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세계를 뒤흔드는 아랍 혁명 ― 의미와 전망
21세기 혁명의 현실성을 보여 준 아랍 혁명
튀니지와 이집트의 혁명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이집트는 아랍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다). 두 혁명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호스니 무바라크의 혁명적 타도는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다. 튀니지와 이집트 민중은 2011년을 우리가 역사 책들에서 본 혁명적 소용돌이의 해로 만들었다.
지금 저항은 예멘에서 바레인·요르단과 이란으로까지 확산됐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카다피 정권에 맞선 리비아의 역사적 봉기의 운명은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북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더 한층의 봉기와 혁명이 발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중동 나라들을 모두 똑같이 볼 수는 없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도 그렇다. 그러나 혁명을 폭발시킨 특정 나라들의 압력들은 그 지역 전체로 퍼져나가는 일반적 과정의 특수한 표현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도시화가 이뤄졌고 노동계급이 탄생했다. 그와 동시에,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긴장이 형성됐다. 지배자들이 대중의 불만을 단속하고 정권과 부유층을 유착시켰기 때문이다. 또, 아랍 지배자들은 대부분 안정적인 석유 수송을 원하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따랐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은 지난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을 급속하게 채택했고, 전임자인 안와르 사다트가 1978년부터 시작한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종속 논리를 따랐다. 지난 10년 동안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이 강화됐다. 미국도 이라크 침공, 이스라엘의 레바논 전쟁 지원과 베이루트에 친미 정권 세우기 시도를 강화했다. 무바라크는 이 모든 것을 지지했고 이집트를 포함해 아랍 세계 전역에서 분노가 커졌다.
분노가 커지자, 무바라크는 억압 기구에 의존했다. 선거를 조작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했다. 그래서 정치적 탄압, 비참한 경제 상태(인구의 절반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산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해 이집트를 팔아넘기는 정권에 대한 수치심 등이 이집트 혁명의 동력이 됐다.
미국의 동맹인 예멘의 권위주의 독재자 알리 압둘라 살레는 1978년부터 장기 집권해 왔다. 그 나라는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있다. 정권과 다른 유력한 부유층 간에, 한때 분단했던 남과 북 간에 심각한 균열이 존재한다. 이들이 지금 반反살레 선동을 열어젖히고 있다. 그럼에도 살레 정권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 산유국인 바레인은 인구가 1백50만 명밖에 안 되지만,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는 수니파 군주와 그 정권이 자신을 배제했다고 생각한다. 바레인의 시위는 걸프 연안 국가들에서 운동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최초 신호다.
이런 조건들이 누적돼 지금 1950∼60년대 아랍 민족주의 운동 이후 가장 거대한 운동이 아랍 세계를 휩쓸고 있다.
당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의 주요 목표는 영국 제국의 잔당들을 그 지역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1956년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고, 여기에 반발해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양해 없는 침공이었고, 결국 세 국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가 승리했다. 뒤이어 1958년 이라크에서 친영 파이잘 왕조가 혁명으로 타도됐다. 시리아에서 급진파들이 집권했다. 예멘과 오만에서 무장 투쟁이 일어났다.
2 카다피는 그렇게 그 나라의 급진적 변화 가능성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당시 아랍 민족주의 물결의 한 가지 부작용은 리비아의 쿠데타였다. 청년 장교 무아마르 카다피가 권력을 잡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反카다피 세력들은 지금까지도 그 쿠데타가 영국 정보 당국이 조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카다피가 표방한 민족주의·현대주의·급진주의는 모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다. 카다피는 오일 머니를 엄청나게 벌어들였음에도 리비아인들에게 교육·보건서비스·주택보조금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고 황당한 해외 프로젝트에 돈을 썼다. 그 중 하나가 수단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들이 타고 있는 비행기를 돌리게 해 수단의 동료 독재자 가파르 니메이리에게 넘겨 교수형을 당하게 한 일이다.1967년 이스라엘이 벌인 전격전은 아랍 민족주의의 종말을 고했다. 시리아와 이라크 간 전투는 워싱턴이 지지한 우익 바티스타의 승리로 끝났다. 나세르의 후임자 안와르 사다트가 1973년 대對이스라엘 전쟁을 벌여 승리했지만, 막대한 희생을 치른 승리였다. 그 뒤 이집트 군부는 이 전쟁에서 손을 떼기로 했고 미국한테서 해마다 10억 달러의 원조를 받는 대가로 이스라엘과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번 아랍 세계의 혁명과 반란 물결은 아랍 민족주의 운동과 다르다. 지금 아랍 민중은 단지 외국 지배(최근 여론 조사에서 이집트인의 82퍼센트가 “미국에 부정적”이었다)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권리 탄압과 부정 축재에 눈먼 엘리트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리고 경제 정의를 지지한다.
