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리비아 혁명, 어떻게 볼 것인가?
튀니지에 이어 이집트에서 민중 항쟁이 전개되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독재자에 맞서 아래로부터 일어난 결연한 저항의 의미를 노골적으로 깎아내리는 사람은 적어도 진보진영 내에서는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 반란이 리비아로 번져 그곳의 민중이 40년 넘는 카다피 독재에 맞서 온갖 억압과 빈곤을 종식시키고자 투쟁에 나서자 사뭇 다른 반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 일부는 리비아 민중 항쟁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더 나아가 사실상 아랍 혁명 전체의 의미를 깎아내린다.
‘친미’ 국가 튀니지와 이집트의 민중 항쟁을 “반미자주화 투쟁”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며 반겼던 자민통 계열이 이른바 ‘반미’ 국가 리비아에서 민중 항쟁이 일어나자 당황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일부는 리비아 민중 항쟁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회피하거나 침묵하고,리비아 혁명에 대한 비방
2 그래서 “무장 반란을 진압하려는 리비아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미국이 리비아에 대한 무력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3 즉, 카다피 반대 운동은 미 제국주의와 동맹한 운동이고 미국 개입의 길을 닦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서방의 군사 개입이 시작되면서 이들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리비아 혁명에 반대하는 자민통 계열 인사들은 리비아의 반란이 튀니지나 이집트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리비아에서는 [튀니지와 이집트와는 달리] 각계각층 대중의 자연발생적 반정부 투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기존 반정부 세력이 조직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급속히 무장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4 곽동기 전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책위원의 이 말은 범자민통 계열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는 착각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리비아 민중의 항쟁은 이집트나 튀니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래되고 끔찍한 독재 통치와 빈곤·실업 같은 경제적 곤궁에 맞선 저항이고, 미국과 서방 지배자들을 당황케 한 연쇄적 아랍 혁명의 한 고리다. 리비아 민중 항쟁이 미국과 동맹한 운동이라는 비방은 카다피 정권을 아직도 반미 정권으로 보는 자민통 계열의 정치적 오해에서 비롯한다. “카다피는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 카다피 정권은 미국과 한때 결사전까지 벌일 정도로 대립한 바 있는 반미 정권이[고] … 사회주의 노선을 펼쳤다.” 몇 년 전 출판된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도 이런 사례다. 이 책은 “악의 뿌리”인 미국이 “악惡”으로 지목한 나라들은 ‘선善’이라는 식의 흑백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 속에서 이 책은 카다피의 리비아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했다. 심지어 카다피가 2003년 미국·서유럽과 관계정상화를 한 뒤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영원한 ‘적’으로서 저항하고 있다”고 두둔했다.6 황당한 주장조차 있다. 〈통일뉴스〉가 번역 소개하고 있는 〈제4언론〉이 대표적 사례다. 7 “서방 언론에선 리비아 상황에 대한 끔찍한 정황들을 계속 발표하고 있지만” 실제로 리비아는 “안정적”이고, “도시에 무력을 행하는 군대는 없다”는 것이다. 8 카다피의 군대가 기관총과 로켓과 전투기로 시위대를 무차별 학살하고 있는데도 “군대[는] … 시위자에게 총을 쏘지 말[라는] …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리비아 민중 항쟁과 그에 대한 카다피의 잔인한 탄압은 사실이 아니며 “수구 언론 매체들이 퍼뜨리는 … 유언비어”라는9 물론 서방 지배자들은 무슨 명분을 들이대서라도 군사적 개입을 하고 리비아 혁명뿐 아니라 모든 아랍 혁명을 자기 목적에 유리하게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다루겠지만 미국과 서방이 원하는 것은 리비아 민중이 카다피를 혁명으로 타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투쟁을 억제하고 원유 시설을 확보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미국의 무력 침공 계략에 말려들지 않는 길은 오히려 리비아 혁명이 더 심화·확대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도록 그에 연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리비아 민중 항쟁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호석 소장은 리비아 민중 항쟁을 “지지하는 것은 미국의 리비아 무력 침공 계략에 말려드는 치명적 실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10 특히, 그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투쟁의 전면에 나선 ‘인터넷 세대’ 젊은이들이 제국주의 세력의 “원격 조종”을 받았다고 비하했다. 이것은 처음 시위를 호소한 페이스북 그룹 “우리 모두 칼레드 사이드다” 11 등을 완전히 모욕하는 말이다. 게다가 이집트 민주화 운동이 2000년대 초중반 이라크 전쟁 반대, 팔레스타인 항쟁 연대 속에서 성장했음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정기열 교수는 마치 무슬림형제단만이 혁명적 세력이라는 듯이 말하지만, 그들은 그동안 개혁주의적 구실을 했고, 혁명이 더 심화할수록 혁명의 전진을 방해할 것이다.
