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독재 정권의 무덤을 판 사람들 *
이집트 혁명이 일어난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혁명의 속도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른 만큼 혁명에 대한 규정도 매우 다양하다. 서방 언론들은 이집트 혁명을 “색깔 혁명”으로 묘사한다. 즉, 지도자 없는 “민중 권력” 운동의 기분 좋은 사례라는 것이다. 기만적인 미국 신보수주의자들 상당수는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이 무력으로 중동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려 했던 조지 W 부시의 노력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본다. <스트랫포>의 군사 평론가들과 <BBC>의 다수 선임 기자들은 이집트 혁명을 구식 군사 쿠데타로 본다. 이집트 혁명을 인터넷이 주도한 항쟁으로 봐야 한다거나 사악한 이슬람주의 음모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 글의 관점은 다르다. 나는 아래로부터 사회를 해방시킬 수 있는 힘이 조직 노동계급에게 있다는 것을 이집트 혁명이 보여 준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일은 반세기 넘도록 아랍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바라크가 퇴진하기 며칠 전 파업이 이집트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지면서 갑자기 노동자들의 힘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러나 이집트 국가에 균열을 내고 항쟁이 일어날 조건을 창출한 것은 국내외 경제 상황의 변화라는 더 깊고도 장기적인 과정이었다. 특히, 호스니 무바라크의 아들 가말과 그 일당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개혁이 세계경제 위기의 충격과 서로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 노동자들과 정권이 물질적·이데올로기적으로 갈라서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혁명의 첫 단계(1848년 혁명이나 1917년 2월 러시아를 연상시키는 규모로 일어난 18일간의 대중 시위)는 이집트 “저항 문화”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 “저항 문화”는 지난 10년 동안 민중이 거리에서 국가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성장해 나온 것이다. 서방 언론과 버락 오바마의 참모들은 “안정적인” 동맹국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대중적 분노에 놀랐겠지만, 2000년 이래 벌어진 저항 운동들(팔레스타인 지지 운동,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민주적 개헌 운동,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권리 쟁취 운동, 경찰의 고문에 반대하는 운동 등)의 흐름을 지켜 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항쟁 자체의 동역학을 분석해 보면, 1월 25일 혁명은 정치적 요구들과 경제적 요구들을 제각각 합쳐 놓은 것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과 그것이 국가에 미치는 압력으로 말미암아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관계가 변했고 더 긴밀해졌다. 무바라크의 마지막 며칠 사이에 마침내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노동자들이 국가에 대항해 사회적 힘을 사용한 것, 특히 2월 8일 분출한 파업 물결이었다. 무바라크가 권좌에서 쫓겨난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거리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혁명이 더 진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미 그 가능성은 독재자가 물러난 다음주에 분출한 파업 물결에서 힐끗 드러났다.
국가의 균열
1952년 권력을 잡고 왕정을 타도한 하급 장교들은 이집트에 국가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놓았다. 가말 압델 나세르 치하에서 그들은 국가의 재원을 중공업에 투입했고, 수에즈 운하를 통제해 아스완 하이 댐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고, 제조업을 육성해 국내시장에 물품을 공급했다.
이런 경제 전략은 노동자·농민을 국가에 결속시킬 수 있는 정치 기구를 창출하는 것으로 연결됐다. 노동자들은 정치적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주택 보조금, 교육 등의 복지 혜택, 상대적 고용 안정을 보장받았다. 나세르의 미사여구는 특히 집권 말기로 갈수록 국가 발전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여를 찬양하며 노동자들을 이상화했다. 그러나 나세르의 국가는 독립적 노동자 조직들을 분쇄했고 그 자리에 정부에 순종하는 공식 노조 연맹을 설립했다.
나세르와 그 동료들이 이런 경제 발전 전략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준 조건은 1960년대 말에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각국 지배계급들이 국가 주도 발전 방식이 아닌 대안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0년 나세르가 죽은 뒤, 그 후임자인 안와르 사다트는 소련과 결별하고 1970년대 말 미국과 새로운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사다트는 국제 금융기관들의 차관을 얻으려고 “경제 개방(인피타)” 정책을 추진했다.
무바라크가 집권하고 나서도 인피타 과정은 지속되고 심화했으며, 1991년 걸프 전쟁이 끝난 뒤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도입됐다. 국가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 비율이 1981~82년 40퍼센트에서 2004~05년 32퍼센트로 줄었다. 그러나 이 수치에는 실업 증가, 고용 불안 심화, 대규모 복지 삭감이라는 더 극적인 사실들이 숨어 있다. 고용계약을 체결한 노동자 비율은 1998년부터 2006년 사이에 61.7퍼센트에서 42퍼센트로 떨어졌고, 같은 기간에 사회보장제도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 비율은 54.1퍼센트에서 42.3퍼센트로 떨어졌다.
