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이집트 혁명의 제1막 *
2 무바라크와 그의 최측근 각료, 일가친척, 가까운 기업인들은 여러 차례 효과를 본 이 방법이 저항 운동을 꺾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목표는 시위대를 잔혹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즉, 항쟁 참가자들의 뼈를 부러뜨려 의지를 꺾으려는 것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빈곤·굶주림·실업에 맞서서, 그리고 두려움·학대·고문에 맞서서 싸웠다. 그들의 수와 그들의 분노는 고비점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아흐레 뒤 무바라크는 쫓겨났다. 징집병들이 계속 명령에 충성할지 확신할 수 없었던 장군들은 마침내 독재자를 퇴진시켰다. 그들은 이제 군대최고평의회 이름으로 권력을 잡은 채,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한 체제의 수호자 노릇을 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이집트 항쟁의 성격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 사건은 무바라크가 얼마나 쉽게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보여 줬다. 이 사건을 목격한 피스크는 발타기야의 등장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냉혹하고 잘 계획된” 것이었다고 말했다.3 마할라 알 쿠브라에 있는 미스르 방직 공장(이집트 최대의 공기업이자 중동에서 가장 큰 방직 공장)의 파업 노동자들은 회사 경영진이 부패했고 노조 활동가들을 탄압했으므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포르투갈 혁명 당시 ‘사네아미엔투’(정화)라고 불린 숙정 과정이 시작됐다. 맨 처음 고발된 자는 집권 국민민주당 고위 인사이자 무바라크의 억만장자 친구인 철강왕 아흐메드 에즈였다. 최고평의회는 내무부장관 하비브 알-아들리, 주택부장관 아흐메드 마그라비, 관광부장관 주헤이르 가라나도 체포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운동의 초점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이집트 전역의 작업장들로 옮겨갔다. 지금 이집트의 많은 주요 공장에서 파업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은 임금, 보너스, 계약 조건, 연금, 건강 보험, 노동조합 권리와 노조 인정, 무바라크 정권 시절 노동자들을 괴롭힌 경영진과 공식 노조 지도자들의 퇴진 등 다양한 요구를 제기했다. 수에즈에서는 군대가 부패 혐의를 받고 있던 경영자들을 체포했다.억압 기구
4 아들리는 같은 날 벌어진 대중 시위에 증오의 대상인 소요 진압 경찰을 보냈다. 소요 진압 경찰이 시위대를 몰아내지 못하자 그는 발타기야를 불러모았다. 무바라크는 집권 기간 내내 대중 저항에 이런 식으로 대처했다. 1981년 권력을 잡자마자 그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파업·시위와 10인 이상의 공개 집회를 금지하고, 신문을 검열하거나 폐간하고, 항소가 불가능한 군사법원을 설치했다. 또, 보안 기구를 대폭 강화하고, 경찰과 정보기관들이 멋대로 용의자를 체포·구속해도 처벌받지 않게 해 줬다. 또, 약간의 양보책으로 비교적 고분고분한 야당 인사들을 포섭하려 했다. 이런 양보로 저항을 봉쇄하기가 여의치 않으면 서슴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이집트 혁명의 전개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2011년 1월 25일 무바라크 정부 지지자들은 내무부장관을 “이집트 제1의 인권 수호자”라고 불렀다. 관영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법원 앞에서 열린 시위에서 그들은 “하비브 알-아들리는 이집트를 위험에서 보호하는 영웅이다”, “하비브, 강하게 대처하라”고 외쳤다.5 이들은 모든 종류의 독립적 정치 활동을 억압했고, 심지어 정권이 허용한 좁은 틀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2004년 온건 개혁주의자인 아이만 누르는 가드(‘내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서 무바라크의 경쟁 후보로 나섰다가 곧장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갇혔다.