정기열 교수는 더 나아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의 칼럼에서 “아프리카, 중동 지역의 수십 년 외세 지배 세력이 이번 아랍 혁명의 배후에 숨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리비아 혁명뿐 아니라 아랍 혁명 전체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냈다.그는 “진짜 아랍 혁명”이니 “가짜 민주 혁명”이니 하면서 마치 진정한 혁명을 지지하는 듯이 말하지만, 그의 입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지금 아랍 세계에서 벌어지는 “독재정권 민주화” 운동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운동을 미국의 “반제자주 국가들에 대한 ‘정권 교체’ 카드”의 결과로 여긴다. 이때 그가 강하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북한이다. 즉, 북한에서 민주화 운동이 벌어질 리 없고,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NGO를 앞세운 미국 제국주의 세력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리비아 혁명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랍 혁명의 미래와 관련해서뿐 아니라 한국 진보진영의 변혁 전략과 관련해서도 함의하는 바가 크다. 이 글은 카다피 정권이 과연 진보적인 반제국주의 정권인가, 리비아 혁명의 성격은 무엇인가, 서방의 군사적 개입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등을 다룰 것이다.
카다피 정권은 진보적인 반제국주의 정권인가?
리비아는 30년 넘게 이탈리아의 혹독한 식민 통치를 받았고 제2차세계대전 중반부터 9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군정의 지배를 받다가 1951년에 독립했다. 당시 리비아는 최빈국이었고 국왕 이드리스는 영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영국과 미국은 나세르의 영향력을 봉쇄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리비아에 군사 기지를 유지했다. 1955년 처음으로 유전 개발이 추진되고 1961년 석유를 수출하게 되면서 리비아 경제가 변하기 시작했다. 노동계급이 창출됐고, 트리폴리와 벵가지가 산업화했고,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리비아가 세계적 석유 기업들의 천국이 되고 석유 수익에 따른 부가 극소수에 집중되자 불만도 증대했다.
1967년 ‘6일 전쟁’은 친서방적인 리비아 왕정의 붕괴를 촉발하는 계기였다. 리비아 노동자와 학생 들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침략에 항의해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있는 영국과 미국 기업들의 재산을 공격했다. 석유 산업 노동자들도 투쟁에 나섰다. 시위가 계속되자 정권은 휘청거렸다. 그러나 6일 전쟁에서 아랍의 패색이 짙어지자 투쟁은 사그라들었고 국가는 점차 통제력을 회복했다.
노동계급의 저항이 사라지자 리비아의 중간계급 지식인층은 왕정을 제거할 다른 길을 모색했다. 1969년 젊은 장교들이 이집트의 나세르를 모델 삼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 무혈 쿠데타를 이끈 사람이 바로 27세의 카다피 대위였다.