아랍 민중의 해방 투쟁과 미국 제국주의
아랍 세계의 혁명과 반란은 아랍인이나 무슬림이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라던 네오콘의 이데올로기를 불에 탄 종이처럼 날려버렸다.
미국이 주도한 야만적인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은 “문명의 충돌”과 관련된 이데올로기를 수반했다. 일반으로 이슬람 세계(와 특히 아랍 세계)는 자체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으므로 오로지 외부에서 — F16 전투기와 미국 해병대에 의해 — 이식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거짓말이다. 중동에서 민주주의를 가로막은 것은 “이슬람 문화”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 미국과 서방이 전폭 지원한 독재 정권들의 정치적 자유 탄압이었다. 중동에서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세력은, 실천에서 입증되고 있듯이, 아랍 대중 자신이다.
게다가 미국은 아랍 세계에서 세속 민족주의의 위협을 막으려고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지했다. 미국의 동맹 사우디아라비아는 급진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이자 이슬람 테러의 중심이기도 하다. 야만적인 파키스탄 독재자 지아 울 하크는 로널드 레이건의 친구였다. 이 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재정 지원을 받아 급진 이슬람주의화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이번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의 특징 중 하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부재다. 두 나라 대중은 세속적 민주주의 전통에 근거해 억압 체제와 부패·빈곤에 저항했고, 자유와 경제 정의를 요구했다. 아랍 나라들에서 대중은 오직 종교적 근본주의나 민족주의에 의해서만 동원될 수 있다는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냉소적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 판명 났다. 슬라보예 지젝은 “서방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이 종교가 아니라 세속적 자유와 정의를 위해 독재자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고 비꼬았다.
한편, 튀니지와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비롯한 그 지역의 모든 국가들과 미국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혁명은 미국의 권위와 패권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이라크에서의 전략적 실패, 팔레스타인 갈등 해결 실패, 시리아와 이란에 친서방 정권을 수립하려던 계획의 실패, 좀더 독자적 노선을 추구하는 지역 열강으로 부상한 터키, 동맹 정권들을 충분히 변화시키지 못해 불만의 폭발을 막지 못한 점, 대중의 삶을 개선하지 못한 신자유주의적 모델 등등. 이렇듯 미국의 대對중동 헤게모니는 쇠락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집트 혁명은 이미 고군분투 중인 초강대국 미국에 또 한 번 강타를 날렸지만, “미국 경제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세계 금융시스템의 중심이다. 또, 미국은 단일 열강이지만 열강들의 합보다도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의 상황은 미국에게 너무 중요하다. 그래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 운동에서 혁명적 심장을 도려내고 사이비 민주주의 정권 지지로 자신들의 선택지를 조정하려 할 것이다. 적은 반드시 패퇴시키고 동맹들에게는 신사적 조언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위선적이게도, 미국은 독재자들과 여전히 궁전에 남아 있는 셰이크들(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뿐 아니라 쫓겨난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지지하고 있다.
옳게도, 이집트 운동은 무바라크 타도 뒤에 워싱턴의 포용 제스처를 거부했다(정권에서 밀려난 분파를 대표하는 이란의 그린 운동 지도자들은 이 문제나 다른 문제들에 의도적인 모호함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미국의 이런 계획조차 난관 투성이다. 미국 패권과 세계 자본주의의 쌍둥이 위기가 이미 지난 수십 년 동안 조성돼 온 긴장을 억제하려고 투쟁하는 중동 전역의 정권들에 지속적으로 충격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럽과 미국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바레인일 것이다. 바레인의 지배자들이 제거된다면 사우디아라비아의 민주적 봉기를 막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 정권은 바레인에 군대를 투입했다). 워싱턴은 이런 일을 허용할 수 있는가? 아니면 권좌에 있는 와하비의 도적 정치인들을 지키려고 군대를 배치할 것인가?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있다. 팔레스타인 저항은 60년 동안 계속돼 왔고 여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존엄·정의·자유의 가치를 지키려고 그토록 희생을 치렀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집트와 아랍의 대중이 같은 배너를 들고 거리를 점거한 오늘날 해방이 더 가까워졌음을 볼 수 있다.
