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 어떤 전략과 전술인가?
역사에서 배운다
해방정국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
서론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가 패전하면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조선인들은 폭발적으로 전진했다. 그들은 다시는 강대국의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자유로운 독립 국가 건설을 염원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해 스스로 관리하려 했고, 농민들은 가혹한 소작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조선인 자본가와 대지주 들은 일제에 협력한 과거 때문에 한동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억압의 최선봉에 선 친일 경찰들은 목숨을 부지하려면 몸을 숨겨야 했다.
조선인들은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 정책을 반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에서 각자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결국 내전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이런 상황에 부응할 수 있는 운동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전략이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었다. 독립된 민족국가 수립, 지주제 철폐, 친일 잔재 해소,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적 간섭 반대 등 당시 즉각적으로 제기됐던 과제들은 전형적인 ‘부르주아적·민주주의적’ 과제들이었다. 그런데 누가 이 과제들을 수행할 것인가?
조선인 ‘민족 자본가’는 그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우선, 그들이 그나마 자본을 모을 수 있던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 구조에 깊숙이 편입됐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친일은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민족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 기층 민중을 동원할 정통성이 전혀 없었다. 대표적인 ‘민족 자본가’ 김성수 가문을 연구한 카터 에커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에 참여한 것은 식민지기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종언을 장식했다. 김연수로 대표되는 자본가 계급이 1919년∼1920년대 초에 보유하고 있었던 정치적 지도력의 신임장은 내선일체기에 크게 퇴색했고, 다른 계급들에 대해 진정한 헤게모니를 확립할 가망은 거의 없어졌다. 2
김씨가[家]가 내선일체 운동
친일 잔재를 사회·경제적으로 청산하려 해도 오히려 이 ‘민족 자본가’들과 지주들에 맞서는 투쟁이 필요했다. 게다가 남한에서 이 ‘민족 자본가’와 지주 들은 한반도에서 일본이 물러나자 곧 미국 제국주의에 빌붙어 살아남으려 했으므로, 반제국주의 민족 독립 과제에서도 동맹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과제들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는 세력은 노동자 계급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혁명이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농민의 지지를 얻으며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파들은 거의 다 이런 전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상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규정하고 거기서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서로 적대적일지라도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반도 좌파들은 이 인민전선 전략을 좌우합작론이나 민족통일전선론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해방 당시 좌우합작론을 옹호하는 주장이 광범하다. 대표적으로 서중석 교수가 있다. 그는 여운형이 중심이 됐던 좌우합작론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당시의 좌우합작론과 오늘날 이 전략을 대안으로 여기는 논리에는 서로 연관된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최소강령주의’다. 민족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면 다양한 계급을, 심지어 우익까지도 포괄해야 하므로, 강령 수준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둘째, ‘선先 민족국가 건설, 후後 계급투쟁’론이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민족 국가 건설이므로, 일단 국가부터 건설한 뒤에 체제 경쟁이나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 간, 좌우익 간 투쟁은 민족을 분열시키는 행위이므로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협상을 통한 국가 건설론인 평화혁명론이다. 이는 계급 간 평화, 좌우익 간 정치 협상으로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일 뿐 아니라, 당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던 두 열강 간의 협상에 의존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나 조선공산당의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은 모두 미국의 신임을 얻어 정권을 인수하기를 기대했다. 또, 미국과 소련이 정권 인수를 지원하고 보장해 주리라 믿었다. 스탈린의 인민전선 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좌익들의 좌우합작 노선은 결국 실패했다. 우익과 우익을 비호한 미군정의 존재가 실패의 주된 요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들의 노선 자체에도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계급투쟁을 고무하고 계급투쟁에 의존하지 않고도, 우익이나 미군정과의 협상으로 민족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좌우합작 전략 자체가 약점이었다.
해방 직후 준혁명적 상황에 이를 정도로 고양된 분위기는 겨우 3년도 안 돼 최악의 반동기로 접어들었다. 제주도 4·3항쟁의 비극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해방 직후 좌익에게 유리하던 세력 균형이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계급 협조 노선을 바탕으로 한 당시 좌익의 자기 제한적 전략을 빼놓고 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 글은 이 문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8월 테제’
해방 후 좌우합작 운동이라 하면 보통 좁게는 1946~47년 미군정과 여운형 등이 주도한 합작운동을 가리킨다.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데 좌우합작이 유일한 길이었다는 생각은 지금도 광범하다. 서로 매우 다른 정치적 경향에 속하는 서중석·한호석·장석준[각각 중도좌파 민족주의, 정설 주체주의, 평등파 PD]은 특히 여운형의 활동을 높이 평가한다. 현대 한국 사회의 중도좌파는 대부분 여운형의 ‘중도좌파’ 노선에 우호적인 듯하다. 특히, 해방정국 당시에는 분단만이라도 막아야 하고, 그러려면 우파와 좌파가 단결해야 한다는 정서가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물론 이는 좌파가 부추긴 측면이 크다).
그런데 여운형과 그의 좌우합작 운동을 높이 평가하는 논지는 필연적으로 비난의 화살을 좌우합작을 거부한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으로 돌리게 마련이다. 우파야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매우 강력한 세력이었던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이 ‘좌경·극좌·계급투쟁 노선’을 고집해서 좌우합작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의 노선을 그렇게 평가하면 곤란하다. 사실, 계급연합 전략이라는 점에서 보면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이 추구한 민족통일전선도 좌우합작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과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의 노선이 좌경적이고 계급투쟁에 충실해서 문제였던 것일까? 또, 과연 여운형식 좌우합작이 대안이었을까?
3 곧 철회했고, 오히려 더 나아가 “민족 부르조아의 반동성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며 4 한민당·국민당 등 우익 정당과 함께 연합을 추진하고 중경임시정부(이하 중경임정) 추대운동을 벌였다. 5
먼저, 조선공산당의 좌경·계급투쟁 노선 고집이 문제였다는 주장부터 검토해 보자. 그러려면 먼저 당면 혁명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견해를 살펴봐야 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거의 모든 좌파들의 혁명론은 단계론이었다. ‘장안파’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단계”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1945년 8월 20일 박헌영의 ‘재건파’ 공산당은 이른바 ‘8월 테제’를 발표해 부르주아 혁명론을 정식화했다. 이 테제를 요약하면, 조선은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인 소련과 미국이 해방시켜 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 단계가 아니므로, 대지주와 고리대금업자와 반동적 민족 부르주아지를 뺀 모든 인민이 참여하는 민족통일전선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7 에 입각한 ‘12월 테제’의 연장이거나 심지어 더 나아간 것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토지 국유화 주장은 “12월 테제에서도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8 조선공산당은 “지주와 부르주아들은 모두 다 일제의 살인강도적 침략적 전쟁을 지지하였고, 근로인민의 진보적 의사를 무시하고 ‘잔인무도한 군사적 제국주의적 탄압’을 행하였다고 비사실적으로 평가”했고, “‘특히 사회개량주의자의 영향 밑에 있는 일반 인민대중을 우리 편으로 전취함에 있어서 그들의 개량주의적 본질을 구체적으로 비판 폭로할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1928년의 코민테른 제6회 대회의 결의 및 12월 테제의 ‘계급 대 계급’노선”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9
그런데 서중석은 이 8월 테제가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의 ‘극좌적’ 태도를 표명한 것이고 따라서 이후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줬다고 평가한다. 또, 이 테제가 코민테른 3기 노선10 그러나 김무용도 지적하듯이, 토지 정책의 최고 강령으로 토지 국유화를 주장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11 게다가 ‘8월 테제’는 토지 국유화를 즉각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하지도 않았다. 이 테제는 “소작료를 3할 대 7할 별로 인하하고 이것을 화폐 지대로 정할 것”을 12 당면 임무로 제시했을 뿐이다. 미군정이 소작료를 3·1제로 인하한 것과 비교해도 그리 급진적이라 할 수 없다. 당시의 인플레를 고려한다면 조선공산당의 소작료 화폐 지불 요구가 농민에게 좀더 유리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조선공산당이 ‘8월 테제’에서 토지 국유화를 제기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제국주의자와 민족적 반역자와 대지주의 토지를 … 몰수하여 이것을 토지 없는 또는 적게 가진 농민에게 분배할 것이요, … 조선인 중소지주의 토지에 대하여서는 자기 경작 토지 이외의 것은 몰수 … 조선의 전 토지는 국유화한다.”조선공산당의 단계론적 접근은 1945년 11월 25일 조선공산당 이론가 박문규가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농업 문제를 두고 발표한 글에서도 드러난다.
