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민주주의 — 신화와 현실
이 글은 ‘맑시즘2008’에서 발표한 내용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제시된 통계 수치들은 최근의 것과 약간 다를 수 있다.
인터넷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꽤 오래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인터넷 사용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한편에서는 인터넷이 민주주의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확산됐다. 특히 진보진영과 반신자유주의 운동 내에서 그랬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터넷이 부정확한 정보를 퍼뜨리고 기껏해야 쓸데없는 잡담이나 주고받는 쓰레기장이 될 것이라는 비관론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사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두 입장 모두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정말 말도 섞기 싫을 정도로 쓰레기통이 돼 버린 게시판이 있는가 하면 비록 부분적으로 그런 결점을 안고 있을지라도 수십만 명이 참여해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공간들도 있다. 그리고 이처럼 두 가지 서로 상이한 측면이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터넷이 천국과 지옥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는 이 사실을 보여 주는 데 글의 많은 부분을 할애할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 전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리다. 필자에게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대기업들의 홍보용 웹사이트와 다음 아고라 같은 인터넷 토론방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인터넷이 보급된 초기와 현재 상태가 많이 다르고 여러 가지 조건(기술 발달·자본·교육 정도·지리적·공간적 문제 등)에 따라 각각의 통계가 의미하는 것도 서로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대체로 일반화할 수 있는 거시적 통계들과 게시판과 댓글 등을 이용한 인터넷 공간에서의 토론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이 글에서 밝힌 인터넷의 현실도 단지 현재의 상태일 뿐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인터넷은 수많은 기술적 진보와 함께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생물의 진화가 그렇듯이 인터넷의 진화도 그 방향이 반드시 ‘진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초기의 흥분과 열광 혹은 비관적 예측과 달리 인터넷 공간은 점점 더 현실과 닮아가고 있고 사회 전체가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런 경향은 계속될 듯하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현실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 우리가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장할 것이다.
그 전에 먼저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밝혀 둘 것이 있다. 비록 내가 인터넷 민주주의 낙관론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만, 나는 정보통신망법·통신비밀보호법·인터넷 실명제(주민등록법) 등 인터넷상의 자유로운 의견 표현을 가로막으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물론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익명성을 방패 삼아 근거도 없이 남을 비방하거나 중상모략하는 자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떤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데서 너무 나아가 악플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제약에도 반대하지만 표현의 자유가 언제나 모든 것에 우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법적 처벌을 통한 규제는 ‘악플’ 같은 부작용을 없애지는 못하면서 인터넷상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심각하게 제약할 것이다. 미네르바 구속을 비롯해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쓴 네티즌들을 수사하고 처벌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정부는 이런 규제를 이용해 정부에 비판적인 개인들과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
우파 언론들과 정치인들은 ‘인권과 사생활 침해’ 등을 이유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부르대지만 그들이야말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상에서 마녀사냥과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장본인이다. 한국 웹사이트에 오른 어떤 악플도 〈조선일보〉 등이 진보진영과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일상적으로 퍼붓는 혐오와 멸시, 왜곡에 비견할 바가 못 된다. 이들이 체계적으로 유포하는 성차별·인종차별적 ‘상식’들이 인터넷 공간으로 전염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의심이 든다면 이들 주류 언론사들의 웹사이트를 한번 방문해 보라.
우파 언론과 정치인들의 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이들은 단지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극도로 혐오할 뿐이다.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고 심지어 행동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인터넷뿐 아니라 현실에서의 민주주의가 확대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런 공격에 맞서 단결해 싸워야 한다.
인터넷과 민주주의
‘인터넷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인터넷 공간이 현실 세계에 비해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이용의 확산이 현실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높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인터넷 공간이 민주적이므로 인터넷 이용의 확대가 현실에서 민주주의의 확대로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인터넷이 민주주의를 확대시키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인터넷 공간이 얼마나 민주적인지 살펴보려면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답해야 하겠지만 이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인터넷 공간의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인터넷 민주주의의 요소들이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겠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인터넷 공간의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꼽는 인터넷의 최고 장점은 평등이다. 현실과 달리 가상 세계는 위계질서와 권위주의가 느슨하거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 공간에는 국경도 없고 빈부격차도 없고 개인을 무겁게 짓누르는 사회적 제약들이 느슨하거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신속(만남이나 서신 왕래보다 훨씬 빠른 의견 교환), 개방성(정보 취득 참여 편집), 편리(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음), 편안함(익명 공간) 등이 가상 공간에서 사람들 사이를 평등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인터넷을 통한 의견 표현은 현실의 다른 수단(언론 출판 집회 시위 등)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다(비용과 노력 등에서)는 점 덕분에 ‘누구나 쉽게’ 자신의 의견을 많은 사람들에게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또 조중동 같은 신뢰가 가지 않는 주류 언론을 통하지 않고도 수많은 사람들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직접 접할 수 있다. 진중권, 노회찬 같은 진보적인 학자나 정치인들의 의견을 여기저기 퍼 나르며 현실 세계에서 참여하지 못한 선거 운동을 하기도 한다.
