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진보사상 조류
니코스 풀란차스의 정치 이론 비판 *
이 논문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4호(1979년 봄)에 ‘“새로운” 개혁주의? — 니코스 풀란차스의 정치 이론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실렸다. 반자본주의 운동이 급진화하고 있는 오늘날 여러 낡은 사상이 새로운 맥락을 배경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운동의 전략을 다루는 논쟁들에서 풀란차스도 다시 원용되고 있는데, 이 글에서 필자가 제기한 여러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콜린 바커는 1960년대 초 국제사회주의자들IS(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과 전국위원으로 활동했고,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1967~2002년에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최근 몇 년 사이에[1970년대를 말함 – M21]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국가에 관한 논의가 부활했다. 반가운 일이다. 두 사람이 이 토론과 결부돼 있다. 랠프 밀리반드Ralph Miliband와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가 그들이다.통합이다. 정부 기구는 단순할수록 좋다. 정부 기구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부정직한 자들의 술수 때문이다. 1
이것[권력 분립은 자유로운 정부의 1차적 조건이라는 프랑스 2공화국 헌법 조항]은 낡고, 어리석은 헌법 조문이다. ‘자유로운 정부’의 전제 조건은 권력 분립이 아니라
3 두 사람의 저작이 개혁주의적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지적했다. 물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둘 모두의 저작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입론은 개혁주의적 결론 도출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뭐든지 왜곡해 대는(물론 그런 왜곡이 익숙한 현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개혁주의자들의 습성 때문에 개혁주의적 결론이 도출된 것은 아니다. 밀리반드와 풀란차스는 국가와 자본주의 사회를 두 가지 이상의 해석이 가능하게 설명했다.
두 사람의 저작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더 통찰력 있는 비평가들은문제의 핵심을 약간 도식적으로 살펴보자. 풀란차스는 《뉴 레프트 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밀리반드에게 “문제적 이론”이 하나도 없는 것이 그의 중요한 문제점이라고 얘기했다. 풀란차스의 말은 틀렸다. 밀리반드의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The State in Capitalist Society》를 보면 그에게 아주 뚜렷한 형태의 “문제적 이론”, 곧 그 나름의 “사회 이론”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밀리반드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아주 달랐다. 풀란차스는 이 점을 알지 못했다. 견해가 달랐음에도 그 역시 밀리반드와 똑같은 근본적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뭐가 잘못됐던 것일까? 마르크스가 이룩한 거대한 이론적 성취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근본적 이유였다. 마르크스는 생애의 상당 기간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이런 업적을 이뤄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의 범주들 — 가치, 자본, 재산, 지대, 국가, 계급 등등 — 을 깊게 파고들어 탐구했고, 이것들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을 입증했다. 특히, 마르크스는 “생산”을 인간들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개조하는 사회적 과정으로 볼 때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생산은 단지 인간과 자연이 맺는 “기술技術적” 관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와 자신의 사회를 만드는 사회 활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생산을 이해하려면 생산이 이뤄지는 다양한 사회 형태를 파악해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론》 앞부분에서 상품을 생산 과정이 이중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상품은 인간에게 유용한 사물, 곧 사용가치이면서 그와 동시에 생산자들이 맺는 특정한 사회 관계를 나타내는 가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상품을 생산하면 유용한 재화를 생산할 뿐 아니라 소외된 사회 관계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사회 형태도 생산하는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치경제학의 다른 모든 용어도 사회의 이런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공장 노동자들은 자동차·철강·화학제품·칫솔 따위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구체적이고 유용한 재화를 만드는 행위 속에서 잉여가치도 생산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용자들을 재생산한다. 또, 노동자들은 자신의 착취와 지배를 유지시키는 수단도 생산한다. 우리는 사회구조 전반 — 가족 관계, 국가, 과학, 교육 등등 — 을 능동적 개인들이 사회적 상호 연관을 맺으면서 끊임없이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요소들로 이해해야 한다. 사회의 한 부분이 사회와 환경 등등을 만들고, 다른 부분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조직되는 게 아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사회를 이루는 모든 개인들이 활동한 기록인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학이 역사 이해에 바탕을 두는 이유다. 사회주의 — 민주적으로 결정된 계획에 따라 모든 주민이 자의식적으로 사회를 만들어 나아가는 사회 — 의 가능성은 자본주의 사회와 기타 계급 사회를 분석한 결과에 근거하고 있다. 즉, 자신이 만들고 새로 다르게 만들어 온 것들을 인간은 스스로 개발한 필요와 인식에 따라 새로 다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이 아무리 과거와 급격히 단절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새로운 원리를 역사에 도입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자주적 활동은 역사 속에 존재해 왔고, 그런 자주적 활동이 없었다면 과거의 역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더 “철학적인” 저술은 모두 그의 혁명적 정치학과 모순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과 기계적 유물론 비판은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나 다양한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비판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사회 관계의 특정 형태가 다양한 “생산양식”을 규정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 같은 계급 사회들에서 사회를 파악하는 핵심은 계급들이 능동적으로 벌이는 상호 투쟁의 형태다. 특히, 피억압 대중의 사회 관계들과 행동 양식들이 사회가 유지되는 방식, 그리고 혁명적 실천을 통해 그 사회를 전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밀리반드와 풀란차스의 분석 내용은 같지 않지만 이 두 사람의 연구 어디를 봐도 그토록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급투쟁에 대한 이해는 빠져 있다. 특히 피착취 계급들의 활동 형태 분석이 빠져 있다. 두 사람의 분석과 마르크스의 분석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셈이다.
4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는 ‘엘리트’ 이론과 ‘계층’ 이론을 결합한 사회 이론에 기대고 있다. 밀리반드의 연구 내용 전체가 계급투쟁이 아니라 계급 지배를 중심으로 편성돼 있는 것이다. 밀리반드의 연구를 보면 지배계급만 행동하는 것 같다. 그가 분석하는 각종 제도에서 계급 갈등은 거의 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예컨대, 밀리반드의 책이 1969년에 출판됐는데도 학교와 대학 교육을 논한 부분에서 당시의 학생 반란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밀리반드의 연구는 이렇게 일면만 강조한다. 그는 지배계급이 존재하는 토대를 거론하면서 그들이 생산에서 하는 구실이 아니라 분배에서 차지하는 이익을 강조한다. 밀리반드의 책에서 지배계급이 (능동적) 자본가가 아니라 재산과 부富를 (수동적으로) 소유하는 존재로 서술되는 이유다. 꼭 마찬가지로 그는 노동계급을 투쟁과 여러 조직 형태를 통해 사회 형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계급이 아니라 “고되게 일하지만 최소한으로만 받는” 계급으로 서술한다. 밀리반드의 분석에서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고, 투쟁하는 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이 없다. 그저 고통받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동계급이 언젠가는 자본주의를 완전히 일소해 버릴 세력이라는 말이 느닷없이 나온다. 부가적 장식물처럼 말이다. 그래서 일관된 논증의 결론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밀리반드를 보자. 밀리반드를 날카롭게 비판한 아이작 밸부스가 지적했듯이,5 노동계급 정당들이 국가 “장치”를 장악해 노동계급에 득이 되게 활용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밀리반드에게는 미해결로 남아 있다. 그는 국가의 여러 형태 — 국가 관료의 특성, “가짜 민주주의”, 국민국가 등등 — 를 설명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다.