쿠데타 직후 최고 기관으로 설립된 혁명사령부위원회RCC(카다피와 장교 11명으로 구성됐다)는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를 따라 국내외 정책을 추진했다. 영국군과 미군을 철수시켰고, 이탈리아인 3만 명의 자산을 동결하고 추방했고, 외국계 은행들과 석유 기업의 60퍼센트를 국유화했다. 또, 석유 다국적기업들의 권한을 축소했다. 덕분에 카다피는 몇 년 뒤 1973~74년에 유가를 무려 네 배나 끌어올릴 수 있었다. 카다피는 늘어난 석유 수익으로 야심찬 발전 계획을 추진하고 몇몇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도로, 학교, 병원 등을 지었고,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고,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그러나 서방 국가들은 1973~74년 유가 인상을 그럭저럭 버틴 반면 리비아는 1980년대 중반 유가가 하락하자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카다피는 모든 아랍인들이 하나의 국가로 단결해야 한다는 믿음(범아랍주의) 아래 통일 아랍 국가 수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집트·시리아·리비아 세 나라 정부의 합의로 1972년 수립된 아랍공화국연방Federation of Arab Republics은 이집트의 사다트가 미국과 타협해 감에 따라 내부 갈등으로 곧 붕괴했다. 모든 아랍인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려는 시도는 이미 10년 전 아랍 민족주의의 전성기 때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한 아랍연합공화국United Arab Republic(1958~61년)이 단명함으로써 실패한 바 있다. 이런 사실은 카다피가 이미 한계가 드러난 아랍 민족주의에 뒤늦은 열정을 불태운 것이 가망 없는 일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1967년 ‘6일 전쟁’이 끝난 뒤 1970년대 동안 아랍 정부들이 이집트를 선두로 점점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 정책을 중단하고 실용주의적 길로 들어서면서 카다피는 점점 고립돼 갔다. 그는 함께 서방에 반대할 이집트 같은 동맹을 붙잡으려 분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애초 비판적이었던 소련에 기대게 됐다.
카다피는 쿠데타 이후 모종의 사회주의를 내세우기도 했다. “리비아는 사람들의 빈곤, 굶주림, 후진성, 무지를 제거하는 길을 따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카다피가 말한 이른바 ‘아랍 사회주의’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사회주의는 계급 차이의 철폐를 뜻하는 게 아니다. 그런 차이는 사회에 필수적이다. … 사회주의는 사회 정의를 뜻한다. 그것은 계급 차이의 격차를 좁히는 중간의 길이다.” 카다피는 이 “중간의 길”을 따라 모든 리비아인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유일 정당, 아랍사회주의연합ASU을 통해 정치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바깥에서는 어떤 정치 활동도 불가능했다. 쿠데타 몇 년 후에 카다피는 ‘제3의 진로 이론Third Universal Theory’이라는 공식 이데올로기를 발표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리비아(뿐 아니라 전 세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있는 길을 따라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3의 진로 이론’은 역사의 원동력이 민족주의와 종교라는 개념에 근거해 있었다.
새로운 카다피 정부는, ‘새로운 국가는 인민 대중이 그 기초다’ 하는 것을 공식 입장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노동계급이 주도적으로 나서는 것을 배격했다. 산업화 속도만큼 노동계급 규모도 빠르게 성장해 석유, 건설, 제조업, 항만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1971년 14만 명에서 1978년 31만 5천 명으로 늘었다(당시 리비아의 인구는 약 3백만 명). 그럼에도 노동계급은 국가가 통제하는 조합 말고는 자주적 단결권이 없었다. 1972년 3월 트리폴리의 항만 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일주일간 파업을 벌이자 정부는 파업과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카다피는 “노동조합과 정치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정치를 하는 것은 아랍사회주의연합뿐이다”고 선언했다. 혁명사령부위원회는 ‘정당을 건설하거나 참여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12 혁명사령부위원회는 공식 폐지됐는데, 카다피는 이를 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통치자들이 인민 대중에게 권력을 넘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다피는 이름이 혁명적인 각종 기구들을 만들며 진보적 지도자 행세를 했지만, 사실 그 기구들은 반대파에 맞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편이었다. 1973년 “문화혁명”은 함께 쿠데타를 모의했던 옛 동료들 가운데 사다트 지지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고, 1976년 “인민회의People’s Congress”와 “인민위원회People’s Committee”를 건설한 것도 반대 세력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1975년 카다피 제거를 기도한 쿠데타가 두 건 있었고, 1976년 벵가지 시위에서는 적어도 학생 열 명이 경찰에 살해됐다. 카다피는 세계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기라며 그가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른 “기초인민회의Basic People’s Congress”를 도입했다. 그리고 이제 리비아는 “자마히리야Jamahiriya”(인민 대중의 국가라는 뜻)라고 선언했다.그러나 이른바 ‘인민 권력’ 기관들이 지역과 부족 경쟁자들을 고무하고 개인적 야망을 가진 새로운 관료들을 형성시키자, 카다피는 ‘인민회의’들과 ‘인민위원회’들 안에 또 다른 정치 권력 기구인 “혁명위원회”를 설립했다. ‘인민회의’를 만들어 대중에게 권력을 넘긴다고 해놓고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 거기로 권력을 집중함으로써 인민회의를 껍데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혁명위원회의 우두머리는 경영자들과 고급 관료들이었고, 카다피는 여기에 믿을 만한 젊은 간부들을 포진시켰다. 혁명위원회들은 공장, 사무실, 학교, 대학, 도시 지구, 군대 내 곳곳에 있었고, 거기서 정치 경찰 노릇을 했다. 막 생성되던 군대 내 반대파를 제거하고, 학생 저항의 조짐을 살피기 위해 대학을 순찰하고, 국외 추방한 반대 세력을 감시·살해했다.