검색 엔진을 이용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된 것도 참여의 기회를 늘린다. 정보 축적의 효율이 대폭 향상됐고 조금만 노력하면 전문가 뺨치는 수준의 정보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됐다. 이쯤 되면 누구랑 붙어도 꿀릴 게 없다고 느껴진다.
‘꾼들’뿐 아니라 일상에 얽매여 있는 평범한 직장인들과 학생들도 여가 시간을 이용해 참여할 수 있고 굳이 부담스러운 공간에 노출되거나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집이나 다른 편안한 장소에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터넷 토론방이나 블로그 등에 올린 한두 편의 글이 대박을 치는 경우가 있다. 주류 언론들이 전혀 주목하지 않던 의견도 어느날 갑자기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유력한 여론이 되기도 한다. 주류 언론들의 여론 조작과 편파 보도가 힘을 잃고 무너지기도 한다.
이 점에서 특히 억압과 소외에 시달려 온 소수자들에게 인터넷은 자신들의 의견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권력을 가진 소수의 의견이 여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조회수나 추천수, 댓글 등을 통해 다수의 의견이 반영되는 일이 현실보다 훨씬 자주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터넷 토론 공간의 여론 수렴 방식은 ‘롱테일의 정치학’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림 1〉의 오른쪽 ‘긴 꼬리’ 부분이 롱테일이다. 집중현상을 나타내는 그래프에서는 발생확률 혹은 발생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으나, 인터넷과 물류기술의 발달로 이 부분도 경제적으로 의미가 있을 수 있게 됐다고 하는데, 이를 롱테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마존 등 크게 성공한 인터넷 상거래와 기존 상거래의 차이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인데 시장에서 크게 히트한 상품 한두 개가 기업 이윤을 좌지우지하던 것과 달리 소량이지만 꾸준히 판매돼 히트 상품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상에서는 정당이나 단체 등으로 조직돼 있지 않고 따라서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설명된다.
인터넷 민주주의가 현실 세계에 비해 월등한 것이 참여 기회와 소통 방식의 ‘평등함’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위의 설명들이 모두 진실인 것은 아니다.
이제 이런 설명들이 얼마나 사실을 정확히 묘사하는지 알아보자. 그러기 위해 인터넷 이용이 얼마나 보편화 됐는지, 인터넷 이용의 확산이 얼마나 참여의 기회를 보장하고 있는지, 또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어떤 방식의 참여를 낳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 전에 이른바 선진국을 능가하는 ‘인터넷 강국’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어느 정도나 사실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이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한 해외 연구 결과들을 인용할 때마다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며 비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진보진영이건 보수진영이건 꼭 있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들을 보면 이는 비교적 쉽게 논박할 수 있다. 몇 해 전에 그것도 아주 잠시 그랬던 것과 달리 이제 한국의 인터넷 환경은 세계적으로 그다지 특별한 수준이 아니다.
1 은 72퍼센트로 미국보다 약간 높을 뿐이다(〈그림 3〉 참조). 지리적으로 면적이 좁은 나라들과 선진국들의 경우 인터넷 보급률은 거의 정점에 도달해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그림 3〉과 〈그림 4〉 참조).
2007년 기준으로 한국의 인터넷 이용자 수는 3천4백82만 명으로 미국, 중국, 인도 등에 이어 세계 8위 수준이다(〈그림 2〉 참조).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어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 이용률
2 는 한국이 세계 3위이지만 미국과 비교해 다른 나라들의 인터넷 호스트 수가 너무 적어 비교 대상이 안 될 정도다(〈그림 5〉 참조). 전 세계 인터넷 호스트 2억 7천만 개 중에 무려 73퍼센트가 미국에 있다. 한국은 단지 2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뿐이다. 1만 명당 인터넷 호스트 수를 보면 순위는 더 낮아져 17위를 차지하고 있다(〈그림 6〉 참조).
인터넷 컨텐츠 양을 보여 주는 인터넷 호스트 수
순전히 물리적인 조건으로만 보자면 전 세계 인터넷을 지배하는 것은 현실 세계의 초강대국 미국이다.
한국에서 초고속 인터넷이 조기에 보급된 것도 다른 나라의 인터넷 환경과 다른 점으로 꼽히곤 하는데 〈그림 7〉에서 보듯이 실제로는 최근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도 많이 평준화돼 선진국들 사이에서 큰 차이를 보기 어렵다(〈그림 8〉 참조). 다만 한국의 경우 집에서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하는 비율이 높은데 이는 뒤에서 얘기할 온라인 의사소통 문제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그림 7〉과 〈그림 9〉 참조).
인터넷은 참여의 기회를 얼마나 보장하는가?
