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이슬람주의의 과거와 현재 *
이 글의 초기 버전은 2007년 4월 카이로아메리칸대학교에서 열린 카이로 논문 발표 심포 지움인 ‘이집트: 30년간의 저항’에서 발표됐다. 사메 나기브는 이집트의 사회주의자다.
정치적 이슬람의 성장은 확실히 지난 30년 동안 이집트 사회와 정치의 성격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1970년대 초에는 주로 좌파와 세속적 민족주의 세력들이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 당시 종교적 성격을 띠는 집단들은 정치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비교적 소수였다. 21세기 초 상황은 크게 바뀌어, 정치적 이슬람이 가장 중요한 야당 세력이 됐다. 이슬람주의 조직들은 학생과 전문가 단체, 도시 빈민가 등에서 헤게모니 세력이다. 2004년 12월 시작된 민주화 운동에서 세속 야당들은 기껏해야 2천여 명을 거리로 모았지만, 무슬림형제단은 몇 개월 동안 이집트 전국에서 지지자 수만 명을 모았다(5장[이 잡지에 실린 라밥 엘 마흐디의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성장과 그 여파’ ― M21]을 참조하시오). 2005년 11월 총선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은 고작 1백50명이 출마하고 무바라크 정부의 보안군에 의해 선거운동이 크게 제약을 받았음에도(특히 3차 투표에서) 88석(전체 의석의 거의 20퍼센트)이나 얻었다. 반대로, 나세르주의자·좌파·자유주의자를 포함한 세속 야당들은 모두 합쳐 14석(전체 의석의 3퍼센트를 약간 넘는 수준)을 얻었을 뿐이다.
1 이슬람 지하드의 출현과 성장, 타블리그나 다와 같은 비정치적 이슬람 단체들의 급격한 확산, 특정 이슬람 단체에 속하지 않은 이슬람 저술가·사상가·설교자 들의 영향력 증대 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이집트 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변화를 설명하고자, 이 글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잘 조직돼 있고 정치적으로 성공한 무슬림형제단을 집중 분석할 것이다. 1970년대 초에는 비주류 세력일 뿐이었던 조직이 어떻게 21세기 초에는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야당 세력이 될 수 있었는가? 이 과정은 이 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정치적 상황 변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런 상황 변화와 이 운동의 성장은 이 운동의 담론과 이데올로기와 강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 글은 무슬림형제단을 분석할 때 적용돼 온 이슬람주의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앞의 질문에 잠정적 답을 내놓으려 한다.
지난 30년 동안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이 강해진 것은 이집트뿐 아니라 중동 지역 전체에서 이슬람주의가 성장한 것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집트에서 이 경향은 더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무장 단체들, 특히 가마트 이슬라미야Gama’at Islamyya(이슬람 단체라는 뜻)와다양한 해석 지난 30년 동안 이집트와 중동에서 이슬람주의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이를 둘러싼 이론과 해석 들이 백가쟁명처럼 나타났다. 좌파에서 사미르 아민(Amin 2001)이나 질베르 아슈카르(Achcar 1981, 2004) 같은 학자들은 이슬람주의를 페르시아 만 연안국의 자본가들이나 수출입 기업인들과 연관된 지배계급 분파를 대변하는 운동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슬람주의를 근본적으로 반동적이고 반민주적인 운동으로 봤다. 아슈카르가 볼 때,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한 ‘근본주의자들’은 이집트 정부가 사회 내에서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제5열’[내부에 있으면서 외부 세력에 호응해 정치적·군사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교묘하게 위장한 집단을 일컫는 말 — M21]이었다. 특히, 좌파와 맞붙을 효과적인 대항마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근본주의자들’의 운동을 대하는 이집트 정부의 태도는 심각한 사회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모든 나라 지배계급이 보이는 태도와 대단히 유사하다. 즉, 그런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지배자들은 극우와 파시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대로라면, 이슬람주의 운동은 부르주아지가 좌파를 약화시키려고 국가와 연합해 중간계급 일부를 동원하려 한 결과다.
3 1980년대와 1990년대 이슬람주의 운동의 역사를 보면, 무슬림형제단 같은 조직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회 집단을 대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슬람주의 운동의 역사는 온갖 변화와 모순으로 가득하며, 이 운동은 체제 친화적일 때도 있었고 반체제적일 때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슬람주의 운동을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고정’시키는 것은, 비판적·역사적 분석을 중요시하는 이 두 좌파 학자가 속한 학파의 전통과 어긋나는 몰역사적·기계적 분석 방법이다. 내가 아래서 분석할 것처럼, 무슬림형제단은 항상 유동적인 조직이었다. 내적 모순과 사회적 구성 변화 때문에 이 조직의 전략·전술·담론·강령은 항상 변해 왔다.