무바라크 정권은 방대한 억압 기구를 건설했다. 정권은 민사행정경찰civil police 말고도 군대와 비슷한 소요 진압 경찰, 즉 암 알-마르카지(중앙보안군)를 비롯한 다양한 보안·정보 기관들을 운영했다.6 이것은 사실, 1950년대와 1960년대 이집트에서 사용됐던 방식이다. 당시 가말 압델 나세르의 급진 민족주의에 매혹된 스탈린주의 경향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공산당을 해산하고 정부 고위직 인사로 취임했고, 노동운동 지도자들도 어용 노조로 흡수됐다. 1970년대 안와르 사다트 정권도 포섭 정책을 폈는데, 나세르가 만든 획일적인 유일 정당인 아랍사회주의연합ASU을 개혁해서 주요 야당 집단들이 ASU 안에서 ‘의견그룹platform’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했다. 그래서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인 와프드당과 공산당 잔존 세력과 나세르주의 조직 등이 독자적인 정치 경향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은 제한적이었다. ‘의견그룹’들은 사무실을 열고 간행물을 발간했지만, 공개적으로 조직하는 것은 금지됐기 때문에 사실상 당원 없는 정당에 불과했다. 무바라크는 임기 내내 이런 제한을 바꾸지 않았다. 국민진보연합당(흔히 ‘알-타감무’ 7 로 알려진)의 지도자 리파트 알-사이드는 정권의 승인을 얻은 정당들은 “이집트 정치에서 대표성도 없고, 이집트 국민에게 인기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8 어느 정당도 “진정한 의미의 정당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의 표면 위를 떠도는 개인들의 모임일 뿐이다.” 9
많은 학자들은 무바라크 정권의 교묘한 매수 공작이 야당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평가한다. 예컨대, 마예 카셈은 무바라크가 “공포와 보상”을 혼용해 야당, 노조, 전문직 단체를 포섭했다고 주장했다. 그 덕분에 무바라크는 오랫동안 큰 정치 위기 없이 임기를 연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대다수 권위주의 국가들에서는, 공식 기구들이 정권의 분신 구실을 하거나 정권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포섭 정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게 줄어든다.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가 모든 공식 정치 영역을 강력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가장 온순한 야당 활동가들조차 의미 있는 정치적 의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박탈당했고 선거에서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도 없었다. 선거 때마다 소요 진압 경찰들이 투표소를 포위한 채 관리들이 부정선거를 저지르도록 보호했고, 이 관리들의 주된 임무는 집권당 후보가 최대한 많은 표를 얻게 하는 것이었다. 2010년 11월 총선 당시 〈알아흐람 위클리〉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동영상들을 보면, 사람들이 투표함에 용지를 맘대로 넣고, 투표함을 맘대로 개봉하거나 파괴하고, 심지어 불을 붙이기도 한다. 독립적 감시 기구들의 보고서를 보면, 이집트 전역의 수십 개 선거구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으로 아홉 명이 죽었다.무바라크의 관료들이 선거 결과를 미리 정해 놓은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2010년 11월 선거 직전에 국회(하원)의장은 무슬림형제단 의원들에게 그들이 선거에서 다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선거 1차 투표에서는 예상대로 무슬림형제단 후보들이 모두 낙선했고, 무슬림형제단은 분노했지만 무기력하게 물러섰다.
12 무슬림형제단은 불법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로 잘 알려진 사람들을 ‘무소속’ 후보로 출마시킬 수는 있었다. 그와 동시에 무슬림형제단은 무바라크가 정한 규칙을 순순히 따르면서 많은 회원에게 집단적 공개 활동을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을 계속 탄압했고 활동가 수천 명을 체포·구속했다. 최근에 무바라크는 무슬림형제단에서 가장 존경받는 원로 지도자들을 수감하는 등 무슬림형제단을 공공연하게 모욕했다.
기존 야당 조직들 중에서는 오직 무슬림형제단만이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유지했다. 1920년대 창립된 무슬림형제단은 반식민지 투쟁과 초기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에서 (일관되지는 않았지만) 주도적 구실을 했다. 나세르 치하에서 억눌렸던 무슬림형제단은 사다트 정부 시절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다른 정치적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대중 조직으로 빠르게 성장했다.13 그래서 최근의 한 분석 글을 보면, 무슬림형제단은 “혼란과 정치적 쇠퇴를 겪고 있고 … 구조적·이데올로기적 위기에 빠져 전례없는 내분에 휩싸여 있다”고 평가된다. 14 2009년에는 무슬림형제단 내 보수파가 지도부를 차지했다. 2009년 무슬림형제단의 신임 의장이 된 모하메드 바데이는 “폭력 배제, 점진적 개혁, 정권과 대결하지 않기 등”의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 내부 갈등과 공개 활동에서의 후퇴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청년 지지자들은 조직 활동에서 소외됐고 무바라크 정권에 도전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가 시작됐을 때 무슬림형제단의 모습은 거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운동이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무슬림형제단의 기층 회원들이 시위에 참여했고, 나중에는 경찰과 깡패들의 공격에 맞선 싸움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런 긴장은 현재 무슬림형제단 내부에서 진행 중인 날카로운 분파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집트 국가의 ‘용납 불가 정책’에 직면한 무슬림형제단은 점점 더 빠르게 정치 영역에서 후퇴했다.고문과 학대
16 이듬해 탄압이 더 심해졌고, 이집트 경찰과 군대는 카이로 빈민가에 많은 지지자를 거느린 급진 이슬람주의 조직들을 공격하려고 카이로의 임바바 지구로 진입했다. 17 ‘이집트인권단체’가 기록한 자료를 보면 경찰은 이 지역을 습격해 주민 수백 명을 집단적으로 처벌했다. 18 이슬람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확대하던 이집트 남부 도시에서도 비슷한 공격이 반복됐고, 농촌 지역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이슬람주의 활동가들을 찾는답시고 농토와 마을을 파괴했다. 전국의 경찰서에서는 고문이 광범하게 자행됐다. 그래서 휴먼라이츠워치의 가세르 압델-라제크는 심각한 학대 행위가 일상적 수사 기법이 됐다고 말했다. “고문은 하나의 문화가 됐다. … 두 세대의 경찰관들이 이슬람주의자들에게 고문을 자행했다. 정부가 허용한 데다 효과적인 것처럼 보였으므로 고문은 확산됐다.” 19 1990년대 이후 고문은 이집트 전역에서 경찰과 보안기관들의 일상적 관행이 됐다.