3 소득에 따른 인터넷 이용률을 보면 저소득층의 경우 2006년보다 2007년에 이용률이 더 낮아져 인터넷 이용도 양극화하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을 통한 의견 표현과 정보 습득의 기회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현실의 다양한 한계를 반영하는 것도 사실이다.
인터넷이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전 세계와 한국의 인터넷 사용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현재 한국에서 전체 인구의 4분의 3 정도가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증가세는 빠르게 둔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압도 다수가 인터넷 사용 경험이 있지만 〈그림 10〉과 〈그림 11〉에서 보듯이 학력·직종·소득·연령 등에 따라 인터넷 이용률에는 큰 차이가 난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한 의사 표현의 기회가 형식적으로 확대됐다고 해도 남들이 봐줄 때 의미있는 얘기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전체 인터넷 이용자의 80퍼센트가 방문하는 웹사이트는 전체 웹사이트의 0.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한 참여가 시간적 제약을 적게 받는다지만 실제로는 현실에서의 일과에 따라 크게 제약을 받는다. 학생들이건 노동자들이건 주요 업무(수업) 시간에 인터넷 서핑을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나마 여유가 있는 저녁 시간대에 인터넷을 가장 많이 이용하지만 휴일이 되면 낮 시간 사용이 가장 많다.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학생들의 경우와 달리 직장인의 인터넷 사용 시간은 업무 시간과 퇴근 시간에 큰 영향을 받는다. 휴일이 되면 이 차이는 크게 줄어든다(〈그림 12〉 참조).
널리 퍼진 상식과 달리 인터넷은 국경을 간단히 무시하지도 못한다. 언어의 장벽도 있거니와 국가 간 망 건설은 해당 국가들의 법과 제도를 무시하지 못한다. 구글, 이베이 등 유명한 인터넷 기업들이 해당 국가의 법에 따라 검색을 제한하거나 표현을 제약하는 것을 보라. 비용 문제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정보통신 기업인 월드콤은 1990년대 말에 시작한 통신망 확대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비용 부담 때문에 파산했다.
요컨대 인터넷의 보급이 개인과 집단의 의견 표현 기회를 크게 확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준은 현실의 여러가지 벽(교육·소득·노동시간·언어·지리·법 등)을 뛰어넘지는 못했다(달리 말해 이런 현실의 벽이 낮아지거나 제거된다면 인터넷을 통한 참여 기회는 더 확대될 것이다).
이 신기술은 누구나 금방 손쉽게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정치적 국경을 사실상 지워버릴 것이며 자유무역을 보편화할 것이다. 기술 발전 덕분에 이제는 더는 외국인이란 없으며 우리는 점차 공동의 언어를 채택해 나가게 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그런데 이 문장은 전보가 발명됐을 때 쏟아진 찬사 중 하나다. 새로운 기술, 특히 미디어·통신 수단의 발달은 언제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런 신기술 도입 자체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사례는 없다. 사실 사회에 끼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TV의 보급이 인터넷보다 사람들의 삶에 훨씬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림 13〉에서 보듯이 TV 대중화 이후 노동시간·가사노동·육아·수면 등 사람들의 일과 시간이 크게 변한 반면 인터넷 대중화는 상대적으로 작은 변화를 일으켰다(〈그림 13〉 참조).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인터넷 대중화로 노동시간이 크게 늘고(집에서도 회사에서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된 데 따른 결과인 듯하다) TV가 대중화 될 때와 달리 인쇄매체를 읽는 시간이 오히려 늘어난 점이다. 이는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TV와 달리 인터넷이 어느 정도 자기 표현 기회를 열어뒀기 때문에 생긴 결과인 듯하다.
인터넷 의사소통
다음으로는 인터넷 공간에서 실제로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살펴보자. 먼저 물리적으로 인터넷 공간이 열려 있다고 해서 사람들의 의사소통이나 토론 참여가 저절로 늘어나지는 않는다. 온라인 공간의 활동량은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늘거나 줄기보다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깊은 연관을 맺으며 변화한다.
〈그림 14〉는 촛불항쟁이 벌어진 지난해 다음 아고라의 토론방·청원방·자유토론방 순방문자 수와 페이지뷰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다. 페이지뷰는 해당 페이지가 조회된 횟수(한 사람이 10번 보면 10번으로 기록)를 뜻하고 순방문자 수는 실제로 그 페이지를 본 사람 수(한 사람이 10번 봐도 1번으로 기록)를 뜻하는데 촛불항쟁이 시작된 5월 2일과 1백만 명 시위가 벌어진 6월 10일을 전후로 수치가 급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빠뜨려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는데 페이지뷰가 대체로 순방문자 수의 10배를 넘는다는 것이다. 이는 참여자가 급증했을 뿐 아니라 기존 참여자들의 활동량(읽고 쓰기)이 폭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6 흔한 상식과 달리 ‘벙개’를 통해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이다. 친구들 사이의 ‘벙개’는 흔하지만 말이다.