이슬람주의, 특히 무슬림형제단을 이렇게 분석하는 사람들은 특정 역사적 국면에서 발생한 이슬람주의 운동의 일반적 성격을 그 역사적 상황에서 곧바로 도출해 내려 한다. 그러면 이 운동이 성장하게 된 사회적·경제적·문화적 배경의 변화와 전환뿐 아니라, 이 운동의 사회적 구성 변화와 전환도 무시하게 된다. 나세르 집권 이전 이슬람주의 운동의 역사나4 그 중에서 이집트 이슬람주의에 관한 가장 대표적 연구는 캐리 위컴(Wickham 2002)의 ‘이슬람을 동원하기’다. 위컴은 이슬람주의 운동이 태로Tarrow가 정의한 사회운동 개념과 딱 맞아떨어지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태로는 사회운동을 “공통의 목적과 사회적 연대를 바탕으로, 엘리트·반대파·정부 당국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집단적 도전들”로 정의했다.(Tarrow 1998: 4) 위컴은 이런 정의에 기초를 두고 1970년대 말부터 무슬림형제단이 어떻게 권위주의적 상황에서도 회원들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를 분석했다. 위컴은 국가의 통제 능력이 약해지면서 사회정치적 주변 집단이 이용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회 구조’가 확대됐다고 주장했다.
좀더 최근에 이슬람주의를 사회운동 이론SMT, Social Movement Theory의 틀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SMT를 이집트 이슬람주의의 성장을 분석하는 도구로 활용하면서 위컴은 이런 형태의 집단적 불만 표출 행동이 단순히 불평불만이 누적된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을 모으려는 노력들이 성공한 결과임을 보여 줬다. 위컴은 이슬람주의에 관한 사회과학 연구를 망쳐 왔던 이슬람 예외주의와 이슬람 환원주의적 가정들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위컴식의 접근법도 약점이 있다. 첫째, 바야트는 SMT 분석 방식에 관해 “내부적 요인이나 특히 외부적 요인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운동의 관심사와 초점, 심지어 방향조차 바뀔 수 있다”고 반박했다.(Bayat 2005: 897) 이와 연관된 문제가 있는데, 서구의 비교적 개방적인 정치 상황과 이집트의 권위주의적 정치 상황은 다르다는 것이다. 바야트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적 조건과 운동은 흔히 내부 차이와 이견을 낳는다. 반대할 수 있는 수단과 기회가 있으므로 서로 충돌하는 사상들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교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상황은 이와 다르기 때문에, 단결되고 동질적인 무슬림형제단의 겉모습과 일반적인 정치 구호들의 이면에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이 숨어 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비판
지난 30년 동안 이슬람주의의 성장을 설명하려는 또 다른 시도는 이 운동의 문화적 측면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이 운동이 서구 현대성[모더니티]의 위기·실패와 연관된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슬람주의의 성장은, 스스로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유력한 경향으로 득세한 서구의 세속적 현대성에 맞서서 차이, 문화적 독립성, 대안적 이데올로기 틀을 내세우려는 시도와 밀접히 연관된 것이다. 예컨대, 뷔르가와 다월(Burgat and Dowell 1993)은 중동의 이슬람주의 운동이 정치적 반식민지 투쟁, 경제적 반식민지 투쟁에 이어 문화적 독립에 초점을 맞춘 세번째 반식민지 투쟁 단계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이집트 역사가 타리크 알비쉬리(Al-Bishri 1983)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옛 반식민지 투쟁 물결이 독립의 문화적·문명적 측면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비롯한 심각한 약점이, 예컨대 나세르주의 실험이 실패한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5 그래서 사이이드(Sayyid 2003)는 이슬람주의의 성장을 “서구 중심주의에서 탈피하는” 과정의 일부이자 ‘서구’와 ‘현대성’의 연계가 약해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이슬람주의는 보편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서구식 역사 과정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이런 문화적 해석의 장점은 이슬람주의의 성장을 세속적 현대성을 성취하지 못한 결과로 설명하는 견해, 즉 역사는 일직선으로 발전한다고 보는 보편주의적 설명이나 근대화론자의 견해를 비판한다는 데 있다.
더 세련된 주장으로, 일부 후기[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은 계몽주의 이후의 서구 현대성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비판이 증대한 것과 이슬람주의의 성장이 비슷한 현상이라고 본다.그러나 문화적 해석에는 이슬람주의의 성장이라는 복합적이고 모순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제약하는 약점도 몇 가지 있다. 예컨대,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운동에서 가장 애용되는 구호인 “이슬람이 해결책이다”는 동일한 운동에 속하는 서로 다른 경향과 행위자 들에게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헤게모니가 약해지고 있는 서구 현대성과 대항 헤게모니로 떠오르고 있는 이슬람 사이에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주의 운동 내에서도, 이 운동이 등장하고 성장하는 사회 내에서도 사상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진다. 무슬림형제단에 가입한 산업 노동자들은 이슬람식 ‘해결책’을 사회정의와 평등으로 이해할 것이고, 기업인들은 법질서나 사회경제적 보수주의로 이해할 것이다. 문화적 해석의 또 다른 문제는 이슬람주의를 경제적으로 설명하는 환원론적 가정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문화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연관돼 있다. 그들은 계급 문제, 자본주의 발전의 모순, 국내외 경제의 변화를 무시하며, 그 결과로 이슬람주의 운동의 내적 모순과 역동적 변화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문화적 ‘차이 본질주의’에 빠지곤 한다.