카다피가 권력을 인민 대중에게 넘겨줬고 리비아는 자마히리야(인민 대중의 국가)라는 주장은 정권 정당화론일 뿐이다. 카다피는 권력 유지를 위해 한편으로는 점점 더 가혹한 탄압을 동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유로 벌어들인 돈으로 떡고물을 나눠 주면서 확고한 충성파인 지지세력을 철옹성처럼 꾸렸다. 여기서 카다피의 친인척이 핵심 중 핵심이었다. 둘째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은 석유회사와 국영 방송사를 소유하고, 영국에 거주하면서 서방의 거물급 인사들과 두루 접촉했다. 넷째 아들 무타심은 군 사령관이고, 여섯째 아들 카미스는 특수부대 사령관이다. 큰아들 무함마드는 우편과 통신위원회를 관장한다. 다섯째 아들 한니발은 석유 산업에, 셋째 아들 사디는 국영 영화 산업에 관여한다. 딸 아이샤는 사설 금융기관을 소유하고 에너지와 건설에도 이권이 있다.
리비아와 서방 ― 적에서 친구로
리비아의 경제는 1980년대 중엽 국제 유가 하락으로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리비아 국가 수입의 75~90퍼센트가 석유에서 나올 정도로 석유 수출 의존도가 높고 다른 산업이 취약한 상황에서 리비아 경제는 유가 하락으로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리비아는 석유 없는 주변국들(이집트나 튀니지)보다 훨씬 부유했지만 카다피가 내세웠던 자립 경제 건설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74년 네 곱절 뛴 유가 덕분에 시작된 거창한 산업화 프로젝트들은 석유 수익 감소로 유산됐다. 1981년 시작된 미국의 대리비아 경제 제재는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1992년부터는 유엔 제재가 추가됐고, 1996년부터는 이란·리비아 제재법으로 석유 개발마저 봉쇄됐다.
이 시기 미국과 서방 정부들이 카다피와 갈등을 빚었던 것은 그의 국내 정책 때문이 아니었다. 이집트 등 다른 아랍 정부들과 달리 그가 서방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가장 강경한 반서방·반시온주의 아랍 지도자로서 위상을 높이고 있는 카다피를 손볼 필요가 있었다. 1981년 집권한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리비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카다피를 권좌에서 축출”하겠다고 공표했다. 레이건 정부는 리비아 해상과 영공에서 계속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을 일으키더니 마침내 1986년 4월 15일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폭탄 60톤을 쏟아부었다. 이 공습으로 무고한 리비아인 1백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또, 미국은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에서 발생한 팬암 항공기 폭파 사고의 배후에 카다피가 있다고 지목하고 경제 제재를 확대했다.
1986년 4월 공습을 당한 직후 카다피는 “우리는 전 세계 민중 혁명을 선동한다”고 호기를 부렸지만, 리비아는 점점 궁지에 몰렸다. 1981년 미국이 처음 경제 제재를 했을 때만 해도 리비아는 소련·동유럽과 교역을 늘렸고, 소련의 동맹국들과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후반 한창 미국과 충돌하고 있을 때 소련은 리비아를 지원하지 않았다. 리비아는 말로는 계속 미국을 비난했지만, 1991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 중립을 취했고 1992년 유엔 제재 이후에는 제3국을 통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클린턴 정부는 카다피가 팬암기 폭파 사건에 책임을 지지 않는 한 관계를 개선하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나왔다.
