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 어떤 전략과 전술인가?
전략과 전술의 기초
이 글은 필자가 2009년 7월 하순 ‘다함께’가 주최한 ‘맑시즘2009’의 한 워크숍에서 한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그 강연은 ‘맑시즘2009’에서 가장 좋았던 강연 중 하나로 꼽혔다. 다만, 필자는 시간 부족으로 공동전선에 대한 얘기를 미처 끝내지 못했는데, 이 부분은 이번 호의 다른 글들에서 구체적 또는 일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치 전략이고, 더구나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목표로 하는 전략이다.
전략이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책들이 무엇이 있나 살펴보니 입시 전략, 경영 전략, 연애 전략 등에 관한 것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다룰 전략은1. 누구의 전략인가? 조직된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이다
그냥 운동 자체의 전략, 그러니까 대중 운동 측이 내놓는 전략, 대중의 전략, 계급의 전략 같은 것은 없다. 자발적인 운동, 자생성, 자발성만 갖고는 전략이라는 개념을 내놓을 수가 없다. 자발성이라는 개념은 전략이라는 개념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가장 일관된 자발성주의자들인 자율주의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일관되고 경직된 자율주의자들은 전략에 대해 날카로운 거부감을 보인다. 《제국》을 쓴 토니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그리고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를 쓴 존 홀러웨이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계획하는 것이고 설계하는 것이다. 뭔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 저것 다 중요하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다. 이 전투가 중요하다고 하면 그 전투에 힘을 쏟는 것이 바로 전략이다.
전략은 목적의식적인 것이다.정치 전략이 되지 못하고 매우 협소한 것이다. 전략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노동조합의 전략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전략은 아주 협소하기 이를 데 없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사용자들의 공세로부터 임금을 포함한 노동조건을 지키고, 노동력 판매 조건을 놓고 사용자들과 협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전략은그러므로 또는 그럼에도 노동조합에는 정치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럴 때 노동조합 간부들은 자신이 직접, 또는 간부들과 연결돼 있는 개혁주의 정치인들이 개혁주의 정당으로 조직돼서 의회 내에서 개혁 입법 같은 것을 만드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개혁주의 전략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의 제도들, 특히 의회 제도 같은 데에 개입해 그것을 개혁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이 바로 개혁주의 전략이다.
여기서는 개혁주의 전략이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 변혁 전략, 즉 사회주의적 전략에 대해서 다루려고 한다. 그 이론적 토대는 마르크스주의다. 사회주의적 전략의 첫 번째 출발점은 조직으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자기 인생을 통틀어 계속 반복되는 일이라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노동자 다섯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우익적이고 보수적인 노동자고, 다른 한 명은 여성 차별과 유대인 혐오와 인종차별과 종교차별 등에 반대하는 투쟁적 노동자고, 나머지 세 명은 그 중간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상황에 따라서는 우파적인 노동자를 지지하기도 하고 투쟁적인 노동자를 지지하기도 하는 식이었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 계급 의식의 불균등을 보여 주는 사례다. 그런데 불균등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조직 안에 있게 되면, 보통 때는 잘 나가다가도 아주 첨예하고 민감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분열돼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늪처럼 질척질척한 수렁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제2차세계대전 같은 커다란 문제가 닥쳤을 때 누구는 전쟁을 지지해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우리가 분열하니까 전쟁 문제는 아예 얘기하지 말자’고 한다. 따라서 투쟁적인 소수는 별도의 독립적인 조직, 독자적인 조직으로 뭉쳐야 한다는 점을 트로츠키는 강조했다. 물론 투쟁적 소수는 공동전선이나 노동조합 등을 통해서 대중적인 조직을 유지하고 거기서도 활동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레닌 당 이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출발점이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전략과 전술에 대한 얘기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 돼 버린다. 왜냐하면 전략과 전술을 집행하려고 할 때 완전히 마비가 돼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2. 이데올로기의 중요성 ― 선동과 선전
전략과 전술의 두 번째 관문은 이데올로기 문제다. 전략과 전술을 이데올로기, 즉 정치적 주장(선전·선동)과 따로 떼어 내서 얘기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는 대의명분을 제공하고 사기를 진작하는 효과를 낸다. 올리버 크롬웰은 17세기 중엽에 청교도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영국 혁명에서 신형군New Model Army을 별도로 조직했는데, 이 군대를 처음 조직할 때 대의명분을 굉장히 중시했다. 즉, 봉건적 사상에 견주면 급진적인 청교도 정신을 중시하는 평민 출신자들로 간부를 구성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해 사병을 모집해 신형군을 조직했는데,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셰익스피어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자신의 싸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자는 세 배로 무장한 것이나 다름 없다.” 나폴레옹도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물량을 1이라고 한다면, 정신은 3이다. 특히 전투력이 열세인 상태에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부패한 정부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휘부가 썩으면 사병들을 제대로 진두지휘할 수 없는 것이다.