국가 문제로 말하자면, 밀리반드는 현행 국가가 노동계급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다양한 제도적 수단들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정통 사회학의 방법으로 국가의 계급적 특성을 강조하는 게 그의 주안점이다. 국가의 여러 형태가 아니라, 국가의 상층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사회계급적” 기원이나 그들과 부자들의 유사한 태도 등을 살펴보는 식이다. 존 리가 지적한 것처럼,6 알튀세르주의는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경제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반발하는 흐름이었다. 알튀세르는 경제주의를 생산력 발전에 따른 역사 전개에 주목하는 일종의 결정론으로 정의했다. 생산을 사회적 과정이 아니라 기술적 과정으로 취급하는 것이 “경제주의”의 특징이라고 한다(루치오 콜레티는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를 비슷한 뜻으로 사용했다). 7 그러나 사이먼 클라크가 지적하듯이(각주 3을 보라), ‘경제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경계한다고 해서 꼭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에 당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함정들도 많다. 알튀세르 역시 다른 함정에 빠졌다. 이 허방다리 속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저작의 무수한 결함을 제거한답시고 마르크스의 저술들을 재해석하고 그의 이론을 아예 다시 쓰기까지 했다.
풀란차스의 저작을 살펴보자. 그의 연구는 알튀세르 학파가 발전시킨 사상 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알튀세르주의는 굵직한 비판을 이미 수도 없이 받았다.알튀세르는 “경제주의”를 대신해 사회를 상호 의존적인 수준들의 복합적 체계로 보자고 제안했다. 경제 수준, 정치 수준, 이데올로기 수준 등이 상호 침투하지만 “최종 심급에서” 경제적 수준이 결정적 요인 구실을 하는 사회 모형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자기 책의 독자들에게 그 “최종 심급”이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고 확언했다. 알튀세르의 체계는 미국의 보수적 사회학자 탤컷 파슨스Talcott Parsons가 개발한 “구조 기능주의” 체계와 매우 유사하다고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했다. 실제로 알튀세르의 체계는 파슨스의 그것처럼 역사 변동의 원리를 자리매김하기가 매우 어려운 모형이다. 역사가 “주체 없는 과정”이고, 모든 게 “영원한 존재”로 취급되는 일련의 생산양식들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개별 생산양식 내부의 어떤 것도 역사를 위협하지 않는다. 위협한다고 믿는 것은 “경제주의”나 “역사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체계는 철저히 엘리트주의적이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별하는데, 이 구별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사회에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해 사회주의도 소수의 “과학적인” 엘리트만 이해할 수 있는 체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풀란차스는 이 체계를 넘겨받았다. 본질적으로 그의 국가론은 기능주의 용어로 개진됐다. 국가는 “사회의 응집력을 보장하는 보편적 요인”이라는 게 풀란차스 설명의 핵심이다. 국가는 억압 기구이자 이데올로기 기구로, 체제 전체를 결속시킬 뿐 아니라 생산관계를 만들고 조직하는 실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원자화된 개인들과 그들의 경쟁 관계는 그렇게 해서 형성된다. 국가는 어떤 의미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를 “표현하지도”, 또 거기서 “비롯하지도” 않는다. 풀란차스는 알튀세르의 체계를 넘겨받으면서 스승에게는 장식품에 불과했던 것인 계급을 추가했다. 그러나 풀란차스는 계급이 생산관계 안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정치·법률 수준”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경제 수준”에서는 생산 과정이 존재한다. 생산 과정은 노동자, 생산 도구와 생산 대상, 노동자가 아닌 사람으로 구성된 기술적 의미로 이해한 “생산관계”를 토대로 재화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풀란차스의 분석 어디를 봐도 계급투쟁을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매개체인 일련의 사회 관계들로 보는 설명을 찾을 수 없다. 풀란차스가 보기에 사회 관계는 정치적으로, 즉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정치·법률 영역에서 형성된다.
밀리반드와 풀란차스는 상당히 다르지만(문체의 난이도도 다르다) 출발점은 같다. 둘 다 기술적 의미로 이해한 생산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위에서 두 사람은 사회적(계급적) 분배·소유·전유專有 관계를 구성했다. 그 결과 둘 다 각자의 분석틀 내에서 변화와 변동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파시즘을 양차 세계 대전 사이에 발생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와 결부해 설명하지 못한다(밀리반드는 짤막한 논의만 했고, 풀란차스는 책 한 권을 써서 파시즘을 규명하려고 했지만 말이다). 아무도 히틀러와 무솔리니 치하 계급투쟁 형태를 검토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꽤 많이 논쟁했음에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기구들”을 비슷하게 분석했다. 그들이 생각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기구들은 내적으로 일관되고 모순이 없었다. 계급투쟁 과정에서 거듭 새로운 형태를 취하는 관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 다에게 알튀세르가 말한 “부재不在”가 존재한다. 즉, 둘 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에서 비롯하는 계급투쟁을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 관계들을 조직하고 교란하는 핵심 요소로 보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분석에서는 노동자들의 실제 투쟁이 이렇다 할 구실을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두 저자의 분석틀은 항상 개혁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래도 최근까지는 최종 판단을 유보해야 했지만, 이제는 두 사람 모두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추락했다. 노골적인 개혁주의 정치 강령을 천명하는 책들을 출간한 것이다. 밀리반드의 최근[1977년] 저서 《마르크스주의 정치학 입문Marxism and Politics》[국역: 풀빛, 1989] 결론 부분에 칠레의 대실패[1973년]를 보는 그의 견해가 나온다. 아옌데 정권의 몰락에서 그가 끌어내는 본질적 교훈은 칠레와 똑같은 경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저 다음 번엔 개혁주의 정부가 자기 방어를 위해 사회 변화 과정을 심화시켜야 함을 지적하는 사회주의자 집단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밖에 없다. 즉, 실제 혁명이라는 질풍노도 없이도 사회 혁명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9 이 책이 발행되면서 그 유명한 ‘밀리반드-풀란차스 논쟁’이 사실상 종결된 셈이다. 두 사람이 기본적인 정치적 문제에서 서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둘 다 스스로 현 “유러코뮤니즘” 경향의 “좌파” — 이 말이 의미가 있는 한에서는 — 로 자리잡았다. 두 사람은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 즉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사상과 단절했음을 확실하게 표명했다.