또, ‘포퓰리즘’ 개념을 이용해서 이슬람주의의 성장을 분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는 이슬람주의를 예전의 세속적 포퓰리즘을 대체하는 것으로 정의하거나 탈식민화 시대에 세속 국가의 모순과 실패에 대응하는 쁘띠부르주아적 포퓰리즘의 일종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아브라하미안(Abrahamian 1992)은 이슬람주의를 중간계급 일부가 제국주의, 외국 자본주의, 기성 정치권에 반대하는 급진적 구호들로 빈민들을 동원한 운동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 운동은 민족 독립과 생활수준 개선을 약속하지만, 사유재산 원칙에는 도전하지 않는다. 주바이다(Zubaida 1993)의 분석을 보면, 이슬람주의로 경도된 대중은 민족주의 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이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하고, 운동 “지도자들과 이데올로기가 지배 엘리트들에게 이용돼 … 결국 오염되지 않았더라면” 민족주의 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을 지지할 수도 있었다.(Zubaida 1993: xvⅲ)
이런 견해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왜 하필이면 이슬람이 운동을 통일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됐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전의 세속적 대안의 실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결국 “비이슬람이 실패해 이슬람이 성공했다”는 순환 논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런 견해들 중 일부는 이슬람주의 운동을 특정 계급(보통 쁘띠부르주아)의 이익으로 제한해, 이 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과 다양한 경향 들을 무시한다.
이슬람주의자들의 다양성
이런 잘못된 해석들 때문에, ‘이슬람주의’로 규정되는 다양한 집단을 모두 동일한 운동으로 취급하는 오류가 생겨난다. 무슬림형제단 같은 하나의 조직 내에서도 불연속성을 볼 수 있다. 1970년대 무슬림형제단의 사회적 구성, 정치 담론, 전략·전술은 나세르 집권 이전 1940년대 무슬림형제단과는 크게 달랐다. 1940년대 말 무슬림형제단은 골수 반공주의, 친왕정 정치인과 짧게 동맹을 맺었고, 보수적 민족주의 정당인 와프드당과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이집트 최대의 정치적 대중 운동이 됐다. 당시 무슬림형제단은 반식민지 투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고, 와프드당의 역사적 헤게모니에 도전했고, 상당한 수준의 토지개혁, 수에즈 운하 국유화, 국가 주도 경제 발전을 포함해 사회경제 강령을 제시했다.(Mitchell 1969, Lia 1998)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면, 무슬림형제단의 잔존 세력들은 나세르 정권 시절의 사회적 기반과 기층 활동가들을 모두 잃었다. 무슬림형제단은 1940년대에는 회원이 50만 명이나 되는 대중 운동이었지만 1970년대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긴밀히 연관된, 수백 명짜리 조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당시 회원의 상당수는 사다트의 인피타[개방 정책] 덕분에 부유한 기업인이 됐고, 좌파의 위협에 대응해 사다트와 전술적 동맹 관계를 맺었다. 나세르 정권 시절 수감됐다가 1970년대에 풀려난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오마르 틸미사니의 주도 아래 월간지 《알다와》를 중심으로 정권의 암묵적 지지를 받으며 재조직화를 시작했다. 《알다와》의 내용은 반유대주의, 반공산주의, 반세속주의였다. 또, 실린 광고들을 보면, 이 잡지가 사다트 시대 신흥 이슬람 금융가들과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Kepel 1985) 《알다와》는 사다트의 자유화 조처를 지지했다. 자유화 조처의 도덕적 함의와 이른바 서방의 ‘문화 침략’에 대해서만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또, 토지개혁과 국유화 등 나세르 시대의 사회경제 정책들은 거의 모두 ‘공산주의’ 정책들이며 이런 정책들 때문에 1967년 전쟁에서 패배하게 됐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Utvik 2006) 이 시기 무슬림형제단의 사회적 구성, 여성과 가톨릭(콥트교도)에 대한 담론들을 보면 아민과 아슈카르의 분석이 그럴 듯해 보인다. 실제로, 사이이드의 연구 결과를 보면, 1980년에 이르러 18대 가문이 민간 경제를 통제했는데, 그 중 여덟 가문이 무슬림형제단과 연관돼 있었다. 사이이드는 민간 벤처 기업들 중에서 거의 40퍼센트가 무슬림형제단과 연관돼 있었다고 주장했다.(Saiid 1989: 23) 당시 《알다와》와 별개로 또 다른 중요한 이슬람주의의 재조직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다트 정권의 암묵적 지지 아래 소수의 이슬람주의 학생들은 학생 운동 내 좌파의 영향력에 도전했다. 이슬람주의 학생 조직들은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회원 모집 활동을 벌였고, 곧 가장 중요한 대학들의 총학생회 지도부를 차지했다. 