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지금의 이슈들
3대 세습 북한은 어디로?
북한 권력 세습의 정치·경제적 배경과 전망
3 그러나 북한 당국의 실제 행보는 북한 공식 담론의 “인물 본위 원칙”을 존중하려던 일부 자유주의 학자들의 조심스러움을 가뿐히 제쳐버렸다.
일부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특정인 후계자 지명설”이 “객관적 현실보다 지나치게 앞서가는 위험”이 있다고 경계했다. “북한이 공식화한 후계자론의 원칙을 감안해야” 하므로 “혈통 승계와 비혈통 승계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아야” 한다고도 했다.4 《세습은 없다 ―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는 그 한 사례다. 이 책의 저자 김광수는 “절실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의 ‘핏줄’에 의한 낙점설이 계속하여 흘러나오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5 대신에 김광수는 몇 가지 사실들이 “김정일로 하여금 자신의 후계자 문제에 대해 김일성 ‘적자’ 가계라는 ‘혈통’에만 집착할 수 없게 하고, ‘혈통’ 절대론에서 국가적 위기 극복과 국내외적 환경을 고려할 수밖에 없게 하는, 즉 ‘능력’ 중심론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정일의 ‘아들만’이 2기 후계자가 된다는 확증은 적어도 ‘북한적’ 시각으로 볼 때는 이론적 오류”라고 강조하고, “변화된 대내외적 환경으로 인해 능력 중심의 2기 후계자로 만들어질 수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고 했다. 6
“혈통 승계” 전망을 경계하는 더 선명한 입장은 자민통 계열에서 나왔다. “핏줄 중심 논의의 경향성을 극복”할 목적으로 썼다는7 그러나 그의 책이 출간된 지 채 2년이 되기 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그 목적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이것은 우익의 반북 선전에 맞서 북한을 대변·두둔·변호하는 식의 대응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 준다. 김광수는 북한의 후계자론을 따라 “인물 본위”를 예측에 적용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셈인데 이것은 북한 당국이 설파하는 ‘말’, ‘이론’, ‘사상’을 그대로 믿고 좇아서는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전망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김광수가 주목하고자 했던 가능성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그는 “세습”이 부각돼 북한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을 완화하고 싶었던 듯하다. 물론 김광수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김정일 위원장의 셋째 아들이 후계자가 됐지만, 그것은 ‘혈통’ 때문이 아니라 ‘능력’ 때문이라고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북한 “후계자론”의 설명 방식이고, 이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도 세습이 아니게 된다. 그의 책 제목이 《세습은 없다》인 이유다. 실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 김정은으로의 권력 승계가 드러난 다음에 자민통 계열 인사들은 “북한은 나름대로 독특한 후계자론을 갖고 있”으므로 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북한의 후계자론에 따르면 후계자는 … 혈통이 아니라 인물 즉 …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유일한 잣대라고 한다. … 그렇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세습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10 후계자론은 이재용이 능력이 없는데도 삼성의 3대 후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식의 얘기나 마찬가지다. 외국 유학으로 국제 감각을 익히고, 기업 안팎의 최고급 정보를 장악하고, 회장이 조직 개편을 단행해 세습을 뒷받침하는 상황에서 그 정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신망이 높고 뛰어난 인물이라도 선임자와 혈통이 같으면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법도 성립되지 않고, 똑같은 논리로 제아무리 신망이 없고 무능한 인물이라도 선임자와 혈통이 같다면 무조건 후임자로 될 자격이 있다는 논리도 성립할 수 없다”는11 그런데 자민통 계열 인사들은 흔히 북한의 공식 발표 말고는 알 수 있는 ‘팩트’(사실)가 없다면서 북한이 “스스로 제시한 이념”에만 기댄다. 예를 들어 박경순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은 “김정은이 과연 북한이 주장하는 후계자론에 걸맞게 후계자로 등장했는가? …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나 자료가 없다”고 12 말한다(과연 그런지는 아래에서 다룰 것이다).
자민통 계열 인사들의 후계자론 존중은 남북관계의 특수성(에 따른 상호 체제 인정·존중 원칙)을 근거로 하므로 가치 판단 자체는 피하는 모양새를 띤다. 그러나 북한의 이데올로기로 북한 사회 현실을 판단한다는 문제점(관념론의 일종인 이데올로기주의)만큼은 숨기기 어렵다. 즉, 북한의 공식 입장이 ‘혈통이 아니라 인물(의 자질)로 후계자를 뽑는다’이면 그리 인정해 줘야 한다는 식이다. 이처럼 북한의 주장이나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로는 제대로 된 “내재적 접근”도 할 수 없다. 송두율은 “내재적 접근”은 북한이 “스스로 제시한 이념을 그 경험적 성과에 비추어 본다는 관념”으로 “이러한 접근 방법은 이념과 경험의 긴장 관계를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다”고 썼다.13 기본 관점, 즉 “이데올로기가 사회 현실을 규정하고 있다”는 가정과 맞닿는다. 그래서 북한 사회의 “안정성과 제도화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체계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에 대하여는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14 전체주의론의 한 특징도 공유하게 된다. 물론 한쪽(자민통계)은 북한 주민들의 자발적 동의를 강조하고 다른 한쪽(전체주의론자들)은 억압에 의존한 통제를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북한만의 “독특한” 사상 체계(주체사상)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은 북한 예외주의, 예외국가론, 비정상국가론과도 맞닿을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아이러니이게도 자민통 계열과 대척점에 서 있는 전체주의론의15 이런 검토는 매우 중요하다. 이 글은 북한의 비민주적 정치체제가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와 관련 있기는커녕, 관료가 국가를 통해 집합적·간접적으로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사회·경제 관계와 한 짝이라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이 글은 북한의 정치제도가 얼마나 비민주적인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그동안 북한 당국 자신이 설파한 주장과도 큰 간극이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또, 북한의 비민주적 정치체제가 사회·경제 체제의 성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런 현실이 진정한 사회주의와 관련 있는지, 과연 레닌 당 개념의 귀결인지 등을 살펴볼 것이다. 이 글은 주체 노선과 수령제 확립, 권력 세습 같은 일이 왜 벌어지게 됐는지 역사적 배경도 돌아볼 텐데, 특히 북한의 경제적 필요와 관련지어 설명할 것이다. 흔히 북한 정치체제의 비민주성을 강하게 비판하는 인사나 연구자들도 거의 예외 없이 북한을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말한) 사회주의로 정의하므로1. 김정은 후계 체제 등장에서 드러난 북한 정치체제의 비민주성
16 임시적 성격이므로 수십 년 만에 열린 것을 탓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당대회는 얘기가 다르다. 조선로동당 규약을 보면, 당대회는 “당의 최고지도기관”으로 “당 로선과 정책 및 전략 전술에 관한 기본 문제[를] 결정”하게 돼 있다. 17 그런데 당대회는 1980년 제6차 당대회 이후 3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애초 1년마다 개최하기로 돼 있던 것을 제3차 당대회(1956년) 때 4년마다 개최하는 것으로 개정하고, 다시 제6차 당대회(1980년)에서 5년마다 개최하는 것으로 개정했지만,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김정은 후계 체제가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북한의 비민주적 정치체제, 조선로동당 운영 실태의 단면을 보여 준다. 우선, 당대표자회와 당대회 등 당내 의결기구가 유명무실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켰다. 9·28 당대표자회는 1966년 이후 44년 만에 처음 열렸다. 당대표자회는 당중앙위원회가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에” 소집할 수 있는18 당대회가 30년 동안, 당중앙위원회가 17년 동안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의 중요한 문제들을 소수가 막후에서 당내 토론 없이 결정했음을 뜻한다.
유명무실하기는 당중앙위원회도 마찬가지다. 당대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의 최고지도기관은 당중앙위원회지만,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도 1993년 이후 17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당 규약에 6개월에 한 번 이상 열도록 돼 있는데도 말이다.19 1980년에 처음 설치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포함해 단 5명으로 구성됐는데, 그나마 나머지는 모두 죽거나 해임되고 올해 9·28 당대표자회가 열리기 전 오랫동안 오직 한 명, 김정일만이 남아 있었다. 20 요컨대 김정일 1인이 “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당의 모든 사업을 조직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당 규약은 당중앙위원회 비서국이 “당 인사 및 당면 문제”를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21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는 비서국의 총비서도 1997년 이후 김정일이었다.
당 규약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전원회의와 전원회의 사이에 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당의 모든 사업을 조직 지도”하도록 허용한다.22 이 과정에서 인민은 물론 당원들의 추대 과정도 없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박경순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처럼 “김정은의 중앙위원과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선출이 …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주기 위한 조처였는지 … 북한의 인민과 당원들이 아래로부터 추대했는지 본인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23 하는 것은 형식적인 변명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보면, 당대회와 당중앙위원회가 열리지 않는 동안 김정은이 도대체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후계자로 내정됐는지 짐작할 수 있고,후계자론을 충족시키지 못한 새 후계자의 등장
24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들은 즉시 전원회의를 열었는데 그들이 한 일은 오로지 주요 당 기구 간부를 선출하거나 조직한 것이었다(김정은은 이를 통해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됐다). 앞에서 봤듯이, 소수의 주요 당 간부들은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되거나 조직되지만 중앙위원회에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중앙위원회가 아예 소집되지 않으니 책임질 일도 없다. 중앙위원회는 당대회나 당대표자회에서 선출되지만 여기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당대회가 아예 소집되지 않으니 책임질 일도 없다. 선거가 요식 절차일 뿐임을 잘 보여 준다.
9·28 당대표자회는 이미 내정된 후계자를 사후 승인한 것에 불과했다. 당대표자회는 후계자 등장의 구색을 맞추려고 44년 만에 소집된 것이다. 이는 17년 만에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도 마찬가지다.25 점은 그동안 요식 절차조차 흔히 무시됐음을 확인해 줄 뿐이다. 대표 사례로, 김정일은 핵심 직책을 선거 없이 “추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선, 그가 1997년 총비서에 취임했을 때 당대회는 물론 당대표자회나 당중앙위원회도 소집되지 않았다. “당조직들의 대표회들”의 추대를 받아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선포하는 형식이었는데, 황당하게도 〈로동신문〉은 이를 대단한 일로 치켜세웠다. “그 어떤 실무적 절차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당적인 일대 정치적 사업으로 당의 최고 령도자를 추대한 것은 로동계급의 당 력사에 일찍이 없었던 사변[이다.]” 26 이번 9·28 당대표자회에서도 김정일은 조선로동당 중앙지도기관 선거와는 별개로 27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재추대됐다. 28
일부 북한 연구자들이 이런 요식 절차를 “정상화”, “정상적 절차 회복”으로 평가한다는29 그 후 1998년 제10기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 2003년 제11기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 2009년 제12기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제의로 계속 “재추대”됐다. 30 헌법에는 최고인민회의가 국방위원장을 선거하고 소환할 수 있게 돼 있지만, 31 실제로는 “소환”은커녕 “선거”한 적도 없다.