토지 농업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오직 전 토지를 국유화하고 이것을 농민[에게] … 재분배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여 둘 것은 이러한 토지 농업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오직 전 민중이 이것을 지지하고 또한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우리의 건국 사업에는 … 지주도 참가할 수 있고 자본가도 참가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 ‘비몰수 토지(민족반역자가 아닌 조선인 토지)의 소작료는 3·7제로 함’이라고 규정하였던 것이다.
14 ‘8월 테제’의 입장과 많이 다른 것처럼 평가하지만, 지주에 대한 온정적 표현을 빼면 ‘8월 테제’와 내용상 다르지 않다.
서중석은 이 글이 “여운형 노선에 가깝다”며15 코민테른 3기 시절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한 ‘노농독재론’이나 ‘소비에트 국가론’과 비교하면 오히려 우경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8월 테제’가 중국의 국공합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8월 테제’가 식민지 시절 민족 자본가와 지주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8월 테제’는 그와 동시에, 향후 건설될 국가 권력의 성격을 명백하게 계급 연합 정권으로 규정했다. “대지주,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를 제외한 “모든 진보적 요소가 정견과 신교와 계급과 단체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참가하여야 하나니, 즉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야 한다.”보라! 중국혁명의 발전을. … 당면에 있어서 ‘단일 민족전선 정부’, ‘민주주의적 연합정부’, 공산당과 국민당의 민주주의적 연합정권을 조직하면서 있지 않은가? … 조선의 객관적 정세는 우리로 하여금 무조건하고 부르조아민주주의 혁명의 제 과업의 수행을 강경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요 조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힘있게 주장한다.
17 그러나 ‘8월 테제’는 코민테른 3기 노선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코민테른 해산 대회라고 말한 7차 대회(1935년) 18 의 연장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서중석은 이 주장을 “8월 테제의 취지와 논리적 모순” 관계라고 본다.19 그리하여 심지어 천황제조차 용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실, 당시 조선공산당의 노선은 1935년 이후 전 세계 모든 공산당이 채택한 노선이었다. 패전국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본 공산당 지도자 노사카 산조는 “일본 공산당은 현재 진행 중인 우리나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평화적이고도 민주적인 방법으로 완성함을 당면한 기본 목표로 한다”고 발표했다.5월 중순의 이 사건들은 이데올로기 면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민중의 저항은 대체로 천황에게 바치는 호소문의 형태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5월 19일에 승인된 결의문에서는 천황을 ‘군주’, ‘최고 권력자’와 동일시했으며, 국민의 의사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기를 공손히 부탁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천황이 그렇게 해 주기만 한다면 … 타락한 정치가, 관료, 자본가 및 지주를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자칭 좌파라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천황의 절대적 권위에 호소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인 것은 민주적 인민 정부의 수립을 내건 스스로의 투쟁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었다. … [공산당이] 격렬한 대립의 시대에 선택한 왕당파적 노선이야말로 희대의 농담거리라 할 만했다.“희대의 농담거리”라는 조롱은 아주 적절한데, 왜냐하면 패전 직전까지만 해도 일본 공산당은 천황제를 타도해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 세계 공산당들이 따른 스탈린의 노선은 미국·서유럽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전후 세력권 조정 협상 과정이 끝나지 않았고, 냉전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따라서 각국 공산당은 이 ‘협력’ 관계를 해칠 혁명적 주장과 실천을 해서는 안 됐다. 혁명에 의하지 않고도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뜻에서 스탈린은 “오늘날 사회주의는 심지어 영국 왕정 하에서도 가능하다”고까지 했다.
23 마찬가지로 이 ‘국제혁명 노선’은 혁명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규제한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고려한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조선공산당은 이를 ‘스탈린-루즈벨트의 국제혁명 노선’이라고 불렀다. 국제적 수준의 좌우합작인 셈이다. 이 노선 덕분에 “조선과 같은 데에 있어서는 평화적으로 혁명의 성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24 호치민이 남베트남에서 제국주의의 교두보를 허용한 결과,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기나긴 독립전쟁을 벌여야 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연합국을 환영한 대가로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다.
이 노선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자신이 조선의 “해방자”라고 규정한 미군정에 협력하는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이는 같은 시기 베트남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태도와 선명하게 대비된다. 베트남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베트남을 분할 점령하려는 영국군의 진주를 앞두고 주민들에게 무장 저항을 호소했다. 이 호소는 영국을 믿지 않고 독립을 상실할까 우려한 다른 민족주의 그룹에 강한 공명을 일으켰다. 영국군 진주에 맞서 사이공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은 영국군을 환영했고, 총파업을 주도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봉기에 가담한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하고 곧 처형해 버렸다.25 그래서, 서중석도 지적하듯이 한동안 조선공산당은 우익들과 합작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김남식은 조선공산당의 8월 테제가 “하층 통일전선의 필요성만을 지적”했다고 26 하지만, 실제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실천은 상당 기간 ‘상층 통일전선을 위한 정치 협상’에 매달렸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을 건준과 인공의 활동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서중석은 “8월 테제로 확립된 조선공산당의 기본 노선은 상당 기간 잠복되었고, 1946년 1월까지는 한민당, 국민당과 대좌하여 협동전선을 형성하여 보려고 시도할 만큼, 민족통일전선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단서를 달기는 한다. “8월 테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노선은 1946년 2월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할 때 …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27 건준은 민족대단결을 위한 좌우 연립을 표방했다. 그러다 보니 건준의 강령은 추상적이고 막연했다.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을 기함,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28
해방이 되자 조선에서는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염원이 분출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건준은 그 반영이었다. 그러나 김하영의 평가처럼 “민족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건설한 것은 진보임에 틀림없었으나, 건국준비위원회는 부르주아적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건준의 추상적 강령은 서로 상반된 계급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민족 단결 사상의 반영이기도 했다. 건준에는 착취 계급의 일부도 참가했고, 그래서 종종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모순을 피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보성군을 보면,
이곳에 서민호라는 자가 있는데 동인[同人]은 악덕 지주 고리대금업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극도의 배일[排日]사상이 있었던 것만은 장점이다. 8월 15일 이후 건준의 위원장이 되어 일인과의 투쟁에는 상당히 맹렬하였다. 그러나 치안대를 자기의 부하로 조직하여 이것으로 농민을 상당히 박해하였다. 그는 노농협의회를 해산시키려 하였고 부인회 석상에서 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년은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폭언한 사실도 있다.이런 모순은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난다. 지주들은 농민들의 소작료 납부 거부 같은 비교적 사소한 요구도 못 견뎌 했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담양군에서는 “농민조합의 ‘소작료 불납동맹’ 결성을 계기로 건준에서 지주 출신의 보수 인사들이 이탈했다.”