3. 전략과 전술의 의미
세 번째로 전략과 전술의 의미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근본적 사회 변혁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들이 전략과 전술이라는 말을 채택했을 때, 그것은 군사적 용어를 빌어 쓴 것이었다. 엥겔스와 레닌과 트로츠키는 모두 클라우제비츠라는 군사 전략가를 굉장히 존중했다. 엥겔스는 1848∼49년 유럽혁명 동안 시민군에 참가해 전투를 하고 다녀서 별명이 장군이었다. 트로츠키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몇 년 동안 발칸전쟁 종군기자로 전투들을 취재하면서 전투 경험을 쌓았다. 나중에 그는 러시아 10월혁명 때 무장 봉기를 지도했고, 혁명이 성공한 뒤 국방부 장관이자 군 최고 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적군 사령관을 지냈다. 트로츠키는 두꺼운 책 다섯 권 분량이나 되는 군사 저작을 저술하기도 했다. 어쨌든 전략과 전술에 아주 능한 이 사람들이 모두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을 매우 존중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책은 칸트 철학 관련 얘기가 많아서 읽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처음에는 축약본을 읽는 것도 좋겠다. ‘지만지고전천줄’이라는 문고판 시리즈 중에 《전쟁론》이 포함돼 있다.
설계를 하는 것이 바로 전략이다. 또, 그에 관한 이론이 전략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적 정치 전략을 정의하면 ‘계급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유리한 입장에 놓이기 위한 최선의 방법에 관한 이론과 기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전쟁과 전투를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전략은 바로 전쟁과 관련 있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이론, 즉 전쟁술, 이것이 바로 전략이다. 쉽게 말해서 전투를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전투가 더 중요한가를 정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처지에서 드는 사례이기는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에서 서부전선의 노르망디 전투가 가장 중요하고 동부전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결정적이라면, 이처럼 전투들의 비중과 경중을 가려서 병력을 집중 배치하는 등전술은 전투에 관한 병법이거나 전투에 관한 이론이다. 전술은 각각의 투쟁에 관한 우리의 병법으로, 쌍용차 투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전술, 미디어법 철회 투쟁에 대한 전술, 특정 집회에 대한 전술 등이 있을 수 있다. 또, 운동의 갈래에 대해서도 전술을 얘기할 수 있는데, 학생운동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전술,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전술, 민주노동당(그리고 기타 개혁주의 정치운동)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전술 등이 있을 수 있다. 또, 의회와 선거 문제도 우리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전술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의회가 가장 중요하고 전략의 거의 전부이다시피 하므로 의회와 선거가 그들에겐 전략이지만 말이다. 또, 중요한 특정인에 대해서도 전술을 얘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나 중요 노동조합 위원장 등에 대한 우리의 전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적 정치 전술이란 ‘특정 투쟁이나 운동이나 운동부문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기로 한 방법과 그에 관한 이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4. 정치적 목표들을 명확히 규정하고 주기적으로 재평가하라
네 번째는 정치적 목표들을 명확히 규정하고 주기적으로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2003~05년에 반전과 반신자유주의 두 개의 축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선거 때가 되면 반보수·반한나라당, 비중도(당시 열린우리당)의 입장을 취했다. 또, 노동자 투쟁이 떠오르면 노동조합 투쟁, 정확히 말하면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우리의 전략상의 역점 분야에 넣고, 그것이 별로 활성화되지 않을 때는 그것을 전략적 강조 분야에서 잠시 뺐다. 2008년의 상황을 예로 들자면, 촛불운동이 벌어질 당시 전략이든 전술이든 모두 촛불운동에 집중됐다. 9월에 금융 공황이 터져 경제 위기가 세계를 엄습했을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조직 내에서 선전과 교육을 강조했다. 올해[2009년 - M21] 초 다함께는 대의원협의회에서 올해의 전략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반신자유주의 문제는 더 깊숙이 들어가서 노동자 투쟁을 강조했고, 반전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이 파병군을 철수한 데다 국제 반전운동도 운동 자체는 폭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당면한 시기에) 반전운동을 그리 강조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우리는 학생운동을 강조했는데, 아직은 불발 상태로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내년 초 대의원협의회에서 이것을 평가해 보고, “지난해 우리는 학생운동이 주요하게 떠오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잘못 예측했다”라고 자기 비판을 하면서 전략을 수정하든지, “그래도 한 해를 더 두고 보자”든지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 계속 재평가해 봐야 한다.
