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
시장을 떠나서 학교를 살리자!
이 책은 학벌없는사회 운영위원 8명이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쓴 글을 엮은 것이다. 대체로 ‘학벌을 위한 학교, 시장을 위한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사인 내가 보기에 교육 시장화를 비판하는 내용은 익숙하지만 ‘학교’를 버리라는 제목은 사뭇 도발적이다. 저자들은 공교육의 전망을 우울하게 본다. 김상봉은 한국 교육이 이미 파탄났고, 학교는 존재 이유를 상실했지만 별 다른 대안이 없어서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15쪽, 이하 쪽수만 표기)
인간성 실현이라는 교육의 본래 목적에 비춰 보면 지금 한국의 공교육이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12월이 되면 고3이나 중3 교실은 수업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학입시를 위한 수능이 끝났고, 고입 내신을 위한 기말고사가 끝나서다. 교육 목표가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마지막 시험 점수와 동의어가 돼서 그 이후의 시간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대학 평준화
최종 학교인 대학에서라도 제대로 된 목표로 잘 교육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한국은 특정 대학의 ‘타이틀’만 필요하지 무엇을 배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학 간판이 중요한 학벌 사회의 대학 문제는 정세근이 잘 정리했다.(184) 그는 ‘제1대학’은 이미 독점권을 획득해 학문을 할 필요가 없고 ‘제2대학’은 어차피 2등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엘리트 교육을 옹호하고 국가 경쟁력을 외치는 자들의 논리로 보더라도 학벌주의는 ‘참다운 경쟁’의 걸림돌이라고 비판한다.(187) 대학원도 전문 교육보다는 ‘학벌 세탁’을 하는 곳이 돼 버렸는데, 특히 ‘제2대학’들은 학부 정원과 비슷한 규모로 대학원 정원을 유지하며 돈벌이에만 치중하고 있다.(193)
대학 학벌주의는 초중등 교육의 파행을 불러오며, 이로 말미암아 사교육비가 기형적으로 많이 소모된다(2009년 통계청 조사 21조 6천억 원). 더구나 공교육비에 포함되는 사부담까지 합치면 민간의 전체 부담액은 천정부지로 높아진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비싼 교육비다.
정세근은 학벌주의가 공부하지 않는 대학과 낮은 출산율을 낳으므로, 결국 기업과 국가에도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198) 그는 국립대 무상평준화부터 시작하는 학벌 타파가 대학의 미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193)
다만 대학을 평준화하는 세세한 청사진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진상 교수의 주장을 눈여겨볼 만하다. 정진상 교수의 주장인즉, 국립대를 통합네트워크로 묶어 입학·교육·졸업을 통합 운영하고, 점차 사립대학도 네트워크로 편입시킨다는 계획으로 입학 정원의 70퍼센트는 고교 내신으로, 나머지 30퍼센트는 입학 자격 시험으로 선발하고, 학생들은 네트워크의 어떤 대학에서든 자유롭게 학점을 이수할 수 있고 동일한 명칭의 졸업 학위를 받게 하자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 입시지옥과 학벌 사회를 넘어》(정진상, 2004)를 권한다. 《공교육과 SKY의 미래》(김학한, 2010)에도 정진상 교수의 주장이 요약돼 있다.
교육 시장화
그런데 역대 정권들의 교육 정책은 대학 평준화가 아니라 거꾸로 교육 시장화 쪽으로 나아갔다. 1960년대 경제가 발전하며 교육받은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중학교 진학이 늘고 중학교 입시 과열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자 1969년 중학교가 평준화(무시험 입학)된다. 마찬가지로 1974년엔 고등학교가 평준화된다. 이런 흐름을 탔다면 대학교 입시가 문제가 되던 1970년대 후반에는 대학 평준화가 실현될 수도 있었겠지만, 정당성이 취약한 군사 정권은 학벌 대학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1980년 ‘과외금지’ 정도의 미봉책으로 입시 문제를 우회해 버린다.
그러다 1995년에 이르러 교육계의 끔찍한 대전환을 낳는 계획이 발표된다. 국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복지)이자 공공재인 교육이 상품으로 선언되고 시장 경쟁에 내던져진다. 교육 시장화 과정 설명과 비판은 이철호가 정리했다.(140) 정부는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 채 복지나 교육을 개인이 무한 경쟁에서 이겨 획득해야 할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를 ‘경쟁력’이나 ‘세계화’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기본권인 교육을, 가진 자만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자 주권’으로 둔갑시키면서 마치 국가주의와 관료주의에 맞서는 것인 양 호도했다.(148) 교원들은 새로운 평가제도를 통해 경쟁해야 하고, 학교들은 일제고사 성적을 통해 경쟁하게 됐다. 학생들의 선택권이 확대되기는커녕 획일적인 입시 경쟁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사교육비를 줄인다는 핑계로 보충수업을 부활시키고, 고등학교를 다양화한다며 귀족학교를 세웠다.