지난 20년 동안 무바라크는 야당 세력에 별로 양보한 것이 없었다. 정치적 대표성의 총체적 위기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오히려 정권은 탄압을 강화했다. 1991년 휴먼라이츠워치[미국에 본부가 있는 국제 인권 단체 — 옮긴이]는 이집트에서 자행되는 고문과 감금을 상세히 다룬 보고서를 발표했다. 《밀실에서Behind Closed Doors》라는 이 보고서를 보면, 안보 위협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온갖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혐의로 수감되고, 학대당하거나 고문당한다.20 수많은 이집트인이 자신이나 가족, 친구, 동료 중에 고문당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래서 특히 악명 높은 사례들을 폭로하기 위해 최근 몇 년 동안 사회관계망사이트[서로 친구를 소개해 친구 관계를 넓힐 것을 목적으로 개설된 커뮤니티형 웹사이트 — 옮긴이]에서 진행된 캠페인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2011년 2월 초 경찰과 깡패들이 카이로 곳곳에서 시위대를 공격한 배경이자 시위 참가자들이 격렬하게 저항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경찰과 보안기관들은 알-니잠(질서·체제)을 대표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삶을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만든 존재이기도 했다. [시위대가 볼 때 — 옮긴이] 타흐리르 광장 전투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경찰들에게 패배하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결국 타흐리르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 이 투쟁에 이어 사람들은 이집트 곳곳에 산재한 국가안보국 사무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경찰 기록을 압수하고 고문 기구를 찾아내고 재소자들을 석방시키려고 유치장을 수색했다.
2003년 변호사와 인권활동가들은 ‘고문에 반대하는 이집트인 연합EAAT’을 결성했다. 그들은 고문이 “내무부와 보안기관들이 채택한 억압적 정책”이 됐고 “국민을 철저히 복종시킬 목적으로, 시민들을 상대로 조직적·체계적·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평가했다.신자유주의
21 무바라크는 이집트 식 “정실 자본주의”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 “정실 자본주의”란 용어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와 세계 금융기관 들이 선호하는 용어로, 건강한 민간 기업과 국가의 이익을 구분하는 “깨끗한” 사업 방식이 따로 있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 위기 때 IMF 총재 미셸 캉드쉬는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면서 기업인과 국가 관료들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가 부패를 낳았고 결국 세계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22 그러나 노엄 촘스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역사 자체가 기업과 국가가 끈끈한 관계를 맺어 온 역사다. 23 촘스키는 근대 상업과 산업 기업의 초기 단계부터 “상인과 제조업자 들은 정부 정책의 주요 결정자였고,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든 자신의 이익을 먼저 보장받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24 독립 후 이집트 국가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 내내 나세르와 자유장교단 운동은 민간 자본이 종속적 구실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민간 기업들은 살아남았고, 오히려 국가를 이용해 특정한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
이집트 민중 운동은 이집트 지배자들의 부패와 도둑질에 책임을 묻고 싶어 한다. 무바라크는 수백억 달러를 축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미국 언론조차 부정 축재 액수가 4백억 달러에서 7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25 나세르와 그 동료들은 식민주의뿐 아니라 대중 운동 자체도 경멸한 쁘띠부르주아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그들이 정권을 잡은 뒤 처음 취한 결정적 행동은 파업을 금지하고 노동자 투사들을 처형한 것이었다. 26 그들은 농민의 자주적 행동도 비난했고, 펠라힌(농민)이 대지주의 토지를 점거하는 것도 중단시켰다. 그 대신에 그들은 엄격하게 통제되는 개혁을 추진했다. 이것은 중요한 발전이었지만 토지를 직접 통제할 권리를 얻고자 오랫동안 싸워 온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27 자유장교단은 원래 서방에 우호적이었고 유럽이나 미국과 동맹을 맺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서방이 이것을 거부하고, 기층의 강력한 압력을 받고 나서야 그들은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영국과 충돌하고 궁극적으로는 소련과 새로운 동맹을 맺게 된 전략을 선택했다.