니코스 풀란차스도 [1978년] 《국가, 권력, 사회주의State, Power, Socialism》[국역: 백의, 1994]를 출간했다.풀란차스의 제안
풀란차스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두 차원에서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좌파가 의회 제도를 사회주의 정치 활동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활용하고 그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와 병행해 노동자 평의회처럼 직접민주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조직되는 “자치” 기구가 발전돼야 한다. 요점은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 곧 민주적 사회주의”를 찾아내는 것이다. 곧,
정치적 자유와 대의민주주의 제도(민중이 획득한 성과이기도 한)가 확대 심화되는 동시에, 직접민주주의와 자치 기구들이 발전하는 식으로 국가를 완전히 탈바꿈하게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11 “민주적 사회주의만이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한다. 12 국가의 중앙 정부는 의회를 기반으로 조직돼야 한다. 풀란차스는 앙리 베버와 한 대담에서 이 구상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보통 선거권을 바탕으로 한 비밀 투표로 정부를 선출할 것, 국회의원에 대한 “명령적 위임”(구속적 위임) 폐지, 국회의원 소환권 없음, 13 부르주아 정당들의 권리 인정 14 등이 그것이다. 이런 국가 시스템 외에 “직접민주주의”의 원리들, 예컨대 대표자 소환이나 대표자 위임제 같은 것들을 바탕으로 한 지역 기구들이 있어야 한다. 중앙 수준에서는 의회제 대의민주주의가 있어야 하고 여기에 더해 공장 등등에 기초를 둔 노동자 평의회도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고 연계돼야 하는데, 둘이 어떻게 연계되는지는 더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풀란차스는 실토했다. 15 곧,
“핵심 문제”는 “탈바꿈한 대의민주주의와 일반 민중의 직접민주주의를 결합하는 것”이라는 것이다.이 문제의 답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신성한 문서에 이론적으로 입증된 모델 같은 것도 없다.
풀란차스 스스로 밝히듯이 그의 이런 구상은, 기존의 국가를 분쇄하고 마르크스가 찬양한 파리코뮌 류의 국가로 대체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가 완전히 단절했음을 의미한다.
…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에서 나타나는 국가 기구의 전면적 탈바꿈”은 전통적으로 일컬어져 온 국가 기구의 분쇄와 파괴를 더는 의미하지 않는다. 분쇄라는 용어 — 마르크스도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다 — 는 결국 매우 엄밀한 역사적 현상을 지칭하게 됐다. 다시 말해, 온갖 형태의 대의민주주의와 “형식적” 자유를 근절하고, 일반 민중의 직접민주주의와 이른바 실질적 자유만을 지지하는 것 말이다. 편을 들 필요가 있다. … 국가 기구를 분쇄하거나 파괴한다는 얘기는 단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온갖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대의민주주의 제도들의 실질적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참고 용인해야 하는 불쾌한 유산이 아니라 —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도 — 민주적 사회주의의 필수 조건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얘기도 더는 없다. 풀란차스는 마르크스가 그 용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기껏해야 이정표 구실을 하는 응용 전략 개념이다. 그 개념은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나타내고,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점진적 국가 소멸 과정에서 국가가 탈바꿈할 필요성을 나타낸다.
풀란차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을 계속 사용할수록 그의 강령만 불분명해질 뿐이었다. 프랑스 공산당PCF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구상을 폐기하기로 한 것을 풀란차스가 지지하는 이유다.
18 이런 “진부한 교조들”이 가끔씩 아무런 검토 없이, 비난조로, 의미의 깊이를 더하지 않고 거론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말들이 거짓이 되나?(따지고 보면 풀란차스 자신의 저작이 대부분 이 말들의 진실성을 부연 설명하는 데 할애됐다). “진부한 교조”에 관한 풀란차스의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런 분석으로는 연구가 단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차별적 형태와 역사적 변모를 설명할 수 없어서 구체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19 이런 단순화 때문에 스탈린주의는 파시즘에 직면해 [마르크스주의에] 재앙들을 안겨 줬다고 풀란차스는 말한다.
풀란차스는 에티엔느 발리바르처럼 당 강령에 그 문구를 유지하고자 하는 프랑스 공산당원들을 비판한다. 그런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진부한 교조”를 표명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모두 계급 국가다. 정치적 지배는 모두 일종의 계급 독재다.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국가다.”풀란차스가 “파시즘에 직면해 [빚어진] … 재앙들” 가운데 딱 한 종류의 재앙만을 거론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풀란차스는 히틀러의 등장을 보고 독일 공산당이 채택한 끔찍한 전술을 뒷받침한 “사회 파시즘”론을 든다. 그러나 “사회 파시즘”론이 앞에서 말한 “진부한 교조” 탓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트로츠키는 그 “진부한 교조들”이 진실임을 단 한 번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히틀러의 등장에 관한 분석과 공동전선을 구축해 나치를 격퇴하자는 그의 제안을 능가하는 분석과 대안은 아직까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민전선 시기의 코민테른(풀란차스는 이 문제에 침묵한다)이 프랑스의 블룸 정부에 굽신거리고, 스페인에서 프랑코 장군이 모든 과실을 차지하게 되는 [인민전선] 전략을 추구한 것은 바로 이 “진부한 교조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풀란차스는 인민전선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제안은 인민전선의 경험을 재연하자는 셈이다.
풀란차스의 제안을 추구했다가는 재앙이 발생할 것이다. 그 제안대로 하면 노동계급은 20세기에 이미 경험한 일련의 패배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그가 제시한 강령은 마르크스주의와 명백히 단절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강령을 뒷받침하는 논증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노동자 권력이 스탈린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불가피한가?
풀란차스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주의 혁명 개념 —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의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 — 이 “국가 통제주의”인 스탈린주의로 직결된다고 말한다. 지금 공산당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스탈린주의의 참상들은 모두 러시아 혁명이 수행된 방식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유주의자들과 기타의 각종 반反사회주의자들도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명제다. 그래서 풀란차스는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대단한 권위에 호소한다. 독일의 이 위대한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다른 무엇보다 1918년 볼셰비키가 제헌의회를 해산해 버린 일을 강하게 비판하는 소책자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풀란차스는 이 문제와 관련한 구체적인 정보라고 할 만한 것을 별로 내놓지 않는다. 그러니 몇 가지 문제를 우리가 직접 살펴보자. 룩셈부르크의 볼셰비키 비판은 옳았는가? 알다시피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러던 볼셰비키가 왜 무력을 동원해 제헌의회를 해산했을까?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잘못 아닌가?
20 룩셈부르크는 볼셰비키에 대한 바로 이 비판을 나중에 철회했다. 그뿐 아니라 룩셈부르크가 러시아 혁명 후 1년 만에 독일에서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그때 카우츠키의 독립사회민주당USPD은 풀란차스가 옹호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종류의 제안을 했다. 국회 더하기 소비에트 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생각에 완전히 비타협적으로 반대했다. 풀란차스가 이 문제를 바라보는 룩셈부르크의 견해를 인용하지 않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풀란차스는 룩셈부르크의 비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몇 가지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몇몇 역사학자들에 따르면,국회를 옹호하는 사람은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위장한 대리인이거나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프티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이다.
또 인용해 보자.