나세르가 구축한 정치체제는, 사다트와 무바라크가 어설프게 손보기는 했지만 나세르가 죽은 뒤에도 수십 년을 존속했다. 나세르의 후임자들은 가짜 “야당들”이 (허약하고 집권당에 굴종하는 한해서) 존재할 수 있게 허용했지만, 그렇다고 정치체제의 기초가 근본에서 변하지는 않았다. 2011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집트에는 두 종류의 선거권이 있었는데, 노동자·농민이 선출하는 국회[하원 ― 옮긴이]의원 후보자 명부와 중간계급 “전문직들”이 선출하는 후보자 명부가 서로 달랐다. 국가가 통제하는 노동조합연맹은 작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국익의 범위 안에 묶어 두는 사회적 통제 기구였을 뿐 아니라, 친정부 유권자들을 투표소로 동원하고 노동자 대중을 무바라크와 그 일당의 박수 부대로 전락시키는 거대한 선거 기구이기도 했다.
이데올로기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세르주의의 유산은 그 창시자보다 수십 년을 더 존속했다. 노동자들이 국가 주도 발전 목표를 지지하는 현상은 심지어 계급투쟁이 첨예할 때조차 나타났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때때로 분출했다. 예를 들어, 1984년 마할라 알 쿠브라, 1989년 헬완 철강 공장, 1994년 카르프 알 다와르에서 그랬다. 그러나 그때조차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고 생산을 중단시키기보다는 대체로 “생산 관리 투쟁work-in”[노동자들이 사측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공장 설비나 자재를 직접 관리하는 노동쟁의 방식 ― 옮긴이]을 선택했다. 이런 행동은 노동자들이 지도자들과는 달리 여전히 “국가”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돼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래 시행된 개혁으로 말미암아 나세르주의 체제는 여러 수준에서 균열을 일으켰다. 사유화 탓에 수많은 노동자가 국가 부문에서 퇴출됐고 노동자들이 받던 보너스와 작업장에 기반을 둔 복지 혜택들이 주주들의 은행 계좌로 흘러들어갔다. 국가가 통제하는 노동조합연맹은 노동자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통로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자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갔다. 노동조합연맹은 계속해서 유권자들이 집권당에 투표하도록 동원했고 아래로부터 저항을 건설하려는 노동자들을 괴롭히거나 위협했지만, 전국의 많은 곳에서 노동조합연맹의 조직 구조는 “장부상 조합원”과 자기 잇속만 챙기는 소수 관료들만 남은 껍데기가 됐다.
2006년 말 마할라 알 쿠브라의 미스르 방직 공장에서 노동자 2만 5천 명이 벌인 파업이 노동자 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노동자 투쟁의 물결이 지속되면서 파업은 이 부문에서 저 부문으로 급속히 확산됐고 그 중 일부, 특히 마할라의 방직 노동자들과 세무 공무원들의 파업은 분명히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그들은 독립 노조 결성권 보장과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생산 관리 투쟁이 아니라 파업을 무기로 사용하는 사례가 확산된 것을 보면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발전이 단지 국내적 요인들의 결과가 아니라 국제적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 세계의 다양한 국가자본주의 정권들이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도 한몫했다. 단기적으로 보면 특히 세계적 식료품 가격 인상이 중요한 구실을 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심지어는 세계경제 위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생계비 급등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벌어졌다.
독재 정권의 벽에 뚫린 구멍들
2006년에 파업 물결이 분출했을 때의 상황은 이미 민중의 저항으로 그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비록 1월 25일 혁명에 참가한 수많은 시위대에 견주면 2000년 말의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이후 거리 시위 참가자 수는 비교적 적었지만, 그 거리 시위들은 이집트의 정치 지형이 현격히 바뀌었음을 보여 주었다. 진정으로 중요한 첫 번째 도약은 2003년에 있었는데, 당시 시위대 수만 명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해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을 점거했다. 한 이집트 사회주의 활동가는 이것을 두고 “독재 정권의 벽에 구멍”이 뚫렸다고 썼다.
그 뒤 몇 년 동안 독재 정권에는 더 많은 구멍이 뚫렸다. 2005년 급진 나세르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이 결성한 느슨한 연대체(무슬림형제단의 일부도 지지했다)가 무바라크의 대통령 선거 재출마와 권력 세습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거리의 저항은 “키파야(충분하다)!”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결집했고 점점 더 많은 청년들이 여기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보면 소규모의 급진적 반정부 세력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대담한 행동이었는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대통령 비판을 금지하는 “레드 라인”을 공공연히 넘어선 것이다.