아랍 세계의 경제적 특성
아랍 세계의 혁명과 반란은 그 지역의 특수한 정치 조건들 때문에 다른 나라들보다 사회 전투의 규모가 훨씬 크고 격렬하지만, 그리스 총파업, 영국 학생 시위, 미국 위스콘신 주의 구조조정 반대 시위와 같은 배경을 갖고 있다. 이런 지적은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아랍권에서 시작된 민중봉기는 전 세계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봉기는 단순히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실업이라고 하는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해 해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혁명과 반란의 동력에는 북아프리가 경제들의 특수성이 있다. 물론 북아프리카 경제들의 특징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우선, 석유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투쟁 중인 나라들 가운데는 리비아가 석유의 경제적 비중이 높다. 그 나라 수출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석유 매장량은 아프리카 지역 최대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 바레인·예멘 같은 소국들에서도 석유가 결정적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가스의 중요도가 최근 몇 년 새 높아졌지만, 수에즈 운하 통행료가 상당히 중요하다. 최초 전투가 일어난 튀니지는 산업과 관광업이 강세다. 요컨대, 그 지역에서 석유의 중요성은 분명하지만, 석유가 유일한 투쟁 촉매제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좀더 복잡한 관계들의 일부다.
둘째, 아랍 세계의 경제는 세계경제 체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80년대 미국에 의해 봉쇄됐다가 그 뒤 긴밀한 파트너가 된 리비아 정권을 포함해 위기를 겪는 정부들은 모두 세계 열강과 정치적· 경제적으로 연결돼 있다. 오늘날 메이저 석유 회사들(예컨대, 이탈리아 석유 회사 ENI를 포함해)이 리비아에 있고, 리비아 국영석유회사NOC와 함께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
6 그 지역에 대한 원조 붐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2001년까지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집트의 경우, GDP의 5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러나 2001년 경제 위기 이후 미국의 원조는 줄었다. 그 지역 전체로 보면 크게 감소한 것은 아니지만, 두 주요 수혜국인 이집트와 이스라엘로 가던 원조가 이라크로 갔다.(그림 참고)
셋째, 석유에 대한 외국의 직접 투자와 함께 그 지역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비중은 “경제적·군사적 원조”와 관계있다. 특히,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주요 수혜자였다. 경제가 취약하기 때문에 이 나라들에 재정 지원을 하는 일부 선진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넷째, 중동 지역 국가들에 대한 외부 지원의 필요성과 그것의 감소가 낳은 불안정성은 이 지역에서 가장 분명한 특수성 중 하나를 보여 준다 — 토착 부르주아지의 취약성. 국내 시장이 협소한 데다 원료를 빼면 이 나라들의 수출은 거의 없다. 늘어난 부가 재투자되지 않고 유럽의 금융 시장들(카다피 일가의 스위스 계좌에서부터 이집트 기업주들의 스페인 축구 구단 매입까지)로 직행하는 까닭이다.
그 결과 자본 축적이 부족해 빈민만이 아니라 숙련 노동자들과 중간계급도 상대적 잉여 인구가 돼 갔다. 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튀니지조차 실업이 기록적 수준이다.
다섯째, 이 나라들의 경제에서 국가가 결정적 구실을 한다. 이집트에서는 정부 소유 기업이 전체 고용의 25퍼센트를 차지한다. 또 다른 25퍼센트가 수익성 없는 농촌의 소토지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 국가 재정을 통해 살아남은 수익성 없는 민간 기업들의 고용까지 포함하면, 이 나라들에서 전체 재생산은 국가 재정 수입에 의존하는 셈이다. 지속 가능한 다른 세수 자원들이 없기 때문에 외부 지원은 이들의 발전에서 핵심이다. 석유와 가스를 수출하는 나라들에서 지대는 주요한 소득원처럼 보인다.