우리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전술도 계속 재평가하면서 명확하게 해야 했다. 분당 사태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민주노동당에 얼마나 힘을 실을 것인가를 논의해 이제는 전보다 힘을 좀 많이 빼고, 그 안에 있되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선전하기보다 가맹 상태 정도로만 하기로 했다. 이런 것을 명확히 해주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잊을 수 있고 여러 일들에 치이다 보면 개념이 모호해질 수 있다.
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서 싸우는 공동투쟁본부(이하 공투본)도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공투본은 PD 좌파들, 그러니까 노동자주의적인 단체들의 기구다. 여기에 다함께도 참가하고 있고, 다함께 측 파견자가 그 단체의 중요 직책도 맡고 있다. 우리는 올해 대의원협의회에서 그 기구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지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공투본이 노동조합 투쟁에서 전국적인 위상으로 떠오를 전망은 별로 없다. 노동조합의 고위 상근간부직을 NL 경향과 온건 PD 경향, 민주노총 용어로 말하자면 국민파, 자주파, 중앙파가 차지하고 있어서 공투본 같은 급진적 좌파가 민주노총 전체의 전국적 노동조합 투쟁을 지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개별 노동자 투쟁이 벌어질 때는 상당히 종파적인 좌파일지라도 빼어난 리더로 떠오를 수 있다. 노동자 투쟁이라는 특별한 성격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종파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나 투사일지라도 이런 투쟁 속에서는 자신의 종파적 정치를 많이 희석하고, 그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자로서 행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소 종파적 경향이 있는 조직들의 결집체이더라도 우리는 공투본에 참가한다.’ 이렇게 명확하게 결정을 했는데도 다함께 측 파견자는 공투본 활동을 하는 사이에 여러 혼란을 겪었다. 공투본의 다른 사람들이 이 기구를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과 경쟁하는 정치단체로 자리매김을 하거나 몰아가려는 것에 그도 부지불식간에 녹아들었고, 공투본이 굉장한 단체나 되는 양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잠시 멈춰 서 우리가 처음에 공투본의 위상을 어떻게 매겼는지 되짚어 보며 다시 토론했다.
5. 전략의 우위 ― 전투에서 패배하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게 중요
다섯 번째 사항은 전략이 전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전투에서 패배하더라도 전쟁에서 이기거나 유리한 처지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전쟁과 전투의 구분을 살펴봤는데, 이라크 상황을 두고 몇 년 전에 미군 고위 장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전투에서는 이기고 있지만, 전쟁에서는 지고 있다.” 사실 그랬다. 우리도 당시에 바로 그렇게 평가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유명한 설(떼뜨) 공세가 있었다. 1968년 1월에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미 대사관, 미 공군기지 사령관 사택, 베트남 대통령궁, 방송국 등 상징적인 장소들을 공격하고 잠시 점거했다. 그리고 몇 시간 만에 쫓겨났다. 군사 작전 자체는 실패였다. 전투에서는, 즉 전술 면에서는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전 세계에 방영됐고, 전 세계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의 중요성과 문제들을 알게 됐고, 반전운동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반전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자 NLF 전사들도 굉장히 힘을 얻었다. 결국 설 공세는 베트남에서 미국을 축출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전투, 즉 전술 차원에서는 졌지만, 전략 차원에서는 전진을 이룬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전략적 관점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핵 폐기장 반대 운동을 예로 들어볼 수도 있다. 부안에서는 핵 폐기장 반대 운동을 성공적으로 해서 핵 폐기장 건설 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러자 정부는 ‘그러면 다른 곳을 추진하겠다’며 경주에다 건설하기로 계획을 바꿨는데, 경주는 핵 폐기장 건설을 막는 데 실패해 결국 유치됐다. 우리의 적은 하나인데, 우리가 서로 나뉘어서 자신들의 전술 관점에만 매몰돼 있으면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리고 전술 문제에 매몰되다 보면 정치적 실용주의로 기울기 쉽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랬다. 제정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던 볼셰비키와 달랐던 대목이다.