김정일이 1993년 4월 또 다른 핵심 직책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된 것도 “추대” 덕분이었고,32 “현장에서 일하는 핵심 당원”은 고작 7퍼센트인데, 이 가운데 노동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데다 노동자이더라도 “노력 영웅”일 가능성이 크다. 또,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정한 당중앙위원회는 위원 1백24명, 후보위원 1백5명 등으로 구성됐는데, 이들은 북한의 핵심 엘리트다. 1970~90년대 통계를 보면 당 중앙위원은 대개 당, 행정기관, 최고인민회의, 군부 출신자들로 구성되며, 학력이 매우 높고, 절반 이상이 해외 경험이 있는 특권층이다. 33
설사 김정은이 당 중앙위원과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된 것이 당대표자들과 중앙위원회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라 쳐도, 인민이 추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정은을 당 중앙위원으로 뽑은 9·28 당대표자회 대표자 1천6백53명의 구성을 보면, 당 관료(40.6퍼센트), 국가·행정·경제 관료(20.7퍼센트), 군부 인사(27.2퍼센트)가 무려 88.5퍼센트를 차지한다.34 북한 공식 입장조차 충족시키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일각에서는 아직 김정은이 후계자로 확정된 것은 아니며 “후계자로 확정되는 과정이 이처럼[후계자론에서 말하는 대로 ― 인용자] 공정한 과정을 거칠 것인가에 대해” 열어두고 지켜봐야지 부정적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35 물론 김정은은 후계 공식화를 남겨두고 있다(7차 당대회에서 공식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후계자론을 보더라도, 후계자는 “유일지도자로서의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며, 이 절대적 지위는 수령의 후계자가 등장하여 수령의 사업을 보좌하는 때로부터 시작[된다.]” 36 김정은은 후계자의 요건을 입증해 보이기도 전에 절대적 지위를 갖게 된 셈이다. 이는 김정은 후계 공식화까지의 과정이 결코 그의 능력이 아니라 막강한 힘으로 뒷받침될 것임을 뜻한다.
앞의 사실들을 보면, 김정은이 “수령의 후계자는 … 인민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 사랑을 받는 혁명의 지도자만이 될 수 있다”는37 또, 북한 당국의 인터넷 매체 〈우리끼리〉에는 “‘천리혜안의 예지와 해박한 식견, 비범한 군사적 지략과 상상을 초월하는 다재다능의 실력’ 등 청년대장 동지의 위인상에 대해 익히 들어 왔었다”는 김정은 찬양 글이 실렸다. 38
이런 뒷받침은 이미 시작됐는데, 두드러지는 것은 국가 언론 매체를 통한 김정은 홍보와 근거를 알기 어려운 찬양이다. 최근 〈노동신문〉(11월 4일자)은 “발행 면수를 10면(평소 6면)으로 늘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정은을 대동해 자강도 희천 발전소 건설장을 현지 지도한 소식을 전하는 데 10면 전체를 썼”고, 그중 “3~10면은 사진으로만 채”웠다.39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모든 문제를 후계자에게 집중시키고 후계자의 결정에 따라 모든 사업을 처리해 나가”며 “후계자의 의도와 방침을 절대성의 정신에서 접수하고 무조건성의 원칙에서 철저히 관철”하는 것 등이다. 40
후계 체제가 막강한 힘으로 뒷받침된다는 사실은 후계자론을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은 “후계자를 옳게 내세웠다고 해도 그의 영도 실현의 여건들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며 후계자의 “유일적 영도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한다. 김일성도 “당의 위업을 옳게 계승해 나가기 위하여서는 후계자를 바로 내세우는 것과 함께 그의 령도를 실현할 수 있는 조직 사상적 기초를 튼튼히 쌓고 령도 체계를 철저히 내세워야 합니다” 하고 강조한 바 있다.41 등은 김정은 자신이 입증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권력 구조 속에서 조작되고 인민에게 강요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조건에서 성과를 내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후계자론이 언급하는 후계자의 요건, 즉 “비범한 사상이론적 예지와 뛰어난 영도력, 고매한 공산주의 덕성” 또는 “혁명과 건설에서 이룩한 업적과 공헌을 통해 인민들 속에서 향유하는 절대적인 권위와 위신”42 한다는 후계자론 사이의 모순은 ‘수령이 곧 대중’이라는 다음과 같은 수령론의 논리로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수령의 명령과 지시는 당과 대중의 조직적 의사인 것이지 어느 개인의 의지가 아니며 수령의 명령은 다름 아닌 대중의 명령이 된다는 것, 따라서 수령의 명령과 지시에 충실하다는 것은 당과 대중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3
요컨대, 김정은이 김정일(과 극소수 권력자들)에 의해 후계자로 내정되고 뒷받침되는 현실과 “후계자는 전민중적 추대에 기초해서 선출해야”노동자들이 배제된 국가와 당 운영
44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르다.
김정은 후계 체제 등장 과정을 보면, 국가 지도자 선출 같은 중요한 문제에서 노동자와 민중이 완전히 배제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헌법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 인테리를 비롯한 근로 인민에게 있”고 “근로 인민은 자기의 대표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지방 각급 인민회의를 통하여 주권을 행사한다”고 돼 있다.45 전체 인구에서 공장·기업소 노동자의 비율이 63.1퍼센트인 것을 볼 때 형편없이 작은 비중이다. 46 반대로, 대의원의 94.2퍼센트가 학력이 대졸 이상인데, 이는 사회 전체의 학력 수준과 견주면 매우 높은 편이다. 북한에서 인구 1만 명당 대학생 수는 2008년 2백18.9명이었고, 47 중학교 졸업자 가운데 대학 진학자는 10퍼센트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48
우선,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대의원의 사회적 구성을 봐도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다. 2009년 3월 8일 실시된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노동자는 전체 대의원의 10.9퍼센트밖에 안 된다.49 〈자주민보〉의 한 기고자는 1백 퍼센트 찬성률을 두고 “북한 주민에게 검증받고 신뢰받는 사람이 단독 후보자로 추천되는 북한식 선거 제도의 특징”이라고 정당화했다. 그러나 그 기고자는 당과 국가가 후보자를 ‘검증’한다는 사실도 무심결에 누설하고 말았다. 50 이렇게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인민들을 대변하지 않으리라는 점은 불문가지다.
게다가 노동자가 10퍼센트를 차지한다 해도 이 대의원들을 노동자들이 자의로 선출한, 노동자들의 대표자라고 볼 수 없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선거구마다 오직 한 명만 입후보할 수 있는데, 당 중앙위 비서국 조직지도부와 간부부가 중심이 돼 후보를 선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과 수령에 충성하는 자만이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가운데 영웅 칭호 등 명예 칭호 보유자는 42.4퍼센트나 된다. 또, 위에서 선정된 후보에 찬성 투표할 것이 강요된다. 2009년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투표율 99.98퍼센트, 찬성률 1백 퍼센트였다. 한국전쟁 이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찬성률은 1957년 한 해(99.92퍼센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1백 퍼센트였다.51 당의 결정을 추인하는 거수기 노릇만 할 뿐 실권은 전혀 없다. 1998년 이후 최고인민회의는 대개 1년에 한 번, 대개 단 하루만 열린다. 제12기 최고인민회의도 1차 회의가 2009년 4월 9일 하루, 2차 회의가 2010년 4월 9일 하루 열렸다. 52 3차 회의가 2010년에 한 번 더 열리자(6월 7일) ‘비상회의’ 성격을 띤다는 얘기마저 나올 정도였다. 53 회기가 단 하루라니! 그러다 보니,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심의하고 토론하고 논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최고인민회의는 헌법상 “최고주권기관”이지만54 그런데 이 당위원회들은 해당 단위의 노동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기구가 아니다. 조선로동당은 오로지 “수령의 의지가 최말단 단위의 당세포까지 전달되고 실현되는 단일한 지도 체계”를 55 추구하며, 이를 중심으로 국가기관들과 대중 단체들에도 수령의 의지가 관철되는 “유일적 영도 체계”를 수립하려 해 왔다.
모든 국가 기구를 통제하는 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조선로동당이다. 그러나 조선로동당은 이름은 노동당이지만 노동자들의 당이 아니라 관료들의 당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당 대표자의 사회적 구성에서도 잘 드러난다(당·국가 관료가 88퍼센트 이상을 차지). 당(오직 한 당)의 국가 기구 통제는 아예 헌법으로 보장돼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 국가행정기관은 당이 노선과 정책을 결정하면 전국적 범위에서 그 집행을 조직·지휘하는 도구로 인식된다. 1959년 조선로동당은 “도·시·군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국가기관, 경제·문화 기관 등 모든 기관·단체들이 ‘해당 당위원회의 통제 하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조선로동당은 철저한 상명하복 원칙을 강조한다. 당 규약 11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당원은 당조직에 복종하며 … 하급 당조직은 상급 당조직에 복종하며 모든 당조직은 당 중앙위원회에 절대 복종한다. 모든 당조직은 당의 로선과 정책을 무조건 옹호 관철하며 하급 당조직은 상급 당조직의 결정을 의무적으로 집행하여야 한다.”57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다. 당 기층에 요구되는 것은 그저 수령에 대한 충성 맹세뿐이다. 예를 들어, 2007년 ‘전국 당세포비서 대회’가 한 일은 오직 김정일에 대한 “맹세문”을 채택한 것뿐이었다. 58
반대로, 민주주의는 없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당대회는 수십 년째 개점휴업 상태고, “혁명적 당 안에는 오직 하나의 사상만이 … 수령의 혁명 사상”만이 있을 수 있다고 규정해59 실제로 볼셰비키당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았고 개인 숭배의 요소도 없었다. 심지어 볼셰비키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 준 내전 동안에도 당대회와 당협의회에서는 자유로운 토론이 지속됐다. 아나키스트 출신으로 러시아 혁명을 지지한 빅토르 세르주의 묘사를 보면, 레닌을 반대하거나 비판하기를 두려워하는 당원은 없었고 그의 권위는 전혀 강요되지 않았다.
이처럼 토론과 논쟁과 비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조선로동당의 획일적 체제는 당 규약 11조의 제목과 달리 “민주주의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관료적 중앙집권제이고, ‘지도’가 아니라 지배(그람시의 구분이다)일 뿐이다. 레닌은 “행동의 통일, 토론과 비판의 자유. 오직 이 원칙만이 선진 계급의 민주적 당에 걸맞은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토론과 비판의 자유 없는 행동의 통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60 요컨대 무지몽매한 대중에게는 무오류의 “수령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민 대중은 가르치고 통제해야 할 대상이라는 이 같은 주장은 민주집중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지배 정당화 논리일 뿐이다.