결국 카다피는 1999년 서방이 팬암기 폭파 사건으로 지목한 용의자 두 명을 넘겨줬다. 그러면서 그는 “세계는 격렬하게 변하고 있어 생각과 통치 방식을 바꾸어야 하며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세계의 흐름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2003년에는 재판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유가족들에게 배상금도 지급했다. 또, 같은 해 “대량살상무기와 모든 종류의 테러리즘에서 자유로운 지구” 건설에 앞장서고 싶다며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카다피는 서방과의 화해 국면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 2세와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이것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사태 진전”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사실 리비아는 폐기할 대량살상무기도 없었다. 리비아가 국제 감시 기구에 넘긴 것은 국제적으로 금지된 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물질과 장비 및 프로그램”뿐이었다.
유엔과 미국이 경제 제재를 해제한 이후 서방 강대국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단연 석유 개발이었다. 리비아는 확인된 원유 매장량만 3백91억 배럴로 세계 8위이고, 유전 개발이 활발해지면 매장량이 1천 억 배럴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과 유럽 정부 지도자들은 리비아로 달려가 카다피와 새로 친분을 쌓았다. 카다피 정권의 억압 통치와 자국 국민에 대한 인권 유린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됐다. 미국과 유럽의 거대 석유 기업들은 리비아 석유 개발 이권을 선점하려고 적극 달려들었고, 중국과 한국 등도 이에 가세했다.
카다피는 40년 만에 석유채굴권 공개 입찰에 다국적기업들도 참여하도록 허용했다. 광구 채굴권 1백 개를 국제 입찰에 부쳐 이미 배당했고, 2007년 현재 광구 채굴권 2백20여 개를 더 배분할 계획이다. 1970년대 석유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자립’ 경제를 추구했던 카다피가 이제 자국 경제를 해외에 개방하고 해외 투자 유치를 위한 세일즈에 나선 것이다.
사실, 이런 경제 ‘개방’ 정책은 이미 1990년대에 시작됐다. 공기업 특혜 폐지와 사기업화, 외국인 투자 유치 강화를 위한 법 개정, WTO 가입 등을 추진했다. 또, 2001년과 2002년에는 IMF 조사단을 받아들여 경제 전반에 대해 협의하고 조사단 권고에 따라 공정환율公定換率을 시장환율에 접근시켰다. 카다피는 2000년 어느 미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오늘의 세계는 어제의 세계가 아니므로 현재의 리비아도 과거의 리비아가 아니다”며 “집권 이후 전 세계가 급변했으며 나도 그 과정에 부응했다”고 말했다.
물론 그 후에도 카다피는 “우리를 정탐하고 국부를 훔치려는 식민 세력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한계를 드러낸 그의 민족주의가 내부 단속용 미사여구로 사용될 뿐임을 보여 준다.
리비아 혁명과 서방의 군사 개입
13 얘기가 얼마나 황당한 위선인지 잘 보여 준다.
2000년대 동안 리비아와 서방의 관계가 친밀해지면서 리비아로 달려든 세계 굴지의 석유 기업들이 황금 열매를 약속받은 한편 카다피 일가와 그 측근들은 엄청난 부를 쌓아올렸다. 석유 산업과 각종 이권에 관여하는 카다피 일가의 재산은 1천5백 억 달러(약 1백69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다피 일가는 해외 부동산과 기업에 공개적으로 투자하며, 한때 식민 모국이었던 이탈리아의 정유회사와 통신사 등에 지분을 갖고 있다. 국영 석유회사와 그 자회사들은 꾸준히 카다피 일가의 수입원 구실을 한다. 이는 “카다피가 추구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는 사라지고 개인적 수요를 넘는 부의 축적은 금지된다”는반대로, 경제 ‘개방’ 정책 속에서 리비아 민중의 삶은 악화했다. 1990년대부터 카다피 정권은 공공 지출을 크게 줄였다. 특히 보건과 교육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보조금 제도와 실업수당 등을 폐지했다. 게다가 IMF 권고를 받아들인 결과 허약해진 통화 때문에 인플레이션마저 발생해 노동자들은 실질임금 하락으로 고통받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투잡’ 신세인 한편,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실업에 시달렸다. 정부 공식 통계로는 실업률이 20퍼센트이지만 실제로는 35퍼센트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리비아 인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20세 이하 젊은 층이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다.