그들은 1976년 카이로대학교와 미냐대학교에서, 1979년에는 전국 수준의 총학생회 기구 지도부에서 다수파가 됐다.(Wickham 2002: 116)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들은 좌파를 대신해 학생들의 분노와 저항이 표출되는 주요 통로가 됐다. 이들의 눈부신 성장을 보면, 학생회가 사다트 정부의 통제 도구만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 학생 이슬람주의자들은 공공연한 정치적 문제들을 회피했고 주로 학교 시설이나 도덕적·종교적인 문제들에 집중했다. 1970년대 초 이슬람 학생회 창립 멤버 중 한 명인 에쌈 알에리안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좌파 학생들은 전국적 정치 이슈들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서비스 분야에서 우리의 경쟁자는 없었습니다.”(Al-Erian 2004:2) 그러나 영향력과 회원 수가 늘면서, 그리고 정치 환경이 변하면서 조직의 정치화가 신속하게 이뤄졌다. 1979년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자 이 점이 분명해졌다. 이슬람 학생 조직들은 평화협정 반대 투쟁을 주도했고 사다트가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저버린 것을 비난했다. 알에리안은 이슬람 학생 조직들이 사다트의 평화협정과 정교분리 담화에 모두 반대하는 대규모 토론회를 개최했다고 회고했다.(Al-Erian 2004) 동시에, 사다트는 좌파의 도전이 급속히 약해지는 상황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의 성장이 제기하는 위협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이슬람주의 학생 조직들에서 서로 다른 두 경향이 나타났다. 그 중 더 크고 영향력도 강력한 첫째 경향은 에쌈 알에리안과 압델 메네임 아부 알푸투가 주도한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알다와》 그룹과 합쳐 새로운 무슬림형제단의 일부가 됐다. 그들은 사이드 쿠트브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급진적 지하드 조직들로 구성된 또 다른 학생 경향과 관계를 단절했다. 첫째 경향의 학생 조직과 무슬림형제단이 통합하면서 무슬림형제단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사회적 관점도 변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이후 처음으로, 무슬림형제단은 교육받은 청년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고 대중 운동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한편, 지하드 전사들은 무슬림형제단이 선전하는 점진적 개혁주의 전략을 비판했다. 지하드 전사들은 사이드 쿠트브(나세르 정부 시절인 1966년에 처형됐다)의 옥중 저술들에 근거를 두고, 국가를 겨냥한 직접행동과 충돌 전략을 옹호했다. 무슬림형제단의 개혁주의는 합법 정치 공간을 이용해 전문가 단체, 지방의회, 국회 등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지하드 전사들은 이런 전략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무슬림형제단이 국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운동을 타협과 패배의 길로 이끌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슬람 지하드 조직 중 하나의 지도자인 아부드 엘주무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는 의회 내 이슬람주의자들이 제기한 제한적 요구 일부에 신중하게 반응하면서, 무슬림들에게 의회를 통해 이슬람 율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자신의 [이슬람] 봉쇄 음모를 완수하려 한다.”(Ahmed 1995: 287)
지하드 전사들은 오직 정권을 상대로 한 직접행동과 폭력적 충돌만이 샤리아 율법을 적용하고 이슬람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논리의 실천적 결과로, 가마트 이슬라미야는 국가 통제가 가장 약하고 자신의 급진적 주장이 가장 잘 먹힐 지역들, 즉 아시우트와 미냐 같은 남부 지역, 카이로와 기자의 판자촌 등에서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지하드 전사들은 이 지역에서 세 가지 전술을 활용했다. 첫째, 민간 모스크를 통해 조직의 메시지를 선전하고 새로운 회원들을 가입시켰다. 1980년대 중반에 가마트 이슬라미야는 아시우트의 다이루트 지구에서만 모스크 약 1백50곳을 통제했다. 둘째, 직접행동 그룹을 조직해 샤리아 율법을 지역사회에 (강제로) 적용하려 했다. 이 그룹은 ‘악행 근절’이라는 명분 아래 비디오나 주류를 판매하는 상점들을 공격하고, 공공장소에서 남녀를 격리하고, 여성에게 이슬람식 복장을 강요하고, 샤리아 율법 적용의 걸림돌이자 정권의 약점으로 여겨지는 콥트교회와 콥트교도의 상점들을 공격했다.(Mubarak 1995) 셋째, 그들은 사회서비스를 제공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사회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국가가 사회서비스 제공을 중단하기 시작하면서, 가마트 이슬라미야는 모스크를 통해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식료품과 학용품을 공급하고 의료원을 개설했고, 많은 사람이 이런 서비스를 이용했다.