또 다른 사례로 1936년 프랑스의 인민전선Popular Front을 들 수 있다. 인민전선은 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좌파가 급진당이라는 친자본주의적 정당과 동맹을 맺고 그 정당의 강령과 요구와 투쟁 수위 안에서 움직이기로 협약을 맺은 것이었다. 스페인에서도 인민전선을 맺었는데 공산당은 인민전선을 통해 몇십 배로 성장했고, 인민전선은 선거에서도 이겼다. 그래서 오늘날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약간 좌파적인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인 좌파들은 인민전선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곤 한다. 트로츠키주의자인 아이작 도이처도 1930년대 인민전선이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협소한 시각이다. 전술적으로 보면 성공이었지만, 사실은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은 친자본주의적인 정당과 연합해 그 정당의 강령과 투쟁성을 넘지 않기로 협약을 맺음으로써 당시에 굉장히 크게 일어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을 자제시키고 ‘정상화’시켰다. 당시 노동자 수백만 명이 공장점거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인민전선은 전술로는 이긴 건지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패배의 길을 의도치 않게 걷고 있던 것이었다.
요컨대 전략의 우위란 크게 보고 넓게 보라, 더 큰 목표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크게 보고 넓게 보려면 전체적인 상황, 즉 전체 사회 상황과 세계 경제의 상황 등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경제와 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다시 말해 이론이 있어야 한다. 이론이 없다면 운동이 침체하는 시기에는 사기가 떨어져 운동을 그만두거나 개혁주의자로 바뀔 수 있다.
지금까지 전략이 우위라는 것을 설명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술이 독자성 없이 전략에 완전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전술의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 노무현 탄핵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다함께는 다른 사회주의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탄핵 사건 전부터 노무현 정권을 반대했다. 그러면 전략적으로 노무현 반대니까 노무현이 탄핵당한 것을 그대로 놔둬야 할까? 다함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좌파는 그런 태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미련한 태도다. 노무현이 탄핵되면 한나라당과 우익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같은 한나라당 집권이 4년 앞당겨졌을 텐데 그 4년 동안 좌파들은 조금 덜 탄압적인 상황에서 유리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2004년 이후에 전개된 상황을 돌아보면 좌파들은 그 해 여름 반전운동을 하면서 노무현 퇴진 구호를 내걸기도 했고, 탄핵 직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뿐 아니라 민주노동당도 굉장히 전진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운동이 전진하는 데, 다시 말해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데서 노무현 탄핵 반대라는 전술이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훨씬 더 고전적인 사례를 들어 보자. 1917년 8월 말 러시아에서 코르닐로프 장군이 반혁명적 우익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자 볼셰비키는 그동안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와 병사 소비에트를 지지하던 데서 전술을 바꿔 임시정부를 지지해 코르닐로프에 맞서기로 했다. 전술이 전략에 종속된다는 말을 기계적으로 이해해 교조처럼 떠받들고 있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신축성 있는 전술 전환이었다.
따라서 전략의 우위를 얘기하지만, 그것이 기계적으로 전술을 전략에 종속시켜야 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해 잘 판단해야 한다.