이듬해에 정권의 노골적인 부정선거와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정권의 행태에 격분한 판사들의 항명 행위가 있었다. 개혁 성향의 대법관 두 명이 징계받은 데 항의해 법복을 입은 판사 수백 명이 카이로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판사회관 건물 계단에서 판사들을 폭행하고 이들의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최루탄을 쏘아 대는 것을 보면서, 누구라도 국가 기관들끼리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었다.
2008년 노동자 투쟁의 고양은 청년 운동의 부활과 맞물렸는데, 당시의 투쟁은 2011년 혁명 전에 정권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 마할라 미스르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호소는 청년 활동가 네트워크의 지지를 받았다. 마할라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연대 총파업을 호소하는 페이스북 그룹에 약 7만 명이 가입했다. 2008년 4월 6일 마할라 파업은 경찰 탄압 때문에 불발이 됐지만,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하자 마할라는 거의 봉기 직전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는 동안 “페이스북 파업”은 카이로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대규모 시위를 촉발하고 상가 철시撤市를 불러일으켰다. 1월 25일 이전의 마지막 시위 물결은 2010년 여름에 있었는데, 당시 경찰이 젊은 인터넷 활동가 칼레드 사이드를 살해하자 사이드의 고향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2000년부터 2011년까지 투쟁이 꾸준히 상승 곡선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이 투쟁 물결은 끊기기 일쑤였고, 일련의 시위들이 사그라지거나 거리에서 분쇄되고 나면 몇 달 후에 다른 투쟁이 터져 나왔다. 노동자들이 제기한 경제적 요구와 개헌을 바라는 중간계급 전문직들이 주로 제기한 매우 정치적인 주장 사이의 간극 때문에 무바라크 반대 진영의 단결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주문呪文
그럼에도 무바라크 집권 기간 중 지난 10년이 그의 몰락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다. 정치적 전통이 서로 다른 활동가들(이슬람주의자들, 나세르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한 세대가 이 10년간의 다양한 저항 운동을 통해 정치적 조직화 기법을 배웠다. 이 10년 동안 급진적 반정부 단체들은 항의 운동을 조직하고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서로 다른 정치 단체들 사이에서 전술적 동맹을 구축하는 경험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거리 정치에서 정권이 30년 넘게 퍼뜨린 두려움이라는 주문을 집단적으로 깨뜨렸다.
모든 항의 운동 중에서도 특히 파업 물결에서 드러난 동역학은 폴란드 출신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경제투쟁과 반정부 정치투쟁의 “상호작용”이라고 말한 것을 확인시켜 준다. 룩셈부르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 때 주장했듯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상호작용을 단순히 빵과 버터라는 경제적 요구에서 국가권력이라는 정치적 문제로 곧장 발전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상호작용 과정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를 오가는 진자 운동으로 볼 수 있는데,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 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는다.” 역으로, 노동자 투쟁의 사례를 보면 노동자들의 힘과 집단적 조직 덕분에 심지어 작업장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전투조차 정치 행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다른 ‘정치적’ 민주화 운동들이 국가 탄압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권리들, 즉 집회·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단숨에 쟁취했다. 파업 물결 덕분에 전국의 수많은 작업장에서 토론하고 조직할 수 있는 공간이 창출됐고, 투쟁이 이집트 사회 깊숙이 확산될 수 있었다.
2011년 1월 25일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의 발전 과정(경찰한테서 거리 통제권을 빼앗아 오려고 싸우고, 무바라크에게 직접 도전하는 요구들을 내걸고 시위하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상호작용이 증대한 과정)이 갑자기 며칠 사이에 압축적으로 일어났다. 행동의 시작은 반정부 활동가들이 튀니지의 벤 알리 정권 전복으로 생겨난 기회를 이용해 전국적 시위를 호소한 것이었다. 시위를 호소한 페이스북 그룹 “우리가 모두 칼레드 사이드다”(2010년 여름 알렉산드리아에서 경찰에게 살해된 활동가의 이름을 딴 것이다)에 수십만 명이 가입했다.
급진적 반정부 단체들도 대거 동참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민주주의 활동가, 나세르주의자, 독립 노조 조합원, 마침내 무슬림형제단까지 한데 모이게 됐다. 시위 조직자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을 새로운 전술에 합의했다. 한곳에 모이기보다는 집결지를 여러 곳으로 분산시킨 것이다.