건준은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고무하지 않았다. 비록 건준은 일제 시기 관공서와 일본인 소유 작업장 접수 등을 호소하며 대중의 정서에 어느 정도 부응하기도 했지만, 당시 대중의 폭발적인 전진이 일정선을 넘지 못하도록 진정시키는 브레이크 구실도 했다. 예를 들어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민중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며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조선민족 3천만 대중에게 고합니다. … 여러분이 너무 흥분한 탓으로 … 까딱하면 민족백년의 대계를 그르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고로 자기의 할 일만을 힘써 하여야 합니다. 쓸데없이 거리에 나와 몰려다니지 말 것입니다. … 여러분 지금에 있어 시위운동은 아무 의미도 없고 도리어 대국을 그르치는 단서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즉시 시위운동을 금지합니다. 그리고 조선 일본 두 민족을 이간 붙이거나 감정이 서로 나빠질 운동을 절대로 금지합니다. … 여러분 조선 안에 지금도 백만대군이 남아 있으니 여러분은 현실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포고에 따라서 절대로 안정하게 행동하면서 곱게 이 시국을 넘어 나아가야 됩니다.
31 민족 단결을 강조하다 보니, 건준은 심지어 과거 친일파 인사들조차 일부 건준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 우파인 안재홍은 말할 것도 없고 좌파인 여운형도 “친일파는 극소수만 가려내어 처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여운형이 친일파인 “장덕수까지 건준에 끌어들이려 한 것은 지나친 행위로 비판받을 수 있을 것이다.” 32
30년 넘게 일본 제국주의와 토착 지배계급의 착취와 멸시로 고통을 겪은 민중에 대한 포고로는 전혀 적절치 않았다.33 우파들은 미군이 남한에 진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건준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건준의 좌우 연립은 금세 붕괴했다. 결정적 요인은 미국이 서울에 진주하리라는 소식이었다. 서중석도 지적하듯이, “미군의 서울 진주설은 남한에서 좌우익을 갈라놓는 데 하나의 분수령이 될 만한 역할을 했다.”이런 이탈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우파와 자본가·지주 들이 자기 기득권을 지키는 데서 좌우합작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좌우합작이나 민족 대단결은 초장부터 신기루였던 셈이다. 우파들은 한민당으로 집결했고, 건준에 맞서 중경임정 추대를 내세웠다. 우파들이 이탈하면서 건준은 좌익, 특히 공산당의 외피처럼 돼버렸다. 1945년 9월 공산당은 건준의 뒤를 잇는 인공을 선포했다.
여운형 같은 중도좌파는 더는 인공에 힘을 싣지 않았다. 이 기구가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1945년 11월 인민당을 결성해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세력 균형의 추가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운형이 사실상 인공을 이탈해 인민당을 창당한 것은 미군정과 우파를 달래고자 우경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여운형은 이승만과 김구, 심지어 한민당 같은 우파 세력과 공산당의 인공 사이를 중재하려 노력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보기에 인민당 창당은 “인공의 온건한 구성원들을 제외시킴으로써 반대파들이 이를 극단주의적 조직으로 표현하기 용이하게 만들어 결국 자체를 약화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공산당이 선포한 인공 강령은 가짓수가 늘었지만, 그렇다고 건준의 강령보다 특별히 급진적이지는 않았다. 조선공산당도 이 점을 적극 부각시키려 했다.
조선에선 좌익 분자가 일본 제국주의에 맹렬히 투쟁하였으므로 인공에 약간의 좌익 분자가 있는 것은 피치 못할 정당한 일이다. … 인공이 좌익이 아니라는 것은 그 정강을 보면 잘 알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가 민족적 범죄자인 친일 분자만을 제하고는 누구든지 환영한다.그러나 이렇게 강령 수준을 낮췄다고 해서 우파와 자본가·지주 들과 특히 미군정이 인공을 어여삐 여긴 것 같지는 않다. ‘한민당 준비위’의 첫 번째 사업은 ‘인공 타도’였다.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인공 선포는 졸속이었다. 조선공산당은 미군에게 인정받고자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기 전에 정부를 선포하려고 서두른 면이 있다. 조선공산당은 자신이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라고 착각한 미국이 인공을 승인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가 환상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채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군정장관 아놀드는 인공을 모욕적 언사로 비난하며 그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자칭 조선 인공이든가 조선 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연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고관대직을 참칭하는 자들이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면 즉시 그 극을 폐막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 만일 이러한 괴뢰극의 막후에 그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이 있어 어리석게도 조선 정부의 정당한 행정 사무의 일부분일지라도 단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맹연각성하여 현실을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구애에도 미군정은 조선에 진주하자마자 지역인민위원회를 무력으로 분쇄하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좌익과 노동자·농민 운동 활동가들이 살해됐다. 그래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이 인공을 승인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인공 국무총리 허헌은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정은 … 조선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조선을 위하여 조선에 나와 있는 것이다. 제군은 모든 오해를 풀고 조선 독립을 위하여 군정에 협력하기를 바란다. … 아직 행정권의 양수讀受를 보지 못하였으나 우리들이 군정과 협력하여 간다면 미구未久에 반드시 행정권의 양수를 성취할 날이 오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미군정에 대한 조선공산당·인공의 이런 협조 노선은 ‘진보적 민주주의’론뿐 아니라 평화혁명론의 반영이기도 한데, 심지어 다음과 같은 황당한 착각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인공 정부가 설령 정부로서의 기능을 하더라도 군정·군정부와 하등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세계혁명사를 돌이켜보면 … 이중정부가 존재하는 것을 항상 볼 수 있다. 멀리 1871년 3월 파리 콤뮨 정부와 베르사이유 정부가 그러했고, 1917년 3월부터 11월까지 러시아의 사베트 정부와 케렌스키 임시정부 … 사례도 있다. … 조선에도 군정부와 인민정부가 동시에 병립하는 것은 조금도 괴이할 것이 없다. … 이 두 정부의 병립을 모순이나 대립으로 보는 것은 속된 견해에 의한 환상이거나 고의적인 악선전일 뿐이다.평화혁명론의 효과로 조선공산당의 방침은 우경화했다. 그들은 인공의 외연을 넓히려고 처음에는 이승만, 다음에는 김구와 합작을 모색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론은 인민 정부 수립이 목표로 되면서 이른바 상층 통전[통일전선]의 이름으로 정치 협상을 벌여 우파 지도자를 영입하고 인민정부의 대표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41 이는 “단결과 연립정권의 수립을 위해, 그 후에 있었던 우파의 어떠한 제창보다도 더 사상적 선을 넘어선 것이었다.” 42
이미 조선공산당은 인공에 우익 인사들을 대거 끌어들이려 한 바 있다. 인공 주석에 이승만을 필두로, 김구(내무부장), 김규식(외교부장) 등 우파 인사들을 내정했고, 심지어 ‘8월 테제’에서 ‘반동적 민족 자본가’로 지목한 김성수(교육부장)까지 인공 내각에 내정했다.43 더 나아가 이승만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인공 해체를 종용했다. 그리고 인공 대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독촉’에 참가하라고 요구했다. 전 민족이 자신을 중심으로 뭉쳐야 하며, 좌익은 들러리나 서라는 요구였다. 공산당은 이승만의 ‘독촉’에 참가했지만, 이승만이 선출한 전형위원들은 대부분 한민당 인사들이었다.