인터넷 그 자체로는 사회적 상호작용이나 정치 참여를 유도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양한 연구에서 드러났다. 대신에 기존의 사회적 결속이나 갈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낸다. 인터넷은 현실 세계의 사회 관계나 다른 미디어를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는 구실을 한다. 특히 기존 관계를 강화하는 데 큰 효과를 낸다.다음 아고라의 모태가 된 ‘2004년 총선 핫이슈 토론광장’에 대한 연구가 보여 준 결과도 대단히 시사적이다. 이 토론광장은 처음부터 정교하게 설계된 일종의 현장실험이었는데, 〈그림 15〉와 〈그림 16〉에서 보듯이 참여가 급증한 시기는 촛불항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에서 특정한 사건 — 노무현 탄핵, 총선 등 — 이 벌어진 날에 집중됐다. 게시판의 개방성이 현실 사회의 대형 사건과 만나 사람들의 글쓰기를 크게 고무한 것이다.
7 다수의 의견이 활발히 개진되기보다는 소수의 이용자들이 전반적인 경향을 주도했다. “등록된 토론자 3만 6천4백85명 가운데 5.7퍼센트의 토론자가 전체 읽기의 50.6퍼센트를 차지했고 3.9퍼센트의 토론자가 쓴 글[이] 전체의 33.5퍼센트를 차지했다.” 8
이 실험에서는 다른 중요한 결과들도 얻을 수 있었는데 토론자들은 평균 30.72개의 글을 읽고 0.7개의 글을 썼다. “인터넷 토론은 기본적으로 [다른 매체를 통한 토론과 마찬가지로 ‘쓰기’가 아니라] ‘읽기’가 지배하는 공간”이다.이준웅 등은 각각의 주장이 얼마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는지(조회수)와 얼마나 많은 찬성 의견을 이끌어냈는지(찬성표)를 두고 참가자들을 네 유형으로 나눴다.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고 찬성 의견을 많이 이끌어 낸 사람들을 ‘온라인 의견지도자’로 분류했는데, 이들이 전체의 11퍼센트를 차지했다. 주목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찬성 의견을 많이 이끌어 낸 ‘조용한 설득자’는 4퍼센트, 관심은 많이 끌었지만 찬성 의견을 많이 얻지 못한 ‘관심 유발자’는 7퍼센트, 그리고 주목을 끌지도 찬성 의견을 많이 얻지도 못한 ‘온라인 일반토론공중’은 전체의 78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림 17〉부터 〈그림 20〉에서 보듯이 ‘온라인 의견지도자’와 ‘조용한 설득자’와 ‘관심 유발자’는 ‘온라인 일반토론공중’에 비해 나이도 많고 학력도 높고 신문 읽는 시간도 길었다. TV 뉴스 시청 시간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관심유발자의 경우에는 일반토론공중과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활짝 열린 ‘기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토론 공간은 주로 ‘교육수준이 높은 중년 남성’의 전유물이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존의 집단이나 계층이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한다.” 그리고 “온라인 의견지도력은 특히 글쓰기 능력과 유의한 관계를 맺는[다].”
아무런 제약이 없고 평등해 보이는 인터넷 공간에서 왜 이런 결과가 생겼을까? 물론 상대적으로 지식이 더 많고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본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쓰고 영향력도 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듯하다. 인터넷 공간이라고 해서 이런 차이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느덧 게시판에서도 인기 필자가 생겨나고 이들이 의견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10 게다가 어마어마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얻어내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체 사용자의 무려 20퍼센트는 하나의 정보를 찾아내는 데 무려 1시간 이상이 걸렸다. 10분 안에 원하는 정보를 찾아낸 사람들은 전체의 절반도 안 된다(〈그림 21〉 참조). 무엇보다 사전 지식을 갖고 있고 논리적 훈련이 된 사람들이 정보 검색에서도 더 높은 효율을 보인다.
인터넷이 이전의 다른 매체에 비해 방대한 정보를 빠른 시간 내에 습득하도록 도움을 준 덕분에 이런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다른 매체와 달리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보가 넘쳐난다는 문제가 이런 장점을 상쇄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얻는 정보의 신뢰성에 의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궁금한 점을 일차적으로 검색하고는 전문가나 친구, 부모에게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오히려 가상 세계에서는 이런 차이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과도한 환상일 것이다.