1월 25일 아침 일찍부터 시위 규모가 지난 몇 년 동안, 아마도 수십 년 동안 이집트에서 벌어진 그 어떤 시위보다 훨씬 더 크리라는 점이 분명해 보였다. 처음에는 10여 개, 다음에는 수백 개, 또 다음에는 수천 개의 구멍이 독재 정권의 벽에 뚫리게 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구멍들로 쏟아져 나왔다. 나스르 시에서, 기자와 슈브라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만수라에서, 수에즈에서, 아시우트에서 그랬다.
그 뒤 며칠 동안 시위는 점점 속도가 붙었다. 1월 28일 금요일은 운동의 첫 번째 주요 관문이었다. 경찰이 도심을 봉쇄했고 정권은 휴대전화 통신망과 인터넷을 차단했다. 시위대는 모스크를 집결지로 삼아 행진하면서 거리를 탈환하고자 했다. 수십만 명으로 추산되는 거대한 시위대가 경찰과 전투를 치렀다. 무바라크는 내각을 해산하고, 불타 버린 경찰서에서 경찰을 철수시키고, 군대를 동원했다. 전국에서 지역 민중위원회가 우후죽순 생겨나 깡패들(많은 사람들이 사복 경찰이라고 생각한)의 공격에 맞서 자신과 이웃을 지켰다. 주말 동안 시위가 더욱 확산돼 2월 1일 화요일 “백만 행진”에서 절정에 이르자 마침내 무바라크는 마지못해 양보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TV 연설에서 무바라크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헌법을 부분 개정하겠다고 말했다.
2월 2일 수요일, 정권은 반격에 나섰다.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서 사복 깡패들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한 것이다. 타흐리르 광장에 있던 시위대를 기습한 깡패 무리들은 돌멩이와 칼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채, 보통은 피라미드 근처에서 관광객들이 타고 놀던 말과 낙타를 타고 쳐들어왔다. 이틀 동안 광장을 뺏고 뺏기는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시위대가 승리했다. 금요일 수십만 명이 다시 행진에 나섰고, 이 날은 “하야의 날”로 선포됐다. 그 사이에 정권은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는 세력들을 필사적으로 찾아 나섰다.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한 일부 야당이 무바라크가 새로 임명한 부통령이자 전 정보국장인 오마르 술레이만과 만날 대표를 파견했다. 기업인인 아흐메드 바가트와 나기브 사위리스 같은 인물을 포함해 지배계급 일부는 시위대의 요구 일부를 공공연하게 지지하면서도 향후의 “전환기”에 자신들이 정치적 구실을 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하려고 나서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만 명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고, 정권의 대변인과 어용 언론들이 폭력적 언사를 늘어놓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거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어린 자녀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군중과 섞였고 일요일 오후에는 젊은 연인들이 결혼식을 올렸다.
파업
세력 균형이 다시 한 번 (이번에는 결정적으로 무바라크에게 불리하게) 바뀐 것은 2월 8일 화요일이었다. 몇몇 작업장(수에즈 운하 노동자, 카이로 통신 노동자, 헬완 철강 노동자 들이 선두에 섰다)에서 시작된 파업의 잔물결이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이집트 전체를 삼켜 버렸다. 2월 9일 ‘이집트 사회적·경제적 권리 센터’는 최대 30만 명의 노동자들이 열다섯 주에서 파업에 들어갔다고 추산했다. 병원 기술직 노동자, 시멘트 노동자, 우체국 노동자, 방직 노동자 들이 작업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나섰고, 경제적 요구와 혁명에 대한 지지를 함께 강하게 제기했다.
이제 파업 노동자들의 대표들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나일 강 주변에 있는 대통령 궁과 라디오·TV 방송국 앞에서 시위대에 동참했다. 무바라크가 사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2월 10일 목요일 마지막 TV 연설에서 무바라크는 여전히 사임을 거부했다. 몇몇 장교들이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에게 연설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 장교는 <알자지라>의 생방송 프로그램에 전화해서 이제 군복을 벗고 “민중 혁명”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했다. 군 사령관들이 밀실에서 만나 회의를 거듭한 몇 시간 동안 시위대가 다시 불어났다. 카이로는 최후의 봉기 직전 상황처럼 보였다.
2월 11일 마침내 국가 조직에 균열이 일어났다. 고위 사령관들이 권력을 잡고 무바라크를 대통령직에서 밀어냈다.