물론 이승만과 우파는 인공 참가를 거부했다. 박헌영은 이승만과의 회담에서 친일파만 배제하면 이승만이 그 나름으로 추진하는 ‘민족통일전선’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에 함께하겠다고도 했다. “우리도 지금 그들을 처단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직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성스러운 건국 기관에서 친일파만 제외하면 얼마든지 손을 잡겠다.”44 좌우익을 망라한 전 민족의 지도자로 추대됐으니 말이다. 이승만은 “급격한 분자가 선두에 나서서 농민이 추수를 못하게 하고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 국체를 회복하여 국토를 찾자는 일점에 대동단결치 않으면 안 될 것”이라며 45 공산주의자들을 훈계했다. 이는 민족 단결이라는 사상이 좌익의 전유물이 아닐 뿐 아니라 좌익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인공은 이승만의 주석 취임 거부로 망신을 당한 반면, 이승만은 이익을 얻었다. 서중석이 지적하듯이, 이승만이 인공 주석으로 추대됐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커다란 정치적 후광이 될 수 있었다.”46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김규식 등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도 인공 참가를 거부했다. 그 뒤로도 조선공산당은 계속 교섭을 타진했지만, 돌아온 것은 “‘인공은 우리 안중에 없다, 인공은 말만 들어도 구역이 난다’는 등의 폭언”이었다. 47 김구가 공산주의자들을 “장개석이 연안정부를 누르듯 다룰 것”이라는 48 미군정의 예측이 맞았던 셈이다.
이승만 영입에 실패하자 조선공산당은 파트너 대상자를 김구로 바꿨다. 인공을 대표해 김구를 만난 허헌은 “김선생의 각별한 지도를 청”했지만,민족통일전선과 노동자·농민운동
조선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 운동은 노동자·농민 운동에도 직접 영향을 끼쳤다. 당시 노동조합 전국 조직 조선노동조합평의회(이하 전평)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하 전농) 지도부는 공산당이 통제했다. 전평 결성대회에서 발표된 ‘일반 정세와 운동 방침’은 반파쇼 반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려면 몇 가지 장애물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1) 도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요, 2) 농촌에서 농민과 지주의 대립이다. 이 두 모순을 잘 조정하는 것이 통일전선의 기초를 쌓는 것이다. … 우리 노동자도 민족통일전선에 최대의 이익을 집중시켜야 한다. 정당한 노력에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고 정당한 자본에 정당한 이윤을 보장하여야 한다. … 조선 민족 사회를 구성한 별개 자본계급이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완전히 승인하고서 당면의 공통된 최대 목표를 향하야 협력하면 민족통일전선은 승리되는 것이다.
50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통일전선을 위해 계급간 갈등을 “잘 조정”해야 하며, 민족 자본가가 있는 사업장에서는 투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은 양심적 민족 자본가와의 공동 관리로 바뀌었다. 또, ‘산업 건설 협력 방침’에 따라 민족 자본가와 함께 생산에 적극 임하라고 했다. 그래야 “소시민·중간층 등의 국민의 대다수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민족 자본의 양심적 부분과의 협동전선을 성취함으로써 민족통일전선에 있어서의 노동자계급의 영도권을 보장하여 그들의 반동진영으로의 이행을 방지”할이 논리를 따르면, “노동자계급의 영도권”은 단호한 독자적 투쟁이 아니라, 열심히 노동하는 데서 나온다. 민족 자본가와 불화를 일으키면 그들은 반동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 그들에게 맞서지 말아야 한다. 전평은 계급 협력의 상징으로 ‘민족 자본가’와 함께 ‘조선산업건설협의회’ 발족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 민족의 희생적 정신에 의한 협조 노력으로서만 통과할 수 있는 대수난기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요구할 때가 아니요 모든 것을 제공할 때이며, 권리를 주장할 때가 아니요 국가 민족의 공리공복을 북돋을 때이다.”
사실, 몇 안 되는 양심적 민족 자본가와 개별 작업장 수준에서 협력하라는 지침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런 계급 협력 이데올로기, 전 민족적 이해관계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민족주의 논리가 선진 노동자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결국 전체 노동계급의 행동과 의식을 꽁꽁 옥죄 놓는다는 점이다.
52 따라서 여러 계급·계층·당파가 모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타협의 논리는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불신하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일본 제국주의가 타도되었다 할지라도 정권은 전국적으로는 어떤 계급의 손에도 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조선 내에 있는 어떠한 계급, 어떠한 세력도 독자적으로 정권을 장악할 만한 역량을 아직은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렇다면 정권을 장악할 능력도 없는 ‘노동계급의 영도’를 “소시민·중간층”이 따라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미군정과 국가기구와 결탁한 우익들이 훨씬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을까? 노동계급이 단호한 투쟁으로 힘을 보여 줘야 ‘소시민·중간층’을 자기 편으로 전취할 수 있다는 점을 스탈린주의 공산당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민족 자본가’가 힘없는 노동계급과 협력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조선공산당의 생각과 달리 조선인 자본가들은 거의 다 미군정과 우익의 ‘영도’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주요 작업장을 통제하고, 원자재와 물자와 돈을 갖고 있고, 노동자들과의 분쟁을 해결할 궁극의 폭력 수단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스페인 혁명의 경험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했는데, 이를 조선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매우 놀라운 것은 스페인 인민전선은 실제로 힘의 사변형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계급의 자리에는 그 그림자뿐이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매개로 인민전선에 참여하라고 귀찮게 조르지 않고도 노동자계급을 자신에게 종속시켰다. 온갖 정치적 색조를 띤 착취자들의 압도 다수는 공공연하게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갔다. ‘연속혁명’ 이론 없이도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그 출발점이 어떻든 혁명적 대중운동이 토지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적대적으로 향하고, 따라서 민주주의적 조치로 이 운동에 전혀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스페인의 자본가계급보다도 실체가 없는 민족 자본가라는 “그림자”와 연합하고자 노동자들의 의식을 마비시킨 셈이다. 조선공산당은 노동자들의 공장 통제 운동과 파업을 억누르며 ‘민족 단결’을 도모했지만, 그 결과는 앞서 보았듯이 결국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었다. 전평이 산업건설 노선을 따라 쟁의부를 폐지하고, 파업을 억제했는데도 우익의 테러 공격과 자본가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미군정이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을 분쇄해 나갔지만, 전평과 공산당은 대미협조 노선 때문에 이를 적극 방어하지도 못했다. 우익은 더더욱 기세가 등등해졌고, 반면 노동자들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54 해방 직후 분출했던 농민들의 토지 접수 시도는 제지됐다. 심지어 공산당은 1945년 11월 13일 임시 조직 요강을 발표해, “일제 및 비친일적 대지주에 대한 소작료 불납 투쟁을 극좌적 오류로 규정”했다. 55 결국 당면 투쟁 지침은 소작료 3·7제 운동으로 하향 통일됐다.