동시에, 지하드 조직들은 갈수록 공격적이 됐다. 그들은 지역에서 종파 간 갈등을 부추겨 정부와 연관된 종교계 인사들을 공격했고 마침내 1981년에는 대통령 사다트를 암살했다. 이 기간에 사다트 정부는 이슬람주의자들을 점점 덜 관용하게 됐다. 사다트 암살 후 무바라크는 지하드 조직들을 강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좀더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고 1980년대 동안 지하드 운동은 아인 샴스, 알자위야 알함라, 임바바 같은 카이로 광역시의 빈민가들로 세력을 확장했다. 1990년대 초에야 이집트 국가는 ‘관용적 탄압’ 정책에서 공격적 파괴 정책으로 전환했다. 1992년 5월 군인 2천여 명이 아시우트의 다이루트 지구에 파견돼 통행금지와 계엄령을 선포했다. 같은 해 12월 군인 1만 6천 명이 지하드 운동을 파괴할 목적으로 기자의 임바바 지구에 있는 빈민가에 파견됐다. 전국에서 일망타진 작전이 시작돼 많은 사람이 구속됐고(1992년부터 1997년까지 4만 7천 명이 구속됐다) 고문, 인질 억류, 암살, 처형 등의 방법이 많이 사용됐다.(Mubarak 1995)
이런 탄압에 대응해 지하드 운동은 국가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해 경찰, 보안군, 정부 관료, 관광객, 은행 등을 표적 삼아 공격했다. 또, 콥트교도에 대한 공격도 전례없이 늘어나 1992년과 1993년에만 50차례 이상의 공격이 일어났다.(Mubarak 1995) 이런 폭력의 악순환은 1997년 가마트 이슬라미야 회원들이 관광객 58명을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공격은 지하드 운동이 감행한 최후의 대규모 공격이었다. 뒤이은 국가 탄압 때문에 지도적 간부들이 암살되거나 처형되거나 수감되면서 이 급진 이슬람주의 조직은 사실상 파괴됐다. 1990년대 말에 이르면 이들의 근거지였던 모스크들은 폐쇄되거나 정부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됐다. 한편, 국가 탄압과 ‘악행 근절’이라는 지하드 전사들의 극단적 실천 때문에 지지자들과 거리가 벌어져서 결국 이들의 사회적 기반도 뿔뿔이 흩어졌다.
무슬림형제단의 변신
지하드 운동은 언제나 무슬림형제단보다 영향력이 약했다. 어쨌든 지하드 운동이 쇠퇴하자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주의 조직들 중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조직이 됐다. 동시에,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저항 운동 조직이자 유일하게 대중적 기반을 보유한 정치 운동이 됐다. 1970년대에 학생 이슬람 조직들과 통합한 뒤로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학생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이 됐고, 오래지 않아 전문가 단체들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이 단체들의 회원 수십만 명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 1984년 무슬림형제단은 의사협회 선거에 참가해 운영위원회 25석 중에서 7석을 확보했다. 1990년 의사협회 선거에서는 운영위원회 의석 20석과 총득표의 71퍼센트를 얻었다.(Wickham 2002: 184) 무슬림형제단은 기술자, 치과, 약리학자, 농업전문가 단체에서도 비슷한 성공을 거뒀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세속 정치 세력이 지배한 단체들, 즉 변호사협회나 언론인협회 등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이것은 무슬림형제단이 대학교에서 거둔 성공과 직결된 현상이었다. 대학 졸업자들은 자동으로 전문가 단체에 등록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무슬림형제단 회원들은 각종 단체에서 학생 시절 갈고닦은 조직 기술과 활동 경험을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발전들은 더 큰 사회경제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대학 교육의 폭발적 성장으로 전문가 단체들은 크게 변했다. 이 단체들은 전에는 엘리트 조직이었지만, 이제는 회원을 수십만 명 거느린 대중조직이 됐다. 대학 교육의 팽창 속도와 대학 졸업자들의 증가 속도는 일자리 창출 속도를 훨씬 초과했다. 대다수 대졸자들은 1960년대에 나세르가 도입한 고용 보장 제도를 통해 정부 일자리를 얻고 싶어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졸업과 취업 사이의 대기 기간이 길어졌다. 대기 기간은 1979년에 3년이었지만 1985년에 이르면 무려 10년이나 됐다.(Handoussa 1991) 동시에, 경제 자유화의 결과로 경제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이 커진 민간 부문은 늘어난 대졸자들을 흡수하는 구실을 하지 못했다. 전문가 단체들 내에서 무슬림형제단이 헤게모니 세력이 되면서, 교육받은 도시 인구의 상당수가 무슬림형제단 활동가가 되거나 지지자가 됐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을 바라보는 가난한 졸업생들은 《알다와》 그룹이 1970년대에 전파하던 담론과 사회적 메시지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전문가 단체 지도자들은 평등, 사회정의, 도덕적 혁신을 주장했고, 관리들이 부패했을 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복지를 무시한다고 비판했다.(Wickham 2002: 157-62)
