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9호를 내며
2011년은 아랍 혁명과 함께 시작됐다. 1월 14일 튀니지 대통령 벤 알리가 축출됐고, 2월 11일 이집트 대통령 무바라크가 축출됐다. 독재자들이 쫓겨나는 것을 목격한 리비아 민중도 자신감을 얻어 2월 17일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고, 저항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반도까지 확산됐다. 이 서문이 인쇄로 넘어가기 직전인 지금 이 순간에도 혁명은 진행 중이고,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폭격도 계속되고 있다.
《마르크스21》 이번 호는 지면 대부분을 아랍 혁명을 다루는 데 할애했다. 편집팀은 원래 기획된 글을 잠시 미뤄 두고, 아랍 혁명의 의미와 전망을 분석한 글들을 소개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발행 시점이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아랍 혁명 특집호를 내놓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있을 때 국내 대형 서점의 웹사이트를 찾아 보니 이 나라들에 대한 정치·사회 분야 도서가 전혀 없는 실정이었다. 리비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마르크스21》 이번 호가 이집트 혁명을 비롯한 아랍 혁명을 깊이 있게 다룬 거의 유일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서가 아닐까 싶다.
〈특집: 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에는 글 열 편을 담았다. 먼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아랍 혁명의 귀환’은 아랍 혁명의 성격과 전망을 넓은 시야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 주는 글이다. 캘리니코스는 세계적인 경제·정치 위기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이 위기를 통해 중동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난 양상을 분석한다. 그리고 아랍 혁명으로 서방 강대국들이 입은 타격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무바라크 퇴진 이후 지금 이집트에서는 독재 잔재 청산 과정이 진행되고 있고, 노동자 파업과 공장 점거가 증대하고 있다. 캘리니코스는 이런 일들의 추진력이 얼핏 정치적인 것으로만 보이지만, 중동 사회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융합돼 있어서 옛 정권의 뿌리를 뽑는 것이 그 사회의 정치와 경제를 모두 깊숙이 건드리는 것과 떨어질 수 없다고 지적한다. 캘리니코스는 아랍 혁명의 특징이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라는 널리 퍼진 주장도 날카롭게 반박한다. 실제로 이번 혁명들의 양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운동 안에서 더 투쟁적인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해야 한다는 과제와도 맞물린다. 그래야 노동자들이 분명한 정치적 주장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도록 도울 수 있다. 혁명의 미래는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필립 마플릿의 ‘이집트 혁명의 제1막’과 앤 알렉산더의 ‘독재 정권의 무덤을 판 사람들’은 이집트 혁명의 배경과 전개를 자세히 다룬다. ‘이집트 혁명의 제1막’은 무바라크가 어떻게 방대한 억압 기구·고문 같은 공포와 보상으로 통치를 유지했는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얼마나 부패와 불평등이 확대됐는지를 잘 보여 준다. 마플릿은 민중 운동이 민주화 요구로 혁명의 첫 번째 국면을 열어젖혔다면, 이제 제2막은 더 광범한 역사적 변화를 향한 운동으로 나아가야 하고 여기서 노동운동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독재 정권의 무덤을 판 사람들’은 이집트 혁명에서 조직 노동계급의 구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앤 알렉산더는 2월 8일 일기 시작한 파업 물결이 순식간에 불어나 무바라크를 무너뜨린 데 결정적 구실을 했고, 혁명의 전진을 위해 조직 노동자들이 할 일이 여전히 많다고 주장한다.
‘튀니지의 민중 혁명’은 튀니지의 현대사, 벤 알리 정권의 성격, 이번 혁명의 배경 등을 다루고 있다. 이 글을 쓴 샴세디네 므나스리는 튀니지 혁명을 현장에서 몸소 겪고 있는 사람답게 혁명으로 가는 길에서 나타난 변화들의 의미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샴세디네 므나스리는 튀니스에 있는 마누바대학교의 마르크스주의자 교수다.