전농의 농민운동 방침도 민족통일전선 노선을 따랐다. 전농은 결성대회에서 농민조합의 조직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오늘의 민족 해방 단계에 있어서는 반역자가 아닌 한 자본가와 심지어 일부 지주까지도 우리와 일정한 정치적 협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56 어쨌든 민주주의 혁명을 벗어나진 않았다. 그래서 박헌영이 인민민주주의론을 제기했다고 해서 계급연합 노선이 근본적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전평은 민족 자본가와 협력 노선을 계속 이어갔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세워질 정부도 여전히 “한 계급이나 한 당파나 한 인물의 전제가 되어서는 아니”되는 57 계급연합 정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주와의 타협 추세는 1946년 3월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바뀌게 된다. 박헌영은 이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 대신 인민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58 즉,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협상으로 통일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농민이 할 일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캠페인인 셈이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말대로,
전농은 북한식 토지개혁안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강령을 ‘무상몰수와 무상분배에 의한 소작제 폐지’로 수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농이 계급투쟁적 방식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전농은 “남한의 주·객관적 조건은 북조선과 달라 토지개혁을 바로 실시할 수는 없다”고 했고, 따라서 “이를 실현해 줄 수 있는 통일 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농민의 총역량을 집결할 것을 주장”했다.강령은 양심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적 행동을 지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면 강령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예를 들어 벨기에 노동자당은 모든 ‘국유화’ 조치들을 담고 있는 드 만의 휘황찬란한 계획을 채택했다. 그러나 당 강령의 실현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이 강령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60 즉각적인 토지 접수는커녕 농민의 원성의 대상이던 미군정의 공출제 부활을 사실상 지지한 것이다.
전농도 조선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미군정과의 협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미국과의 협력 방침이 존재하는 한 전농이 계급투쟁적 방식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전농은 1946년 들어 미군정의 하곡수집 정책이 발표되자, 군정 방침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는 전제 아래 농민의 신곡 출회시까지 자가 소비량을 확보하고 그 잔여량을 공출하[라는] … 방침을 내놓았다.”신탁통치
61 물론 김구의 중경임정은 이 제안을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선공산당은 신탁 찬성으로 입장을 180도 바꿔 버렸다. 덕분에 우익의 반소·반공 캠페인은 훨씬 힘을 얻게 됐다. 조선공산당은 얼마 전까지 ‘민족의 영웅’으로 떠받들던 이승만과 김구를 파시스트로 규정하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통일전선 결성 시도는 우익의 참가 거부로 지리멸렬해졌다. 여기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소식은 결정적으로 좌우익 간 대립을 격화시켰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처음에는 좌우익 간 합작이 촉진되는 듯했다. 우익은 물론 좌익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사항인 신탁통치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반탁을 민족통일전선 결성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김구에게 “양 정부[중경임정과 인공] 동시 해산”을 통한 “양 정부의 통일이 민족 통일의 유일 최선의 방법”이라며 통합을 제안했다.62 그러나 바로 다음날 한민당은 이 합의에 참가했던 한민당측 인사들을 규탄하고 승인을 거부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공산당이 우익과의 합작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공산당은 심지어 한민당과 함께 ‘4당 코뮤니케’를 발표해 “통일전선 문제를 풀어가기로” 했다.우익의 ‘민족통일 전선’ 거부와 더불어, 북한에서 벌어진 사태도 좌우합작의 동력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북한에서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던 조만식을 소련이 연금해 버리는 등 우익과의 연립은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됐다. 조선공산당은 우익과의 ‘상층 통일전선’이 더는 무망하다고 보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결성했다.
63 조선공산당은 여전히 민족통일전선론에 매달려 노동자 투쟁을 억제하고 민족 자본가와의 협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우익을 격렬히 비난하고 민전을 결성했다고 해서 계급 협조 노선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신 조선공산당은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의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하 3상 결정) 지지 여부를 제시했다. 따라서 민전에는 “민주주의 국제노선”(3상 결정)의 “원칙을 인정하고 준수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 참가할 수 있다. 우익에의 문호를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익을 열렬히 환영할 것이다.”그러나 ‘반탁=반동, 찬탁=진보’라는 조선공산당의 공식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 열강에 의존하는 것이 어떻게 진보가 될 수 있었겠는가? 특히 공산당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 하루아침에 찬탁으로 입장을 돌변시킨 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공산당이 소련에게서 전혀 독립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은 3상 결정에 따라 세워질 통일임시정부가 자신들에게 비우호적이게 되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우익은 미국의 지원을 통해, 좌익은 소련의 후원을 얻어 각각 자신에게 유리한 정부를 만들려 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눈에 당시 좌우 대립이 미국과 소련 두 열강의 입김에 놀아나는 행위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계급과 정견의 차이를 넘어서 민족 앞에 단결하라는 정서가 자라났다. 이런 ‘민족 단결’ 정서는 여운형 같은 중도좌파가 1946년 이후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하는 배경이 됐다. 좌익의 잘못된 정책으로 좌우 모두에 대한 양비론과 냉소도 커졌다. 당연히 이는 노동계급 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행동과 의식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민족통일국가 수립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도 좌우합작, 민족단결이라는 방식은 효과적일 수 없었다. 당시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최대의 방해 세력은 미국과 소련 제국주의였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미국은 우익과 자본가, 친일 관료들을 육성해 이들을 지배 파트너로 삼고자 했으므로 이들에 맞선 투쟁을 통일 민족국가 건설과 분리해서는 안 됐다. 자본가, 지주, 친일 관료에 맞선 투쟁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당연히 노동자, 농민의 계급적 요구를 고무해야 했다. 그러나 좌우합작, 민족단결 사상은 노동자, 농민의 투쟁을 억제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이득을 얻는 세력은 우익과 미군정뿐이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공산당은 이런 계급협조 사상을 부추겼다. 결국 조선공산당의 입장은 급진화하던 노동계급과 빈농의 염원을 만족시키지도 못했고, 두 제국주의 열강 간 경쟁이 분단 고착화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민중의 두려움을 해소할 전망도 보여 주지 못했다.
