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이집트 혁명에 대한 개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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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나세르 이전에 겪은 역사와 1980~1990년대의 전개 둘 다를 보면, 무슬림형제단 같은 단체가 발전 과정에서 각각 국면마다 뚜렷이 상이한 사회 집단들을 대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무슬림형제단의 역사는 변화와 모순, 체계적이면서 동시에 반체계적인 면으로 가득하다. … 무슬림형제단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인데, 운동의 사회적 구성이 내부 모순과 변화를 겪으면서 전략·전술·담론·강령의 변화를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70

한 세대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70년대 초 이집트로 돌아온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적 회원들은 훨씬 더 보수적인 어젠다를 제시했다. 기업인, 특히 이슬람 은행과 관련된 이들이 주를 이뤘는데, 이들은 소련 진영에서 미국-이스라엘 진영으로 말을 갈아타려던 사다트와 관계를 맺고 시장화 계획, 즉 ‘인피타’(“개방”)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와 동시에, 젊은 회원들(다수는 오늘날 무슬림형제단의 지도부를 맡고 있다)은 학생과 청년들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했다. 1980~1990년대 무바라크가 급진 지하드주의를 혹독하게 탄압해 이들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무슬림형제단은 또다시 대중 조직으로 성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은 특히 캠퍼스와 직능 단체들 속에서 성장했고, 지역 복지 협회, 진료소, 학교에 기반을 둔 광범한 사회 프로그램을 통해 빈민 가정들에 서비스를 제공했다. 무슬림형제단은 곧 정권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야당이 됐고,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창했으며, 공무원들의 부패와 무바라크의 경찰 국가를 비판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창하던 친시장 담론 안에 포함된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포퓰리즘적 비판”을 했다. 71 좌파가 독자적 세력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여전히 마비돼 있는 상황에서, 무슬림형제단은 모든 이집트인, 적어도 모든 무슬림들(적잖은 소수인 기독교인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은 부유층, 프티부르주아지,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 다양한 부문에서 회원을 충원했다.

무슬림형제단의 선거 공약은 이슬람 원리에 따른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2011년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은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개혁주의 어젠다를 내놓았다.

우리 선거 공약은 사회 정의를 달성하고, 경제 활동에서 나오는 수익을 분배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무의 일부[인 — 마플릿] 정의와 평등과 기회의 균등을 이뤄낼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을 알고 있는 우리는 선거 공약에서 고물가 문제 해결, 빈곤과 실업 해소, 교육, 의료, 대중교통 및 기타 서비스와 공공시설 등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 제공,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 조건 개선, 독신녀[원문 그대로 — 마플릿]와 길거리 아이들과 장애인 같은 사회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 해결책 찾기, 입양 가족 지원, 연금 수령자들의 수익 증대 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모든 시민들을 위한 정의를 실현하려 노력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 같은 것들을 고려할 것이다. 국가 재정에서 빼돌린 돈들을 되찾아 오고, 세금 제도를 개혁하며, ‘자카트’와 ‘와크프’(전국적 기부와 자선 신탁) 제도를 촉진시키고, 부패 및 국가 자원의 의도적 낭비와 탕진에 맞서 싸운다. 그러면 모든 시민들이 바라는 사회 정의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72

전 세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공약을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자카트’와 ‘와크프’에 관한 언급만 빼면, 유럽의 정당들이 제시하는 개혁주의 어젠다와 다를 바 없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제 여러 협회들(의사, 치과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언론인들의 협회)뿐 아니라, 모든 캠퍼스에서 이슬람주의 정치를 유력한 경향으로 만든 대규모 학생 단체들을 통해 광범한 지지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한편, 그들은 또 다른 부류의 개혁주의인 옛 좌파의 위기로부터 득을 봤다.

스탈린주의의 유산

1960년대 이후 이집트 좌파의 전력은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역사에서 가장 형편없는 축에 든다. 1965년 이집트공산당이 해산하자 지도적 당원들이 이집트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던 나세르의 아랍사회주의연합에 입당했다. 이 당은 이론상으로는 마을, 도시, 직장·교육 기관마다 지부가 있는 대중 당원 조직이었지만, 실제로는 껍데기뿐인 조직이었다. 당내 활동은 전혀 없었고, 당원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세르 자신도 결국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 당의 내부 조직 체계는 장부에만 존재할 뿐이다.” 73 노조는 국가 기관 — 모든 국내 정치 활동을 통제하는 관료와 군대 장교들이 운영하는 — 에 지나지 않았다. 작업장에서 아랍사회주의연합의 공식적 임무는 교육을 촉진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보안 기구의 일부로 운영됐으며 노동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역 관리자도 감시했다. 나세르의 최측근이자 언론인이었던 무하마드 하사네인 헤이칼은 아랍사회주의연합이 산업에서는 주로 스파이 조직으로 운영된다고 말한 바 있다. 74

공산당 잔존 세력은 아랍사회주의연합에 입당하면서 독자적 조직을 완전히 버렸고, 독재의 옹호자가 됐다. 그들은 1970년대 노동자 투쟁에서 의미 있는 구실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단명한 노동자공산당을 결성한 젊은 활동가들이 그 손실을 메우려 했지만, 이들은 이집트공산당의 붕괴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 활동해야 했다. 1980년대에 공산당 잔존 세력은 타감무에서 확고하게 터를 잡았다. 초기에 타감무의 당원은 15만 명이고 그중 핵심 활동가가 2만 명이 됐고, 당 주간지인 〈알아할리〉는 발행 부수가 13만 부였다고 한다. 75 이 수치들이 과장됐다고 해도, 사회 혼란의 시기에 타감무의 청중이 많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타감무는 어김없이 이 청중을 무바라크에 순응시키는 방향으로 끌고갔다. 타감무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항의한다는 것 말고는 고유한 방침이 없었다. 타감무 지도자들은 이슬람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았고, 정권이 무슬림 활동가들에게 노골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지지할 태세가 돼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타감무 사무총장 리파트 알사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집권당의 정책이 틀리고 이 나라에 위험하다고 보지만,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더 틀리고 더 위험하다.” 76 정권은 타감무를 기꺼이 활용했는데, 관료들이 무슬림형제단의 활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타감무에 유리하게 선거를 조작했다는 혐의가 종종 제기됐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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