6. 전략의 설계 ― 전략 기획의 출발점
여섯 번째 사항으로, 전략 설계를 직접 해 보는 것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도대체 우리의 적이 누구이고 우리 편은 누구인지 구별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고 상식적인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운동에 참여하다 보면 적과 동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뜻밖에 굉장히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민주당이 한 예다. 민주당은 어떤 세력인가? 분명히 해두자면, 민주당은 자본가 계급의 정당으로 우리의 적이다. 비록 주적은 아닐지 몰라도 말이다. 민주당에는 과거 운동권 출신자들이 꽤 있어 현재의 좌파들과 느슨한 인맥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포퓰리스트 이데올로기와 포퓰리스트적 연계를 가지고 우리 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포퓰리스트적 자유주의 정당이지만, 결코 우리의 친구는 아니다.(민주당이 현재 좌파와 맺는 관계는 아주 느슨한 인맥적 관계로 영국노동당이 노동조합과 맺고 있는 것과 같은 밀접한 연계는 아니다.) 그런데 운동 내 일부 사람들은 민주당과 전략적으로 동맹을 맺자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민주당과 전술적으로는 동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중요한 집회를 민주당이 주도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 집회에 안 간다면 안 될 것이다. 그러면 민주당이 좌지우지하게 되고 민주당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악착같이 끼어들어서 어떡해서든지 민주당의 헤게모니를 잠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아나키즘을 들 수 있다. 권위가 싫고 울분에 불타는 반항적 청년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고, 또한 촘스키나 박홍규 영남대 교수 같은 반체제적 저술가들을 비난하려는 것도 물론 아니다. E H 카가 “반대파에 대한 반대파”라고 한 종류의 아나키스트들, 즉 주요 좌파들을 주로 매도하는 초좌파적 종파주의인 아나키즘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현재 우리의 적은 이명박 정권과 자본가들과 보수 우파 정치인들인데, 오히려 이 자들과 맞서 싸우는 우리 진영을 주되게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아나키스트들의 역할이다. 아나키스트 중에는 사실은 마르크스를 부정하면서도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래서 가장 효과적인 아나키스트들이 있는데 바로 자율주의자들이다. 자율주의자들은 운동 내에서 오히려 운동의 지도부를 비판하는 데 주력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촛불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지고 있을 때 자율주의자들은 촛불운동의 지도부인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비판하는 데 주력했다. 물론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비판받을 점이 있었지만 대책회의가 하는 일을 지지해야 할 측면들도 있었다. 또, 우리가 대책회의를 지지해야 운동에 새롭게 참가하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영향력을 건설할 수도 있다. 그런데 대책회의를 적처럼 공격하는 데만 몰두하는 세력들이 있었던 것이다.
정체성 정치를 또 다른 예로 들 수도 있다. 정체성 정치를 받아들이는 운동 중에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있다. 필자는 투쟁적인 여성운동을 지지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운동 내 특정(현재는 주된) 갈래일 뿐이지 그 자체가 여성운동인 것은 아니다. 1백 년 전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운동 내에서 주된 갈래였다. 어쨌든 지금은 분리적 페미니즘이 여성운동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갈래 중 하나인데, 이 경향은 남성을 다 적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여성은 다 동맹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심지어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몇 년 전에는 〈한겨레〉 기자 출신인 최보은 당시 《프리미어》 편집장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입장을 내놓는 착각까지 가게 된 것이다. 또, 여성계 NGO들이 정부에 들어가서 정부에 포섭되다 보니까 이제 자신이 대표하고자 한 평범한 여성들과 대립적인 입장에 서는 처지까지 가게 되곤 하는데 이런 상황도 면밀하게 봐야 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또 다른 예로 들 수 있다. 2007년 한국인 선교사 피랍사건 때 참여연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탈레반이나 미국 제국주의나 똑같다는 양비론을 취했는데, 이는 반전운동에 큰 어려움을 줬다. 사실, 지금도 이런 양비론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전쟁 반대 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탈레반이나 미국 제국주의나 똑같다고 보는 것은 큰 착각이다. 탈레반이 지독히 혐오스러운 자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리고 만약 미국이 쫓겨나면 탈레반이 집권할 가능성도 적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미치는 나쁜 영향력은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수백만 주민에 한정된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미국 제국주의가 패배한다면 전 세계 수십억의 평범한 대중에게는 큰 전진인 것이다. 베트남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왔듯이 미국 제국주의가 패배하면 미국이 다른 나라에 개입하기가 굉장히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탈레반이 어떤 세력이냐에 관계 없이 미국 제국주의가 패배하기를 바라야 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반전운동의 전술에서뿐 아니라 전체 전략에서도 유리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대하는 태도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마치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격하는 초좌파적인 종파들이 꽤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비판받을 바가 많은 개혁주의 정당이다. 