신전술
64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의 소비에트화 정책을 조기 실현시키도록 투쟁하라”고 지시했다. 65 이에 따라 북한에서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이 추진됐다. 아울러 스탈린은 남한에서 좌우합작을 배격하고, 공산당·인민당·신민당 3당 합당을 추진하고, 반미 선전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듯하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은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미군정과 여운형이 주도하던 좌우합작 운동을 보이콧했다.
1946년 5월 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점령 지역에서 지배 체제를 한층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1946년 7월 들어 이른바 ‘신전술’을 주창했다. 그동안 추진한 미군정과의 협조 노선을 파기하고, 탄압에 적극적으로 반격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는 스탈린의 대한반도 정책 변화의 반영이기도 했다. 사실, 신전술은 1946년 7월 초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김일성·박헌영의 비밀 회담 결과였다.그러나 공산당이 ‘반격’을 결정할 즈음 상황은 이미 불리해졌다.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는 탄압으로 상당 부분 분쇄됐다.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운동도 유명무실해졌다. 미군정의 탄압뿐 아니라, 조선공산당의 계급연합 노선, 미군정과 협조 노선도 이에 한몫했다. 공산당 지지 대중에게 이와 같은 공산당의 입장 변화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공산당은 신전술 채택 직전인 1946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우리 민족에게는 직접 원조자로서 해방자로서 유달리 인연 깊게 오랫동안 우리의 역사에 빛날 것”이라고 미군정에 감사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그런데 그 뒤 한 달도 안 돼 미국을 침략 국가라고 비난하고 반미 운동을 벌이라고 요구했다.
공산당 노선 변화의 결과는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이었다. 많은 논자들은 이 항쟁에서 공산당이 취한 노선을 ‘좌경 모험주의’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공산당이 저질렀을 법한 ‘적색 테러’를 논외로 하면 항쟁 와중에 공산당이 취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혁명과 개혁주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중간주의였다. 반미를 표방하면서도 미군정을 전면 부정하지도 못했고,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고 요구하면서도 실제로 정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전략은 없었다. 박헌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군정에 대하여는 여전히 우호적 관계를 변함없이 계속하여야 함과 동시에 또한 미군정의 옳지 못한 정책에 대하야는 우리는 그 시정을 위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 이러한 내용의 신전술이 무엇인 옳지 않을 것이며 어째서 그것이 반미적 반군정적이겠느냐? … 폭동이란 주권 획득을 목적하고 객관적 정세가 혁명적 위기로 드러가고 주관적 요소가 선두에 서서 이것을 의식적으로 조직 지도하는 것이어늘 이번의 남조선의 인민적 무장 반격을 가지고 폭동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이는 우익과 중도좌파의 공산당 비판을 의식한 변명이기도 하지만, 공산당 노선의 모순과 딜레마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1차 미소공위가 파산하자 공산당은 이를 재개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사실, 공산당의 신전술은 미소공위를 재개하라는 압력 수단이었다. 그러다보니 미소공위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협상 대상인 미군정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신전술 시기에 좌파적 언사가 있었음에도 공산당의 노선은 초지일관 3상 결정과 미소 합의에 따른 통일 국가 건설이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서 계급투쟁에 의존할 이유도 여전히 없었다. “우리나라의 완전 자주 독립과 전 민족이 다 잘사는 민주주의 건설의 길은 오직 삼상 결정뿐”이기 때문이었다.
69 이 때문에 미군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일방적으로 항쟁 참가자들을 학살할 수 있었다.
항쟁에 참가한 대중은 한쪽 손만 가지고 싸운 꼴이었다. 공산당의 미군정에 대한 어정쩡한 입장은 가장 강력한 탄압 주체인 미군정과 충돌하지 말라는 지령으로 모순을 드러냈다.어쨌든 남로당의 염원대로 이듬해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렸다. 좌익은 환호했지만, 사실 미국과 소련이 다시 만난 이유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미군정과 여운형의 좌우합작
70 아울러 향후 미소공위에서 소련에 대항할 카드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소련이 절대 거부하는 이승만과 김구를 일단 뒤에 두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내세워 발언력을 높이겠다는 뜻이었다.
1946년 봄 들어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뒤 본격화했다. 미군정은 ‘중간파’를 활용해 남한에 과도정부를 설립하고자 했다. 이는 1946년 2월 이북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돼 정권 기구로 발전해 가는 것에 대응하는 성격도 있었다.71 당시 미 국무부 차관이던 딘 애치슨은 마셜의 목적이 “쌍방의 화해를 통한 내전의 방지와 국민당 정부를 도와 가능한 한 넓은 지역에 그들의 권위를 확보케 하는 두 가지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했다. 72
미군정의 좌우합작 공작은 중국의 사태 변화와도 관련 있는 듯하다. 1946년 1월 미국의 마셜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간 충돌을 중재하려고 했다. 강만길은 한반도의 좌우합작 운동도 이와 같은 정책의 일환이라고 봤다.서중석을 비롯한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기본적으로 미국의 좌우합작 정책은 우익을 강화하고 좌익을 분열시키겠다는 취지였다.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인기 없거나 극단적인 우익에만 의존해서는 남한에서 안정적인 통치 체제가 구축되기 힘들다는 판단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철저히 배제됐다. 외피를 좀더 온건한 모습으로 포장했더라도 미군정이 추진한 좌우합작의 본질은 우익 지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을 더욱 강하게 탄압했다. 온건 좌파를 공산당의 영향력에서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여운형은 미군정의 좌우합작 공작을 기회로 보고 침체에 빠진 민족통일전선을 활성화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조선공산당도 여운형의 좌우합작 운동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신탁통치에 대한 태도를 합작의 핵심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민전의 이강국은 1946년 1월 초에 작성한 ‘4당 코뮤니케’가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묘안이라고 주장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문제와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분리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신탁통치 찬반 여부는 3상 결정에 따라 통일 임시정부 수립 뒤에 결정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공산당으로서는 일종의 ‘유연한’ 접근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신전술’을 채택하며 곧 이를 파기한다. 공산당은 북한식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3상 결정 지지 문제도 ‘엄격히’ 했다. 예를 들어, 남로당 부위원장 이기석은 “삼상 결정의 골자가 신탁 조항인데 이를 부인하면서 삼상 결정을 지지한다 함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좌우합작 찬반을 둘러싸고 온건 좌파와 공산당이 분열했다. 특히 좌우합작 찬반 문제에 공산당이 패권적으로 추진한 3당 합당이 맞물리면서 범좌파 진영의 내분이 격심해졌다. 물론 우익 진영 안에서도 좌우합작을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찻잔 속 태풍에 지나지 않았다.
여운형이 추진한 좌우합작 운동의 배경에 좌파와 우파가 단결해야 한다는 대중의 염원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점점 가시화하고 있던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 운동을 높이 평가하는 논자들도 이에 동의한다. 예를 들어, 서중석은 조선공산당이 좌우합작에 적극 나섰어야 한다고 본다.