여섯째, 1970년대에 이 나라들에서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했고 1980년대에 더 심화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랬듯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강요한 민영화와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시작됐다. 1990년대에 이 과정이 더한층 강화됐다.
예컨대,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정권은 세계 시장에 경제를 개방하는 과정을 가속화했고 일부 대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 주도 경제 발전 모델과 단절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이 정신 없이 빠른 속도로 채택됐다. IMF는 2006년에 국영 기업의 3분의 2가 민영화됐고 토지소유법 자유화가 “예상을 뛰어넘었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부가 상층부에 집중됐다. 이들 중에는 일부 국가 관료, 군부와 민간(종종 퇴역한 군 간부), 새로운 기업주들(특히 무바라크의 아들 가말 주위에 형성된 서클)이 있었다. 대량 실업, 임금 압박, 장시간 노동이 뒤따랐고, 농민 열 명 중 한 명이 토지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국가 기구의 비중은 거의 감소하지 않았다.
새천년의 첫해에 이 지역은 대다수 “개도국”이 경험한 것과 비슷한 성장을 했다. 이집트와 튀니지 같은 나라들은 9퍼센트 가까이 성장했다. 미국의 경제 원조가 줄었는데도 성장했다. 이 지역이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밟거나 적어도 대외 의존도가 낮아진 것처럼 보였다. 성장의 핵심 요인은 1995년 유럽과 체결하고 2005년에 더 강화된 자유무역협정이었다. 그 결과 이집트는 2007∼08년에 수출이 62퍼센트 증가했다. 또 다른 요인은 관광업의 호황이었다. 튀니지는 관광업이 GDP의 절반을 넘는다. 이집트에서도 외화 수입의 19퍼센트에 이른다.
그러나 이 수치들은 이 지역 경제의 근본적 변화를 뜻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전체 실업은 9퍼센트였지만, 20∼24세의 실업률은 약 27∼30퍼센트였다. 20∼24세 이집트 여성의 실업률은 거의 50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세계 시장 몫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소 개선됐지만, 연료를 제외한 아랍 부르주아지(또는 이 지역에 진출한 해외 자본)의 비중은 여전히 미미했다.
이런 구조적 취약성이 2008년 세계경제 위기의 폭발과 함께 밝히 드러났다. 소규모 호황을 가능케 했던 원천이 완전히 붕괴됐다. 이집트만 보더라도, 이주노동자 송금액이 2008년과 비교해 17퍼센트 줄었고, 관광업도 2008년에 24퍼센트 증가했다가 2009년에 1.1퍼센트 감소했다. 수에즈 운하 통행료 수입도 2008년에 견줘 7.2퍼센트 하락했다.
튀니지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GDP 성장률이 2007년 6.33퍼센트 증가에서 2008년과 2009년에 각각 4.5퍼센트와 3.1퍼센트 증가로 둔화했다. 제조품 수출은 25퍼센트 가까이 감소했다. 대개 직물, 의류, 석유 관련 제품의 수출 감소 때문이다. 리비아도 2009년에 석유 가격이 2008년보다 거의 40퍼센트 하락했다가 2010년에 회복했으나 단지 20퍼센트 상승에 그쳤다.
요컨대, 국가가 최저 생활수준을 보장해 줄 물질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위기는 사회 전체의 위기를 보여 준다.
반란의 이면에는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취약한 토착 부르주아 분파와 제국주의적 경제 열강들의 관심사 때문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리비아에서는 미국과 유럽 기업만이 활동하는 게 아니다. 중국과 러시아의 진출도 두드러진다. 격렬한 전투가 자국 기업의 활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국도 개입 반대 입장을 거두고 유엔에서 미국과 함께 반反카다피 제재를 지지했다.
그러나 토착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 열강이 내놓은 것들은 해결책이 못 된다. 토착 부르주아지는 지속 가능성이 없는 대안, 곧 지금까지 맞서 싸워 온 바로 그 파괴된 권위주의적 국가의 생존을 요구한다. 세계 열강 뒤에 있는 대기업들은 석유와 가스에 돈을 걸 뿐이고 그들이 제공한 것은 대부분 QIZ(대미 무관세 지대) 같은 것이다.