레닌 시절의 이 같은 당내 민주주의 전통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원칙과 맞물려 있었다. 반대로, 조선로동당과 그 당의 유일 사상인 주체사상은 인민 대중이 스스로 해방할 능력이 없다고 가정한다. “인민 대중은 그 자체로서는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데 절실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나 운명 개척의 길을 알지 못하며 자기의 생활적 방도를 실현하려는 욕망과 염원은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현실로 전변시킬 방도를 알지 못하고 있다”(《주체사상의 사회력사원리》).마르크스와 레닌의 유산?
61 여기에 더해, 196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수령제’와 ‘후계 체제’를 통해 북한 사회가 굴절됐다는 주장도 아주 흔하다(일부는 문제가 이때부터 나타났다고 보고, 또 다른 일부는 악화했다고 한다). 62
지금까지 살펴본 북한 국가와 조선로동당의 비민주성을 부정하거나 정당화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관료 독재, 당 독재, 일인 독재가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흔한 해석 하나는 그것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과 레닌의 당 개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에서 현실 사회주의 국가기관의 주요한 특성이 도출”됐고 “레닌에 의해 발전”됐으며 북한이 이런 “사회주의의 보편적 국가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식의 흔해 빠진 설명은 북한 학자들의 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63 북한 당국은 1972년 개정 헌법(“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천명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시를 명문화했다. 북한 당국은 국가와 조선로동당이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으로 운영된다고도 한다.
북한을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레닌의 민주집중제와 연결시키는 주장은 무엇보다 스탈린주의 국가 북한의 공식 입장이다. 김일성은 “천재적 맑스-레닌주의자”라고 한다.에 대한 독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 국가를 대체할 국가의 사회적 내용을 나타내는 말로,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지배계급이 되는 것, 즉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뜻했다. 자본주의 국가는 소수의 착취자가 다수의 피착취자를 지배하는 수단이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역사상 최초로 다수인 노동 대중 자신이 국가를 통제하고 옛 착취자들의 반혁명적 저항을 분쇄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64 즉,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1871년 파리 코뮌을 거치며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됐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인 코뮌은 보통선거로 선출되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는 대표자들로 구성됐으며(모든 공직자의 선출), 그 구성원의 대다수는 노동자들과 노동계급의 대표였다. 코뮌은 단지 의회 기구가 아니라 (책임성을 위해) 행정부인 동시에 입법부였고, 코뮌 구성원들은 노동자 평균 임금만을 받고 공공 서비스를 수행했다. 코뮌이 취한 조처의 핵심은 “국가를 인민의 통제에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고차적 형태의 민주주의다.”65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일시적인 것으로, 자본주의와 무계급 공산주의 사회 사이의 “필수적 경과점”이라고 생각했다. 66
코뮌의 첫 포고령은 상비군 철폐였다. 물론 ‘특별한 억압 기구’인 국가도 당분간 여전히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과도기 국가일 뿐이고 더는 엄밀한 의미의 국가가 아니다(반쯤 소멸한 국가). “어제의 임금 노예였던 다수가 소수의 착취자들을 억압하는 것은 비교적 아주 쉽고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착취자들은 아주 복잡한 억압 기구 없이는 민중을 억압할 수 없지만 민중은 매우 간단한 ‘기구’만으로도, ‘기구’가 거의 없이도, 특별한 기구 없이도, 무장한 민중이라는 간단한 조직(예컨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같은)만으로도 착취자들을 억압할 수 있다.”67 앞에서 봤듯이, 내각과 군대의 고위 간부는 물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조차 자유로운 선거와 소환이 가능하지 않다. 당·정·군 간부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것은 인민이 아니라 당의 핵심 기구인 조직지도부다. 68 고위 관료들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풍요와 특권을 누린다. 이는 김정남의 마카오 호화 저택과 배우 뺨치는 명품 패션, 김정은의 해외 유학과 20대의 권력 승계(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지 4년 만에)만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오스트리아의 한 사업가가 북한에 50억 원대의 사치품 ― 최고급 요트, 최신형 벤츠S-클래식, 초고가 그랜드 피아노 등 ― 을 팔았다가 벌금형을 받았는데, 이런 물품이 누구에게 갈지는 뻔하다. 69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내각, 군대 등 국가기구는 앞에서 제시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징 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한다. 북한 국가가 노동자 혁명으로 수립된 게 아니라는 점은 여기서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70 조선공산당 당수였던 박헌영은 1953년 미제 간첩 누명을 쓰고 1956년 처형당했고, 역시 당 고위 간부였던 최창익과 박창옥 등은 1956년 김일성에 반대하다가 1960년 “반국가범죄” 혐의로 처형됐다.
북한의 억압 기구는 육중하게 발달돼 있다. 군대와 경찰 기구, 노동교화소와 정치범수용소, 사형제도와 반국가범죄법 같은 억압적 사법제도 등등. 북한의 국가는 “반쯤 소멸”하기는커녕 날로 강화됐다. 북한의 억압 기구는 옛 착취자들의 반혁명적 저항을 분쇄하는 데 사용된 게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그런 세력은 북한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북한의 억압 기구는 김일성과 김정일에 맞선 반대·불만 세력을 겨냥했고, 반대자 제거와 탄압을 정당화하려고 계급적 딱지를 붙였다. 예를 들어, 조선로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이었던 박금철과 리효순은 1967년 “부르주아 및 수정주의 분자”로 규정돼 숙청됐다.71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그 역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의식, “수령의 사상”만이 허용된다. 요컨대 누구든 “수령의 사상”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부르주아”이자 “반혁명 분자”가 되는 것이다. 72
김일성은 억압을 정당화하려고 희한한 개념을 만들었는데, “인민 대중의 성원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기본 척도는 계급적 토대가 아니라 어떤 사상을 가졌는가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73 “반국가 목적이 없”더라도 “집단적으로 국가기관의 지시에 응하지 않고 반항”하면 주동자는 최고 10년 이상 노동교화형에 처한다(집단적소요죄). 74 또, “폭행, 협박, 모욕의 방법으로 관리 일꾼의 직무집행을 방해한 자”도 노동교화형에 처한다(직무집행방해죄). 75 이런 법률은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억압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남한 노동자들이 쟁의행위로 흔히 적용받는 형사 처벌이 바로 ‘업무집행방해죄’다.
북한 형법은 “반국가 목적”으로 폭동·시위에 참가한 자, 선전·선동 행위를 한 자를 최고 무기노동교화형(무기징역)이나 사형 및 재산몰수형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다.76 노동자·민중의 자주적 활동은 완전히 금지돼 있다. “근로 대중의 조직들”은 “당의 외곽 조직”으로 “당의 지도하에서 자기의 사업을 진행”해야만 한다. 77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을 금지한다는 것은 북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북한 관료의 그것과 어긋난다는 것을 방증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북한 관료는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참여를 체계적으로 차단·억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과 그들의 자주적 활동에서 진정한 힘의 원천을 얻는다.
사상과 의견 표현의 자유는 없다. “출판질서를 어기고 출판물을 인쇄, 발행, 보급하였거나 타자, 복사”하는 것은 불법이다(출판질서위반죄).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러시아 소비에트가 바로 그랬다. 예를 들어,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가 혁명의 목표라는 점을 강조했다. 혁명 과정에서 등장해 공장을 통제한 공장위원회들은 사회주의 건설이 당면 과제로 떠오르는 상황에서는 파편화라는 역효과를 낼 수 있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레닌의 방식은 공장위원회 운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통제의 원칙을 모든 조직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지역의 요구와 충돌할지도 모르는 전국적 계획을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전국적 우선순위를 결정할 국가기관들에 노동자들의 참여를 극대화하는 데 있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북한의 일당 독재와 당-국가의 융합이 사회주의 원리를 따른 것이라고 여긴다. 북한도 공식적으로 “정치에서의 ‘다당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 방식”이고 “사회주의와 량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말이 아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트로츠키는 1930년대 소련 스탈린 체제를 비판하면서 계급 독재와 당 독재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하나의 계급에도 여러 ‘부분’이 있으므로 같은 계급에서 여러 정당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소비에트 정당들이 합법화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노동자·농민이 자유 투표를 해서 어떤 정당들을 소비에트 정당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81 레닌도 당과 국가의 융합을 점점 더 경계했다. 그는 병들어 눕기 직전인 1922년 당대회에서 “당 기구와 소비에트 정부 기구는 분리돼야 한다”고 다시금 강조했다. 82
실제로 1917년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거듭 당과 국가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실제로 1918년까지 소비에트 안에는 볼셰비키당뿐 아니라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당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내전과 외세의 침공 때문에, 공공연히 반혁명 편에 서거나 동요하는 이 당들을 규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당과 국가의 구분은 형식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과 소비에트는 점차 융합됐다. 그러나 이것은 끔찍한 내전이 빚어낸 차질이었지, 볼셰비키의 희망이 아니었다. 트로츠키가 지적하듯이,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이 조치[반대 정당 금지]가 원칙에 입각한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방위를 위한 일시적인 고육지책일 뿐이라고 생각했다.”83 당내 일인 독재와 지도자 개인숭배 모두 스탈린이 권력을 잡기 전에는 없던 현상이었다. 북한 당국은 ‘계급 독재냐 당 독재냐 수령 독재냐’ 하는 문제 제기는 대중-당-수령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돼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형이상학적으로 대립시킨 결과라며 일당-수령 독재를 정당화했다. 84 이것이 왜곡임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북한을 사회주의로 보고, ‘사회주의=일당 독재’ 식의 북한 공식 입장을 공유하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에 환멸감을 느끼는 진보·좌파가 흔히 의회 민주주의가 더 낫다거나 의회 제도가 결합돼야 소비에트의 관료화를 막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리는 이유다. 그러나 이것이 한낱 환상일 뿐이라는 것은 소련 붕괴 이후 의회 선거로 옛 스탈린주의 노멘클라투라[특권 계층]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양새만 조금 바꿔 여전히 지배계급으로 남을 수 있었다. 85 민주적인 투쟁 조직들을 통해 아래로부터 조직된 대중운동만이 독재와 관료화를 막을 수 있다. 86
일당 독재가 정당화되고 마치 사회주의의 원칙인 것처럼 둔갑·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스탈린의 반혁명을 거치면서였다.2. 북한의 특수성, 어디서 비롯했는가?