혁명의 경로는 분명 그 목표에서 나온다. 혁명의 방법들은 그 과제들에서 도출된다. 모든 권력을 노동 대중의 수중으로! 모든 권력을 노동자 평의회와 병사 평의회의 수중으로! 이것이 지도 원리다. … 모든 행동, 모든 조처가 나침반처럼 이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국회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보장하기는커녕 바로 “노동계급에 맞서 건립된 반혁명의 근거지”였던 것이다.
이렇듯 로자 룩셈부르크는 실천에서는 의회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가 민주주의에 대한 (1917년의) 헌신을 갑자기 잃어버린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룩셈부르크의 태도는 민주주의에 대한 완전한 헌신, 노동계급과 직접 권력 사이에 어떠한 방해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신념에서 나왔다. “권위”에 의존한 논증을 시도할 요량이라면 룩셈부르크야말로 풀란차스가 인용하기에 그다지 좋은 대상이 아니다. 볼셰비키는 왜 제헌의회를 해산했는가? 볼셰비키가 1917년에 제헌의회 소집 운동을 벌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상불 그들은 막강한 소비에트 체제만이 제헌의회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와 의회가 충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10월 이전에는 그들도 몰랐던 듯하다. 이것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볼셰비키는 실행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재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전망 속에서 혁명에 뛰어들었다. 2월 혁명 이전에는, 볼셰비크가 아니었던 단 한 명 트로츠키만이 연속혁명 이론을 바탕으로 다르게 생각했다.
10월 봉기로 그림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점을 맨 먼저 깨달은 사람은 레닌이었다. 레닌은 제헌의회 선거 연기와 투표 연령 18세로 인하를 촉구했다. 자주 그랬듯이, 레닌은 다수를 설득해 자신의 제안을 지지하도록 하는 데 실패했고, 선거가 치러졌다. 사회혁명당이 확실한 다수파를 차지했다. 그러나 [농민에 기반을 둔 정당이었기에] 사회혁명당의 득표수는 유권자들이 혁명의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와 정비례했다. 사회혁명당의 승리가 딱히 민주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회혁명당은 봉기 과정에서 분열해, 좌파는 봉기를 지지했고 우파는 반대했는데도 선거인 명부는 “통합” 정당으로 제출했던 것이다. 유권자들이 실제로 누구를 지지해서 투표했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던 셈이다. 제헌의회 개회 첫날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토지 법령, 평화 법령,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 등을 승인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제헌의회는 237 대 136으로 그 동의안을 부결시켰다. 그날부로 제헌의회는 해산됐다. 제헌의회는 이미 반혁명 세력이 결집하는 중심부로 변해 있었고, 몇 개월 뒤 발발한 내전에서도 계속 그 구실을 했다. 제헌의회를 해산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반혁명 범죄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중 권력” 상황이 다시 등장해, 목표와 방법이 정반대인 전국적 정치 구심 두 개가 경쟁하게 됐을 것이다.
25 )이야말로 기상천외한 역사 해석일 뿐 아니라 형식주의의 극치다. 러시아 혁명의 변질이라는 비극은 혁명의 고립, 내전의 혹독함과 끔찍함, 기근, 생산 붕괴, 시민의 도시 이탈 따위로 말미암아 다른 무엇보다 노동계급이 직접 통치할 수 없게 돼 버렸기 때문이다. 혁명의 살아 숨쉬던 심장인 소비에트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목숨과 함께 박동을 멈추었다. 강조하건대, 반민주적 정당이나 지도부가 처음부터 관료적으로 조종하고 통제한 것이 아니다. 온갖 상황이 가혹한 압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26
이 사건을 보면 스탈린주의의 기원을 알 수 있다는 주장(풀란차스는 이 주장 말고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가 스탈린주의를 예비했다는 그 구태의연한 유언비어도 되풀이한다“대의민주주의”
풀란차스의 두 번째 논법을 살펴보자. 그는 “대의민주주의”, 곧 의회 제도가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는 핵심적 보장책이라고 주장한다. 대의민주주의가 국가 권위주의에 맞선 전략적 방어선이라는 것이다. 풀란차스는 베버와 한 대담에서 이탈리아의 사회민주주의자 노르베르토 보비오의 견해를 인용한다.
[보비오는] 한 가지 점을 강조했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우리가 표현의 자유 등 다원주의를 지키고 싶어한다고 해 보자. 내가 알기로 이런 자유는 전 역사에 걸쳐 의회제와 결부돼 있었다.” 물론 보비오는 사회민주주의의 형태를 얘기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궁금하다. 거기에 어느 정도라도 진리가 없는 것일까? 정치적 자유를 형식적으로라도 유지하려면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권력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닐까? 분명 대의민주주의의 권력 형태들은 탈바꿈할 것이다. 부르주아 의회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다.
풀란차스는 “대의민주주의”를 옹호하면서 이런 정부 형태와 각종 정치적 자유가 “대중이 획득한 성과”라는 관찰 말고는 별다른 논증을 제시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하에서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획득한 경로를 이렇게 단순화해 버린 것을 트집잡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원론적으로 반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파가 이런 권리들을 공격하는 것에 맞서 계속 그런 권리를 방어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권리와 자유의 범위나 성격을 미화해서도 안 된다. 특히 대의민주주의에 포함된 “성과”가 매우 애매하고 제한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사실, 풀란차스는 초기 저작 《정치권력과 사회계급Political Power and Social Classes》[국역: 풀빛, 1986]과 최근 저작 모두에서 이 쟁점 전체에 관해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한다. 그는 많은 자료를 동원해 의회제 정부가 가짜 민주주의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딱 맞는 명칭 그대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뛰어넘을 수 없는 주요 한계를 몇 가지 상기해 보자.
28 개별 유권자는 국가와 관련해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권력”을 행사한다. “시민”과 국가 사이의 이런 원자적 관계는 1840년대 초부터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국가 비판에서 주요 화두였다. 풀란차스 자신의 저술도 이런 원자화된 관계를 다룬다. 29 개인적 투표는 효과와 중요성 면에서 공개 토론이나 집회에 못 미친다. 개인적 투표는 철저하게 개별화돼 있다. 혁명가들은 대중 집회가 비밀 투표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항상 주장했다. 관련 사실들을 모두 숙고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어, 외떨어진 유권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폭넓은 정치적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중 집회에서는 쟁점들을 토론할 수 있고, 주장이 반박되기도 한다. 대중 집회에서는 어떤 행동 제안들에 대한 전반적 지지 수준을 가늠할 수 있고, 따라서 그 행동이 성공할 가능성도 가늠할 수 있다. 비밀 투표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민주 정체 하에서 노동자들은 의회와 지방선거 투표권이 있다. 그들은 이 권리를 비밀 투표로 행사한다.둘째 한계는 악명 높은 것이다. 유권자들은 그들이 선출한 “대표”를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 국회의원 등을 소환할 수 있는 실질적 권리도 없고 그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유효적절한 권한도 없다. 유권자들은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 외떨어진 유권자로서 선출하므로 그 의원을 어찌하지 못한다. 국회의원은 일단 선출되면 온갖 “특권” 덕분에 선거구민들의 통제를 피할 수 있다. 국회의원은 일단 선출되면 더는 누군가를 대표하지 않는다. 18세기 말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국회의원과 선거구민의 관계를 아주 잘 표현했다. 그는 브리스톨의 유권자들에게 자기를 당선시켜서 의회에 보내 주면 ‘국가에’ 그들을 대변하지 않고, 그들에게 국가를 대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 근래의 예도 보자. 해럴드 윌슨[1964~70년과 1974~76년 재임한 노동당 소속 영국 총리]은 민주주의를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라고 정의한다고 새삼 환기시키면서 자신은 “강조점을 정부에 두겠다”고 해 버크와 똑같은 생각을 피력했다. 그러니 의회 제도에서는 정치적 자유와 권력을 몇 년에 한 번씩 몇 초 동안만 행사하는 셈이다. 유권자들은 문맹자처럼 투표 용지에 기표하면서 의회에서 자신을 대표하지도 않을 사람을 고르는 것이다.