1970년대 이래 미국이 옛 소련을 대신해 그 지역의 취약한 국가들과 부르주아지의 후원자 구실을 했다. 이집트에서 봤듯이, 그런 지지는 1980년대 이래, 특히 2001년 이후 확실히 실패했다. 이것은 그 지역의 전반적 추세다. 또, 자본의 위기와 사회적 봉기가 결코 일시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국의 영향력 쇠퇴가 한동안 계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연속혁명의 필요성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서 핵심은 두 혁명들에서 결정적 구실을 한 노동자 투쟁 물결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을 파괴했다는 유행에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과 불안정한 고용이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약화시켰다는 것인데, 현실은 그 반대다. 세계화는 세계 곳곳에서 새롭고 강력한 노동자들을 창출했다. 2011년 이집트 노동계급은 1917년 차르를 전복한 러시아 노동계급보다 훨씬 더 크고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훨씬 더 높다.
특히 이집트에서 노동계급이 한 구실은 1989년 동유럽 혁명, 1998년 인도네시아 혁명, 2000년 세르비아 혁명, 2000∼01년 겨울 동안 아르헨티나 혁명에서 거의 부재했거나 적어도 훨씬 더 미약했던 가능성들을 열어 놨다. 곧, 조직 노동계급이 정치 혁명의 중심으로 귀환한 덕분에 자유 민주주의의 틀을 넘어 착취와 위계적인 계급 제도를 강타할 잠재력을 지닌 투쟁들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집트 혁명의 최초 국면은 끝났다. 계급들 — 개혁적 요구나 심지어 무바라크 퇴진에 부분적으로 동조한 일부 자본가 계급까지 — 을 한데 끌어당긴 것처럼 보인 광범한 단결은 갈수록 계급 양극화로 대체될 듯하다.
칼 마르크스는 혁명의 이런 특징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1848년 프랑스 혁명이 전체 계급의 지지에 도취해 있다가 피비린내 나는 7월 전투로 가는 길을 열어놨다고 썼다.
7 (강조는 마르크스의 것)
2월 혁명은 아름다운 혁명, 일반적 공감을 얻는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그 혁명 속에서 왕권을 반대하여 현저하게 나타난 대립들이 발전되지 못한 채 나란히 의좋게 졸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그 대립들의 배경을 이룬 사회적 투쟁은 단지 허공에 뜬 존재였고, 문구의 존재, 말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6월 혁명은 추한 혁명, 혐오스러운 혁명이다. 왜냐하면 사실이 문구를 대신해서 나타났으며, 공화국이 괴물의 머리에서 그것을 덮어 주고 가려 주던 왕관을 벗김으로써 괴물의 머리 자체를 드러내 놓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집트 노동계급은 1848년 프랑스보다 비할 데 없이 강력하다. 그러나 핵심 과제가 놓여 있다 — 파업 물결을 강화하기, 공장과 산업 들을 연결시키는 선출된 노동자평의회(노동자 권력 기관의 맹아가 될 수 있는)를 건설해 이집트 국가 기구의 핵심과 결정적 대결을 준비하기. 계급 분단선에 따라 군대를 분열시키는 시도도 필요하다.
그렇게 봤을 때, 이집트 혁명은 아직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의 규모에 못 미치고 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기억을 따라) 노동자평의회가 즉각 건설됐고 페트로그라드 수비대가 며칠 만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레온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에서 지적했듯이, 튀니지와 이집트는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 “성장 전화”할 잠재력을 힐끗 보여 줬다.
진정한 희망은 혁명 과정이 지속되고 더 강력해져, 진정한 대안이 중국과 이란 같은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버전이 아니라 자본주의 착취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다.