교육 시장화의 실패
홍훈은 근본적인 개념에서 교육과 시장이 다르다는 면을 보임으로써 교육 시장화의 실패를 예견한다.(111) 성적을 과도하게 수량화하면 수량화 할 수 없는 자질을 오히려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장이 경쟁을 통해 전체 파이의 크기를 키우기도 하지만 성적 경쟁(입시 경쟁)은 연구 역량 성장보다는 점수 인플레이션만 낳거나 서열을 결정하는 데 쓰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학벌이라는 독점 현상 때문에 대학 졸업장은 실제 역량과 상관없는 포장으로 작용할 뿐이다.
홍훈의 분석은 이철호의 교육 시장화 비판(165)과 연결 된다. 교육은 공공재이므로 시장의 경쟁 원리에 맡겨 두면 자유가 확대되기보다 오히려 독점이 진행돼 불평등이 확대된다는 주장이다. 교육 시장화를 추진한 자들이 내세운 ‘정부 통제 축소’, ‘수요자의 선택 확대’, ‘경쟁의 효율성’ 등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겉으로는 국가 통제를 축소한다고 했지만 평가 서열화를 통한 국가 통제는 오히려 강화됐다. 더구나 교육 시장화를 시장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동안 민영화나 자율화나 선진화 등의 이름으로 교육이 시장화했지만, 교육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사교육비는 증가하고, 교육 불평등은 더 심해지고, 학교에 대한 불만은 커졌다. 교육 시장화는 이미 실패했고, 앞으로도 더욱 큰 문제만 낳을 것이다.(182)
이렇듯 교육 시장화와 경쟁 교육은 실패했다. 하승우는, 경쟁하는 우리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행복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207) 자연 생태계에서도 생존 경쟁보다는 상호 부조가 더 효율적이며, 지구상의 생물 전체가 상호작용하는 공동체라고 말하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한다.(216)
학교 버리기
김상봉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의 만남(교육)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일명 ‘서로주체성’이다. 따라서 교육은 사회(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다.(25) 그리고 그는 공교육의 근본악인 학벌주의를 타파하고 대학을 평준화시킬 사회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41)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학교를 떠나 대안학교에 다니는 등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다고 조언한다.(56)
채효정은 학교를 그만두는 청소년의 수가 한 해 7만 명이 넘고,(68) 이들이 학교 밖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무엇을 하는지 파악도 되지 않는다고 폭로한다.(79) 그는 학교를 떠나는 청소년 개개인의 사정은 ‘계기적’ 원인일 뿐, ‘근본적’ 원인은 학교에 있다고 본다.(88) 무한경쟁 입시지옥을 해결하지 않은 채 학교 밖 청소년과 상담하거나 보호만 하는 것은 단기적 처방일 뿐이므로, 학교와 다른 교육 기관이 필요하고 반학교문화의 건강한 표출점으로서 학교 밖 배움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01)
다시 학교로
이 책의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입시 경쟁에 끌려 다니며 지식 암기(논술이나 문학적 심상조차)만 시키는 지금의 교육은 효용성을 다한 듯하다. 그렇다고 김상봉의 조언처럼 학생들에게 언제든지 학교를 떠날 준비를 하라고 제안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아직 학교를 버릴 수는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김상봉도 글 첫 부분에 쓴 것처럼 아직 학교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대안학교가 대안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채효정의 분석처럼 7만 명에 이르는 청소년들이 학교를 버리지만, 그 중 (대안학교든 홈스쿨링이든) ‘교육’을 받는 청소년은 소수다. 더구나 학교 밖에서도 교육받을 수 있는 소수와 기본권적인 교육 복지조차 누리지 못하고 방치되는 다수를 나누는 기준이 부모의 소득 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학교를 버리라는 주장은 더 큰 차별과 억압 속으로 뛰어들라는 주장과 비슷해진다. 학교를 떠난 7만 명의 청소년들에게도 충분한 공공 교육이 제공돼야 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학교를 떠나라는 충고가 아니라, 공교육 개편 운동이다.
비고츠키의 ‘생각과 말’
지난 여름 ‘다함께’가 주최한 ‘맑시즘2010’에서 천보선 교사가 강연한 비고츠키 교육학이 교육을 살릴 방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계량화할 수 없는 인간의 질적 발달 개념을 들으면서 나는 양적 발달주의 교육학이 취한 조기교육이나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협력이 도덕적이고 당위적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이므로 필요한 교육 수단이라는 분석은 경쟁 교육의 약점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 줬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근접 발달 영역’은 학생에 관한 최고 전문가로서 교사되기를 꿈꾸게 해 주었다.
그러나 비고츠키를 더 공부하기에는 국내에 출간된 책이 거의 없어서 ‘맑시즘2010’ 이후에 갈증에 시달렸다. 다행히 조만간 비고츠키의 《생각과 말》(가제)이 번역·출간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가 교육 시장화를 꼼꼼히 반박해 속이 시원하면서도, 학교를 버리라는 조언에는 주저할 독자들에게는 《생각과 말》이 학교를 살릴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MARX21
필자 김성보는 현직 중학교 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