김하영의 ‘리비아 혁명, 어떻게 볼 것인가?’는 카다피 정권이 진보적인 반제국주의 정권인가, 리비아 혁명의 성격은 무엇인가, 서방의 군사적 개입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등을 다룬다. 이 글은 한편으로는 리비아를 반미 국가로 보면서 리비아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자민통 계열을,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군사 개입을 명확하게 반대하지 않는 일부 진보단체들을 겨누고 있다. 김하영은 우리는 카다피가 제거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서방 군대가 아니라 그 나라 노동자·민중의 손으로 성취되기를 바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서방의 군사 개입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도 리비아를 포함한 아랍 전역에서 혁명이 확대·심화할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한다.
그 다음에 수록한 글 네 편은 이집트의 정치·경제·사회와 정치 세력들, 이번 혁명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될 만한 글들이다. 먼저, 앤 알렉산더의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좌절’과 에릭 루더의 ‘나세르에서 무바라크까지’는 1952년 이집트에서 나세르의 자유장교단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지난 번 아랍 혁명과 아랍 민족주의의 한계를 다룬다.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좌절’은 국가가 반제국주의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입증해 주는 듯했던 1956년의 사건들(수에즈 운하 국유화와 이에 맞서 서방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 이후 어떻게 아랍 민족주의가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는지를 추적한다. 앤 알렉산더는 나세르의 민족 해방 전략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분석하면서, 이집트·이라크·시리아의 공산당들이 민족주의 정당과의 동맹 속으로 용해돼 아랍 민족주의와는 다른 대안을 건설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나세르에서 무바라크까지’는 나세르주의가 그의 후계자 사다트와 무바라크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노골적인 신자유주의와 대미 협력주의로 변해갔는지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집트 민주화 운동’과 ‘이슬람주의의 과거와 현재’는 이집트 사회주의자인 라밥 엘 마흐디와 사메 나기브가 쓴 글이다. ‘이집트 민주화 운동’은 2011년 이집트 혁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10년 동안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전한 운동들이 준비해 온 것임을 이해하게 해 준다. 라밥 엘 마흐디는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이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민주화 운동이 사라지는 듯하자 그 뒤를 이어 노동자 투쟁이 등장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2011년 또 한 차례 대중적 저항의 주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던 그의 예언은 지금 우리가 보듯이 완전히 적중했다.
‘이슬람주의의 과거와 현재’는 지난 30년 동안 중동 전역에서 성장한 이슬람주의, 특히 무슬림형제단을 집중 분석한 글이다. 국내 진보진영에서는 이슬람주의를 혁명적 세력으로 분칠하거나 아니면 아예 반동적 세력으로 매도하는 억측과 오해가 난무한다. 사메 나기브는 무슬림형제단이 매우 모호하고 이질적인 단체로서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어 왔고, 특히 1980년대 포퓰리스트 정치 세력으로 되살아났다고 설명한다. 이 글은 이번 혁명 과정에서 무슬림형제단이 한 구실을 이해하고 전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집〉의 마지막 글인 김인식의 ‘21세기 혁명의 현실성을 보여 준 아랍 혁명’은 아랍 혁명의 의미를 짚어 보고, 아랍 세계의 경제적 특성이 이번 혁명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김인식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며 노동자 투쟁을 심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튀니지와 이집트는 민주주의 혁명 운동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운동으로 “성장·전화”할 잠재력을 힐끗 보여 줬는데, 그것을 현실화하는 데서 혁명적 정당의 존재가 핵심 요인이라고 강조한다.
이 밖에도 이번 호는 주목할 쟁점으로 ‘다시 불거지는 유럽 재정 위기’를 다뤘고, 파리 코뮌 1백40주년을 맞아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을 소개한 글, ‘파리 코뮌, 최초의 노동자 국가’를 실었다.
이번 호에 피드백을 싣게 돼 매우 반갑다. 토론과 논쟁을 통해 서로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두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독재 정권이 풍전등화인 예멘 상황에 대한 글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상황을 보아가며 다음 호 기획 때로 미루고자 한다.
다른 한 가지 아쉬움은 크리스 하먼의 부재다. 실제로 그는 당면한 이집트 혁명을 내다보며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이집트를 방문하며 그곳의 사회주의자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2009년 11월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그에게서 이집트 상황에 대한 결정적인 분석과 전망, 영감을 얻고 있을 텐데 말이다.
독자들이 《마르크스21》을 조금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본문 디자인을 새롭게 바꿨다. 디자인을 해 준 김준효 씨에게 감사드린다.
2011년 3월 27일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