결론 — 혁명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 혁명은 단지 사회주의 단체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사회적 위기들이,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 지적한 “하층 계급들이 옛 것을 원하지 않고” “상층 계급들”이 더는 “예전의 방식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창출하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대중 파업과 자발적 봉기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삶으로 갑자기 진입하면서 전대미문의 토론과 논쟁이 벌어진다. 현 체제에 대한 혐오감, 파업과 시위의 경험은 특히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를 집단적이고 민주적으로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을 수용하게 만든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만이 제시되는 게 아니다. 지배계급 분파들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을 찾는다. 그들은 군사 쿠데타를 획책하는 장군들이나 인구 대중의 비참함을 종교적·인종적 소수에 대한 반감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모사가와 저질 저널리스트 들에게 지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이 극단들 사이에는 (직접적 대결이 아니라) 협상과 합법 절차를 통해 사회가 천천히 비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개혁주의적” 접근이 최초의 위대한 민중 봉기 직후 시기에 언제나 대중적 지지를 받는다. 혁명 과정에 참가한 사람들의 사상이 하룻밤 새 완전히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 정부를 타도한 뒤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요구에 덜 적대적인 새 정부에 희망을 건다. 사람들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조처들을 지지하는 과도기 없는 혁명적 봉기는 없다.
그래서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자발적 봉기가 차르를 타도한 뒤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전쟁 모리배 르포프 공이 이끄는 정부를, 그 다음에는 자본주의를 유지하려 애쓰는 변호사 케렌스키가 이끄는 정부를 지지했다. 2000∼01년 아르헨티나에서도 사람들은 대통령 넷을 낡은 친자본주의 정치 체제에서 몰아냈지만, 결국 비슷한 배경을 가진 다른 두 명(두알데와 키르히너)을 받아들였다.
한편, 최초의 거대한 격변을 낳은 비통함이 다시 누적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혁명은 두 방향으로 갈 수 있다 — 반동적 방식으로 사회 질서를 회복할 것인가 아니면 대중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해 정부 전복을 넘어 체제 전복으로 나아가는 혁명을 완수할 것인가. 혁명들이 언제나 전진과 후퇴를 가르는 결정적 갈림길에 이르는 까닭이다. 후퇴는 심지어 전보다 더 나쁜 낡은 자본주의 질서의 복귀를 뜻할 수도 있다.
한때 단일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운동이 세 경향으로 분화한다. 혁명 정당, 반동적 정당 그리고 이 둘의 간극을 메우려는 개혁주의 정당으로 말이다. 혁명적 상황의 결과는 이 세 거대한 정당들 간의 전투에 달려 있다. 그런데 엄청난 위기 상황에서 개혁주의는 해결책을 제공할 수 없다. 이제 혁명 정당과 반동적 정당이 개혁주의 지지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투가 시작된다. 이것은 단지 사상 전투만이 아니다. 실천적 투쟁이기도 하다.
혁명을 시작하는 데서는 혁명 정당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리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이집트와 튀니지 혁명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
MARX21
주
- 알제리는 반대 세력들이 포진해 있지만, 가장 대담한 진보 세력들조차 1992년 이슬람주의자들의 선거 승리를 막으려는 군부 쿠데타 — 좌파와 민족주의자 들이 지지한 — 로 이어진 10년의 내전으로 회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당시 내전에서 15만 명이 넘게 죽었다. 그러나 알제리는 가장 뿌리 깊은 혁명적 전통이 있는 아랍 나라다. 격렬한 민족 해방 전쟁을 치렀고 그 뒤 프란츠 파농에서부터 말콤X와 체 게바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혁명가들의 회합 장소가 됐다. ↩
- Tariq 2011. ↩
- Slavoj Žižek 2011. ↩
- 캘리니코스 2011. ↩
- 김의기 2011. 세계무역기구WTO 선임참사관인 김의기는 케인스주의적 소득재분배가 “불같이 타오르는 혁명의 불길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
-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국유화를 비롯해 새로운 국가 구조를 형성하던 1950년대 중반에는 옛 소련의 지원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아랍 사회주의가 건설됐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였지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계 없었다. ↩
- 맑스 1991, 464쪽. ↩
- 레닌 1995, 94쪽. ↩
참고 문헌
김의기 2011, ‘혁명과 소득재분배’, <한겨레>(2011.3.11).
레닌 1995,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돌베개, 94쪽.
맑스, 칼 1991, ‘6월 혁명’,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박종철 출판사.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1, ‘몰락하는 친서방 ‘온건’ 독재자들’, <레프트21> 50호.
Ali, Tariq 2011, ‘This is an Arab 1848. But US hegemony is only dented’, guardian, 22 February 2011.
Žižek, Slavoj 2011, ‘Why fear the Arab revolutionary spirit?’, guardian, 1 February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