나세르가 권력을 잡을 수 있게 해 준 1952년의 쿠데타는 영국 점령과 왕정 통치에 맞선 지속적인 투쟁의 결과였다. 혁명의 가능성이 활짝 열린 당시 상황에서 이 쿠데타는 “빗나간” 혁명의 사례이기도 했다. 급진 민족주의자들은 군대를 이용해 일부 개혁을 시행했지만 동시에 대중 운동을 통제했고 나중에는 운동의 동력 자체를 꺼뜨렸다. 1956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나세르는 중동 전역에서 반식민지 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급진적 정서와 특히 범아랍주의의 초점이 됐고, 팔레스타인인들은 그가 이스라엘에 맞서기를 바랐다. 그 다음 10년 동안 그는 대다수 외국자본을 국유화했고, 보편적 교육과 보건 서비스를 제공하고 식량 안보가 보장되는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나세르는 국가가 경제를 통제해서 이집트에 강력한 자본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민간 자본의 활동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많은 중소기업과 강력한 지주 세력들이 살아남았다. 1960년대 말 경제가 갈수록 불안정해지자 나세르는 이들의 활동을 고무했다. 새로운 군대 엘리트와 고위 국가 관료 들은 민간 자본과 공생했고 이집트의 국가자본주의는 혼성적 형태였다. 말라크 잘루크는 민간 자본이 “국가 부르주아지” 안에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이런 상황은 사다트 정권에서 일어난 변화의 초석이 됐다. 사다트는 1974년부터 나세르식 국가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사다트의 인피타(개방) 정책은 민간 투자를 고무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이집트를 소련식 모델에서 미국식 시장 모델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민간 지주와 상업 자본 들을 기반 삼아 무역업자, 중개인, 자산 투기꾼 들이 번창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1970년대 말 나타난 “갑부들”의 탐욕과 과시적 소비 행태를 보면서 많은 이집트인이 분노했다. 1981년 권력을 잡은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전략을 계승했고 오히려 변화의 속도를 조금씩 높였다. 이집트는 이제 미국의 굳건한 동맹이 됐고, 세계은행과 IMF의 주류로 득세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신봉했다(무바라크는 세계은행과 IMF에서 거듭거듭 돈을 빌렸다). 그러나 이런 국제 기구들은 인피타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고 식량 보조금과 무역 장벽을 대폭 낮추고 국영 기업을 대거 사유화하라고 요구했다. 무바라크는 곧 그들의 조언을 수용했고 1991년 경제 개혁과 구조조정 프로그램Ersap을 시작했다. 멕시코가 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로 말미암은 변화의 물결에 휩쓸렸듯이, 이제 이집트도 급속한 시장 개혁의 실험실이 됐다. 무바라크 정부는 국영 기업을 매각할 준비를 했고 나세르 시대의 토지 개혁을 파기하고, 펠라힌이 50년 동안 경작한 토지 수백만 헥타르를 식민지 시대의 지주(와 그 가족들)에게 반환해 줬다. 이런 정책의 대가로 무바라크는 외채를 빌릴 수 있었고, 국제 채권자 모임인 파리클럽은 이집트의 외채를 거의 3백억 파운드나 탕감해 줬다.
29 사실, 이 범주들을 서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집트 국가자본주의는 오랫동안 민간 부문을 육성했고, 민간 부문은 많은 공공 사업에 진출했다. 이미 부동산과 상업과 농업에 뛰어든 고위 국가 관료들이 많았다. 이제 그들은 산업에도 진출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이집트로 진출한 외국 기업과 거래했다. 외국 기업들은 이 관료들이 가진 영향력이 필요했다. 나세르 시대의 유산인 개발 국가의 잔재를 청산하고 이집트를 세계시장에 개방시키겠다는 두 가지 신념으로 똘똘 뭉친 미국 정부와 세계은행과 IMF 관료들은 이 모든 과정을 감독했다. 만약 무바라크 패거리가 “정실 자본주의의 원흉들”이었다면, 그들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핵심 세력으로서 그렇게 했다.
클레먼트 헨리와 로버트 스프링보그는 1990년대 중반쯤 이집트는 “빽 있는 자, 장교, 관료, 공공 부문 경영자 들의 네트워크”가 지배하고 있었다고 논평했다.불평등
30 그 원조의 많은 부분은 미국산 첨단 무기를 구입하는 데 쓰였지만, 이집트 국가는 그 무기와 군대로 외세 열강에 맞서 싸우지는 않았다(이집트 군대가 미군을 지원해서 페르시아만에 잠시 주둔한 적은 있었다). 제복 입은 국가기구, 즉 군대와 전투경찰paramilitary police은 약 1백만 명까지 늘어났다(민사행정경찰과 보안경찰은 포함하지 않은 수다). 31 장교들은 현대식 주택 입주 보조금, 비교적 높은 연금 액수, 전용 사교 클럽이나 호화 해수욕장 이용권 등 온갖 종류의 특혜를 누렸다. 그들은 정권 안보에 필수적인 존재였지만, 그 정권은 이제 모순에 직면했다. 그 모순은 무바라크가 정권 내부의 지지자들에게 막대한 부를 나눠 주며 사회 전반의 불평등을 전례 없이 심화시킨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무바라크는 나세르에게 물려받은 국가기구를 강화하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그는 미국의 막대한 경제·군사 원조도 받았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이 이집트에 제공한 원조 금액은 연평균 21억 달러였는데, 이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제공한 원조 다음으로 많은 액수였다.32 무바라크 정권이 신자유주의에 헌신하는 것을 보며 박수쳤던 다른 사람들도 그런 변화의 결과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코노미스트〉는 불만이 급격히 증대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신흥 졸부들의 과시욕이 사회를 어지럽힌다며 그들을 “새로운 파라오”라고 불렀다. 33 이집트 경제는 1990년대 말 이후 엄청난 자산 호황을 누렸는데, 페르시아만 연안국들에서 ‘핫머니’가 유입돼 주로 카이로 외곽의 사막 근처에 부유층을 위한 신규 주택단지들이 건설됐다. 또,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가, 쇼핑몰, 초대형 슈퍼마켓, 멀티플렉스 영화관, 사립 대학교 등도 새로 건설됐다. 외부인 출입 제한 지역들은 캘리포니아식 생활을 꿈꾸는 신흥 졸부나 그들과 연관된 다국적 자본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었다.