무슬림형제단의 발전을 오로지 ‘룸펜 인텔리겐치아’를 결집시킨 결과로 여기거나 불만에 찬 쁘띠부르주아에게 매력을 준 결과로만 여기는 것은 무슬림형제단이 학생과 대졸자 간부층 너머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하면서 포퓰리스트 정치 세력으로 환골탈태한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은 대학과 전문가 단체 밖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빈민 거주지로 대중적 기반을 확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은 민간 모스크, 이슬람 자선단체, NGO 등을 ‘대중을 결집시키는 기구’로 이용해, 성장하는 간부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고 새롭게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무바라크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속화하고 국가가 기초적 공공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게 되자 이슬람주의자들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었고, 불만을 품은 학생과 졸업생뿐 아니라 노동자와 일부 도시 빈민 사이에서도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하게도, 무슬림형제단은 전에는 국가를 통해서만 이용할 수 있었던 서비스들을 제공해 대중의 지지를 얻었고, 신자유주의에 헌신하고 서방과 동맹하고 악랄한 권위주의 행태를 보인 무바라크 정권에 맞서는 정치적·문화적·경제적 대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의 성공은 오래지 않아 총선에서 정치적으로 표현됐다. 그러자 무바라크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을 강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무바라크 정부는 전문가 단체에서 선출된 임원을 제거하고,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적 회원들을 군사 법정에 넘기고 감옥에 가뒀다. 그러나 이런 탄압이 계속됐음에도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2000년 총선에서 정권이 엄청난 선거 부정을 저지르고 경찰이 선거운동을 방해했지만, 무슬림형제단의 후보 18명이 무소속 의원으로 당선했고, 2005년 총선에서도 선거운동에 큰 제약이 있었지만 88석을 얻었다.
성공 속의 모순
지난 30년 동안 무슬림형제단은 담론, 전략과 전술에서 몇 차례 전환을 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세 영역, 즉 경제정책, 민족주의, 민주주의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경제정책
앞서 봤듯이, 무슬림형제단은 큰 틀에서 사다트 정부의 자유화 정책을 지지했고 1980년대 동안에는 시장 개혁의 광범한 확대를 주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 태도를 1990년대 초까지 고수했다. 1991년 이집트 국가가 IMF·세계은행과 합의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라 신자유주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면서, 무슬림형제단의 경제 담론에서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무슬림형제단은 중앙집권적 계획과 국가 소유를 비판했다. 또, 낮은 생산성, 관료적 지령, 낭비, 부패, 변덕스런 우선순위와 정책 때문에 공공 부문의 심각한 곤경이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Al-Ghazali 1990)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은 산업 노동자들에게 다가갈 때는 다른 담론을 사용했다. 예컨대, 베이닌이 지적했듯이,(Beinin 2005a: 133) 1991년 노조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 후보는 “파업권을 지지하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노조 선거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규탄하고, 공공 부문을 해체하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무바라크 정부가 국유 기업과 공공서비스를 사유화하고, 생필품 보조금을 폐지하고, 대외무역 자유화를 확대하자 모순은 더 심각해졌다. 무슬림형제단이 2004년부터 단계적으로 작성해서 2007년 슈라(이집트 상원) 선거 직전에 발표한 선거공약을 보면, 무슬림형제단은 사유화 계획이 공공 부문을 해체하고 국가가 경제를 현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강하게 비판한다. 또, 무슬림형제단은 이 선거공약에서 이집트 국가가 기초적 공공서비스와 복지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보장해 줘야 할 권리들을 열거했다. 그 중에는 빈민 가족이 최소한의 적절한 생활수준을 보장받을 권리, 무상 의료와 무상 기초 교육을 받을 권리, 사회보장권, 연금을 받을 권리 등도 포함돼 있다. 이 선거공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미래에 총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려면 국가가 계속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한다. 만약 국가가 제 구실을 하지 않는다면, 발전과 경제에 모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고, 사회 혼란과 경제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 … 민간 생산 체제는 일부 상품의 생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국가의 개입과 공공 부문의 구실이 중요하다.(Muslim Brotherhood 2007: 39)
전에 무슬림형제단은 경제에서 국가가 중심적 구실을 하는 것을 악의 근원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선거공약의 중요한 내용으로 포함시켰다. 물론 무슬림형제단이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앞서 인용한 공약에서도 사유화 자체가 비판의 초점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슬림형제단은 사유화 방식과 실행 규모를 주로 비판했다. 무슬림형제단의 글을 보면,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 국가가 할 수 있는 구실에 관해 정부가 균형 있는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는 점을 주로 비판하고 있다.