이런 특징들은 인터넷 토론 공간에도 현실 세계의 사회적 관계들이 반영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실제로 인터넷 ‘전사’들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직접 글을 쓰기보다는 논리정연한 권위자들의 글을 ‘퍼 나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다고 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토론에서 수동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현실에서나 온라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읽기와 쓰기, 토론하기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주로 그들이 사회에서 처한 현실과 관련된 것이지 그 개인의 책임이나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 어디서나 만연한 각종 차별과 억압, 엘리트주의에 더해 권위주의의 유산(유교 문화, 식민지 잔재, 권위주의 정부 등)이 여전한 한국에서 나이도 적고 가방끈도 짧고 이렇다 할 자격증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쉽사리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곤 한다. 살면서 많든 적든 권위에 짓눌려 의견을 묵살당해 본 경험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격언을 상식으로 여기며 산다. 이런 수동성이 온라인 공간이라고 해서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비록 드문 사례이기는 해도 미네르바처럼 오프라인에서라면 그가 가진 배경 때문에 쉽게 영향력을 획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온라인에서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미네르바 자신이 실제로 기울인 노력에 비하면 당연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사건이나 사회적 쟁점에 대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진지하게 주장하려 하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온라인 토론장의 경우에도 많이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글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었고 적게 읽는 사람들은 쓰는 횟수도 적었다.
‘핫이슈 토론광장’의 경우도 한 번이라도 글을 쓴 사람의 67퍼센트는 11회 이상 다른 사람의 글을 읽었고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은 사람의 72퍼센트는 읽은 회수도 10회 미만이었다(〈그림 22〉 참조).
요컨대 오프라인의 의견 교환 양상이 온라인 공간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따라서 온라인 의사소통이 현실에 비해 월등히 나은 것이라고 판단할 이유도, 무조건 쓰레기장 같다고 폄하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다만 온라인 토론이 사람들 사이의 대면 접촉과 직접 의사소통에 비해 갖고 있는 약점들은 비교적 명백해 보인다.
인터넷 토론의 약점들
컴퓨터와 통신망을 이용한 인터넷 토론에서는 현실 세계의 토론에서 가끔 생겨나는 문제들이 훨씬 자주 극단적으로 생겨난다. 익명성이 낳는 여러 문제들은 그 일부일 뿐이다.
문자로만 이뤄지는 인터넷 토론과 달리 현실에서 사람들은 ‘다중 채널’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눈빛·말투·몸짓 등 입체적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소리’로 전달되는 정보를 명확히 하고 불필요한 오해와 과장을 걸러내는 작용을 한다.
의사소통은 기본적으로 개인이든 대중이든 상대방을 전제로 한 것이다 보니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토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런 인식은 불필요한 불신이나 적대감을 없애거나 혹은 그 반대 작용을 하는데 인터넷 토론에서 상대방을 인식할 수 있는 정보는 대체로 그가 한 ‘말’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아주 표면적으로 드러난 특성을 중심으로 상대를 파악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군과 적군으로만 파악한다거나 ‘초딩’, ‘중딩’ 하는 식으로 싸잡아 이해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합리적인 비판과 지지 대신 중상모략과 비방이 종종 더 효과적인 토론 전술로 떠오른다.
11 이렇게 되면 덜 중요한 의견들이 게시판 토론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게시판에서 설치는 ‘알바’들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게시판 토론자들의 관심과 지지를 모두 이끌어낸 진정한 ‘인터넷 의견지도자’들보다 오로지 눈길을 끄는 데만 성공한 ‘관심유발자’들의 의견에 달린 댓글이 월등히 많다.현실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외감을 안겨 주는 권위주의나 억압적 위계질서는 인터넷 토론에 없다. 가끔 눈팅 하는 사람이나, 전문가 혹은 국회의원도 똑같이 굴림체 11포인트로 표시될 뿐이다.
그러나 필요 없는 권위와 전문성도 있지만 토론의 발전에 꼭 필요한 권위와 전문성도 있다. 단순히 토론의 양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 질이 보장된다고 할 수는 없다. 충분한 수의 참가자와 충분한 시간만 있으면 올바른 길을 찾게 된다는 이른바 ‘집단지성’ 예찬론은 실제 문제 해결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집단지성’에 대한 논의는 뒤에서 다시 하겠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 사례만 살펴보겠다.
위키피디아에 담긴 또 하나의 시대정신은 지식의 공동 생산과 공유이다. 위키피디아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함께 지식 협업의 대표적 사례이다. …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식을 저자보다는 내용에 의해 평가하는 위키피디아 방식은 기존 전문지식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내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집필진에서 전문가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문가라고 해서 특별한 대접을 받지는 않는다. 실제로 한 논평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40년 동안 연구를 한 학자의 글이 그 전쟁에서 해골이 검을 휘둘렀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네티즌에 의해 수정되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해 중립적인 견해를 유지한 채 그 네티즌과 점잖게 토론을 벌여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예시하면서 위키피디아의 기본 철학은 ‘전문가는 하찮은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13 그래서 이제 온라인 공간에서도 글을 쓰는 사람들의 신뢰도를 평가하는 기준들이 도입되고 있다. 조정자나 관리자의 직함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명한 네이버 지식인에도 사람들의 등급이 정해져 있다. 이런 노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진척돼 여느 언론사 못지않은 편집 기능을 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인 서비스에는 “82명의 디렉토리 에디터가 활동 중”인데,
사실, 토론에서 신뢰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보와 그의 행동과 말투 등은 이 필수적인 요소를 충족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디렉토리 에디터의 활동은 운영자의 최종 검수를 거치게 되며, 디렉토리 에디터 역시 지식스폰서와 마찬가지로 디렉토리 에디터임을 표시하는 마크를 부여하고 인증서가 발급되며 2개월마다 소정의 활동지원비를 지급하고 매달 우수 에디터들을 선정해 상품을 제공하는 혜택을 받는다.