여러 가지 한계와 약점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우파 세력이나 민주당 같은 중도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세력들과 대립할 때 분명하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지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난 4월 재보궐 선거 때 울산 북구에서 조승수 씨가 후보로 나왔다. 조승수 씨는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 〈조선일보〉에까지 글을 쓰며 좌파들을 비난한 사람이다. 그의 이런 전력이 불쾌하지만 그가 울산 북구에서 한나라당 후보와 맞붙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표를 던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노준이나 그 단체와 연관을 갖고 있는 지식인인 손호철 교수 등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모든 것이 실종돼 버려서’ 별 의미가 없는 선거인 것처럼 말했다. 이와 달리 다함께는 ‘조승수 후보에게 투표를 해라, 그러나 그는 국가보안법 등에서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하고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같은 자유주의자조차 조승수 씨를 비판하면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이 어떻게 〈조선일보〉에 그들 마음에 쏙 드는 글을 쓰는 체신머리 없는 짓을 하느냐’고 점잖게 꼬집은 적이 있는데, 다함께는 그 얘기를 인용하면서 조승수 씨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7. 적군과 아군에 대한 분석과 평가
일곱 번째 사항은 적군과 아군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은 무엇을 왜 하려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언제나 적의 능력을 정확히 판단하고 적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봐야 한다. 적의 강점만 보는 사람들, 주로 온건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패배의식에 절어 있다. 그들은 늘 적을 더 밀어붙이면 역풍이 분다며 소심하게 군다. 적을 너무 막강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을 너무 우습게 알아도 안 된다. 지난해 촛불운동 때 새로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급진적 청년들이나 좌파들이 아마 그런 태도였을 것이다. 1백만 명쯤 모이니까 이명박이 허수아비로 보였는지 지나친 낙관에 들떠 있었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처럼 반쯤은 우리 편이기도 하고 반쯤은 적의 편이기도 한 포퓰리스트적 자유주의 신문들이 자발성을 찬양하는 것에 그 청년들은 녹아 들어 있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좌파가 광우병국민대책회의로 하여금 이명박 퇴진 입장을 채택하고 노동자 투쟁을 호소하도록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다함께와 소수 단체들만이 이런 입장이었고, 특히 노동자 파업 호소는 오로지 다함께만이 주장했다. 당시에 중요한 과제들이 있었다. 첫째, 의제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노동자들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파업 투쟁을 해야 하는데 꼭 정치파업일 필요는 없었다. 각자 자신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등을 놓고 그러나 동시에 파업하면 그것이 정치파업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셋째, 이명박 정부를 설득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이명박 퇴진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앞으로도 권위주의적 탄압을 밀어붙일 정권이므로 물러나라고 해야 했다. 그런데 자발성 만능주의 관점에서는 자발성이면 다 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과제의 필요성을 인식할 리 없었다. 적의 약점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도취감에 빠진 나머지 지난 번에는 우리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이명박은 지금도 탄압을 강화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명박은 약하기 때문에 탄압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런 약점도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명박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간단히 살펴보자면, 첫째, 그는 지금 경기부양책이라는 가닥을 잡았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잠시 미뤄놓고 있다. 그는 지금 아래로부터의 대중 반란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은 특히 조직 노동계급을 겁내고 있다. 쌍용차 투쟁 때도 그는 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을 만나 협상안을 내놨고, 정갑득 위원장이 그 협상안을 가지고 쌍용차 노동조합 지부장을 만났는데,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은 그 협상안을 거부한 바 있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많이 해고되긴 했지만, 정규직이고 잘 조직돼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공격을 못하고 있다. 이 공격이 곧 있긴 하겠지만 아직 못하고 있는 것은 이명박이 조직 노동계급을 겁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나 피억압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반란이 제한적일 듯한 쟁점들, 특히 야당과 관련돼 있었던 쟁점들에서는 치고 나가는 측면이 있다. 특히 재벌 등 자신의 기반을 확실히 챙기기 위해서 미디어법을 통해 언론을 재벌에게 주고, 금산분리 완화법을 통해 재벌의 은행 장악을 허용해 주려는 것이다. 셋째, 이명박은 탄압을 강화하면서도 다른 한편 “중도 실용”을 내세우는데 이는 민주당과 친노세력의 지지 기반을 뺏어오거나 그들을 혼란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중도 실용’은 노무현 세력의 주된 구호였다. 노무현 정부가 표방했던 게 실용주의였고, 그 정권은 중도적이었다. 