심지어 세계은행조차 이집트의 ‘중간’ 빈곤층이 크게 늘어 2005년에 인구의 20퍼센트인 약 1천5백만 명을 기록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레이크사이드Lakeside, 드림랜드Dreamland, 유토피아Utopia 등은 민간 경비업체들과, 궁극적으로는 중앙보안군으로 징집된 농민과 도시 빈민이 지켜 주는 부유층 거주 지역이다. 아흐메드 바가트(드림랜드를 건설한 건축업자) 같은 부동산 재벌들에게 헐값에 팔린 국유지에 조성된 이 부유층 거주지들은 고속도로를 통해 컨트리클럽이나 해안가 리조트와 바로 연결된다. 그래서 부자들은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의 번잡한 도심이나 도시 외곽의 난개발 지역을 통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곳에는 생존의 벼랑 끝에서 불안정하게 생활하면서, 이제 특권을 과시하는 정권에 점차 분개하는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34 2003년 카이로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략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도시 한복판을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타흐리르 인티파다’는 2011년 혁명의 예행연습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활동가들은 이듬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일련의 운동들을 시작했다. 집회를 조직하고, 로비 활동을 하고, 행진을 벌이고, 이메일 네트워크와 사회관계망사이트를 이용한 ‘플래시몹’[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행사나 놀이를 하고 나서 금방 사라지는 것 — 옮긴이] 시위 등을 펼쳤다. 워낙 느닷없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런 곳에는 경찰이 없는 경우가 흔했고, 그래서 거의 60년 만에 처음으로 반정부 시위들이 경찰의 방해를 받지 않고 꽤 오랫동안 벌어질 수 있었다. 비록 시위 참가자 수는 적었지만 자신감은 꾸준히 커졌고, 이런 자신감이 작업장 투쟁에도 반영돼 이제 모든 산업 부문에서 투쟁이 벌어졌다. 2005년에는 집단적 노동쟁의가 2백2건 일어났고, 2006년에는 2백22건으로 늘어나더니 2007년에는 6백14건까지 증가했다. 35 그 중에는 마할라 알 쿠브라 방직 공장에서 일어난 파업도 있었다. 그것은 20여 년 만의 가장 중요한 장기 파업이었는데, 핵심 요구들을 모두 쟁취하면서 다른 노동자들에게 파업 허가 신호 구실을 했다. 파업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정권은 노동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를 주저했다. 정부 각료들은 여느 때처럼 위협적 언사를 늘어놓았지만, 한편으로는 양보안도 제시하는 등 파업 노동자들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바라면서 작업장에서의 정면 충돌을 회피했다. 대담해진 노동자들은 온갖 종류의 항의 운동에 참여했다. 대학생들의 학내 권리를 지지하고, 식량과 식수 부족에 항의하고, 토지 강탈에 반대하고, (건물 붕괴 사고가 잇따르자) 처참한 주거 환경을 비판하고, 경찰의 만행을 규탄했다.
2000년부터 민사행정경찰과 소요 진압 경찰은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시위에 점차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런 시위는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지지하는 광범한 행동들과 함께 시작됐다. 라밥 엘 마흐디는 이런 시위 참가자들이 새로운 영역(국가가 봉쇄하기 힘들다는 것이 입증된 점점 더 대담한 공개 활동들)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 ‘시위 주기’의 발전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사회 전체에서 자주적 활동을 벌일 자신감이 꾸준히 커지고 있었다. 이때 세계경제 위기가 닥쳤다. 필연적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식료품과 연료 가격이 폭등했다.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밀가루가 턱없이 부족해졌다. 빵집 앞에서 빵을 구하려고 서로 다투다가 사람을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권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산업 투쟁에 정면 대응하는 것은 꺼리면서도 민주화 운동가들, 지역사회 활동가들, 기자들, 블로거들은 더 야만적으로 탄압했다. 2010년 11월 총선에서 정권은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2011년 1월 튀니지 혁명으로 벤 알리가 쫓겨난 후, 이집트 사회의 다양한 부문이 단결하고 온갖 투쟁들이 하나로 합쳐지자 마침내 댐이 무너졌다.
제2막
혁명의 첫 번째 국면을 열어젖힌 것은 청년·학생·노동자·빈민의 민중 운동이었다. 사람들은 난생 처음으로 집단적 힘을 경험했고, [생활수준의 — 옮긴이] 전반적 개선을 위해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수단도 발견했다. 그런 개선은 쉽게 이룰 수 없을 것이고,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독재자를 제거했고, 이제 대다수 사람들은 독재 정권도 제거하고 싶어 한다. 비상계엄 해제, 자유 선거, 정당 건설과 단체 결성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 개혁, 국가기구의 인권 유린 근절이 보편적 요구다. 명목상으로는 군부가 권력을 쥐고 있다. 지금까지는 군부가 대통령을 제거한 운동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상계엄 해제 등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도 않았다. 수많은 단체와 개인이 앞으로 벌어질 투쟁들에 대비해서 저마다 입지를 다지고 있다. 무바라크가 임명한 각료들과, 고분고분한 와프드당의 사무총장을 비롯한 합법 야당 인사들로 내각이 구성되고 있다. 높은 자리를 꿰차고 싶어하는 자들 중에는 자칭 현인賢人위원회(무바라크 체제의 대안 모델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학자, 변호사, 기업인 등의 모임)의 위원들도 있다. 현인위원회의 일원인 드림랜드의 아흐메드 바가트(유력 TV 방송사 〈드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와 통신 재벌이자 중동 최고의 갑부 축에 드는 나기브 사위리스는 그동안 정권의 부패에 시달린 것이 끔찍하다고 떠들어 댄다. 사위리스는 양심에 거리낄 게 없는 자본가라면 부패 혐의로 조사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직[원문 그대로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만이 걱정할 것이다. … 나 같은 사람은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 조국에 어떤 식으로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도울 것이다.”