인터넷 게시판 토론에서는 토론을 발전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 ‘누가’,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어렵다. 의견 교환의 시공간적 제약을 완화한 대가로 정보 전달의 효율성을 일부 잃어버린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고 그에 따라 현실의 여러 요소들이 온라인상에 도입되고 있지만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한계를 뛰어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인터넷 의사소통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요소는 ‘편안함’이다. 내 생각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토론에 참여하는 이유도, 그리고 인터넷 의사소통의 장점을 찬양하는 이유도 상당 부분 이 ‘편안함’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한국에서 인터넷 접속자들이 대부분 집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고(96.3퍼센트) 인터넷 사용 시간이 저녁 시간대에 몰려있다는 사실도 이와 관계있는 듯하다.
그러나 편안함은 효율적이라거나 편리하다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고 협동하기보다는 서로 경쟁시켜 정보를 알아내도록 유도하는 학교에서의 교육 방식과 달리 사람들은 사회 생활을 통해 훨씬 효과적인 정보 획득 방법을 알고 있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불편하다. 이런 행동은 스스로 경쟁에서 뒤쳐져 있음을 상기시킨다.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무척 부담스럽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가 뒤틀어 놓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편안한’(얼굴을 마주할 필요도, 여러 가지 난처한 환경에 놓일 필요도 없는) 대화 방식을 선택하는 듯하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효율성으로 보자면 정보 습득은 아는 사람에게 묻는 게 빠르고 신뢰도도 높다. 의견 교환도 문자만 있는 것보다는 전화가 낫고 대면 접촉이 훨씬 효율적이다. 무엇보다 경험을 통해 알겠지만 중요한 정보 획득 과정, 논의 과정은 대개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이런 모순은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민주주의와 권력
민주주의라는 말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인터넷의 어떤 요소를 살펴봐야 인터넷 민주주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전 세계에 전파된 민주주의라는 사상은 이 사회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 다시 말해 누가 권력을 쥐는 것이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왕과 귀족, 성직자들이 쥐고 있던 권력이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물론 부르주아지는 그 ‘다수’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제외된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따라서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인터넷 공간이 민주적인지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법과 제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인터넷 공간 안팎에서 적용되는 모든 규칙들은 주요 포털 사이트나 통신사들이 정한다. 큰 틀에서는 정부의 법률이 이를 규정한다. 예컨대 누구나 네이버나 구글을 이용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지만 검색 결과에서 어떤 정보를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우선 배치할지 정하는 것은 사용자가 아니라 네이버와 구글이다. 그리고 이들이 보여 주는 우선 순위에 사람들이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광고주들은 거액의 광고료를 지불하며 순위 다툼을 벌인다.
최근에는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만들어진 웹사이트의 대부분이 국제 표준이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사가 개발한 전용 코드를 사용하는 바람에 다른 웹브라우저나 운영체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해당 정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심지어 관공서들도 모두 이런 식이니 한국이 마이크로소프트에 정복당했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기업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과도한 개인 정보를 요구하고 정부가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대중의 의견이 민주적으로 반영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정부의 인터넷 검열 시도가 늘어나는 것도 인터넷 민주주의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게 하는 요소다. 마지막으로 정보에 대한 접근 자체가 법적으로 차단당하기도 한다. 한국 정부가 구축한 국가지식포털에는 약 2억 5천만 건의 자료가 있는데 일반인은 이 중 단 5퍼센트만 열람할 수 있다.
한편, 법과 제도가 보장하는 권력보다 더 근본적인 권력이 바로 소유권과 통제권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데 요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인터넷 공간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 깨닫게 된다. 통신사와 정보통신기기를 만드는 기업이 법적으로 인터넷에 들어가는 문과 길을 소유하고 있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미국 정부, 정확히 상무부가 인터넷상 모든 것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1990년대 말에 인터넷의 소유권을 두고 벌어진 투쟁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를 서술한 것이다.