계속된 억압 통치와 함께 이와 같은 빈곤이 카다피 정권에 맞서 리비아 민중이 목숨을 건 저항에 나선 이유였다. 튀니지나 이집트 민중과 꼭 마찬가지로 말이다. 튀니지의 벤 알리와 이집트의 무바라크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본 리비아 민중은 용기를 내서 2월 17일 저항의 포문을 열었다. 벵가지에서 시작된 저항은 중요한 승리를 거두며 확산됐다. 수도 트리폴리를 제외한 여러 도시들에서 혁명위원회가 건설됐는데, 혁명위원회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와 혁명을 심화시킬 잠재력을 보여 줬다.
그러나 카다피 정권과 그 지지 세력이 신속하게 온갖 중무기를 동원해 발악적인 반격에 나서자 저항세력은 불리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카다피가 나눠 준 떡고물로 혜택을 받아 온 사람들은 현 체제 유지에 모든 것을 걸고 카다피 정권 방어에 나섰다. 잔혹한 학살이 벌어지고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금세 서방의 군사 개입 얘기가 흘러나왔다. 모락모락 피어오른 군사 개입설 자체가 저항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우선, 카다피가 다시 한번 반제 투사로 행세해 지지를 회복할 가능성을 열어 줬고 반대로 저항세력은 고립되거나 정당성을 의심받게 됐다. 또, 개입 시도는 혁명 지도부 내에 분열을 일으켰다. 일부는 서방의 개입에 분명히 반대하지만, 다른 일부, 특히 카다피 정권에서 일탈한 옛 권력자들은 서방에 기대려 한다. 이들은 그동안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자주적 행동에 계속 제동을 걸었다.
14 이것은 미국과 서방의 진정한 관심사가 석유이고, 항쟁의 전진에는 조금치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억제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백악관 대변인 제이 카니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반대파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다”고 실토했듯이, 오바마 정부는 카다피 정권에서 일탈한 옛 권력자들과 접촉하려고 애썼다. 그들을 후원하고 그들과 협상해, 카다피와 사이 좋던 시절에 미국의 오일 메이저들이 리비아에 세운 정유시설과 각종 계약을 보존하려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는 가장 먼저 임시과도국가평의회를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고, 영국은 비밀요원을 투입해 반정부 저항세력 지도부와 접촉하려다 반정부 시위대에 붙잡히기도 했다.15 누가 리비아 정부군이고 저항세력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다국적군은 정부군과 저항세력 간 격전지인 벵가지에도 폭격을 퍼부었다. 저항세력에 대한 카다피 군의 공격도 계속되고 있어, 리비아 민중은 양쪽에서 학살당하고 있는 셈이다.
마침내 3월 20일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가 리비아를 폭격했다. 그들은 카다피의 학살을 막고 리비아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군사 개입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개입”은 번지르르한 명분일 뿐이다. 당장에 그들이 보호하겠다는 무고한 리비아인들이 이번 폭격으로 많이 죽었다. 1995년 보스니아 공습에 참가했던 전 영국 공군 중위 존 니콜은 이런 종류의 작전에서는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이라고 말한다.“인도주의적 개입”의 실체는 이미 2003년의 이라크 전쟁에서 드러났다. 후세인 치하에서 고통받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인도주의적 개입”으로 죽음과 파괴와 분열을 겪었다. 아부 그라이브 감옥의 고문과 학대는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서방의 군사적 개입은 리비아 민중의 저항을 돕기는커녕 카다피를 강화할 수 있다. 카다피를 좋아하지 않는 평범한 리비아인들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격에 분노할 것이고, 카다피는 이를 이용할 것이다. 지금 리비아를 공격하고 있는 국가들은 전에 리비아를 식민 통치하던 국가들이다. 이탈리아의 30년 식민 통치는 유독 잔혹했던 것으로 유명하고, 영국과 프랑스도 그 뒤를 이어 9년이나 리비아를 통치했다. 미국은 1969년 카다피의 쿠데타 전까지 본토 밖에서는 가장 큰 공군 기지를 리비아에 뒀었다. 리비아인들에게 지금의 공습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권리’라도 주장하는 듯한 식민 본국들의 귀환으로 보일 것이다.