그의 낙관론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을지 모른다. 이집트 전역에서 정화 과정이 진행 중이다. 이미 내무장관 아들리, 발타기야의 공격에 연루된 카이로의 경찰서장들 같은 고위 인사 몇 명이 날아갔고, 지방 관리들이 군대에 체포됐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억압적인 관리자들과 어용 노조 간부들을 해임하고, 국유 기업 사유화 과정에서 돈을 챙긴 기업주들을 조사하고, 그런 기업들을 재국유화하라고 요구했다. 2월 중순 다양한 산업 부문의 파업 투쟁 지도자 40명이 모여서 요구들을 조정하고 독립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출범시켰다. 그들은 “혁명, 자유, 사회정의”라는 구호 아래 다음과 같은 “노동자 강령”을 제시했다.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를 통합해서 그것이 우리 혁명의 필수적인 목표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 혁명은 이집트 민중이 일으켰고, 이 혁명을 위해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 이 혁명의 사회적 성격을 재확인하고 근본적으로 혁명의 수혜자여야 할 사람들의 손에서 혁명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정당한 요구들을 종합한 [강령을 제시한다 — 옮긴이].
38 혁명적 사회주의자 단체는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결합시킬 혁명적 평의회를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이 노동운동의 효과가 향후 혁명 과정에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단체가 2011년 2월 6일 발표한 성명에서 주장했듯이 “그동안 … 집회와 시위가 핵심 구실을 했다. 이제는 노동자들이 나서야 한다.”혁명은 항상 길고 복잡한 과정이다. 이집트 혁명과 현저하게 비슷한 점이 몇 가지 있는 이란 혁명에서도 1976년에 시작된 시위의 효과가 온전히 나타나 팔레비 정권이 무너지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학생 운동, 바자[시장 거리 — 옮긴이]의 쁘띠부르주아지, 종교계 지배층, 소수민족, 농민 등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장기간의 대중 파업으로 샤[국왕 — 옮긴이]가 쫓겨났다. 이런 투쟁 과정에서 각종 지역위원회와 작업장 조직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조직들이 생겨났고, 그 중 일부는 노동자 평의회의 맹아 같은 성격도 띠었지만 나중에 아야툴라[시아파의 고위 성직자 칭호 — 옮긴이] 호메이니의 공격을 받고 해산됐다. 이집트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처음에 민주화 요구로 시작된 운동이 더한층의 급진적 변화 가능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했으니 말이다. 즉, 투쟁을 일반화해서 무바라크 시절의 불평등, 공장과 토지를 비롯한 사회적 자원의 소유권, 국가 자체가 휘두르는 권력의 문제를 다뤄야 하게 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등장은 이집트 혁명이 정말로 더 광범한 역사적 변화를 향한 운동으로 “성장·전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다시 말해, 세계적 함의가 있는 연속혁명 과정이 진행 중인 것이다.
〈부록 1〉 독립적인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성명서
2011년 2월 19일 카이로
혁명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요구
혁명, 자유, 사회정의오, 1월 25일 혁명의 영웅들이여! 지금 이집트 전역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점거·시위를 벌이고 있는 다양한 작업장에서 모인 우리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원들은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를 통합해서 그것이 우리 혁명의 필수적인 목표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 혁명은 이집트 민중이 일으켰고, 이 혁명을 위해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혁명의 사회적 성격을 재확인하고 근본적으로 혁명의 수혜자여야 할 사람들의 손에서 혁명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정당한 요구들을 종합한 노동자 강령을 여러분에게 제시한다.
우리가 1월 25일 혁명 전에 제기했고 이 영광스러운 혁명의 서곡에 포함된 노동자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1. 혁명의 산물인 사회정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최저임금과 연금을 인상하고, 최고임금과 최저임금의 차이가 15배가 넘지 않도록 그 격차를 좁힐 것. 실업급여를 지급하고, 물가 인상분만큼 임금도 정기적으로 인상할 것.
2. 독립적인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무조건·무제한 보장하고, 노동조합과 노조 지도자들을 보호할 것.
3. 육체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 농민, 전문직 종사자에게 고용 안정을 보장하고 해고 방지 장치를 마련할 것.
4.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해고된 노동자들을 복직시킬 것. 비정규직 채용 허용 사유를 모두 폐지할 것.
5.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켜 헐값에 매각하기 위해 낙하산으로 임명된 부패한 경영자들을 모조리 해임할 것.
고용 기회를 청년들에게 개방하기 위해, 퇴직 연령이 지났으면서도 국민소득 30억 [이집트]파운드를 까먹고 있는 자문위원 채용을 제한할 것.
물가를 낮게 유지하고 빈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복귀할 것.