넷째, 이명박은 개헌 얘기를 꺼내 쟁점을 흐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는 작전을 쓰고 있다. 다섯째, 이명박은 북한의 핵무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해 운동을 분열시키려 한다. 왜냐하면 운동 내에 친북적인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간단히만 봐도 이명박이 뭘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무게중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적의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를 표현했다. 즉, 힘의 원천, 최대 강점, 가장 중요한 요소를 두고 무게중심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게중심을 잃어 버리면 팍 쓰러진다. 그러니까 적의 힘의 원천은 동시에 적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한 것이다. 레닌은 이를 두고 ‘사슬의 약한 고리’라고 불렀다. 김대중 정권의 무게중심은 남북 화해 협력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운동을 분열시키고, 운동 내 포퓰리스트들을 어느 정도 달래고, 운동 내의 전투적인 계급투쟁주의자들을 고립시켰다. 노무현은 첫 해에는 김대중 정권의 남북 화해 협력을 채택하지 않다가 굉장히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2004년부터 그것을 채택했다. 지금 이명박의 무게중심은 경제다. 그는 경제로 당선됐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부부을 아주 집요하게 공격해야 한다. 경제와 관련된 노동계급 투쟁, 이런 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 투쟁을 일으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론 노동자가 아닌 다른 천대받고 차별받고 억압받는 여성, 이주자, 장애인, 동성애자 들을 방어하는 일도 절대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8. 전략의 핵심인 집중과 기동 중 집중에 관해
여덟 번째, 클라우제비츠는 전략의 핵심은 두 가지인데 바로 ‘집중’과 ‘기동’이라고 말했다. 먼저 집중에 대해 살펴보자면, 우선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을 구분해야 한다. 어떤 운동이든 다 중요하다는 입장, 즉 자율주의나 아나키스트들의 입장을 가지고는 전략적으로 효과적일 수 없다. 즉,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없다. 주요한 것이 무엇이고, 덜 주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한 다음에 주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투를 결심했다면, 먼저 전 전투력을 집결시켜라. 단 한 방울의 물이 양동이 물을 넘치게 하는 것처럼 때때로 단 하나의 대대가 그날의 승패를 결정짓는다.” 어떨 때는 그런 주요한 전투가 있는 법이다. 그런 전투 하나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면, 전체적인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지형이 유리하게 바뀌기도 한다. 거꾸로 패배하면, 유리하던 지형이 불리하게 바뀔 수도 있다. 올해[2009년 — M21] 4월 쯤에 다함께는 여름에 미디어법 철회 투쟁과 쌍용차 투쟁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보고 거기에 전력을 실었다. 지금 미디어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바람에 사람들의 사기가 약간 꺾인 면이 있지만 계속 싸울 여지가 있다. 저들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미디어법을 통과시켰으므로 계속 싸워서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전술적 여지가 있는데, 그러려면 쌍용차 투쟁의 향방이 중요하다. 쌍용차 투쟁이 이겨야만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게 되고, 그래야 미디어법을 뒤집는 투쟁에서 결정적인 고지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쌍용차 투쟁에서 패배한다거나 어설프게 타협으로 끝나 힘이 빠지게 되면, 미디어법을 둘러싼 전투에서 적이 역습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집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힘의 집중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간단한 전략 원칙은 없다. 간단히 말하면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레닌은 이를 두고 “사슬의 올바른 고리” 또는 “막대기 구부리기”라고 불렀다.
9. 전략의 핵심인 집중과 기동 중 기동에 관해
다음으로, 기동에 관해 살펴보자면, 이것은 기동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즉 전술 전환을 신속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속하게 정책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과거에 잘 먹혔던 방식을 그대로 채택하려 하지 말라, 관성적 사고를 배격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인용하는데, 나는 그 반대를 훨씬 더 강조한다. 즉,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무엇을 성공했을 때 다음에도 자꾸 그대로 하려는 관성이 우리 좌파들에게 강한데 이는 실패를 낳을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의 호엔로에 장군 사례를 드는데, 호엔로에는 1806년에 전에 성공적이었던 사선 전투 대형을 그대로 사용했다가 나폴레옹 군대에게 참패를 당했다. 전에 잘 먹혔던 거니까 지금도 잘 먹히겠거니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계획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 사이에는 언제나 어떤 격차가 생겨나는데, 클라우제비츠는 그것을 ‘마찰’이라고 불렀다. 이론과 실천은 결합돼야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일시적으로 분명히 이론과 실천 사이에 격차가 생기고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라우제비츠는 직관을 강조한다. 이론과 경험도 중요하지만, 이론과 경험을 사용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척 보고 감으로 판단하는 직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변혁적 조직의 활동가들에게 직관은 매우 중요하다. 직관을 기르려면 많은 전투를 해보고 그 전투를 평가하고 분석해 이를 이론과 연결시켜 봐야 한다.