셋째, 어쨌든 익명의 힘없는 유권자들이 뽑는 것은 입법부뿐이다. 나머지 국가 기구는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 만약 그곳에 영향력을 조금치라도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합법적·합헌적 수단이 아니라 폭동에서 뇌물에 이르는 다양한 수단들로 가능한 것이다. 군대를, 사법부를, 경찰을, 이른바 “시민의 종복”이라는 공무원을 뽑지 못한다. 그들을 통제할 효과적인 수단도 없다. 그들을 고소하더라도 흔히 그들에게는 담당 변호사들과 그들에게 동정적인 판사들을 동원할 수 있는, 내적으로 확립된 그 나름의 메커니즘이 있다. 입법부, 곧 의회가 국가 관료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세금과 각종 공과금 등으로 재정적 뒷받침을 받으면서도 대중의 일상 생활을 다양하게 지배하는, 선출되지 않는 국가 기구는 대중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여기에는 온갖 제도적 수단이 동원된다. 각종 모욕죄(판사들을 ‘국민 모욕죄’로 기소할 법조항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공무상의 비밀(사회 보장 혜택 관련 법규에까지 적용된다), 관리 임명 등등. 국회의원들조차 관료의 행위와 인사 이동을 대부분 자세히 조사할 수 없다.
30 전통적인 정치학에서는 이런 양상을 “압력단체 이론”이나 “의회의 쇠퇴” 등으로 분석한다. 그 누구도 제대로 대변해 본 적이 없는 의회는 사회의 진정한 권력을 점점 덜 대표하고, 진짜 의사 결정에도 점점 덜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입법부는 주로 법을 제정한다. 특정 사례들이 아니라 일반적인 규칙을 다루는 것이다(그 밖에는 주로 학생들의 방과후 토론 교실처럼 시끄럽게 떠든다). 그러나 현대 국가들은 광범하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률보다는 특정 세부 사항들, 예컨대 행정 부처와 기업들의 세부 협상, 특정 행정 업무 등을 더 많이 다룬다. 의회는 이런 문제들을 다룰 권한이 없고, 역량도 안 된다. “법치 국가”의 공간 자체가 자본과 권력의 집중 경향 때문에 꾸준히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31 우리가 ‘탈바꿈’을 기대하는 점 어느 것에 대해서도 민주화를 제안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투표권이라는 “성과”는 꽤 공허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기존의 투표권을 방어하는 게 민주주의의 원리를 주요하게 방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풀란차스는 “탈바꿈한” 대의민주주의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가 어떻게 “탈바꿈”해야 할지에 관한 그의 생각은 대체로 불분명하다. 풀란차스는 비밀 투표, 국회의원 소환권 부재, 국회의원에 대한 [대중의] 권한 결여 등을 바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32 “점진적 국가 소멸”이라는 사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최초로 발전시킨 고귀한 사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존 자본주의 국가 분쇄,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리고 풀란차스가 내다버리고 싶어 하는 다른 것들에 관한 사상도 함께 제시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점진적 국가 소멸” 사상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직접 통제하는 새로운 국가 권력을 만들어 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적 과제를 처리하는 데서 조직화된 폭력이 점점 덜 필요해지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 관계와 생활 조건들을 형성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국가가 점차 소멸하면 강압보다는 설득이 사회의 핵심적 조직 원리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직접 종속돼 있지도 않은 의회 기구를 유지해서는 이런 열망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조금치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의회 기구는 그런 열망 실현의 방해물이다. 그것은 민중의 통제를 벗어난 통치 형태라는 점에서 민주적 삶의 장애물이다. 풀란차스는 실제로는 “점진적 국가 소멸”로 가는 길을 제안하고 있는 게 아니다. 풀란차스의 “점진적 국가 소멸” 운운은 본인의 말을 빌리면 말장난이다.
그러나 풀란차스는 그러고 나서 자신에게 훨씬 더 웅대한 목표가 있다고 주장한다. “점진적 국가 소멸이라는 세계적 전망을 열어젖혀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풀란차스의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은 비민주적 통치 형태의 유지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노동자들의 자치에 대한 공격
풀란차스는 직접민주주의, 특히 노동자 평의회라는 통치 형태도 공격한다. 여기서도 그의 논증은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풀란차스의 첫째 논점은 논증이 아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목표로 일어난 노동계급 운동은 지금까지 모두 실패했다고 한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은 모두 지금까지 갖가지 수단으로 격퇴당했다. 풀란차스의 이 주장은 이런 패배의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 다음 번에는 성공하자는 주장에 반대한다는 말일 뿐이다. 익사하니까 수영하는 법을 배워서는 안 된다는 논법과 비슷하다.
둘째, 풀란차스는 기존의 국가가 너무나 강력해서, 사회주의 혁명의 전주곡인 ‘이중 권력’을 형성하는 대항 구심이 등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곧,
… 국가 기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작금의 프랑스 국가를 살펴보자. 그리고 나서 민중의 권력이 집중된 형태도 살펴보자. … 말할 나위 없이 몇 발짝도 떼지 못하고 분쇄되고 말 것이다. 현 상황에서 대항 권력 창출을 목표로 [기존] 국가와 병행하는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기존 국가가] 놔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조직화의 낌새라도 있는 듯하면 순식간에 사태가 평정될 것이다.
35 국가가 너무 약해서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을 확실히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한테는 국가가 너무나 강력하다고 강조한다!
풀란차스의 변설은 이 지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다. 변증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모순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케이크를 먹으면서도 그 케이크가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의 개혁주의적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할 때 풀란차스의 주장에서 국가는 기본적으로 취약한 존재다.이 주장은 둘 중 어느 면으로든 말이 안 된다. 아니, 프랑스의(또는 다른 어디라도) “현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평의회를 만들어 그것에 권력을 집중시키려 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을까? “현 상황”이 바뀌어야 그런 사건도 일어날 수 있는 법 아닌가? 비혁명적 상황 속의 혁명이라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다. 혁명적 시기에는 기존 국가 기구와 지배계급이 반드시 분열한다. 혁명적 시기에는 국가가 위기에 처하고, 효과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런 위기가 없는 혁명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이다. 국가가 위기에 봉착해야 ‘이중 권력’ 상황이 출현하고, 새로운 형태의 국가 권력이 이길 가능성도 있다.