87 ‘유격대-정규군 국가론’과 ‘군사국가론’, 88 ‘수령체제론’과 ‘유일체제론’은 89 물론 북한 당국 자신이 말하는 “자주적 사회주의”론과 “우리식 사회주의”론까지 모두 북한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을 사회주의라고 보는 동시에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수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왕조적 전체주의론’이나 ‘동양적 전제군주제론’ 같은 우파적 주장부터90 물론 북한 나름의 특징이 있다. 예컨대 북한은 나름의 사상 체계인 주체사상을 확립해 소련의 공식 지배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로동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 주체사상을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했다. 그러나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아예 삭제하고 “주체사상”을 유일 지도사상으로 규정했다. 2010년에 개정한 조선로동당 규약 서문에도 “주체사상을 … 지도적 지침으로 [하고] … 당 안에 사상과 영도의 유일성을 보장[한다]”고 돼 있다. 91
두루 알다시피 북한은 1945년에 소련 군대의 점령으로 수립된 스탈린주의 국가다.92 권력의 세습(심지어 3대 세습)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론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수령 숭배는 소련이나 마오쩌둥 치하 중국과 비교해도 정도가 심하다. 북한 헌법 자체가 김일성을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로, 북한 헌법을 “김일성헌법”으로 규정한다. 당 규약 자체에서 조선로동당을 “김일성 동지의 당”이라고 한다. 최고인민회의는 김일성이 죽은 뒤 그를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했다. 김일성·김정일과 그 가계를 숭배한다는 점은 둘의 생일을 명절로 정한 점, 전국 곳곳에 산재한 동상이나 사적지, 그들에게 사용되는 언어 등에서 잘 드러난다. 북한의 근현대 역사서인 《조선전사》를 보면 “우리말에서는 무엇보다도 경애하는 수령님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정중한 표현들이 수많이 생겨나 우리 인민의 언어생활에서 확고한 것이 되었다”고 한다.93 설득력이 없다. 이른바 유교 문화적 전통을 공유했다는 다른 나라들, 예컨대 중국이나 남한은 왜 다른 양상을 띠는지 해명할 수 없다. 마치 ‘광기’나 ‘비정상’처럼 보이는 북한의 이런저런 현상과 제도와 이론은 자원이 부족하고 손 벌릴 곳도 없는 조그만 나라가 급속한 공업화를 추구하면서 봉착한 문제들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확립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여러 제약 때문에 합리적 해법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거듭 비합리적 해법에 이끌렸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그 과정과 그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들을 간단히 짚어 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특수성’을 예외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런 현상들의 원인을 ‘유교 문화적 전통’(대가족, 충효, 지도자 숭배 전통)이나 전근대성에서 찾는 것은국제 공산당 획일 체제의 균열과 북한의 주체 노선
94 실제로는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공업화 과정에서 부딪힌 국내외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확립됐다. 먼저, 주체사상-수령론의 기본 골격은 소련과의 갈등 속에서 만들어졌다.
북한의 주체사상-수령론-후계자론은 1980년대 초에 체계화됐지만95 이것은 스탈린 못지않은 스탈린주의 노선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이게도, 김일성이 이 노선을 추진하는 데서 처음 부딪힌 장벽은 다름 아닌 소련이었다. 스탈린 노선이 소련 안에서 부정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직후 소련이 1928년 이래 걸어온 길을 따라 급속한 공업화 노선을 취했다. 축적을 위해 무자비하게 농업과 인민의 소비를 희생시키고, 중공업에 모든 물자를 쏟아붓고, 강력한 노동규율을 강요하고, 끊임없는 희생과 동원을 요구하고, 공포정치로(박헌영 처형에서 보듯이) 인민을 억압했다.1953년 스탈린이 죽자 그의 측근들 사이에서 암투가 벌어졌고 새 지도자 흐루쇼프는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을 비난했다. 스탈린 사후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비록 근본적 한계가 있긴 했지만 공포정치가 완화된 것이었다(강제노동수용소 폐쇄, 법치의 주요 요소들 복원 등). 이는 당시 소련의 경제적 필요, 즉 생산성을 높이려면 노동자들의 교육 수준, 영양 상태, 주거 상태 등 생활수준을 개선해야 하는 필요를 반영했다. 같은 당대회에서 발표된 “평화공존론”도 이런 필요와 맞물린 것이었다. 소련의 “평화공존론”은 인공위성과 수소폭탄이 ‘평화공존’을 보장하는 한, 소련 경제가 서방 자본주의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반영한 정책이었다. 실제로 소련은 인공위성 발사 몇 달 뒤 미국에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1928년에 착수했던 ‘원시적 축적’을 이제 막, 그것도 매우 열악한 조건에서 시작한 북한 같은 소련 블록 내 후진국의 관료에게 이런 정책은 희소식이 아니었다. 중국, 베트남, 알바니아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나라들은 새로운 공업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투자를 절실히 원했고, 이를 위해서라면 원시적인 방법들까지 동원해야 할 판이었으며, 생활수준은 되도록 낮은 수준으로 묶어 둬야 했다.
이런 나라들에게 “평화공존론”은 소련이 이룩한 경제 성장을 그들이 결코 따라갈 수 없음을 뜻했다. 왜냐하면 첫째, 소련이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서 모든 물자를 자국 경제에 쏟아부으려 했기 때문이다. 소련 관료는 블록 내 후진국에 돈을 빌려주거나 원조하기보다 발달한 자국 공업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낫고, 자본을 수출하더라도 북한이나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들에 하기보다는 소련 경제에 통합돼 있는 동유럽 위성국에 하는 것이 대미 경쟁에 더 유용하다고 봤다.
둘째, 소련은 블록 내 후진국보다 이른바 중립국의 민족 부르주아지들을 지원하는 것이 대미 경쟁에서 ‘남는 장사’라고 봤다. 그 민족 부르주아지들을 미국에서 떼어 내 소련 블록에 편입시키려고 돈으로 매수하는 셈이었다(그들을 혁명으로 타도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이집트의 나세르는 공산주의자들을 감옥에 처넣고도 소련의 지원을 엄청나게 받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중국이나 북한은 이미 블록 안에 있고 미국이 그들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돈을 쓸 필요가 없다고 봤던 것이다.
96 마오쩌둥은 “혁명주의” 노선에서가 아니라 자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소련의 “평화공존” 정책을 반대했던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공산당 사무부총장 루이지 롱고는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찔렀다. “중국 지도부는 사회주의 블록 내 여러 나라들의 공산주의 발전이 단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선진적인 나라들이 후진적 사회주의 나라들의 문제점과 고통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대미 경쟁 정책이 사회주의 진영 모든 나라들의 동등한 발전이라는 [중국의] 개념보다 세계 공산주의 발전에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97
“평화공존론”을 둘러싸고 중국과 소련이 서로 상대방을 “교조주의”,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며 마치 마르크스주의 이념 논쟁이라도 하듯이 한동안 싸웠지만, 이는 단순히 이데올로기 논쟁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상이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했다.98 소련 대사 이바노프가 1956년 말 본국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소련이 중공업 중심의 발전 노선, 개인숭배 등을 폭넓게 문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 공산당은 20차 당대회 노선을 블록 내 나라들에 강요하려 했다. 그들은 조선로동당이 제3차 당대회(1956년)에서 이 노선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며, “이 대회를 정식 대회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정리”하기까지 했다.조선노동당 3차 대회는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의 가장 중요한 결정 사항과 북한의 특수 상황으로부터 도출된 결론들을 당대회의 사업과 결정서에 반영해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못했다. 당 정책의 마르크스주의적 원칙들, 조선노동당 내에서의 개인숭배의 극복, 집체적 영도 원칙의 준수, 민주적 법질서의 강화 등이 반영되지 못했다. 현실적인 가능성을 고려치 않고 모든 중공업 분야, 특히 기계 제작 공업을 발전시키려는 조선노동당 지도부의 예전의 경향들이 제3차 당대회에서도 나타났다. 동시에 당대회는 지극히 낮은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소련이 김일성의 중공업 중심 발전 노선을 문제 삼은 것은 북한 경제가 이른바 “사회주의 국제분업”에 편입돼 소련의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북한 경제는 소련 경제에 종속되고, 특정 산업 건설(십중팔구 소련의 소비를 충족시키는 소비재 부문)에 치우칠 게 뻔했다. 김일성이 자신의 노선을 밀어붙여 모든 후진국들의 꿈인 민족 자립 경제를 확립하려면 소련과의 갈등이 불가피했다.
소련은 새 정책에 따라 북한 원조도 크게 줄였다. 1954년 북한 정부 예산 중 31.4퍼센트나 차지하던 소련의 원조 비중은 1957년에 1.2퍼센트로 뚝 떨어졌고, 1960년 이후에는 원조가 완전히 중단됐다. 또, 소련은 ‘평화공존론’에 방해가 된다며 북한이 미국을 겨냥해 사용하는 ‘호전적’ 표현도 규제하려 했다(김일성은 1961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3차 확대 전원회의에서 소련이 북한에 반제투쟁 중단을 요구했다고 공개했다.) 그러나 전시 분위기 속에서 노동규율을 강제하며 경제 건설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공존”은 북한 당국에 해로웠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탄생 배경만으로 보자면, 소련 군정 하에서 지원을 받으며 집권한 김일성이 소련을 비판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국제 공산당의 획일적 통제 체제가 균열되기 시작했다. 소련 공산당의 스탈린 공개 비판, 자력으로 정권을 잡은 공산당들의 등장(특히 중국), 헝가리와 폴란드 등 동유럽 위성국들에서 일어난 아래로부터의 투쟁 등이 이런 균열을 일으킨 요인이었다. 김일성은 이 균열 속에서 “주체”를 확립할 틈바구니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중·소 분쟁에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던 북한 당국은 1960년대 들어서는 공공연히 중국 편에 섰다. 그리고 1962년에는 소련 블록 경제를 코메콘(소련 블록 국가들의 경제협력기구)으로 통합하려는 소련의 시도에 반대해, 중국·베트남 등과 함께 코메콘 가입을 거부했다. 1963~64년 북한 당국은 소련의 행동을 공개적이고 직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수정주의적 경향과 분열주의적 ‘책동’, 그리고 여전히 코민테른식의 강압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려고 하는 고압적인 자세, 과거 개인숭배를 내리먹이며 내정에 간섭한 대국주의적 태도, 사회주의적 국제 분업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자립적 민족 경제 노선을 중상하며 ‘제국주의자들이나 하는 비방’을 늘어놓는 행위 등.”
이처럼 북한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반에 더는 경제적 도움도 주지 않는 부자 “사회주의 형제국”에서 벗어나는 자주 노선을 확립해 나간다. 북한이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62년 12월 〈로동신문〉 논설에서였고, 1965년에 그것을 처음 정식화했다. 자주 노선은 무엇보다 “자주적이며 자립적인 경제 건설”, 김일성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자체로 벌어서 완전히 먹고살 수 있도록, 즉 자급자족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든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소련의 원조가 끊긴 상태에서 경제 건설 조건은 매우 혹독했다. 게다가 1962년 쿠바 사태 이후 북한은 국방 예산을 점차 늘려야 했고, 1966년을 기점으로 북한의 국방비는 전체 예산의 30퍼센트나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 북한에서 “기술 신비주의 타파” 같은 구호가 등장하고, “천리마 운동” 등 각종 속도전과 노동력 동원 운동이 계속된 것은 맨손으로 홀로 서야 했던 처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자력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북한 당국은 두 가지에 의존했는데, 이는 주체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다.
