했다. 직장 동료, 학교 친구, 이웃, 가족, 친구와의 연대감이 무슬림형제단의 ‘막타브 알이르샤드’, 즉 주요 의사결정 기구인 ‘지도국’의 어르신들에 대한 충성심보다 더 컸다. 무르시의 말을 뒤집으면, 무슬림형제단 회원들은 “어린애들을 따라”갔던 것이다. 무바라크 퇴진 이후 민주적 활동이 만개한 동안, 평회원들은 각종 거리 시위와 파업에 참가했고 학생과 지역사회 속에서 주도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사회 전반의 집단적 자신감 상승에 크게 영향 받아, 구질서와 군최고평의회 또는 [무슬림형제단] 지도국의 권위를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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