6. 실패한 정권의 잔당에 맞서, 그리고 기업 경영을 악화시켜 헐값에 매각하기 위해 임명된 경영자들에 맞서 지금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포함해 모든 이집트 노동자들에게 파업, 농성, 평화적 시위 권리를 보장할 것. 이 혁명이 부의 공정한 분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 사회적 자유가 없는 자유는 온전한 자유가 아니다. 입에 풀칠할 권리가 선거권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7. 보건의료는 생산 증대의 필수 조건이다.
8. 고장난 체제의 가장 부패한 기구 중 하나인 이집트 노총을 해체할 것. 부정 비리를 저지른 노총 인사들을 사법 처리하고, 노총의 금융 자산을 몰수하고 문서를 압수할 것. 노총 본부와 산하 노조 지도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의 범죄 혐의를 수사할 것.
〈부록 2〉 이집트 혁명적 사회주의자 단체의 성명서
2011년 2월 6일 카이로
순교자들에게 영광을! 혁명에 승리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우리 나라와 아랍 세계 전체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민중 혁명이다. 우리 혁명은 순교자들의 희생 위에 건설됐고 우리는 두려움의 벽을 모두 깨뜨렸다. 우리는 범죄를 저지른 ‘지도자들’과 그들의 범죄적 체제가 분쇄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무바라크 하야는 혁명의 종결이 아니라 첫걸음이다
오마르 술레이만, 아흐메드 샤피크를 비롯한 무바라크 측근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은 똑같은 체제의 연장일 뿐이다. 오마르 술레이만은 친이스라엘·친미 인사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워싱턴과 텔아비브를 왔다 갔다 하면서 보낸다. 술레이만은 또,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떠받드는 하인이다. 아흐메드 샤피크는 무바라크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로서 이집트 민중에게 폭정과 억압을 강요하고 이집트 민중을 수탈해 온 자다.
이집트의 부富는 민중의 것이므로 민중에게 되돌려 줘야 한다
지난 30년 넘게 이 폭압 정권은 이집트의 막대한 재산을 극소수의 기업주와 외국 기업에 나눠 주었다. 1백대 가문이 이집트 부의 90퍼센트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이 사유화 정책, 권력 남용, 자본과의 동맹을 통해 이집트 민중의 부를 독점하고 있다. 그들은 이집트 민중의 다수를 빈민, 무토지 농민, 실업자로 만들어 버렸다.
파산해서 헐값에 매각된 공장들을 민중에게 되돌려 줘야 한다
우리는 이 자들에게 약탈당한 기업·토지·자산의 국유화를 원한다. 우리의 자원이 그들의 수중에 있는 한은 우리는 이 체제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적 노예 상태는 정치적 폭압의 다른 얼굴이다. 이 패거리들한테서 민중의 재산을 되찾아 오지 못하면 우리는 실업에 대처할 수도 없고 그런대로 괜찮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적정한 최저임금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경비견 노릇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 체제는 혼자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독재자 무바라크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는 하수인이고 똘마니다. 이집트는 미국의 식민지 노릇을 하면서 팔레스타인 봉쇄에 직접 가담했고, 군함과 전투기들이 수에즈 운하와 이집트 영공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허용해서 그들이 이라크 민중을 살해하고 이스라엘에 아주 싸게 석유를 공급하도록 해 주었고, 그러면서도 물가를 급등시켜 이집트 민중의 목을 조르고 있다. 혁명은 이집트의 독립성과 존엄성, 중동 지역에서의 지도력을 복원해야 한다.
이 혁명은 민중 혁명이다
이집트 혁명은 엘리트들, 정당들, 종교 단체들의 혁명이 아니다. 이집트의 청년, 학생, 노동자, 빈민이 이 혁명의 주인이다. 지난 며칠 동안 많은 엘리트, 정당, 이른바 상징적 인물들이 혁명의 물결에 올라타서 혁명의 정당한 주인들한테서 혁명을 가로채 가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우리 혁명의 상징적 인물들은 오직 혁명의 순교자들과 변함없이 투쟁 현장을 지킨 청년들뿐이다. 우리는 저들이 우리 혁명을 통제하면서 우리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체제를 구하려는 자들에게 살해당하고 피의 희생을 치른 순교자들과 우리를 대변할 사람들을 우리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민중의 군대는 혁명을 보호하는 군대다
모든 사람이 묻는다. “군대는 민중의 편인가 아니면 반대편인가?” 군대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사병과 하급 장교의 이해관계는 대중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 그러나 고위 장교들은 무바라크의 부하들로서, 부패하고 부유하고 폭압적인 무바라크 정권을 지키도록 신중하게 선발된 자들이다. 그들은 이 체제의 필수적 일부다.
이집트 군대는 더는 민중의 군대가 아니다. 이 군대는 1973년 10월 전쟁 때 시온주의 적들을 물리친 군대와 다르다. 이 군대는 미국·이스라엘과 결탁해서, 이집트 민중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사병들을 설득해서 혁명의 편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군대는 우리 편”이라는 구호에 속아서는 안 된다. 군대는 시위대를 직접 탄압하거나 아니면 경찰 조직을 재편해서 시위대를 탄압하게 할 것이다.