1월 25일 혁명 과정에서 세 가지가 두드러졌다. 첫째, 18일간의 대결에서도 그 전 10년 동안의 저항 운동 동역학과 동일한 동역학이 많이 발견되지만, 그 수준이 훨씬 더 높았고 속도도 훨씬 더 빨랐다. 시위대는 주요 도시의 핵심 지역, 특히 타흐리르 광장을 점거했고, 그곳을 혁명 운동의 전략적 자산으로 탈바꿈시켰다. 사람들이 스스로 안전위원회를 조직하고, 쓰레기 더미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의료진과 청소부들이 자원 활동을 펼치고, 음향 시설과 텐트가 설치되고, 배너가 내걸린 타흐리르 광장은 (지난 5년 동안 점거 투쟁이 벌어진 공장 수백 곳처럼) 해방구로 바뀌었다. 광장은 논쟁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조직 활동의 구심이기도 했다. 활동가들은 타흐리르 광장에 모였다가 밖으로 나가서 공장과 사무실과 지역사회를 혁명에 가담시키자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이 공간을 수호하는 데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야 했고, 정치적 조직도 필요했다. 예를 들어 무슬림형제단의 청년 활동가들은 정부가 고용한 깡패들에 맞서 광장을 지키고 광장 주변에 검문소를 설치하는 데서 중심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 자체는 이 공간을 지배하지 못했고 오히려 자체 모순에 시달렸다. 젊은 회원들은 더 광범한 혁명 운동을 지지했지만, 지도부는 국가와 거래하고 싶은 염원이 간절했다. 이런 모순에 찬 균형 덕분에 거리에서 시위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고, 규모가 작긴 했지만 혁명적 좌파들이 새로운 청중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달할 수 있었고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을 가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둘째로, 혁명이 거리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심지어 1월 25일의 시위 규모가 계속 유지됐더라도 국가를 위로부터 분열시킬 수 있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난 10년 동안 민주주의와 개혁을 위한 투쟁들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변화를 추구하는 여러 사회·정치 단체들의 동맹은 혁명이 정치적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침투하고, 거리에서 작업장으로 확산돼 노동자들이 집단적 행동에 나서게 하고, 노동자들 자신의 요구와 운동의 더 광범한 목표를 결합시키기 전까지는 돌파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게다가, 정권의 사회적·정치적 통제 기구가 분열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데, 이런 분열은 단순히 1월 25일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개혁이 나세르주의 국가 구조에 미친 장기적 영향의 결과였다.
마지막으로, 군대의 구실이라는 쟁점이 있다. 근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거둔 성과 때문에 국가의 일부(군대 최고사령부)가 국가 전체를 지키려고 무바라크라는 암세포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대중 운동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한 것과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다. 군대가 세로로 쪼개진 것(서로 경쟁하는 사령관들끼리 분열한 것)도 아니었고, 가로로 쪼개진 것(1917년 러시아 군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계급의 차이에 따른 분열)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바라크의 퇴진을 단순히 쿠데타로만 보거나 군 사령관들이 무력으로 혁명 운동을 해산시키려 할 때 직면하게 될 어려움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지금 상황은 1952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때는 대중적 항의 운동이 일시적으로 기진맥진하자 소수의 하급 장교들이 행동에 나섰다. 나세르가 군대를 이끌고 왕궁과 라디오 방송국과 병영들을 장악했을 때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여기서는 사회적 투쟁으로 다시 전환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2011년 2월에는 군대가 행동하기 전에 이미 혁명이 작업장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1952년에는 카프르 알 다와르의 방직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이 새로 들어선 군사정권을 위협하자 군대가 나서서 파업을 분쇄했다. 이번에는 무바라크 퇴진 후 일주일 동안 작업장 수백 곳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그 중에는 2만 4천 명이 일하는 거대한 마할라 방직 공장도 포함된다.
나기브 사위리스와 아흐메드 바가트 같은 백만장자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집트인을 위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혁명이 더욱 전진해야 한다. 조직 노동자들은 발전하는 혁명 운동 내의 사회 세력이 되고 있고, 자신들의 집단적인 사회적 힘을 의식적으로 사용해 운동의 첫째 정치적 목표인 무바라크 제거를 이뤘다. 겨우 18일 만에 이집트 노동자들은 인류 해방의 길에서 그들의 부모·조부모 세대가 평생 동안 전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모든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 집권당의 하수인들을 내쫓아야 하고, 독립 노조를 세워야 하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노동자 민주주의 기구를 건설해 이것이 (적어도 맹아적 형태로서) 대안적 국가 권력의 중심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해야 한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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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nne Alexander, ‘The gravedigger of dictatorship’, Socialist Review(March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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