문제는 좌우합작 운동과 미군정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직시하면서, 거시적인 안목으로 민족의 지상 과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데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좌우합작안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성공의 길로 이끌 수 있고, 또 그것의 성공을 통해서 민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 미국의 좌우합작 지원은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요 기회였다.
장석준도 비슷하게 평가한다.
좌우합작이 애당초 성사될 수 없는 비현실적 방안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스트리아와 핀란드에서는 가능했던 일이 유독 한반도에서만 불가능했으리라는 법은 없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현실과 배치되는 이상주의를 주장했던 게 아니라 그 당시 한국인들의 역량으로는 따라가기 쉽지 않았던 수준 높은 현실주의를 제시했을 뿐이다.
76 나아가 그는 조선공산당뿐 아니라 상당수 중도좌파도 반대했던 ‘좌우합작 7원칙’을 중심으로 단결했어야 한다고 본다.
한호석은 “좌우합작 운동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추진되는 군정청의 좌우합작 공작과 여운형의 지역 통일전선 운동이 매우 절묘하게 결합된 그야말로 위기와 기회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된 정치 운동”이라고 본다.좌우합작 7원칙에서 진보적 사회 정치 세력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군정청이 벌인 좌우합작공작의 핵심 사항이었던 과도 입법 기구를 내오는 원칙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과도 입법 기구[는]…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정세가 남조선 단독 선거로 밀려갈 수 있는 위험한 함정이었다. … 그러나 만일 진보적 사회 정치 세력, 중도적 사회 정치 세력, 근로 대중의 삼대 역량이 좌우합작 7원칙에 동의하고 통이 큰 지역 통일전선을 완성하였다면, 그 전선의 강한 투쟁력으로 미국이 파놓은 과도 입법 기구라는 함정은 얼마든지 비켜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좌우합작위원회가 내놓은 세부 사항을 살펴보면, … 함정을 비켜갈 수 있는 예방 조치들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좌우합작위원회는 과도 입법 기구의 성원을 90명으로 정하면서 그 가운데서 45명은 민선(간접 선거)으로 선출하고, 나머지 45명은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추천하여 임명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또한 ‘친일파, 민족 반역자, 일제 시대의 악질 관리 및 모리배’는 과도 입법 기구 성원에서 배제하고, 현재 진행되는 ‘국가 독립 운동’에 헌신·분투하는 ‘독립운동자’를 추천 대상으로 하는 방안도 내놓았으며, 과도 입법 기구는 전국 총선거를 통하여 구성될 정식 입법 기구로 이른 시일 안에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게 밝혔다. 만일 좌우합작 7원칙을 공동의 정치 강령으로 하여 통이 큰 지역 통일전선을 세우고, 그 원칙을 이루기 위하여 힘껏 싸웠더라면 제국주의 미국의 좌우합작 공작은 깨져나가고 좌우합작 운동은 지역 통일전선 운동으로 전환·발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한(조선)민족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서중석·장석준·한호석의 평가에는 한결같이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따라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안이었고, 이는 모종의 좌우연립 정권을 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현실론’은 전혀 현실적이지도 못한데, 왜냐하면 이미 국제 정세는 미소 냉전의 전조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대 제국주의 열강의 협상에 의존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은 마치 지진으로 틈새가 갈라지고 있는 양쪽 땅에 발을 하나씩 걸치고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79 북한의 공식 역사서는 좌우합작 운동에 대해 “미제의 강점자들[이] … 새로운 모략을 꾸며 … 민주 역량을 분열시키고, … 식민지 예속화 정책을 엄폐하는 병풍으로 삼고, … 남조선 단독 정부까지 수립하려는 것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80
만약 남한에서 좌우합작이 성사됐더라도 그것은 미군정이 용인할 만큼 온건한 좌우파 연립이거나 아예 우익 중심의 합작일 가능성이 높았고, 이런 합작을 소련이 받아들였을 리도 없다. 소련과 북한은 당시 좌우합작 운동에 반대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련은 1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좌우합작을 저지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장석준을 비롯한 여러 논자들은 좌우연립에 기반한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장집이 지적하듯이, “전후 1955년 오스트리아에서 중립화된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이 가능했던 것은, 보통 잘못 알고 있듯이 국내의 4개 정파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지양하고 민족적 대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미소 냉전의 전개 과정에서의 지정학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중앙 유럽에서 지정학적 요충을 차지했던 체코와 오스트리아 가운데서 소련에게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체코가 확고하게 소비에트 진영으로 흡수·편입되지 못했더라면 오스트리아가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코 중립화된 독립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리히트하임이 분석하듯이, “1945년 러시아는 핀란드의 병합을 위협하고, 서구를 배제시킨 채 오스트리아를 장악하고자 … 요구할 수 있었다. 사실상 이 모든 문제들은 1943∼45년 스탈린과 몰로토프에 의해 제기되었던 것이지만, 그것은 동유럽의 완전한 지배라고 하는 소련의 기본 요구가 충족될 경우에는 포기되어 버릴 협상 조건이었을 뿐이다.”부차적인 쟁점이기는 하지만, 미군정이 추진한 “과도 입법 기구라는 함정”은 한호석의 생각보다는 교묘한 것이었다. 반면, 한호석이 예로 든 “함정을 비켜갈 수 있다는 예방 조치”는 너무 빈약하다. 최선으로 좌우합작위원회 추천 의원의 50퍼센트 이상을 중도좌파와 극좌파 등 범좌파 진영이 차지하더라도, 지역 유지들이 뽑는 민선 의원을 좌파 진영이 차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실제 민선 의원 선거 결과 이승만·김구 계열과 한민당 세력이 대거 당선했다.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 규정 등은 우익들이 얼마든지 피해나갈 수 있었고, “‘현재 진행되는 국가 독립운동’에 헌신 분투하는 자”에 극우 세력이 해당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83 친일파들이 이리저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준 셈이다. 또, 미군정은 ‘중도우파’ 세력에게 합작의 조건을 완화해 우익 세력을 더 광범하게 끌어들일 것을 종용했다. 84 토지개혁안은 미군정의 압력을 받아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한호석은 당시 중도우파까지 포괄하는 통일전선이 필요했다고 본다. 그러나 중도파는 단일하고 독립적인 정치 세력이 아니었다. 특히 ‘중도우파’는 미군정과 극우파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이들은 미군정의 지원과 우익의 협조 없이는 활동할 수 없었다. ‘중도우파’와의 상설적·전략적 연합은 노동자·농민 운동을 마비시킬 위험이 컸다. ‘중도우파’는 운동의 의제를 극우파가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려 끊임없이 애썼다. 예를 들어, 좌우합작위원회 대표인 김규식은 합작 7원칙 가운데 친일파 처리 문제에서도 극우와 타협하느라 “죄상이 현저하지 않고 건국 사업에 공헌이 유한 자에 한하여는 무방하다”고 했다.‘중도우파’와 상설적·전략적으로 연합하려는 시도는 민중 운동의 요구 수준을 현격히 낮추거나, ‘중도우파’의 뒤를 좇다가 결국 미군정과 극우파에 끌려다니는 결과를 낳을 공산이 컸다. 이 점에서 당시 남로당이 과도 입법 기구에 불참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여전히 우익을 합작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는 올바르지 않았다.