다른 모든 개혁주의자들처럼 풀란차스도 사회주의로 이행을 “현 상황”에서 추론하려고 한다. 그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국가는 위기에 처한 국가, 위기 상태로 파악할 때 비로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국가가 이렇게 위기에 처해 있어서 좌파는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이행이 객관적으로 가능한 기회를 붙잡을 수 있다. 정치 위기의 종류는 몇 가지다. 좌파는 현 위기의 성격에 따라 어떤 분야가 민주적으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한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현 위기는 이중 권력의 위기도 아니고, 파시즘 체제로 나아가는 경향에서 비롯한 위기도 아니다.
이 구절에 관해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위기로 나아가는 경향이 전반적이라 해서 그 자체로 혁명적 위기가 아니라는 지적은 (“진부하”기는 해도) 정확한 지적이다. 둘째, 혁명적 위기가 없이도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혁명적 위기는 경제 불황 같은 것이 아니라 계급 관계의 위기를 가리킨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유치증幼稚症》에서 혁명적 위기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지배계급이 더는 옛 방식으로 계속 지배할 수 없고, 피지배계급도 더는 옛 방식으로 계속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나서는 부글부글 끓는 상황. 풀란차스도 가끔은 이 점[혁명적 위기가 계급 관계의 위기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좌파” 정부가 선출되더라도 “민중”이 동원되지 않으면 그 집권은 “사회민주주의를 경험”하는 것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민중이 동원된다면 노동계급과 국가와 각종 정치 생활의 “현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풀란차스에게 떠오르지 않는 듯하다.
셋째, 풀란차스는 소련에 관한 자신의 주장과 궤를 같이해 노동자들의 직접민주주의가 스탈린주의 체제로 귀결돼, 정치적 자유가 억압당하고, 반대 의견이 분쇄되리라고 말한다. 곧,
직접민주주의 — 나는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에 의한 직접민주주의만을 얘기하고 있다 — 는 언제 어디에서나 복수 정당 제도와 정치적·형식적 자유에 대한 억압을 동반했다.
38 노동자 평의회가 자체의 국가 권력을 만들면 “국가가 점차 소멸하거나 직접민주주의가 승리하기는커녕 새로운 유형의 권위주의 독재가 출현하고 만다.” 39 노동계급의 자치가 불가능하다는 이런 엘리트주의적 명제를 풀란차스가 논증으로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그저 일언지하로 단언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가지 얘기를 할 수 있다.
이 주제는 《국가, 권력, 사회주의》에서도 반복된다. “모든 것을 대중의 직접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면 “조만간 필연적으로 국가의 폭정이나 전문가들의 독재를 낳고 말 것이다.”첫째, 풀란차스는 틀렸다. 노동자 평의회와 “복수 정당제”의 소멸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중국, 쿠바, 캄보디아 등은 노동자 평의회가 존재한 적이 없으므로 풀란차스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사례가 될 수 없다). 파리코뮌에는 복수의 정당이 참여했다. 1936~37년 스페인 노동자 평의회도 마찬가지였다. 1956년 헝가리 노동자 평의회의 핵심 요구는 복수 정당제였다.
둘째, 풀란차스가 실제로 옹호하는 것은 복수의 부르주아 정당들이다. 그는 부르주아 정당이 복수로 존재해야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는 걸로 본다. 노동자 평의회에 부르주아 정당이 참여할 여지가 별로 없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자 평의회가 부르주아 정당들을 금지해서가 아니라 혁명적 상황에서 부르주아 정당들이 노동자 평의회 안에서 민주적 권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파괴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제헌의회는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영국에서 노동자 평의회의 대회가 열리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대처 여사[1979년 5월 보수당이 집권하기 전에 이 글이 씌어졌다]의 주된 관심사가 핀칠리[런던 북부의 노동계급 거주 지구] 노동계급 대표자를 포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40 “… 우선 기존 국가 권력이 장악되면 그 다음에 또 다른 국가 권력이 그것을 대체한다는 견해는 더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41 도대체 누가 이런 생각을 “받아들였다”고? 그건 개혁주의자들의 상상이다. 사회주의 혁명이 먼저 스스로 부르주아 국가 기구를 맡고, 그 다음에 그것을 폐지한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기존 국가 권력은 파괴의 대상일 뿐이지 ‘차지’할 목표가 아니다.
어쩌면 풀란차스는 사회주의 혁명의 개념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몇 군데에서 “요새” 비유를 한다. 혁명적 좌파를 그것에 비유할 요량으로 말이다. 예컨대 다음의 인용문들을 보라. “우선 국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 요새를 차지한 다음에 전체 국가 기구를 완전히 파괴하고, 제2의 권력(소비에트)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풀란차스는 사회주의를 원하지 않나?
니코스 풀란차스 자신의 주장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사회주의를 회피하지 않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인터뷰에서 두 가지 주장을 잇따라 한다. 첫 번째는 나무랄 데 없는 지적이다.
동의한다. 현 국가 전체와 그 기구들 전부 — 사회보장, 보건, 교육, 행정 등 — 의 구조는 부르주아지의 권력에 부합한다. 나는 대중이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자율적인 권력의 지위들 — 종속적인 지위조차 — 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지위들은 저항의 수단이고, 부식되는 요소들로, 국가의 내적 모순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 다음 두 번째 주장이 주목할 만하다.
단지 국가의 물리적 범위 안에 갇힌 투쟁이라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그럼에도[국가의 물리적 범위 안에 갇혔어도] 국가의 전략적 지형 위에 자리잡은 투쟁이라는 의미에서도 [국가 안에서 투쟁해야 한다.] 그런 투쟁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들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접수해 마침내 권력을 장악할 목적으로 고안된 일련의 개혁들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자 국가로 대체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국가의 내적 모순을 날카롭게 만들고 국가를 심층적으로 바꿔내는 투쟁, 저항의 투쟁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권력을 장악하지 말자는 얘기다!
풀란차스는 《국가, 권력, 사회주의》에서 국가의 경제 기구들이 분쇄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단계에서도 변화로 말미암아 경제 기구가 해체돼서는 안 된다. 사태가 그런 식으로 전개되면 그 기구가 마비될 테고, 그에 따라 부르주아지의 보이콧[자본 투자 거부 등]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세상에, 우리가 통상산업부나 재무부를 마비시킬지도 모른다니! 풀란차스는 앞 페이지에서 “경제 기구[그렇다, 바로 그 경제 기구 — 바커]가 통일체로서 여전히 자본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언급해 놓고도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르주아지가 여전히 보이콧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에도 주목하라. 노동자 평의회가 공장과 은행 따위를 통제함으로써 이런 보이콧의 위험을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천만에. 풀란차스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한다. 곧,
…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은 오랜 과정이다. 그 과정의 첫 단계는 독점 자본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급하게 핵심적 생산관계를 전복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왜 안 되나?’ 하고 감히 순진한 질문을 던지는 독자는 이런 대답을 듣게 된다.