첫째, 국민에게 근로 의욕을 강력히 요구했다. 즉, 장시간, 강도 높게 일하고, 당분간 생활수준을 돌아보지 않는 희생을 요구했다. 그리 하면 비록 생산력 수준이 매우 낮아도 민족 자립 경제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른바 ‘사회주의적 개조’)이다. “우리는 지금 어렵게 산다. 우리는 빨리 잘살기 위해서 남보다 더 빨리 가야 한다. 왜 쏘련 노르마[노동 기준량]에 딱 매달려야만 하겠는가. … 공연히 쏘련 노르마의 그늘 밑에서 어물어물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김일성이 말한, 소련식이 아닌 “주체”적 방식이었다. 이것이 바로 주체사상이 사람의 중요성(“사람 중심”)을 강조하는 이유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이] 인민 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희생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북한 당국은 그 답을 투철한 사상 의지에서 찾았다. “물질 만능의 원리가 작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생명이라면, 인민 대중이 주인으로 되고 있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상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활수준을 개선하는 대신 사상을 ‘개선’(사상교양)시키겠다는 얘기인 셈이다. 이것은 당시 마오주의 노선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덩샤오핑은 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혁명은 물질적 이익의 기초 위에서 생기는 것이다. 만약 희생정신만 강조하고 물질적 이익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념론이다.”
102 수령론이 체계화된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이미 김일성은 1960년대 초반에 “수령”으로 불리고 있었다.
둘째, 강력한 지도력 구축이다. 중공업 중심의 급속한 공업화 노선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면, 매우 중앙집권적인 명령 체계를 통해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러려면 최고 지도자가 막강한 권한이 있어야 하고, 그와 그의 노선에 대한 일말의 의혹도 허용해서는 안 됐다. 이것이 바로 주체사상이 유일 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인민 대중은 … 옳은 지도에 의하여서만 사회 력사 발전에서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할 수 있다.”103 이른바 ‘8월 종파 사건’ 주모자들은 1960년 비밀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104 한 차례 피의 숙청이 끝난 뒤 개최된 1961년 4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단일 지도 체제의 확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4차 당대회는] 하나의 사상 의지로 결속된 우리 당의 강철 같은 통일을 시위[했다.]”
김일성은 1956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관료 내 투쟁을 벌이면서 “수령” 지위를 차지했다. 그는 1956년 8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자신에 대한 반대를 공개 표명한 윤공흠·최창익·박창옥 등을 ‘반종파 투쟁’의 이름으로 탄압했다. 그 여파로 수백 명이 체포되고, 군대에서도 수백 명이 숙청됐으며,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도망친 사람만 1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북한 관료 내 분열과 수령-후계제의 확립
105 이 사건은 북한 당국이 일인 독재를 강화하고 권력 세습이라는 보기 드문 선택으로 나아가는 한 계기였다.
그러나 “강철 같은 통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4차 당대회 이후 겨우 몇 년 만에 김일성은 또다시 당 고위 간부들의 이견에 부딪혔다. 국내파·연안파·소련파를 숙청한 뒤 당 간부들이 거의 ‘범빨치산’파로 구성됐는데도 관료 내 도전이 재현된 것이다. 그 주요 인물인 박금철·리효순은 둘 다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위 최고 요직인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이자 비서국 비서였다.106 1965~66년에는 3.6~5.8퍼센트까지 떨어졌다. 107 성장은 한계에 봉착한 듯했다. 북한 당국의 기록을 보면, 이런 상황에서 박금철·리효순 등은 기존의 “천리마 운동”을 반대하며 “수정주의 경제 리론”을 내세웠다. 108 그들은 물질적 자극을 위주로 하는 자본주의적 기업 관리 방법을 받아들이자고 했고, 계획의 일원화·세부화 체계에 반대했다. 김일성이 주도하는 높은 성장 속도에도 반대하고 균형을 강조했으며, 경제-국방 병진 노선에 반대하고 경제 우선 정책을 주장했다. 109 그들이 내세운 “수정주의 경제 리론”이란 바로 10여 년 전 자주 노선 확립의 계기가 됐던 소련식 ‘합리화’와 흡사했다. 그들은 중·소 논쟁에 편승해 “혁명 전통의 다원화” 움직임도 보였다고 한다. 110
논란의 핵심 쟁점은 다시 경제 건설 노선이었다. 그 배경은 북한이 1960년대에 겪던 경제 침체였다. 1954~56년(3개년 계획) 30퍼센트, 1957~60년(5개년 계획) 21퍼센트이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960년대 들어 10퍼센트대로 내려앉았고,111 예를 들어, 한 ‘수정주의자’가 황해 제철소, 강선 제강소, 대안 전기공장을 비롯한 몇몇 공장에서 가화폐 제도를 112 도입했는데, 공장·기업소의 경제 지도 일꾼들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또, 박금철은 검덕 광산을 지도하면서 임의로 생산 계획을 절반으로 낮추었는데, 검덕 광산은 당 결정을 무시하고 박금철의 지시를 수용했다. 113
그런데 북한 당국의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꽤 지지를 받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부르죠아 및 수정주의 분자들의 죄행이 이처럼 엄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당원들은 … 옳고 그른 것을 가르지 못하고 부르죠아 및 수정주의 분자들에게 맹종맹동하였다.”114 김일성의 주장인즉, 북한은 생산력이 낮은 조건에서 경제를 건설하고 있으므로 ‘합리화’할 여유가 없고, 115 “혁명을 계속 전진시켜 사회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튼튼히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금철·리효순 등의 도전에 김일성은 두 가지로 대응했다. 첫째, 기존의 (속도전식) 경제 노선을 고수했다. “김일성은 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발전 유지를 위해서는 물질적 자극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우경 기회주의라고 비판하고, 대신에 ‘생산력 발전의 결정적 추동력인 사람의 혁명적 열의’를 동원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천명”했다.이른바 이 “계속 혁명” 주장은 — 이는 뒤에서 살펴볼 후계자론의 근거이기도 하다 — 공포정치를 완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1960년대 소련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끝났으므로 점차 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북한에서는 아직 ‘과도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심지어 ‘과도기’가 끝나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궤변을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이름으로 설파했다.
116 이것은 당과 국가의 명령 계통을 단일화하겠다는 것으로, 개별적인 그 누구, 심지어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의 개별 지시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했다. “오직 수령의 교시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둘째, 박금철·리효순 등의 도전에 맞서 김일성은 유일 사상 체계 또는 유일 지도 체계를 세우려 했다. 조선로동당 당력사연구소의 자료를 보면, “당의 유일 사상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곧 수령의 혁명 사상과 그 구현인 당의 로선과 정책으로 전당을 무장시키고 … 수령의 령도 밑에 수령의 혁명 사상을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하여 혁명 사업을 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런데 당의 지시가 잘 집행되지 않고 좌절된 것은 박금철·리효순의 방해 탓에 나타난 예외적 문제가 아니었다. 김일성이 “[일부 일꾼들이] 당의 지시는 형식적으로 집행하면서도 개별적 사람들의 지시는 떠받들고 있”다며 “중앙당 어느 부장”, “어느 부수상” 얘기를 언급한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김일성은 여러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일들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생산자들이 생산 능력에 대해서는 과소 보고하고 생산 요소는 과대 요구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어서 계획을 제대로 수립하기 어려운 점, 수립된 계획을 고위 간부들이 제대로 집행하지 않고 “도에서는 도대로 고치고, 군에서는 군대로 고[친다]”는 점, 국가적으로 맞물려 놓은 계획 지표들이 “기관 본위주의”나 “지방 본위주의” 견지에서 수정돼 망가지고 있다는 점, 공장 당 책임비서들이 계획을 낮추려는 경제 지도 일꾼들의 “소극성·보수성”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점 등등. 이와 같은 문제들은 북한의 관료적 명령 경제의 문제가 드러난 것인데, 김일성은 더욱 관료적인 명령 체계를 확립해 이런 문제를 다루려 했던 것이다.
117 1970년까지 사회 곳곳에서 이른바 “종파 여독 청산”이 이어졌다. 그 직후 열린 1970년 당대회는 “주체사상의 전면적 승리”를 선언했고, 당 규약을 개정해 “[조선로동당은]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했다. 김일성의 유일적 지도를 공표한 것이다. 이제 간부의 자질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으로 판가름됐다. “수령에 대한 태도, 이것은 진정한 혁명가와 기회주의자를 갈라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118
1967년 5월 박금철·리효순 등이 숙청된 뒤 1968년 군부에서도 대규모 숙청이 뒤따랐고(김창봉·허봉학 등),김일성의 유일 사상 체계 또는 유일 지도 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하는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 강화를 돕는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후계 구도를 확립할 인물을 찾아야 했다. 그가 결국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기로 결심한 배경을 두고 김정일 자신의 능력을 중요하게 꼽는 사람들이 많다. 김정일이 박금철·리효순 숙청 과정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중요한 지위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보는 게 현실에 더 부합한다.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공인된 뒤[중앙위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회 정치위원이 되면서] 유일 사상 체계를 이용해 당과 군과 정부기구를 빠르게 장악해갈 수 있었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공인된 지 두 달 만에 ‘당의 유일 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가 규정하듯이 김일성에 대한 “충실성의 대헌장”이다. “김일성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신조화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더 중요한 것으로, 김일성이 개척한 혁명 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 완성”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당중앙”[김정일을 일컫는 말]에게 수령과 같은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수령님의 령도 밑에 당중앙의 유일적 지도 체제를 확고히 세워야 한다.(10조 1항)
당중앙의 권위를 백방으로 보장하며 당중앙을 목숨으로 사수하여야 한다.(10조 5항) 모든 사업을 수령님의 유일적 령도 체계에 의거하여 조직 진행하며 정책적 문제들은 수령님의 교시와 당중앙의 결론에 의해서만 처리하는 강한 혁명적 질서와 규률을 세워야 한다.(9조 2항)
120 중요한 일들이 그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1980년 6차 당대회는 김정일 권력 승계를 공식화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그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고,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다. 이 대회에서 정치국, 비서국, 군사위원회에 모두 선출된 사람은 김일성과 김정일 둘밖에 없었다. 이틀 동안 토론에 나선 40여 명은 “영광스런 당중앙”의 현명한 영도를 강조했다. 그리고 당대회 결정서는 “당과 혁명의 장래 운명을 좌우하는 근본 문제”, 즉 후계 문제가 “빛나게 해결되었다”고 선언했다.