9·11 이후에 많은 좌파들이 반전운동으로 전환하기를 거부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 전까지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주력하던 좌파들이 반전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을 비난했다. 반전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다 다함께라고 몰아붙일 정도로 좌파들의 저항이 굉장히 강력했다. 그것은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왜 반전운동으로 전환돼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를 답습하려는 문제점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처럼 성공은 사람들을 자기만족적으로 만들고 나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매번의 상황은 매번 새로운 것이다. 언제나 변한다. 똑같은 상황 또는 역사가 되풀이되는 경우는 없다. 마르크스가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났다”고 한 말이 아주 유명한데, 이 말은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는 똑같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꼭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뭔가 새로운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레닌은 ‘상황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그래서 ‘진리는 구체적’이라고 강조했다. 레닌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하라고 말했다. 추상적인, 시공을 초월해서 맞는 것 같은 얘기를 늘어놓지 말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는 요인들을 분석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17년 4월 초 러시아로 귀국했을 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하고 호소하면서, 임시 정부를 지지하고 있던 선임 볼셰비키 간부들을 ‘구식 볼셰비키’라고 비판했다. 1905년과 달리 유럽이 국제 혁명 전야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당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해 촛불 집회가 대규모로 벌어지던 당시에 민주당은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촛불 집회에서 사람들은 민주당 의원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거나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했다. 한 마디로 별볼일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당이 주도하다시피 한다. 왜 그런가? 물론 원인이 있다. 촛불운동을 풍미했던 자발성 예찬론 때문이다. 물론 자발성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자발성만 갖고는 안 된다. 자발성 더하기 목적의식적인 계획성, 리더십, 집중된 조직 등이 매우 중요하다. 촛불운동 당시에는 자발성만 예찬했는데, 사실 순수한 자발성은 있을 수 없다. 누군가 거기에서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고 있게 마련이다. 지금 그 수혜자가 민주당인 것이다. 1년 만에 민주당은 자발성주의에 도취돼 있는 젊은 세대들, 자발성주의를 추수한 좌파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헤게모니를 잡은 형국이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가 아니꼽더라도 민주당이 주도하는 운동에 전술적으로, 다시 말해 개별 사안별로 필요하면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전략적으로 동맹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이것이 지난해 상황과 올해 상황 사이의 변화인 것이다.
10. 동맹의 기예 ― 공동전선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동맹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공동전선 문제인데, 맨 마지막에 비록 짧게 다루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특히 우리가 혼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들과 동맹해야 한다. 다함께는 매우 급진적인 소규모 단체들과 원칙 면에서는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반전이나 반제국주의 투쟁에서는 그들과 동맹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2003년 늦여름에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새롭게 일으키려고 할 때 NGO들이나 NL 경향이 협조하지 않아서 ‘노동자의 힘’ 등 다른 급진좌파들과 동맹을 했는데, 그 동맹[반전평화공동행동]은 우리 혼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집회를 열었을 때 반전 분위기가 뜨니까 2천5백 명 정도를 모았는데, 그 가운데 1천여 명이 다함께 회원이거나 다함께 후원회원격인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1천 몇 백 명은 반전운동을 지지하는 훌륭한 청년들이었는데, 이들은 대개 조직적인 연계가 없거나 느슨한 네트워크 정도만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 동맹으로부터 별 득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 원칙이 우리와 흡사한 급진 좌파들과 만나서 좋은 대화를 나눌 용의가 있지만, 반전이나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을 건설하는 데서는 가장 중요한 동맹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공투본[자본의 위기 전가에 맞서 싸우는 공동투쟁본부]에서처럼 다함께는 사노준, 사노련 등 급진 좌파 단체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지만 이런 것은 공동전선이 아니다. 급진 좌파들끼리 하는 것은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한 좌파 재결집체라고 할 수 있다. 공투본은 노동운동 내 좌파 블록을 형성해 노동조합 상층의 보수적 상근 간부들을 견제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고, 우리는 공투본을 경제투쟁에 개입하는 채널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개혁주의자들과 하는 공동전선과는 목적이 다르다.
공동전선은 믿지 못할 세력, 온건하고 개혁주의적인 세력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달라 붙어서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당기고자 공동전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노준, 사노련 같은 급진 좌파들은 다소 종파성이 있어서 공동전선이 필요한 상황에서 공동전선을 거부하곤 한다. 개혁주의자들과도 과감하게 연대체를 꾸려 함께 싸울 필요가 있는데, 종파적이 되기 쉬운 급진 좌파들은 ‘NGO들이나 NL과는 함께하고 싶지 않다’며 공동전선을 거부해서 운동을 건설하는 데 조금 문제가 된다. 짜증이 나더라도 온건하고 개혁주의적인 세력과 협력해야 하고, 그러나 비판이 필요할 때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식으로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