이런 모순은 단지 실용주의 때문이 아니다. 더 중요하게는 조직의 사회적 기반이 다양할 뿐 아니라 계속 변해,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하는 집단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이집트 국가가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갈수록 많은 빈민과 중간계급이 그 폐해에 시달리면서, 무슬림형제단은 자신이 과거에 견지한 시장친화적 담론 속에 신자유주의 비판을 포함시킬 수밖에 없게 됐다. 무슬림형제단의 회원 중에는 수십만 명의 ‘룸펜 인텔리겐치아’도 있지만 카이라트 엘샤테르(무슬림형제단 부의장)와 하산 말레크 같은 백만장자들도 있다. 무슬림형제단은 경제적 비전을 제시할 때,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세력들에게 직간접 영향을 받는다.
민족과 민족주의
1970년대에는 정권의 친미 정책과 이슬라엘과의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로 세속 좌파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면,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옹호하고 중동 지역에서 미국이 저지르는 공격적 행동에 반대하는 이집트인들의 행동에서 무슬림형제단이 구심점이 됐다. 무슬림형제단은 제1차 인티파다를 지원했고,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에서 빠르게 파타를 대체하고 있던 하마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 덕분에 대중의 머릿속에서 무슬림형제단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결연하게 방어하는 존재로 각인됐다. 비슷하게, 무슬림형제단은 미군이 걸프 지역에 진주하고, 1991년 이라크를 침략한 것에도 단호하게 반대했다. 무슬림형제단은 걸프 연안국 정부들이 외국 군대가 아랍과 무슬림 영토에 진주하도록 허락했다고 비난하고, 외국군들이 “계속 주둔하면 이 지역에서 다시 군사 점령이 시작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Al-Erian 2003)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의 이런 태도에 분노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내무부 장관은 무슬림형제단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슬림형제단에 주던 재정 지원을 끊었고, 걸프 지역 정부들은 정치적 단절을 선언했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은 일관된 반제국주의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고, 이집트 정부가 중동 지역에서 하는 구실에 철저히 도전할 태세가 돼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새로운 패권 전략에 저항할 세속주의 세력이 없다 보니 무슬림형제단이 그 정치적 공백을 메웠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을 이끌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좀더 급진적인 반제국주의 태도를 취하라는 대중적 지지 기반의 압력과 좀더 ‘현실적’ 외교 정책을 채택하라는 부르주아 회원들의 압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이것은 무슬림형제단 지도부가 모순된 견해들을 발표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무슬림형제단의 주요 인사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포함해 현 이집트 정부가 체결한 조약들을 준수할 것이라고 ‘국제 사회’에 공언해 왔다. 다른 한편, 그들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유린하는 시온주의 깡패들”과 맺은 조약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회원과 지지자 들에게 말해 왔다.(Akef 2007) 또 다른 비슷한 사례로, 2006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 당시 무슬림형제단의 최고 지도자는 헤즈볼라를 돕기 위해 훈련된 투사 1만 명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 다른 지도자들은 이 선언이 “비유적인” 표현이었다고 평가했다.
민주주의
무슬림형제단의 이런 모순들은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에서도 드러난다. 1970년대에 무슬림형제단은 민주주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민주주의와 이슬람의 슈라 개념이 어떤 관계인지 모호하게 말했다. 또, 무슬림형제단은 여성과 가톨릭 소수파의 권리에 관해 명백하게 반동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고, 미래 이슬람 국가에서 개인적·제도적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될지에 관해서도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이 갈수록 의회와 선거 정치에 깊숙이 발을 담그게 되고, 또 이집트 국가가 긴급명령, 군사 법정, 노골적 폭력을 이용해 이슬람주의자들의 활동 공간을 계속 제약하자, 민주주의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됐다.