전 노동당 고위 간부 신경완이 한 말을 보면, 1976년 즈음 모든 정보는 김정일에게 집중됐고 김일성이 이처럼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기로 결심하게 된 데는 두 가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첫째, 이른바 ‘8월 종파 사건’, 박금철·리효순 사건, 김창봉·허봉학 사건 등을 겪으면서 누구도 믿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항일유격대 출신 동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일성은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21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누구나 “사대주의와 수정주의”에 물들 수 있고, “지난날 항일 무장 투쟁을 한 사람도 결코 예외로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들 가운데서 개별적 사람들이 앞으로도 변질되지 않으리라는 절대적 담보는 없[다.]”122 김일성의 속마음을 먼저 읽고 일을 추진해야 했을 당시 관료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말은 틀림없이 관료 사회를 매우 경직시켰을 것이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출신 동지들도 ‘수정주의자’가 될 수 있다면 관료 누구든 그럴 수 있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이제 누구나 의심과 감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신임을 얻으려면 충성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김일성보다 핵심 측근들이 김정일 권력 승계에 더 적극적이었던 듯이 묘사하지만, 실제로 김일성은 항일유격대 출신자들에게 김정일을 후계자로 받들어나가는 데서 “누구보다 모범”이 되라고 주문했다. “지금까지 나에게 충실하여온 것처럼 김정일 동지를 잘 받들고 도와주[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그 후계자에 대한 충실성으로 이어질 때 그것이 참다운 충실성이 되며 그러한 충실성을 지닌 사람이 바로 참다운 혁명가이고 충신[이다.]”124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난하고 레닌의 묘소에서 스탈린 시체를 이장한 일 등은 김일성에게 두려움을 심어 줬을 것이다. 특히, 북한 당국은 이 사건이 동유럽에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불러오고,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정권마저 무너진 데 기겁했다. 당시에 북한은 동유럽 유학생들을 “반혁명의 전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귀국시켰고, 헝가리 혁명이 진압되자 김일성은 자신의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해 “열렬한 축하와 지지”를 보냈다.
둘째, 소련과 동유럽과 중국의 경험이 반면교사였을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혁명의 대[代]가 바뀌는 시기에 혁명과 건설에 대한 령도가 올바로 계승되지 못하면 사회주의 위업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실패를 면치 못하게 된다.” “후계자를 올바로 내세우지 못하다 보니 [소련] 당이 수정주의당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125 그런데 그는 1970년 말에 공직 생활에서 자취를 감췄다. 2년 뒤 그가 마오쩌둥 암살과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발표가 나왔고, 그와 그의 가족은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공식 발표의 세부 사항의 참 거짓 여부를 떠나 분명한 것은 린뱌오가 분파 투쟁 과정에서 제거됐다는 점이다. 투쟁의 핵심 쟁점은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문제 및 외국의 설비와 기술을 소규모로 수입하기 시작한 문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26 나중에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과 세 명의 협력자들(‘사인방’)은 린뱌오 비방 캠페인을 이어받아 저우언라이의 경제 정책을 공격했다.
복잡한 권력 투쟁에 휩싸여 있기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북한이 박금철·리효순 등을 숙청하고 유일 사상 체계를 수립하던 시기에 벌어진 린뱌오 사건은 북한이 후계자를 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린뱌오는 1969년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됐다. 중국 공산당은 장정[규약]을 개정해 린뱌오를 후계자로 명시하기까지 했다.이것이 김일성에게 준 교훈은 수령의 노선에 충실한 사람을 후계자로 앉혀야 한다는 점, 그 후계자가 다른 분파들에 의해 제거되는 일이 없도록 권력 승계를 철저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후자가 더욱 중요했다. 왜냐하면 제한된 정책 변화를 시도하더라도 당과 국가가 수령의 영도 하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은 1973년부터 서유럽 국가들에서 기계와 설비를 들여오고 수교를 맺기 시작했다.
수령론과 후계자론은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특히 수령이나 후계자의 위대한 자질은 체계적으로 조작됐다 — 무오류성, 비범한 영도력, 고매한 공산주의적 덕성 등. 이것은 수령론과 후계자론이 체계화되기 전이든 후든 북한의 현실이 결코 수령론이나 후계자론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3. 김정은 후계 체제는 어디로?
127 이런 평가는 단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경험”에 대해서뿐 아니라 3대 세습에 대한 전망도 담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김정은 후계 체제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자민통 계열의 한 인사는 “북한의 후계자론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 검증받은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많은 사람들이 김정일과 김정은 각각의 권력 세습의 조건 차이를 지적한다. 김정은이 만 30세도 안 된 어린 나이라는 점, 김정일은 적어도 20년 이상의 오랜 후계자 ‘훈련’ 과정을 거쳤지만(늦어도 1974년부터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까지) 김정은은 김정일의 와병으로 그 기간이 충분치 않을 것이라는 점, 내세울 업적을 쌓기에 촉박한 시간이라는 점 등등. 모두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다소 부차적이다. 김정은 후계 체제를 좀더 정확하게 전망하려면 그가 김정일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128 김정일의 ‘전횡’에 대한 당 고위 간부들의 불만을 반영했던 듯하다. 또, 1976년 ‘판문점 [도끼]사건’ 이후 김정일이 전쟁 대비를 명분으로 평양 시민 20만 명(이른바 ‘성분 불량 계층’과 노약자 등)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자, 자살하는 사람이 늘 만큼 격심한 불만이 치솟았다. 김정일 자신도 “군중 사업” 또는 “사람과의 사업”에서 “10년은 후퇴했다”고 시인했을 정도다. 129 또, 김정일은 오랜 후계자 ‘훈련’ 기간을 거쳤음에도 김일성 사망 이후 존재감이 큰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유훈통치 기간을 거쳤다.
김정일이 로동당 중앙위원회에 처음 진입한 1972년부터 후계자로 공식화된 1980년까지 기간은 북한이 어느 정도 안정을 구가하던 시절이었지만, 지금 북한은 여러 면에서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 물론 김정일도 후계자로 낙점된 뒤 공식화되기까지 과정이 결코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항일유격대 출신 당 정치위원 겸 비서인 김동규가 1976년 당 중앙위 정치위원회에서 김정일의 정책을 비판”한 것은그러나 이런 난관은 김정은이 처한 조건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김정은은 북한 국가가 지난 20~30년 동안 취약해진 상태에서 권력을 승계해야 하는 위험한 처지에 있다. 무엇보다 경제가 심각한 상태다. 북한 경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침체에 빠져들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960년대 중반의 하락을 회복하며 연평균 10퍼센트대의 성장률을 보이더니, 1970년대 후반에 와서는 성장률이 2~4퍼센트로 떨어졌다. 1978년에 시작된 제2차 7개년계획, 2년간의 조정을 거친 뒤 1987년에 시작된 제3차 7개년계획은 모두 실패했다.
130 상황에서 찾아온 1989~91년 소련 블록 붕괴는 북한 경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며 북한 체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 경제는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했다. 이 기간의 북한 GDP(국내총생산)는 30퍼센트나 감소했고, 산업의 전반적인 가동률이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재정 규모도 1994~98년 동안 반토막이 났다.
“북한 경제의 침체[가] 이미 구조적인 것으로 전환”된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3.7 | -3.5 | -6.0 | -4.2 | -2.1 | -4.1 | -3.6 | -6.3 | -1.1 | 6.2 |
132 했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북한 당국의 문헌을 보면 당시 사회적 불만이 증대했다는 증거를 포착할 수 있다. “식량 문제로 하여 … 인민들의 사상 의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성된 엄혹한 정세에서 신념과 의지가 나약한 일부 사람들 속에서는 승리의 신심을 가지지 못하고 동요하는 경향이 발로되었[다.]” 북한 당국은 이 시기 “비겁 분자, 동요 분자가 생기고 배신자, 변절자들이 나타났다”고도 했다. 133 실제로 고위 관료의 망명과 평범한 인민들의 대규모 탈북이 이어졌다.
경제 위기는 전 사회적인 불만 증대와 동요를 낳았다. 제 인민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체제의 신뢰와 정당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김일성도 “우리 제도의 참다운 생활력도, 우리 당의 노선과 정책의 정당성도 결국은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구체적인 성과에서 나타난다”고134 식량난도 심각하다. 2008년에 유엔세계식량계획WEP은 폭우, 한국과 중국한테서 받는 식량 원조 감소, 세계적 물가 상승, 연료 부족 등으로 북한의 식량 부족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당국은 체제 정당성 위기에 대처하고자 또 다른 정당화 이데올로기들 — ‘고난의 행군’, ‘붉은기 사상’, ‘강성대국론’ — 을 내놨지만, 이런 처방의 약발은 가시적 성과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지표상 안정을 보이는 듯하던 북한 경제는 다시 2006년, 2007년, 2009년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다.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1.3 | 3.7 | 1.2 | 1.8 | 2.2 | 3.8 | -1.1 | -2.3 | 3.7 | -0.9 |
136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내민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냉전 해체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북한을 동아시아판 ‘악마’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위험을 적절히 관리할 수만 있다면, 지각 변동 속에서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지키는 데 북한을 이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1993년 핵 의혹 이래 북한과 미국은 숱한 협상과 위기 — 1994년에는 전쟁 목전까지 갔다 — 를 반복했지만 관계 정상화에 다가서기는커녕 ‘판돈’이 커지는 상황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는 동안 경제 재건에 필요한 돈을 서방에서 구하려는 북한의 시도들, 즉 국제 금융 기구 가입, 북일 수교를 통한 보상금 확보 등은 모두 좌절됐다.