결론
85 버스는 이미 떠나간 뒤였다.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 단결 이데올로기, 계급 연합 논리, 평화혁명론 등은 결국 반동 세력의 결집과 분단을 막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도우파’까지 포괄하는 통일전선체를 꾸렸어야 한다는 주장은 갈수록 태산이요 점입가경인 셈이다.
1947년 10월 미소공위가 최종 파산하자, 남로당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남로당은 미소공위가 파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동위원회를 수호하자! 죽엄으로써 수호하자!”고 했지만,당시 좌파들은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을 내세워 계급적 운동의 수위를 낮추고자 했다. 건준과 인공의 강령은 비교적 온건했다. 그러나 강령을 완화시켰어도 우익과 자본가와 지주의 호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또, 당시 좌파들은 민족 국가 건설(권력 장악)과 계급투쟁을 분리해 사고했다. 그들에게 국가 건설은 좌우 협력을 통해, 특히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 따라 건설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위로부터 국가 건설 논리였다. 이런 식의 ‘선先 민족 국가 건설, 후後 체제 경쟁’ 논리는 계급투쟁을 마비시키는 구실을 했다. 민족의 대의 앞에 계급투쟁을 내세우는 것이 분열 행위라는 논리로는 우익의 ‘덮어놓고 뭉치자’는 논리를 효과적으로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노선은 결국 우익과 미군정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좌익이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틈을 타 우익은 세력을 재결집할 수 있었고, 좌익의 최소 저항 노선에 따라 미군정은 지역 인민위원회를 분쇄하고 노동자·농민 운동을 파괴할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와 개혁주의 좌파가 주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론’과 좌우합작론은 어찌보면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철저히 완수한 셈인지도 모르겠다. 북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나중에는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은 노동자들의 독립적 진출을 억제해서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성립시켰다. 남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은 노동자계급의 힘을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운동이 몰살하게 함으로써, 이후 부르주아 체제가 확립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8·15 직후 자라났던 노동자·민중 해방의 싹이 잘려 나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주
-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사상.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자 당시 조선 총독 미나미지로는 조선을 전쟁에 동원하는 강압 정책으로 내선일체를 내걸었다 — M21. ↩
- 에커트 2008, pp369-370. ↩
- 해방3년사연구회 1988, pp85-96 참조. ↩
- 조선공산당 정치국(장안파) 1945, 심지연 1987, pp142-143 참조. ↩
- <자유신문>(1945.10.27). ↩
- 김남식 1988b, pp20-37 참조. ↩
- 이른바 코민테른 3기 노선은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에서 채택된 노선이다. 이 노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파국적 위기에 빠져 혁명이 임박했고, 공산당의 가장 큰 적은 사회민주당 등 개혁주의 세력으로, 이들은 ‘사회파시스트’다. 이는 당시 나치가 부상하는 상황에서 사회민주당과 노동자 공동전선을 펼칠 필요성을 부정하는 초좌파 노선이었다. ↩
- 서중석 1997, p238. ↩
- 서중석 1997, pp238-239. ↩
- 김남식 1988b, p22. ↩
- 김무용 2001b, p331. ↩
- 김남식 1988b, p28. ↩
-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
- 서중석 1997, p296. ↩
- 김남식 1988b, pp32-33. ↩
- 김남식 1988b, p33. ↩
- 서중석 1997, p239. ↩
- 1935년 코민테른 7차대회에서는 이른바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스탈린은 그 전의 3기 노선에서 180도 방향을 바꿔, 파시즘에 대항하는 계급연합을 주창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까 두려웠던 스탈린이 서유럽 열강과 동맹을 맺고자 한 게 주된 동기였다. 이에 따라 서방 공산당은 자국 자본가계급을 화나게 할 급진적 주장과 행동을 삼가야 했다. 그 결과 스페인에서 혁명은 패배했고, 나중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스탈린은 서방 지배자들을 안심시키려고 아예 코민테른을 해산시켰다. ↩
- 다우어 2009, p329. ↩
- 다우어 2009, p339. ↩
- 小山弘健 1991, p160. ↩
- 암스트롱 외 1996, p71. ↩
- 김남식 1988b, p21. ↩
- Alexander 1991. ↩
- 서중석 1997, p224. ↩
- 김남식 1988a, p93. ↩
- 김하영 2002, p247. ↩
- <매일신보>(1945.8.28). ↩
-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
- 양지은 2008, p17. ↩
- 안재홍이 “백만대군” 운운하며 위협한 것은 심한 과장이다. 당시 일본 육군의 주력이던 관동군은 이미 만주에서 붕괴한 상태였다. 또, 일본인들의 증언을 보면, 조선주둔군의 경우 부대별로 60∼80퍼센트가 조선인들이었고, 이들은 소련군과 전투가 임박하자 대부분 탈영해버렸다. 모리타 요시오 외 1995, pp15-19. ↩
- 서중석 1997, p215. ↩
- 서중석 1997, p208. ↩
- 커밍스 1986, p257. ↩
- <자유신문>(1945.10.9). ↩
- 한민당 1945. ↩
- <매일신보>(1945.10.11). ↩
-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
- 이강국 2006, pp41-42. ↩
- 김무용 2001a, p262. ↩
- 내각 명단은 <매일신보> 1945년 9월 15일치 참조. ↩
- 커밍스 1986, p126. ↩
- <매일신보>(1945.11.2). ↩
- 서중석 1997, p221. ↩
- <매일신보>(1945.10.26). ↩
- <중앙신문>(1945.11.28). ↩
- 김남식 1988b, p21. ↩
- 서중석 1997, p278에서 재인용. ↩
- 안태정 2005, p250에서 재인용. ↩
- 김양재 1987, pp26-27. ↩
- <조선인민보>(1946.7.23), 안태정 2005, p354에서 재인용. ↩
- 김양재 1987, p22. ↩
- 트로츠키 2008, p331. ↩
-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
- 박혜숙 1987, p380. ↩
- 이완범 2008, p31 참조. ↩
- 박헌영 2004a, p222. ↩
- 박혜숙 1987, p389. ↩
- 트로츠키 2001, pp99-100. ↩
- <조선인민보>(1946.6.3), 김무용 1997, p245에서 재인용. ↩
- <조선일보>(1946.1.1). ↩
- <조선일보>(1946.1.9). ↩
- 이강국 2006, p202. ↩
- 이완범 2008, p32. ↩
- 박명림 1996, p246. ↩
- 서중석 1997, pp420-421. ↩
- 박헌영 2004a, p489. ↩
- <청년해방일보>(1946.8.15), 박헌영 2004b, p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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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노 외 1982, p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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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석준 2007, p55. ↩
- 한호석 2006, p256. ↩
- 한호석 2006, p257. ↩
- 김하영 2002, p296. ↩
- 국사편찬위원회 2004, p17. ↩
-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1989, pp316-317. ↩
- 최장집 1991, p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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