서방의 개입이 저항 민중이 아니라 독재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 뿐이라는 사실은 1999년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격에서도 입증됐다. 나토는 군사 개입이 밀로셰비치의 코소보 알바니아계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미국은 세르비아의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20세기 말의 “새로운 히틀러”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토의 폭탄에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밀로셰비치가 아니라 그에 맞서 오랫동안 투쟁해 온 사람들이었다. 1991년과 1996년에 세르비아 민중은 밀로셰비치를 거의 타도할 뻔했다. 밀로셰비치는 그 뒤에도 저항을 완전히 잠재울 수 없었다. 이 일을 이룬 것은 나토의 폭격이었다. 공습은 밀로셰비치를 좋아하지 않던 세르비아인들도 분노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밀로셰비치는 분노의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나토의 폭격이 강화해 준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밀로셰비치였던 것이다.
서방이 카다피의 저항세력 탄압을 빌미로 리비아를 폭격한 것은 누가 봐도 이중 잣대다. 예컨대 바레인에서는 시위대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지만 서방은 미국 제5함대가 있는 전략적 요충지 바레인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을 감고 있다. 서방이 후원하는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도 시위대에 발포해 50여 명을 죽였지만 서방은 이에 대한 군사 개입을 검토하지는 않는다.
서방이 리비아 혁명의 편인 척하는 것은 위선이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카다피가 끔찍한 독재자라는 사실을 결코 모르지 않았지만 지난 수년 동안 그와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지금 카다피가 자기 국민을 학살하는 무기는 바로 서방이 제공한 것이다. 특히 이번 공습에 가장 앞장선 프랑스는 리비아에 ‘평화적 핵’ 사용을 지원할 정도로 관계가 돈독했고, 2007년 대선 당시 현 대통령 사르코지가 리비아 정부의 돈을 받았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서방이 어쭙잖게 변명하더라도 이번 군사 개입의 진정한 목표는 분명하다. 첫째, 석유를 통제하는 것이다. 석유는 유럽 지배자들이 이번 작전에 그토록 적극적으로 나서는 매우 중요한 이유다. 리비아 석유의 85퍼센트가 유럽으로 흘러들어간다. 미국과 유럽의 지배자들은 석유를 둘러싼 기존 사업 계약을 지키고 싶어한다. 둘째, 최근 아랍을 뒤흔든 반란으로 잃어버린 서방의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단 두 달 만에 서방은 아랍의 두 핵심 동맹인 튀니지와 이집트를 잃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리비아에 군사 개입을 해서 전진하는 아랍 혁명 연쇄의 고리를 끊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다시 확보할 발판을 마련하고 싶어한다. 이런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리비아를 분단시킬 각오까지 돼 있다.
그러나 서방의 바람대로 되기는 녹록치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점령으로 여력이 많지 않아 지상군까지 투입하기는 쉽지 않은 데다 유럽 국가들은 부담을 떠안고 싶어하지 않는다. 〈가디언〉의 표현대로 “유럽과 미국이 아랍 동맹 뒤에 몸을 숨기려”는 이유다. 사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석유와 아랍 지배의 욕구는 충만해도 용의주도한 전략은 없어 보인다. 나라마다 목표가 엇갈리고, 유럽과 인접한 지중해 국가 리비아에서 전쟁의 장기화가 낳을 경제적·지정학적 결과를 감당할 태세가 돼 있지 않은 듯하다.