1998년에 … [존 포스텔은] 당시는 물론 아무도 기억 못하는 오래 전부터 인터넷에 들어가려면 기본적으로 꼭 필요한 인터넷 프로토콜 숫자를 할당하는 최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뉴욕의 택시마다 고유 면허 번호를 할당받아 갖고 있듯이 각각의 숫자는 전 세계에 하나만 있으며 이를 통해 인터넷에서 컴퓨터의 정체를 찾아내 인터넷에 연결시킬 수 있는지 여부를 가려낸다. 1997년 이코노미스트는 “만약 인터넷에 신이 있다면 아마 존 포스텔일 것이다”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1998년 1월 28일에 … 포스텔은 전 세계 12개의 ‘네임 서버’ 중 8개의 운영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네임 서버란 google.com 같은 이름을 입력하면 그에 맞는 주소(123.23.83.0)로 찾아가게 해 주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는 컴퓨터들을 말한다. 이날 포스텔은 그 8명의 운영자들에게 자기 컴퓨터를 ‘루트(root)’ 서버, 즉 전체 인터넷에서 최고 우두머리 컴퓨터로 인식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포스텔과의 개인적인 의리가 두터웠던 운영자들은 이에 응했고 각자의 서버를 미국 정부가 통제하는 루트 서버 대신 포스텔의 컴퓨터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불안에 떨었다. 그 중 폴 빅시라는 운영자는 혹시라도 자신이 체포될 경우에 대비해 자식을 돌봐줄 사람을 미리 찾아놓았을 정도였다.
포스텔은 인터넷 창설자들의 비전, 즉 전문가가 모든 이들을 위해 봉사정신을 갖고 운영하는 개방적, 비상업적 네트워크라는 비전을 [상업화와 미국 국방부의 개입에 맞서]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미국 정부는 단호하게 대응했다. … 그 이후로 루트 파일과 루트 권한은 예외 없이 당연히 미국 정부의 소유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존 포스텔은 안타깝게도 이 사건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아홉 달 뒤 심장마비로 숨졌다.
따라서 인터넷 공간의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현실 세계의 민주주의의 테두리 내에 있다고 봐야 한다. 다만 이 글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현실 세계를 닮아가는 가상 세계는 현실 세계처럼 점점 더 불균등해지고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측면만을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변화와 함께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공간에서도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지키려는 사람들과 이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정부·기업들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앞서 잠시 언급한 ‘집단지성’에 대해 살펴보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집단지성은 어디로?
집단지성은 크게 두 가지 핵심 가정에서 출발한다. 첫째는 아무리 뛰어난 개인의 견해도 훨씬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견해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곤충이나 박테리아 등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집단적 상호관계를 통해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한 수의 개체는 일정한 시간을 거쳐 단일 개체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거나 질적으로 훨씬 높은 수준의 행동을 하곤 하는데, 이는 ‘복잡계’ 이론으로 체계화되고 곤충이나 박테리아 등의 실험에서 증명되곤 했다.
18 제임스 서로위키는 개인이 답을 모르더라도 집단은 매번 정답을 줄 수 있으며 특정 조건에서 집단은 가장 우수한 집단 내부의 개체보다 지능적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의 의견이 비전문가 개개인보다는 정답에 더 가깝지만 비전문가 집단의 결과를 조합한 예측보다는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첫째 사례로 흔히 제임스 서로위키(James Surowiecki)의 실험 사례가 제시된다. 위키피디아에서 ‘집단지성’을 검색해 보면 이 실험 사례를 볼 수 있다. 어떤 상황을 주고 직감이 뛰어나다는 투자 예측 전문가 한 명과 비전문가 여러 명에게 예측을 하게 했는데, 비전문가 여러 명의 의견을 종합한 예측 결과가 정답에 거의 들어맞았다는 것이다.인터넷 백과사전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위키피디아는 바로 이 개념에 착안해 만들어졌다. 개발자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백과사전을 만들어 냈다. 실제로 몇몇 연구 결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오류가 적은 것으로 알려진 덕분에 집단지성론이 힘을 얻기도 했다.
둘째 사례로 흔히 제시되는 것은 개미다. 개미는 그 하나하나가 높은 지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집단으로서 개미는 그 낱낱이 할 수 있는 일 이상의 것을 해낸다. 개미 집단 내에는 일관된 지휘 계통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들은 대단히 뛰어난 수준의 협동 행동을 한다. 심지어 개미 집단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유년기·청년기·노년기를 거쳐 수명을 다하는 현상도 관찰된다. 집단을 형성한 지 얼마 안 되는 개미 집단이 왕성한 모험 정신을 발휘하는 반면 노년기의 개미 집단은 활동력도 감퇴하고 기존의 행동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보수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개미 하나하나의 연령과는 전혀 무관한 현상이다.
이런 현상들은 대단히 신비롭고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이런 자연과학적 성취를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몇 가지 무리가 따른다.
첫째, 인류의 집단지성이 이제 막 발현되기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생물학적으로 크게 다를 게 없는 인간이 우주에 사람을 보내고 자기 자신의 의식과 뇌를 탐험하는 일을 집단지성의 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지식 하나조차 그동안 인류 전체가 쌓아올린 결과물 위에 놓여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잠재력만 두고 보자면 뛰어난 한 사람의 지혜보다 수천 명의 머리가 낫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별로 새롭지 않다.