변화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필연적으로 경제가 붕괴할 위험을 무릅쓰게 된다.
46 그러나 풀란차스의 견해는 반대다.
그러므로 풀란차스가 말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현 상황”에서 출발해야 하고 “경제가 붕괴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혁명가들이 공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풀란차스에 반대해 다음과 같은 점에 명확해야 한다. 즉, 노동계급이 사회를 완전히 재편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경제가 붕괴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다. 사회주의 혁명은 “경제 붕괴”를 동반한다. 문제는 새로운 토대 위에서 경제가 즉시 회복할 수 있도록 사회주의 혁명을 단호히 완수하는 것이다.반독점 단계에 수반된 단절에 덧붙여 여전히 국가는 경제의 작동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경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어느 정도 여전히 자본주의적이어야 할 것이다.
역사의 교훈
48 그렇다면 한 번 따져보자. 의회 민주주의와 노동자 평의회가 “병행”했던 고전적인 “부정적 사례”와 “실수들”은 1936년과 1937년의 스페인이었다.
앞에서 나는 의회 민주주의와 노동자 평의회가 양립할 수 없는 제도라고 말한 셈이다. 풀란차스는 두 제도가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그 방법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를 보면 … 피해야 할 부정적 사례들과 성찰해 봐야 할 실수들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1936년 7월 프랑코가 스페인 공화국을 반대해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처음에 스페인의 여러 지역에서 격퇴당했다. 민중의 무장 세력이 크게 활약한 덕분이었다. 그들은 공화국 정부에 무기를 요구했고, 많은 경우 탈취했다. 군 장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스페인 전역에서 대중 투쟁이 걷잡을 수 없이 분출했기 때문이었다. 투쟁의 전조로 1936년 2월 인민전선 정부가 선출됐다. 총파업과 토지 몰수가 들불처럼 번지면서 노동자 평의회와 농민 평의회가 생겨났다.
7월 이후 이 운동은 열 배로 불어났다. 스페인의 대부분 지역, 특히 카탈루냐·아라곤·카스티야에서 노동자 평의회와 농민 평의회는 생산과 분배를 조직했고, 도시와 촌락을 운영했고, 자체 시민군을 설립했다. 스페인 공화국의 심장부에는 엄청나게 약화된 부르주아 의회제 정부가 있었다. 7월 이후 스페인은 전형적인 “이중 권력” 상황이었다.
프랑코를 저지하고자 스페인 공화국에 군사 원조를 주로 제공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히틀러에 맞서 프랑스와 영국의 지배계급들과 외교적·군사적 동맹을 맺길 원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스페인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전개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로 말미암아 프랑스 정부나 영국 정부와 멀어질까 봐 두려워한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스페인 공화국을 지원하면서도 큰 대가를 요구했다. 스페인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결코 넘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했다.
주로 모스크바에 의해 무장되고 조직된 공화국 중앙 정부는 1937년 중반까지 지역의 노동자 평의회나 노동자 시민군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이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과 조직, 이들이 구현하고 있던 요구들(재산 사회화, 토지 몰수,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 등)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충돌의 결과, 먼저 스페인 사회의 기층 세력이 억제되고 제한됐고, 그 다음에 공화국 중앙 정부의 치안 활동과 총력전으로 노동자 평의회가 파괴됐다. 1937년 5월 초 바르셀로나에서, 얼마 후 아라곤에서 말이다.
이 모든 비극은 부르주아 의회제 정부가 존속하는 한 지역 노동자 평의회들조차 살아남을 수 없음을 증명한다. 중앙 정부가 지시한 협소한 한계를 넘는 지역 차원의 독자적인 노동계급 행동조차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므로 스페인의 비극이 빚어진 핵심 원인은 다음과 같다. 스페인 노동자 평의회를 이끌었던 사람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 평의회들을 중앙 집권화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 결과 스페인인들의 정치 생활의 중심이 텅 비게 됐고, 그 빈 공간을 채운 것은 반혁명적 자유주의자들과 공산당이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에 맞서 그 빈 공간을 조직하고 활용했다. 이 투쟁의 유일한 승자는 프랑코 장군이었다.
의회 민주주의는 노동자 평의회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번번이 입증됐다. 어느 하나가 유지되려면 나머지 하나는 파괴돼야만 했다. 1936년 프랑스에서 공산당은 인민전선 정부를 수호하려고 대중 파업 운동을 철회시켰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당들은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을 무장 해제시켜 의회 제도를 보호했다. 칠레에서도 아옌데의 국민연합 정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 운동을 공격했다. 직접적인 공격과 관료 집단을 통해 제한하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말이다. 거듭 반복된 잘 알려진 재앙들은 다 이런 전략의 결과다.
풀란차스는 “새로운” 전략을 내놓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낡은, 검증된, 결과가 확실한 방식을 내놓고 있는 것뿐이다. 노동계급이 패배하게 되는 결과 말이다. 노동자 평의회라는 새로운 기관으로 자신의 권력을 집중하고 그 집중화의 장애물을 모두 분쇄해 사회주의 혁명 과정을 완성하지 않는 노동계급 대중 운동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끄러워 말고 주장해야 한다. 노동자 권력에 제한을 두자는 풀란차스 같은 사상가들의 사상을 최대한 강력하게 논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게 풀란차스 자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의 책은 “민주적 길” 위에서 만날 수도 있는 “위험 요소들”에 관한 우울한 몽상으로 끝난다.
… 최악의 경우 우리가 희생자가 돼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학살당할 수도 있다. 이에 답해 보자. 우리가 그 위험성을 가늠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우리 자신이 공안위원회와 어떤 프롤레타리아 독재자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놓이는 것보다는 어쨌든 바람직하다. … 민주적 사회주의가 직면할지도 모를 위험 요소들을 피할 확실한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선진적 자유민주주의의 지도와 회초리 아래서 조용히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얘기다.
이 모호함이 풀란차스의 특징이다. 풀란차스가 이 문제를 화두로 다음 번 제안을 내놓을까? 이미 보았듯이 풀란차스가 자유민주주의의 이론적 지도를 이미 받고 있으므로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도 아닐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 앞에 ‘선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달라질 것은 없다.
옮긴이 정병선은 전문 번역가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보통 사람을 위한 제국 가이드》,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전염병의 사회적 생산 조류독감》, 《존 리드 평전》, 《벽을 그린 남자》, 《렘브란트와 혁명》 등 많은 책을 번역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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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arker, Colin 1979, ‘A “New” Reformism? — A Critique of the Political Theory of Nicos Poulantzas’, International Socialism 4(Spring 1979).