서방의 군사 개입으로 리비아 혁명은 중대한 위기에 처했고, 서방의 군사 개입과 카다피 세력 모두에 맞서 싸워야 하는 더욱 어려운 처지가 됐지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희망은 리비아 민중의 혁명 운동을 전진시키는 것이다. 노동자 대중 파업과 시위 같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권력을 끝까지 부여잡으려는 독재자를 몰아내는 유일한 길이다. 노동자들이 기업주를 내쫓고 일터와 자원을 통제해야 한다. 리비아는 전체 인구 6백여만 명 가운데 노동자가 1백60만 명가량 된다. 반란이 확대되고 심화되면 서방의 군사적 개입도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리비아는 아랍 혁명의 한 고리이지 혼자가 아니므로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집트와 튀니지의 연대도 중요한 구실을 할 것이다.
우리는 카다피가 퇴진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서방 군대가 아니라 그 나라 노동자·민중의 손으로 성취되기를 바라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진보단체들이 이 점에서 모두 명확한 것은 아니다. 한편에는 서방의 군사 개입을 명확하게 반대하지 않는 세력이 있고(예를 들어 진보신당), 다른 한편에는 리비아 민중 항쟁을 지지하지 않고 사실상 카다피 정권을 옹호하는 세력이 있다(예를 들어 자민통 인사들). 진정한 진보 지지자라면 서방의 군사 개입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도 리비아를 포함한 아랍 전역에서 혁명이 확대·심화할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한다.
주
- 임승수 2011. 임승수는 중동의 민중 항쟁을 지지하며 그것이 ‘미국 일극체제에 파열구를 내고 있다’고 옳게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반미 국가 대열에 포함시켜 온 리비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리비아 민중 항쟁은 반미 국가를 위협함으로써 미국을 돕고 있는가, 아니면 미국과 서방에 타격을 가하고 있는 아랍 혁명의 일부인가? 지금 상황에서 리비아 혁명의 성격 문제를 회피한 채 중동 민중 항쟁을 논할 수는 없다는 게 명백하다. ↩
- 한호석 2011. ↩
- 한호석 2011. ↩
- 곽동기 2011. ↩
- 정호연 2008, 251쪽. ↩
- 한호석 2011. ↩
-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와 <통일뉴스> 등의 정기 기고가인 정기열 칭화대학교 초빙교수가 <제4언론>의 책임주필이다. ↩
- 안나 바르폴로미바 2011. ↩
- 한호석 2011. ↩
- 정기열 2011. ↩
- 이 그룹 이름은 2010년 여름 알렉산드리아에서 경찰에게 살해된 활동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
- 리비아의 정식 명칭은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 인민공화국(자마히리야)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이다. ↩
- 정호연 2008, 235쪽. ↩
- <한겨레>(2011.3.22). ↩
- <한겨레>(2011.3.21). ↩
참고 문헌
곽동기 2011, ‘미국의 아랍정책으로 본 리비아 사태’, <통일뉴스>(2011.3.7).
안나 바르폴로미바 2011, ‘미국/서방의 군사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한 리비아에 대한 거대한 정보전쟁’, <통일뉴스>(2011.3.6).
임승수 2011, ‘중동의 인민항쟁을 보며 드는 몇 가지 단상’, <민중의 소리>(2011.2.25).
정기열 2011, ‘아랍 민중혁명의 미래와 세계제국 미국의 운동’, <진보정치>(2011.2.28-3.6).
정호연 2008, ‘리비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통일아랍을 꿈꾸다’,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시대의창
한호석 2011, ‘자마히리야 붕괴의 비극’
<통일뉴스>
<한겨레>
socialistworker.org
socialistworker.co.uk
wsws.org
Jonathan Bearman, ‘Libya – the development of the Qadhafi regime’, International Socialism 24(Summer 1984)
Phil Marshall 1984, ‘Libya-‘the middle road’’, Socialist Review(1984 May)
‘Libya Raid-Reagan’s terror’, Socialist Review(1986 May)
Andy Zebrowski 1986, Middle East-‘The third way’’, Socialist Review(1986 May)
Mike Haynes 1987, ‘Illusion or confusion?’, Socialist Review(1987 M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