둘째, 지금 인간 사회에는 집단지성의 ‘자발적’ 발현을 가로막는 강력한 사회관계들이 존재한다. 이 강력하고도 복잡한 관계는 개미나 박테리아들 사이에 생겨나는 관계와 질적으로 다르다. ‘복잡계’ 이론에 따르더라도 각각의 개체 사이의 관계가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단순할 경우 ‘저절로 생겨나는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집단의 고정 상태나 혼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혹은 그 중 어떤 관계가 다른 것에 비해 지나치게 강력하거나 약할 경우 곳곳에서 벌어지는 작은 변화들은 전체 계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고 기존의 관계들로 수렴되거나 사라져 버리곤 한다. 집단지성 이론을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고자 하는 주장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질서와 여기에서 비롯한 복잡한 사회 관계를 종종 무시한다.
셋째, 설사 인간들 사이의 수평적이고 광범한 네트워크가 생겨나고 이로부터 새로운 의식, 혹은 행동이 발전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반드시 인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마지막으로, 이론적 수준에서 벗어나 현실로 나오면 얘기는 훨씬 분명해진다. 사회 변화를 바라는 수백만 명이 원시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여기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회 변화를 원치 않는 단단하게 조직된 반대편 집단이 우리를 쉽게 분쇄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피지배계급의 역사적 경험이 응축된 이론과 이로부터 발전시킨 전략과 전술이 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역사적 성취(자연과학과 기술적 성취만이 아니라 사회학과 인문학적 성취를 모두 포함해)를 무시하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결론
인터넷은 분명히 기회비용을 낮춘 측면이 있다. 그러나 기회비용이 사회적 관계와 정치 참여 수준을 정하는 결정적 요소는 아니다. 미국인들이 선거 참여율은 미디어의 발달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19세기 후반에 가장 높았다.
인터넷이 점차 현실을 닮아가면서 위키피디아 같은 집단지성 실험(웹2.0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도 될 듯하다)도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힌 듯하다. 무엇보다 기존 사회는 내버려 둔 채 인터넷 세계만 새로운 단계의 민주주의로 진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현실을 조금만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인터넷의 가상 세계는 현실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현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운동에 유용한 도구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인터넷 세계에서 벌어지는 투쟁에서 거두는 성과들은 현실 세계의 운동에 크고 작은 기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사회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면 인터넷 세계의 발전 가능성도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공간은 현실과 다른 새로운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투쟁을 벌여야 할 또 다른 전장이다.
주
- 국제 인터넷 통계 산출 방식은 나라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개 3세 이상 인구를 모집단으로 이용률을 구한다. ↩
- 인터넷에 연결되어 인터넷 주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네임 서버에 등록돼 있는 컴퓨터, 인터넷에 접속해서 주소를 입력하고 들어갈 수 있는 웹사이트의 수를 생각하면 된다. ↩
- 직종과 연령에 따른 인터넷 이용률도 ‘정보화실태조사보고서(2007)’에서 확인할 수 있다. ↩
- Paul DiMaggio, “Social implications of the internet”, Annual Review of Sociology, 2001, 27:307-336. ↩
- 잭 골드스미스·팀 우, 《인터넷 권력 전쟁》, 뉴런(2006)에서 재인용. ↩
- Paul DiMaggio, “Social implications of the internet”, Annual Review of Sociology, 2001, 27:307-336. ↩
- 김은미·이준웅, ‘읽기의 재발견 : 인터넷 토론 공간에서 커뮤니케이션의 효과’, 《한국언론학보》 50권 4호(2006.8). ↩
- 같은 글. ↩
- 김상배 엮음, 《인터넷 권력의 해부》, 한울아카데미(2008). ↩
- 최항섭 외, ‘인터넷 상 네티즌 공유정보에 대한 신뢰행위 연구’, 정보통신정책연구원(2006.12). ↩
- 이준웅 외, ‘누가 인터넷 토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 온라인 의견지도자의 속성’, 《한국언론학보》 51권 3호(2007.6). ↩
- 김상배 엮음, 앞의 책. ↩
- 모순이게도 지식검색을 통한 지식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전문가 아닌 일반인의 답변이므로’ 하고 대답했다. 최항섭, 앞의 글. ↩
- 같은 글. ↩
- 1998년 당시 유력한 포털 사이트였던 알타비스타(Altavista)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면, 전체 사용자의 85퍼센트는 엄청나게 많은 검색 결과 중 단지 첫 번째 페이지만 본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googlarchy”(구글 질서)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
- 같은 글. ↩
- 잭 골드스미스·팀 우, 《인터넷 권력 전쟁》, 뉴런(2006). ↩
- 위키피디아(http://ko.wikipedia.org/wiki/%EC%A7%91%EB%8B%A8_%EC%A7%80%EC%84%B1 ) ↩
- 스티븐 존슨, 《이머전스》, 김영사(2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