북미관계는 김정은이 물려받을 또 다른 심각한 골칫거리다. 북한 당국은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직후 서둘러 북미관계 정상화 외교에 나섰다. “과거를 돌아다보지 않고 앞을 내다보며 … 조미관계의 개선을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137 요컨대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책동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조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에 맞선 군사 대응에 국가적 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0년대와 2000년대 동안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북한 당국은 이와 같은 현 위기 상황에 주로 두 가지 차원으로 대처하려 한다. 첫째, 군 우선 정책, 즉 선군정치다. 〈로동신문〉의 정의를 보면, “선군정치란 말 그대로 군대를 중시하고 그를 강화하는 데 선차적인 힘을 넣는 정치이다.” 《조선로동당력사》는 1990년대 중엽 “북미 대결의 강화가 선군정치 도입의 배경”이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진정한 반제 투쟁이 되지 못한다. 군사력으로 미국을 이기기 어려울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미국과 남한 대중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기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 우선 정책은 평범한 북한 인민의 삶을 희생시킨다. 다음과 같은 글은 북한 경제의 우선순위를 잘 보여 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숨 죽은 공장, 꺼져 버린 수도의 불빛, 멈춰 선 열차들을 뒤에 두시고 선군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며 자위적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온갖 심혈을 다 바치었다”, “언젠가 막대한 자금을 국방력 강화에 돌리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나는 인민생활이 어려웠지만 군수 공업에 언제나 큰 힘을 넣어왔다. 이에 대해 앞으로 우리 인민이 반드시 이해해줄 것’(김정일 위원장)”139 규모는 26퍼센트 감소에 그쳤다. 또, 2003년, 2006년, 2008년 전체 예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21.3퍼센트, 12.2퍼센트, 5.5퍼센트로 줄었지만, 군사비 비중은 각각 15.7퍼센트, 16퍼센트, 15.8퍼센트를 유지했다. 140
실제로, 1990년대 동안 ‘일반 경제’ 규모는 64퍼센트나 감소했지만 군수 경제를 포함한 ‘특수 경제’군 우선 정책은 사회 전체에 포위 분위기와 위기의식을 팽배하게 해 내부 결속력도 높일 수 있다. 경제적 어려움과 생활수준 하락, 이 모든 것이 미국의 압살 정책 때문이라고 선전하는 것만큼 좋은 변명거리도 없다. 힘겨워도 포위하는 적에 함께 맞서 싸우자고 하는 것만큼 인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기 좋은 명분은 없다. 정권을 향할 수 있는 불만과 분노를 모두 딴 곳으로 돌리는 데서 외부 적과의 충돌만큼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정책이다(이른바 “평화 공세”). 자칫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쉽지만 북한 당국은 반제국주의 관점에서 미국과 대결 자세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북한은 실리적 관점에서 북미관계 개선을 원한다. 심지어 북한은 중미 갈등 속에서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는 구상을 비치기도 했다. 북한 측이 비교적 좋아하는 셀리그 해리슨이 한 말을 보면, “북한은 미국이 자신과 좀더 좋은 관계를 맺으면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봉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왔다.”
북한 당국은 체제를 지탱하고 붕괴된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물자를 원한다. 그러나 미국의 제재로 원조, 국제 금융 기구들의 경제 개발 자금 지원, 미국 수출입은행의 여신 제공 등을 받을 수 없고, 일본도 자본 거래 규제 같은 제재를 가하고 있다. 북미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이런 근본적 제약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지렛대 삼아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려 한다(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미국이 중국에 압력을 넣어 북한을 달래는 결과라도 기대한다).
142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것을 보면, 북한 당국은 이명박 “역도”와도 선先 경제 지원을 전제로 정상회담을 하려 했다.
남북관계에서도 북한 당국이 원한 것은 각종 지원과 달러다. 운동단체들(의 푼돈)보다 각종 관광 사업이나 공단 조성 사업 등을 좌우할 수 있는 정부와 재벌이 우선인 것이 그들에겐 너무도 당연했다. 그래서 국가보안법으로 남한 좌파들이 감옥에 갇히는 동안에도 북한 당국은 남한 정부와 협력을 유지했다. 이것이 바로 “상호 체제 인정·존중”의 의미다. 이는 기댈 곳이 없는 북한 관료의 처지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남북 교역과 무역이 북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한 연구 조사를 보면, “무역과 남북 교역으로 인한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1999~2003년에 각각 연평균 2.4퍼센트 및 1.2퍼센트로서 양자를 합치면 동기간 연평균 경제성장률 2.8퍼센트를 상회하고 있어, 현재 대외무역이 없다면 북한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44 중국은 북한 붕괴가 가져올 혼란과 난민 등을 우려해 북한을 지원한다(이명박 정부 들어 남한은 더는 이런 입장이 아니다). 북한이 군사적 완충지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도 중국은 북한을 지탱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이후 북중 관계는 경제 협력을 비롯해 더욱 긴밀해지고 있다.
북한 무역에서 남한보다 더 중요한 상대는 중국이다. 북한의 대중국 무역의존도는 1995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로, 2008년 현재 북한의 전체 무역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73퍼센트다.145 미국과 남한 정부 모두 북한을 더 옥죄겠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지렛대의 페달을 더 힘차게 밟으려 한다. 미국과 일본은 그것을 빌미로 사실은 중국을 겨냥한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한다. 이런 것들이 맞물리고 서로 강화하며 한반도 주변의 불안정은 점증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 전격 공개와 한국전쟁 이후 처음 벌어진 남북한 상호 포격 사건(일명 ‘연평도 포격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북한 당국은 이와 같은 긴장을 내부 결속에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협상 국면이 오더라도 그것은 사태의 종결이 아니라 긴장 쌓기의 새로운 회기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다.
그러나 붕괴되고 낙후한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물자를 외부에서 끌어오려면 미국이 옥죄고 있는 제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미국 오바마 정부는 북한의 태도 변화가 있을 때까지 “전략적 인내”를 하겠다는 태도다. 이명박은 “임기 말까지 남북관계를 얼어붙은 상태로 놔둘 각오”가 돼 있다고 한다.146 실제로 그런 걱정을 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20년 넘게 누적된 북한의 핵심적 두 가지 문제, 즉 경제 위기와 대미 관계는 1~2년 안에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로기 상태로 그럭저럭 버티는 경제 상황에서 시작된 3대 세습 과정은 심각한 정치적 불안을 자아낼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를 더욱 증폭시킬 수 있다. 북한 당국도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5년 〈로동신문〉에서 “[국제 공산당 정권들에서] 모든 변화와 우여곡절은 수령의 서거를 계기로 하여 생겨났다”고 쓴 바 있다.147 피상적이다 못해 비현실적 희망일 뿐이다.
최근 폭로된 일단의 해외 근무 북한 고위 관리들의 망명은 북한 관료 사회 내 냉소와 확신 결여를 보여 주는 것일 수 있다. 김정은이 당 관료들과 군부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낡은 수단 — 우상화, 숙청, 내부 결속 다지기를 겨냥한 전쟁(포위) 분위기 강화 등 — 이 제 효과를 낼지도 의문이다. 현 상황을 두고 “북측 체제가 더욱 안정화되어 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148 또, 북한의 안보와 안정을 확립하는 데 점령군이 최대 46만 명 필요하다고 추산했는데, 이는 이라크 주둔 미군 병력의 무려 세 곱절이다. 이 보고서는 또 “일본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미국은 지난해와 올해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한미 연합군의 ‘작전계획 5029’를 진전시켰고, 지난 10월 한미안보협의회의SCM는 북한의 “불안정 사태”에 대한 “대응”을 처음으로 공식 언급했다.
미국과 남한은 물론 한반도 주변국들은 북한의 정치적 불안정이 가져올 파장을 걱정하면서도 그것을 한반도 전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기회로 이용하려고 한다. 오바마 취임에 맞춰 작성된 미국 외교위원회 보고서인 《북한 급변사태의 대비》는 북한 정권을 전복하는 데 반대하면서도 “이미 효과적 통치력을 상실”했을 경우 “전환의 과정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런 얘기들은 당연히 중국의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북한이 한국에 흡수되는 통일, 중국 동북지역 국경선에 미군이 배치될 가능성은 중국이 경계하는 시나리오다. 한편 중국도 나름으로 북한 난민이 국경으로 밀려들 것에 대비한 계획이 있고, “중국 인민해방군은 북한에 개입하여 인도주의, 평화주의, 환경 통제 등의 미션을 수행할 작전계획을 개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좌파들은 어떤 경우라도 북한의 불안정을 빌미로 미국과 남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북한에 군사적·정치적 개입을 하는 것에 반대하며, 위기를 가속시키려고 대북 압박을 강화하는 것에도 반대해야 한다. 그렇다고 제국주의적 개입과 압박에 반대한다 해서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가서는 안 된다. 북한의 평범한 인민들이 더 나은 삶을 누리려면 북한과는 전혀 다른,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장 자본주의에서처럼 북한에서도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민주적으로 자기 자신의 국가 기구들을 세우는 노동자 혁명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이 지금 당장은 비현실적인 얘기로 들릴 수 있지만, 북한과 관계가 점점 긴밀해지고 있는 중국에서 노동자 저항이 분출한다면 북한도 그 영향을 크게 받을 것이다. 북한의 불안정이 어떤 사태로 발전할지 점치기는 어렵지만, 남한의 좌파들은 북한의 노동계급이 이 위기의 대안 세력으로, 변화의 주체로 등장하기를 바라고 지지해야 한다.