10 앞서 말한 다른 모순과 마찬가지로, 이런 모순도 단지 기회주의나 혼란의 문제가 아니라 무슬림형제단 지도부가 조직의 간부와 지지 기반을 구성하는 이질적인 사회집단들을 하나로 단결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이제 의회민주주의, 완전한 정치적 자유, 모든 위헌적 긴급조치의 폐지 등은 무슬림형제단의 주장과 활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됐다. 무슬림형제단의 문헌에서 슈라와 자유민주주의는 동일한 것으로 취급됐고, 무슬림형제단은 2004~06년에 잠시 활발해졌다 단명한 민주화 운동에 참가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조직이었고, 무슬림형제단 지지자 수만 명이 민주화 시위에 참가했고 수천 명이 연행됐다. 또,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여성과 남성, 기독교도와 무슬림에게 동일한 시민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수시로 내놓았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논의된 무슬림형제단 정치 강령 초안을 보면, 민주주의와 권리에 관해 엄청나게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초안은 모든 시민이 종교나 성별의 차이를 떠나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성과 가톨릭교도는 모두 이집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출마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이런 모순은 무슬림형제단 내부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였다.결론
무슬림형제단의 전략, 전술, 담론에서 나타나는 모순들과 조직의 사회적 구성과 지지 기반의 지속적 변화를 인식하면서도, 이슬람에 대한 무슬림형제단의 견해(이슬람을 단결의 매개로 여기는 것)가 변함없이 유지돼 온 점을 동시에 봐야 한다. 무슬림형제단의 핵심 구호들, 즉 “이슬람이 해결책이다”, “이슬람 국가”, “샤리아 율법의 시행”은 1920년대에 시작된 이 조직의 역사에서 변하지 않았다. 중요하게도, 2007년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 선거공약의 부제목은 “그렇다, 이슬람이 해결책이다”였다. 무슬림형제단은 1970년대부터 선거 때마다 이 사상을 항상 중심에 놓았다. 이것은 반대자들이 무슬림형제단을 비판한 주요 초점이었다. 비판자들은 그 사상이 모호하고 애매하다고 비판하거나, 그 사상의 근저에는 다른 강령들을 “비이슬람적인 것”으로 무시하는 생각이 숨어 있다고 비판했는데, 이러한 비판은 무슬림형제단이 정치적 기회주의에 빠져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하다. 즉, 무슬림형제단의 사회적 구성이 모순되고 다양하기 때문에 그런 보편적 이데올로기 기표가 중요하다는 점을 말이다.
그 이데올로기 기표가 추상적이고, 특히 몰역사적이기 때문에, 무슬림형제단은 서로 공통점이 없는 사회집단들을 유연하게 결집시킬 수 있다. ‘이슬람’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된다. 즉, 이슬람은 노동자와 빈민 들이 겪는 불의와 착취, 교육받은 중간계급이 경험하는 민족적 수모와 개인적 소외감, 부자들이 두려워하는 혼란과 무질서, 젊은 여성들이 직장과 거리에서 겪는 성희롱과 차별에 대한 공통된 해결책으로 제시됐다. ‘이슬람 국가’는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로서 노동자들에게 정의와 존엄성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됐다. 동시에, ‘이슬람 국가’는 여성, 노동자, 소수민족 등이 가르침을 받고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초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유토피아이기도 했다. 이런 유연성 덕분에 무슬림형제단은 대항 헤게모니 경향과 헤게모니 경향을 동시에 띠고 있다. 이것은 대중적 포퓰리스트 운동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이 이 두 경향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고 불안한 단결을 해칠 행동을 삼가는 한 그런 유연함은 강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극심한 탄압을 받거나 정치적·사회적 위기가 심화한다면, 이 운동의 분열을 가져올 위험이 있는 동요와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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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ameh Naguib, ‘Islamism(s) old and new’, EGYPT: The Moment of Change, Zed Books, 2009.
↩
- 가마트 이슬라미야Gamaat Islamiya, 자마트 알이슬라미야, 알자마 알이슬라미야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
- 동일한 이론의 또 다른 아랍 좌파식 해석은 Al Said 1999; Azm 1998을 보시오. ↩
- 나세르 이전의 운동에 관해서는 Mitchell 1969; Lia 1998을 보시오. ↩
- Wiktorowicz (2004)는 사회운동 이론을 이슬람주의에 적용한 아랍 나라들의 연구들을 잘 정리했다. 특히, 이론을 다룬 서문을 보시오. ↩
- 잘 알려진 사례로, Foucault (1994)는 이란 혁명을 ‘최초의 포스트모던 혁명’으로 규정한 바 있다. ↩
- 그러나 심지어 1970년대 중반에도 새로운 무슬림형제단과 사다트 정부 사이의 전술적 동맹 관계는 한계가 있었다. 사다트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을 합법 조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지도자인 오마르 알틸미사니를 슈라[상원] 의회의 의원으로 임명하지 않았다(나중에 무바라크는 국민진보연합당의 ‘좌파 야당’ 지도자 리파트 알사이드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
- 베이닌과 많은 세속 좌파 전문가는 이슬람주의 학생 조직이 좌파를 대신해 성장한 것을 “협박, 물리력 사용, 값싼 복사본 교재나 히잡 착용 여성을 위한 교통편 제공 등 서비스 제공”의 결과로 해석한다.(Beinin 2005: 119) 이런 설명은 이슬람주의 운동의 성장이라는 도전에 좌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과, 이슬람주의 운동이 수많은 학생에게 자신을 급진적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었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
- 더 자세한 내용은 Azzam 2006을 보시오. ↩
- http://arabist.net/archives/2006/08/05/the-muslim-brothers-support-for-lebanon을 보시오. ↩
- 이 문제에 관한 압델 메나임 아부 알푸투와 모하메드 무르시(둘 다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적 회원) 사이의 치열한 지면 논쟁(2007년 10월호 <투스투르>)을 보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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