혁명적 평의회 건설이 시급하다
이 혁명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여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집트인들이 경찰에 맞서 이렇게 용감하게 싸울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독재자를 물러서게 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변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경제적 요구들을 우리 요구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민중위원회로 조직해야 한다. 그러면 민중위원회들은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상위 기구인 평의회를 선출해야 한다. 이 평의회들은 모든 경향의 대표자들을 포함하는 더 높은 평의회를 선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대변하고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평의회를 선출해야 한다. 우리는 타흐리르 광장과 이집트의 모든 도시에서 민중평의회들을 구성할 것을 호소한다.
이집트 노동자들에게 혁명의 대열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그동안 집회와 시위가 우리 혁명을 촉발하고 지속하는 데서 핵심 구실을 했다. 이제는 노동자들이 나서야 한다. 노동자들은 정권의 운명을 끝장낼 수 있다. 노동자들은 시위에 참여할 뿐 아니라 모든 필수 산업과 대규모 기업체에서 총파업을 조직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정권은 농성자나 시위대가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며칠이든, 몇 주든 버틸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파업을 무기로 사용하면 몇 시간도 버틸 수 없다. 철도에서, 대중교통에서, 공항에서, 대규모 산업체에서 파업을 시작하자! 이집트 노동자들이여! 반란을 일으킨 청년들을 위해서, 우리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혁명의 대열에 동참하고 여러분의 힘을 사용해서 승리를 우리 것으로 만들자!
순교자들에게 영광을! 체제를 타도하자! 모든 권력을 민중에게! 혁명에 승리를!
주
-
출처: Philip Marfleet, ‘Act One of the Egyptian Revol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30(Spring 2011).
↩
- Fisk, 2011. ↩
- Fisk, 2011. ↩
- 2월 12일 Arabawy 블로그에 실린 ‘수에즈 파업들’을 보시오. http://www.arabawy.org/2011/02/12/jan25-suez-strikes-egyworkers ↩
- Afify, 2011. ↩
- 마바히스 암 알-다울라(국가안보조사국), 지하즈 암 알-다울라(국가보안국), 무카바라트 알-아마(정보안보총국), 무카바라트 알-하르베야(군사정보국), 지하즈 알-암 알-카우미(국민보안국). ↩
- Kassem, 2004, p7. ↩
- 타감무에는 옛 공산당 인사들도 포함돼 있다. 공산당은 1964년 나세르가 이집트에서 혁명 과업을 완수했다고 주장하며 자진 해산했다. ↩
- Hussein, Al-Said와 Al-Sayyid, 1999, p77. ↩
- Hussein, Al-Said와 Al-Sayyid, 1999, p77. ↩
- Howeidy, 2010. ↩
-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적 활동가와 인터뷰. 2011년 1월 카이로. ↩
- 무슬림형제단의 모순적 성격에 관한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는 Naguib, 2009를 보시오.[《마르크스21》 이번 호에 실린 사메 나기브의 ‘이슬람주의의 과거와 현재’ ― M21] ↩
- Howeidy, 2010. ↩
- El-Enani, 2010. ↩
- El-Enani, 2010. ↩
- Human Rights Watch, 1992, p128. ↩
- 이 공격의 목표는 무슬림형제단과 달리 정권과 타협하지 않은 이슬람주의 지하조직인 이슬람 지하드와 가마트 이슬라미야(이슬람협회) 회원들이었다. ↩
- Report of the Egyptian Organisation for Human Rights, Lorenz 1993에서 재인용. ↩
- Murphy, 2007. ↩
- EAAT, 2003. ↩
- Raghavan, 2011. The Week, 2011도 보시오. ↩
- 예컨대, 1998년 연설에서 그는 “정실 자본주의”를 “소유 구조가 투명하지 않고 규제가 부적당할 뿐 아니라 불균등하게 적용되고, 너무 많은 결정이 자의적으로 내려지고, 시장이 정상적인 규제자 구실을 하지 못해 심각한 불균형과 치명적인 비효율성이 누적된” 결과로 설명했다. Camdessus, 1998. ↩
- Chomsky, 2008. ↩
- Chomsky, 2008. ↩
- 이 시기 중요한 변화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는 Marfleet, 2009를 보시오. ↩
- 1952년 8월 카프르 알-다와르의 미스르 방직 공장에서 소요를 선동한 죄로 무스타파 카미스와 무하메드 하산 알-바카리가 처형됐다. ↩
- Bush, 2009를 보시오. Abdel-Fadil, 1975, 1980와 Baker, 1978도 보시오. ↩
- Zaalouk, 1989, p41. ↩
- Henry and Springborg, 2001, p155. ↩
- Sharp, 2007 pp27-9. ↩
- 육군·공군·해군·중앙보안군을 합친 수. IISS, 2007, p223. ↩
- World Bank, 2007. 이렇게 낮춰 잡은 수치로는 진정한 빈곤 수준과 궁핍화 증가 속도를 파악할 수 없다. El-Naggar, 2009를 보시오. ↩
- Economist, 2005. ↩
- El-Mahdi, 2009.[《마르크스21》 이번 호에 실린 라밥 엘 마흐디의 ‘이집트 민주화 운동’ ― M21] ↩
- Beinin, 2009, p79에 인용된 Land Centre for Human Rights의 수치. ↩
- Stier, 2011. ↩
- 성명서 전문은 부록 1을 보시오. ↩
- 성명서 전문은 부록 2를 보시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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