주
- <조선일보> 인터넷판(2002.6.22). 이교덕 2003, p65에서 재인용. ↩
- 김정일 위원장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1월 8일 리제강 중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게 하달하고, 이 지시가 인민군 총정치국을 중심으로 전파됐다는 것이다. <연합뉴스>(2009.1.15), 이기동 2010, p7에서 재인용. ↩
- 한 예로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2009년 3월 24일 열린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주최 토론회에서 이런 의견을 피력했다. 김근식 2009, pp47-50. ↩
- 김광수 2008, p33. ↩
- 김광수 2008, p44. ↩
- 김광수 2008, pp27-28. ↩
- 심지어 김정은 후계 체제가 기정사실이 된 9·28 당대표자회 이후에도 이런 시도는 계속됐다. 예를 들어, 박경순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은 “후계자 문제에 초점을 맞춰 이번 당 대표자회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협소한 시각”이라며 “김정일 체제의 완성”이라는 데 방점을 둔 분석을 내놓았다. 박경순 2010. 그러나 이것은 최근 삼성의 조직 개편이 ‘이재용 체제’로의 전환을 뜻한다는 관측을 두고 이재용이 이를 부정하며 여전히 “회장님이 (그룹 경영의) 중심에 계신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스운 얘기일 뿐이다. 또, 북한의 후계자론으로 봤을 때도 “권력 승계”는 “김정일 체제의 완성”과 전혀 모순되는 일이 아니다. ↩
- 실제로 이 책은 북한의 후계자론을 소개하며, “‘북한식 순응 승계’가 ‘불편하지만’ 사실로 받아들여지길 기대”한다. 김광수 2008, p40. ‘북한식 순응 승계’는 후계자가 혈통이 아니라 수령으로서의 자질과 인품에 따라 정해지는 원리라고 한다. ↩
- 박경순 2010. ↩
- 김광수 2008, p195. ↩
- 고유환 2009, pp48-49. ↩
- 박경순 2010. ↩
- 북한 사회에 대한 미국 주류의 평가가 바로 “전체주의와 전제주의가 결합된 절대 권력 체제”라는 것이다. 정영철 2010. ↩
- 고유환 2009, p37. ↩
- 예를 들어 김세균 교수는 “공산주의적 인간으로의 인간 개조”, “당과 대중의 사상적·정치적 통일 단결”, “대중의 헌신성, 창발성 확보” 등과 같은 북한의 대표적인 억압·통제 기제를 “사회주의적 목표 달성”을 위한 것으로 본다. 김세균 2006. ↩
- 조선로동당 규약 제3장 30조. ↩
- 조선로동당 규약 제3장 21-22조. ↩
- 조선로동당 규약 제3장 24조. ↩
- 조선로동당 규약 제3장 25조. ↩
- 이종옥(1983년 해임), 김일(1984년 사망), 김일성(1994년 사망), 오진우(1995년 사망). ↩
- 조선로동당 규약 제3장 26조. ↩
- 후계자 내정은 늦어도 2009년 초, 심지어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박경순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부소장도 “사실상 수년 전부터 … 후계자 문제를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고 볼 수 있다”고 인정했다. 박경순 2010. ↩
- 박경순 2010, pp32-33. ↩
- 북한 보도를 보면, 당대표자회가 당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등을 선출하고, 이어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돼 당중앙위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비서를 선출하고, 당중앙위 비서국과 당중앙군사위를 조직했다. <통일뉴스>. ↩
- 정창현 2010, 이정철 2010. ↩
- <로동신문>(1997.10.10), 서동만 2010에서 재인용. ↩
- 9·28 당대표자회는 조선로동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전에 첫 의제로 ‘김정일 장군님을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변함없이 높이 추대할 데 대하여’를 다뤘다. 이정철 2010. ↩
- <조선중앙방송>(2010.9.28), 《주간통일정세》 2010-40에서 재인용. ↩
- 백학순 2010, p689. ↩
- 《KDI 북한경제리뷰》(2010년 4월), p47.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6장 제91조 5항. ↩
- <조선중앙방송>(2010.9.30), 《주간통일정세》 2010-40에서 재인용. ↩
- 이우영 1996. ↩
- 평양 사회과학연구원 철학연구소, 《철학사전》, 김광수 2008, p89에서 재인용. ↩
- 박경순 2010. ↩
- 김유민, 《후계자론》, 정영철 2005, p90에서 재인용. ↩
- <조선중앙통신>(2010.11.4), 《주간통일정세》 2010-45에서 재인용. ↩
- <우리민족끼리>(2010.11.9), 《주간통일정세》 2010-46에서 재인용. ↩
- 김일성, ‘조선로동당 건설의 력사적 경험’(1986), 이교덕 2003, pp45-46에서 재인용. ↩
- 이교덕 2003, pp46-47. ↩
- 백학순 2010, p656. ↩
- 김재천, 《후계자문제의 이론과 실천》, 정영철 2005, p95에서 재인용. ↩
- 평양 사회과학연구원 철학연구소, 《철학사전》, 김남식 2004, p36에서 재인용.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1장 제4조. ↩
- 김갑식 2009, p121.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구일제조사자료집》(1995), 《2009 북한개요》 p22에서 재인용. ↩
- 통계청. http://kosis.kr/bukhan/ 남한은 인구 1만 명당 대학생 수가 6백25.6명으로 북한의 세 곱절 가까이 된다. ↩
- 한만길 2003, p210. ‘총인구에 대한 각 학교 학생 비율’을 활용해 환산한 것. ↩
- 전현준 2009. ↩
- 이세현 2009.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6장 제1절 제87조. ↩
- 최수영·정영태2009. 최수영 2010. ↩
- 정영태 2010. ↩
- 백학순 2010, p553. ↩
- 이대근 2007, p214. ↩
- 조선로동당 규약 제2장 11조 2)와 3) ↩
- 《로선로동당략사》, 백학순 2010, p600에서 재인용. ↩
- 정영태 2007. ↩
- Molyneux 2009에서 재인용. ↩
- 백학순 2010, p646. ↩
- 예를 들면, 박영자 2007. ↩
- 이종석 2000 등 많은 북한 연구자들이 이런 견해고, 스즈키 마사유키 1994의 ‘수령제 국가론’도 그렇다. 개번 맥코맥은 1960년대까지는 북한에 우호적이었다가 수령제 확립과 권력 세습 이후 북한을 ‘신전체주의’로 규정한다(맥코맥 2006). ↩
- 정영철 2005, p81. ↩
- 캘리니코스 2007, p225. ↩
- 클리프 2009, p452. ↩
- 캘리니코스 2007, p223. ↩
- 이에 대해서는 김하영 2002, pp231-351. ↩
- 정창현 2007, p540. ↩
- <매일경제>(2010.12.8). ↩
- 백학순 2010, p599. ↩
- 김남식 2004, p40. ↩
- 자민통 계열은 진보단체들의 북한 비판조차 흔히 우익(사상)과 같은 것으로 몰아붙이는데(한나라당이라는 둥 CIA 첩자라는 둥), 이는 이런 나쁜 전통의 유산이다.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3장 제1절 제59조, 61조.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7장 제1절 제219조.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7장 제1절 제220조.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7장 제1절 제226조. ↩
- 조선로동당 규약 제9장 56조. ↩
- 오브라이언 2005, pp66-67. ↩
- 김정일 1992, ‘사회주의건설의 교훈과 우리당의 총로선’, 이종석 2000, p349에서 재인용. ↩
- 몰리뉴 2003, p183. ↩
- 몰리뉴 2003, p183. ↩
- 클리프 2010, p251. ↩
-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부터 반혁명까지 자세한 설명은 최일붕 2007, pp38-79를 보시오. ↩
- 김광수 2008, p56. ↩
- 그렇다고 해서 1989년 이후 동유럽 등지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민주적 권리들이 없는 곳에서 이런 변혁 덕분에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권리가 허용됐다. 그런 변혁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유·정의·평등 같은 문제에도 눈뜨게 되고 기존 국가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그 본질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
- 소비에트와 의회가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는 Harman 2005. ↩
- 왕조적 전체주의론의 대표적 주장자는 박형중(통일연구원), 동양적 전제군주제론의 대표적 주장자는 이상우(서강대 명예교수)다. 그러나 개혁·진보 인사 가운데서도 주대환 한국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와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가 북한 체제의 성격을 이와 유사하게 본다. ↩
- ‘유격대-정규군 국가론’을 정식화한 와다 하루키 2002 외에도 군사국가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많다. 서대숙 교수가 한 예다. ↩
- 수령체제론의 대표적 주장자는 스즈키 마사유키 1994, ‘유일체제론’은 이종석 2000. ↩
- 북한 국가의 형성에 대해서는 김하영 2002, pp231-351. ↩
- 조선로동당 규약 서문. ↩
- 정영철 2010, p85. ↩
- 주목받는 북한 연구자들인 스즈키 마사유키, 와다 하루키, 브루스 커밍스, 찰스 암스트롱(그리고 이들에게 영향받은 학자들)도 이런 경향이 있다. ↩
- 김정일 1982와 《주체사상총서》(1985). ↩
-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김하영 2005. ↩
-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Cliff 1963, Cliff 1964. ↩
- Cliff 1963에서 재인용. ↩
- 이종석 2010, p388. ↩
- 이종석 2010, p388. ↩
- 이종석 2000, p154. ↩
- 이종석 2000, p178에서 재인용. ↩
- 김정일 1982. ↩
- 이종석 2010, p408. ↩
- 백학순 2010, pp530-554. ↩
- 당시 상무위원은 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금철, 리효순, 김광협 여섯 명으로 구성됐다. ↩
- 양문수 2001, pp28-29. ↩
- 정영철 2005, p123. ↩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 1989, p217. ↩
- 이태섭 2009, pp205-207. ↩
- 이종석 1995, pp294-296. ↩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 1989, p217. ↩
- “가화폐 제도”는 노동자들에게 날마다 계획 수행에 따른 가짜 돈을 지불하고 월말에 그것을 진짜 돈으로 교환해 주는 제도를 말한다. ↩
- 이태섭 2009, pp205-210. ↩
- 이종석 2000, p345. ↩
- 김일성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한 만큼, 자본주의 하에서 마땅히 해결하였어야 할 생산력 발전의 과업을 오늘 우리 사회주의 시대에 와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백학순 2010, p650. ↩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 1989, p218. ↩
- 당시 군 검열 사업에 참여한 전 노동당 고위 간부 신경완(본명 박병엽)은 김창봉·허봉학 등 군부 강경파가 노동당의 후계 구도(김일성-김영주)에 반발했다고 한다. 정창현 2007, pp337-340. ↩
- 5차 당대회에서 양형섭이 한 말. ↩
- 현성일 2007, pp117-118. ↩
- 정창현 2007, p139. ↩
- 백학순 2010, pp628-629. ↩
- 예를 들면, 정영철 2010. ↩
- 백학순 2010, p662. ↩
- 이교덕 2003, p25. ↩
- 이종석 2000, p509. ↩
- 호어 2000, p104 ↩
- 박경순 2010. ↩
- 이종석 2000, pp506-507. ↩
- 신경완의 증언. 정창현 2007, pp138-143. ↩
- 이석기 2003, pp59-60. ↩
- <중앙일보>(2010.11.23). ↩
- 김일성, ‘농민을 혁명화하며 농업 부문에서 당 대표자회 결정을 철저히 관철할 데 대하여’(1967.2.2), 이태섭 2009, p205. ↩
- 《주체 혁명 위업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 《근로자》 등에 실린 글. 이태섭 2009, pp296-300. ↩
- 한국은행 2009, 한국은행 2010. ↩
- 양문수 2010, p55. ↩
- <로동신문>(1992.9.9). 현성일 2007, p159에서 재인용. ↩
- 백학순 2010, p693. ↩
- 양문수 2010, p48에서 재인용. ↩
- 특수 경제는 당 경제와 군 경제로 이뤄지고, 군 경제는 순수 군 경제와 군수 경제로 구분된다. ↩
- 조명철·김지연 2009. ↩
- 해리슨 2003, p494. ↩
- 남한의 진보 세력이 이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면 계급 협조주의 정치에 빠지기 십상인 이유다. 다음의 사례는 “상호 체제 인정·존중”이 개혁주의와 잘 맞물린다는 것을 보여 준다. 북한 당국은 올해 당대표자회에서 규약을 개정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 해방과 인민민주주의의 혁명 과업을 완수”를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 해방과 민주주의 혁명의 과업을 수행”으로 바꾼 것이다. 이정철 2010의 지적대로 “적화의 목표치가 물 빠진 붉은 색으로 하향 조정”된 것이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이 “평화 공존”과 함께 “사회주의로 가는 다양한 길”을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
- 이영훈 2004, p37. ↩
- 조명철·김지연·홍익표·이종운 2009, p37. ↩
- 위키리크스에 폭로된 주한미대사관의 보고. ↩
- 이태섭 2009, p300. ↩
-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논평. ↩
- 스테어스 & 위트 2009. 이 보고서는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미국은 “점진적인 경로를 통한 통일 방식을 선호”할 수 있는 남한과 “의견 불일치의 가능성”이 있으며, “핵무기와 다른 무기에 대한 안전 확보”를 위해 “일방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 스테어스 & 위트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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