↩
- K. Marx, ‘The Constitution of the French Republic Adopted November 4 1848’, Notes to the People, London, no 7, (June 1851); Hal Draper, Karl Marx’s Theory of Revolution, Vol I (1977), Monthly Review Press, p. 316에서 재인용. ↩
- Ralph Miliband, The State in Capitalist Society, Weidenfeld & Nicolson, (1969), (현재는 4부작 페이퍼백); Nicos Poulantzas, Political Power and Social Classes, NLB, (1973); Fascism and Dictatorship, (1974); Classes in Contemporary Capitalism, (1975); Crisis of the Dictatorships, (1976). 밀리반드와 풀란차스는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의 여러 호에서 논쟁을 벌였다. ↩
- John Lea, ‘The State of Society’, International Socialism, old series no. 41, Dec~Jan 1969; Simon Clarke, ‘Marxism, Sociology and Poulantzas’s Theory of the State’, Capital and Class, 2, summer 1977. ↩
- Isaac Balbus, ‘Modern capitalism and the state’, Monthly Review, May 1971. ↩
- John Lea, 앞의 글. ↩
- 예컨대, Simon Clarke, ‘Althusser’s Marxism’(아직 출간되지 않았지만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 사회학과로 찾아가면 그에게서 등사판을 구할 수 있다); E.P. Thompson, The Poverty of Theory and other essays, Merlin, 1978. ↩
- Lucio Coletti, From Rousseau to Lenin, NLB, (1972). ↩
- Colin Barker, ‘Muscular Reformism’ (review of Marxism and Politics) International Socialism, old series 102, (October 1977)을 보라. ↩
- Nicos Poulantzas, State, Power, Socialism (이하에서 SPS로 표기함), New Left Books, (1978), £7.50. 풀란차스는 제4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의 앙리 베버와 흥미로운 대담도 했다. 이 대담은 Critique Communiste 16, (June 1977)에 처음 실렸고, International에 영어로 번역됐으며, 미국 잡지 Socialist Review no 38 (March~April 1978)에 재수록됐다. 내 인용의 출전은 이것으로, 이하에서 Interview로 표기하겠다. ↩
- SPS, p. 256. ↩
- 같은 책. ↩
- 같은 책, p. 257. ↩
- Interview, p.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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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그런 것 같다. 풀란차스와 베버의 다음 대화를 보면, 둘 중 누구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말이다.
풀란차스: 다원주의를 신봉하는가?
베버: 물론이다. 우리는 다원주의를 신봉하고, 실천한다.
풀란차스: 적들에게도 다원주의를 인정하는가?
베버: 그렇다. 부르주아 정당들한테도 인정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풀란차스: 아하, 부르주아 정당들도! 그런데, 순진하다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면 여러 가지를 해명해야 할 듯하다. 우리 내부의 비판도 두렵기 때문이다.
베버: 물론이다.
풀란차스: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제도로 다원주의를 보장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것은 항상 부차적인, 그러나 중요한 문제다. … (Interview, p. 23).
제4인터내셔널이 부르주아 정당들에게도 다원주의를 보장하는 문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다! ↩ - SPS, p. 264~5. ↩
- 같은 책, p. 260. ↩
- 같은 책, p. 256. 칼 마르크스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사상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데 열심인 풀란차스가 정작 그 옛 혁명가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엥겔스를 대하는 풀란차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해하고 싶다면 파리코뮌을 보라고 얘기한 사람이 엥겔스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이정표”가 있었다면 그 이정표는 풀란차스가 가리키는 방향과 정반대를 가리켰을 것이다. ↩
- SPS, p. 124. ↩
- 같은 책, p. 125. ↩
- 예컨대, Norman Geras, The Legacy of Rosa Luxemburg, NLB, 1976, p. 187. 룩셈부르크가 쓴 팸플릿들에는 다른 문제들로 볼셰비키를 비판하는 내용들이 있는데 역시 부적절한 게 꽤나 많다. Tony Cliff, Rosa Luxemburg, IS, 1969, ch. 7 참조. ↩
- Tony Cliff, 앞의 책, p. 70 참조. ↩
- Norman Geras, 앞의 책, p. 144. ↩
- 같은 책, p. 126. ↩
- Tony Cliff, Lenin, Vol. 3, Pluto, (1978)을 참조했다. ↩
- SPS, p. 253; Interview, p. 21. ↩
- 앙리 베버가 Interview에서 이런 주장을 하지만 풀란차스는 자기 하고 싶은 말로만 대꾸한다. 풀란차스는 러시아 혁명이 내적으로 패배했다는 이런 역사적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그 근거로 중국, 쿠바, 캄보디아 혁명에서도 민주주의가 없었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베버는 이 혁명들에서 노동계급이 독자적 구실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모종의 사회주의 혁명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런 나라들을 변질된 노동자 국가나 기형적 노동자 국가로 보는 제4인터내셔널 지지자인] 베버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어쩌다가 제4인터내셔널은 개혁주의에 맞서 소비에트 사상을 옹호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전락했단 말인가? ↩
- Interview, p. 22. ↩
- 풀란차스는 비밀 투표를 옹호하는데, 앙리 베버도 그러다니 정말 놀랍다(Interview, p. 25). ↩
- 예컨대, SPS, p. 104를 보면, “국가에서 분리된 동일한 단자單子, monad들의 총체인 정치적 통일체body-politic[조직된 정치 집단으로 여겨지는 한 국가의 전 국민]의 개별화”라는 말이 나온다. ↩
- 예컨대, Franz Neumann, ‘The change in the function of law in modern society’, The Democratic and the Authoritarian State, Free Press, (1957); 풀란차스 자신도 이 점을 언급했다. 예컨대, SPS, p. 172 참조. ↩
- Interview, p. 20. ↩
- SPS, p. 262. ↩
- 풀란차스는 파리코뮌 이후의 마르크스 견해를 폐기한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기존 국가 기구를 그냥 손에 넣어, 자기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풀란차스는 “대의민주주의”를 계급 중립적인 영속적 형태로 취급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딴소리를 한다. 예컨대, “… 국가의 구체적 제도에 정치적 지배가 아로새겨져 있다. …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르주아지의 것인) 국가 권력은 이렇게 구체적이다.”(SPS, p. 14) 풀란차스는 자본주의 국가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분리한다고 말하지만 의회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제도들은 다를 수 있다고 눙친다. 예컨대, “국가와 대중의 관계가 표출되는, 다수의 이른바 간접민주주의 제도(정당, 의회 등등)가 동일한 메커니즘에 의존한다는 것도 분명하다.”(SPS, p. 56) 그러나 풀란차스는 무엇과 어떻게의 문제를 명시하지 않는다. ↩
- Interview, p. 31. ↩
- 예컨대, ‘The Weakening of the State’, SPS, p. 241ff. ↩
- 같은 책, pp. 206~7. ↩
- Interview, p. 20. ↩
- SPS, p. 255. 같은 책, p. 261도 참조. ↩
- 같은 책, p. 264. ↩
- 같은 책, p. 255. ↩
- 같은 책, p. 260. ↩
- Interview, p. 13~4. ↩
- SPS, p. 198. ↩
- 같은 책, p. 197. ↩
- 같은 책, p. 197. ↩
- 그 중에서도 Nicolai Bukharin, The Economics of the Transformation Period, Bergman, (1971) 참조. ↩
- SPS, p. 197. ↩
- 같은 책, p. 2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