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3호 2020년 3~4월호)

지난 호

마르크스주의와 동아시아 역사

유럽중심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보편주의로

오언 밀러 케임브리지대학교 연구교수이자 런던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학대학 강사 34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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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언 밀러가 기고한 영어 논문 ‘Marxism and East Asian history: from Eurocentrism and Nationalism to Marxist Universalism’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 천경록 / 교열·감수: 이수현·최일붕

1. 서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자임하는 목표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곧, 지배계급의 역사 서술에서 배제된 민초들의 역사를 재발견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와 계급사회 일반을 인간 사회의 특수한 형태로서 역사화하는 것, 사회 변혁 전략을 위한 경험적 자료를 축적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의 가장 원대한 목표는 보편적 인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다. 튼튼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부르주아 역사 서술의 이분법과 관념론을 거부하면서 말이다. 이 원대한 목표의 실현은 아직 요원하다. 특히, 동아시아 역사를 마르크스주의적 인류사에 접목시키는 데서 어려움이 많다. 20세기에는 동아시아와 옛 소련의 역사학자들과 유럽의 일부 학자들이 중국·일본·한국의 역사를 마르크스주의적 이론 틀에 끼워 맞추려고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1 나는 이 같은 시도들이 대체로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제2인터내셔널과 스탈린주의의 기계적이고 단계론적인 도식에 충실했던 그 밖의 ‘마르크스주의적’ 역사학에도 해당되는 얘기다.2

이처럼 실적이 저조한 탓에 일각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이론이 스스로 약속한 보편적 인류사를 제시할 능력이 없다고 결론짓기도 했다.3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는 유럽중심적이지 않은 인류사를 구축하기 위한 도구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미 그러한 작업에 필수적인 이론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내에서(스탈린주의 시대에는 흔히 그 정치적 변두리에서) 개발됐지만 아직 체계적으로 상호 결합되고 일관되게 적용되지 못했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야말로 인류 역사와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를 갖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그러한 도구를 더 날카롭게 다듬고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단지 하나의 사례로서 한국만 봐도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서술의 이 같은 쇄신이 왜 필요한지를 알 수 있다. 약 20년 동안 좌파 민족주의 학자들이 유력했던 남한의 한국사학계는 지난 10년 동안 오른쪽으로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스탈린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의 명백한 문제점들을 비판하며 2000년대에 진행된 역풍은 한규한이 말한 “우파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반동적 이중주”를 불러 왔다.4 새롭게 떠오르는 ‘탈민족주의’와 뉴라이트 역사 서술은 갖가지 본질론을 거부한다면서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적 범주의 해체와 학문적 객관성을 내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종의 ‘국제주의적’ 실용주의를 내세운다.5 그러나 이르판 하비브가 인도의 서발턴 그룹과 관련해서 지적했듯이, 탈식민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초국적’ 식민주의 담론을 은폐하는 위장막으로 너무나 쉽게 악용된다.6 그런가 하면 뉴라이트의 반민족주의는 역대 남한 군사독재 정권들을 정당화하고 남한이 미국의 종속국 구실을 하는 것을 고무·찬양하기 위한 얄팍한 외피 이상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유럽중심주의, 민족주의, 기계적 단계론 등으로 왜곡된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로는 우파들의 이 같은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식민지 근대성, 동아시아 경제 발전, 보편적 인류사 등에 관한 논쟁에 효과적으로 개입하려면 비유럽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좀더 일관된 이론적 틀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유럽중심주의와 기존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의 문제점들을 살펴본 다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명시적으로 보편주의적인 인류사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다음 절에서는 그러한 인류사를 서술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세 가지 이론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트로츠키의 불균등·결합 발전 이론, 2) 사미르 아민 등이 개발한 전자본주의 중심부·주변부 이론과 공납제 생산양식론, 3) 안토니오 그람시가 최초로 고안했으나 최근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승·발전시킨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론과 수동 혁명론.

2. 유럽중심주의와 기존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의 문제점들

2.1 유럽중심주의와 역사

보편적 인류사를 구축하는 데서 가장 큰 장애물은 현재 대세를 이루는 특수주의적 또는 예외주의적 담론들이며, 그 중에서도 유럽중심주의와 그것의 거울 이미지라 할 수 있는 유럽과 북미 외 지역의 민족주의다. 사실, 유럽중심주의는 아직도 거의 모든 역사 서술의 기본 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 저술의 대다수에도, 그리고 역사적 유럽중심주의와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역사 저술의 대다수에도 해당하는 얘기다.7 그렇다면 역사 서술에서 유럽중심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다음은 유럽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논의의 목적상 중요한 요소들을 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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