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고전 읽기
《프랑스 내전》
파리 코뮌, 최초의 노동자 국가
옛 사회의 이리떼와 개돼지들에게 분쇄되더라도, 현재[1871년]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봉기는 우리 당에게는 [1848년] 6월 봉기 이후 최고로 영광스러운 훈장입니다. 낙원을 급습하고 있는 이 파리 사람들을 독일-프로이센 신성로마제국의 낙원에 예속된 노예와 비교해 보십시오. 제국의 멸망 후 막사 냄새, 교회 냄새, 얼간이 같은 융커 계급 냄새, 무엇보다 천박한 실리주의자 냄새를 풍기던 가장무도회와 비교해 보십시오.(1871년 4월 12일 마르크스가 동료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1871년 “낙원을 급습” 한 파리 코뮌은 인류 최초의 노동자 국가였다.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고 말했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잡으면 사회가 얼마나 민주적으로 조직될 수 있는지(이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를 보여 준 최초의 사례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열렬히 옹호했다. 그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 내전》에서 온 힘을 다해 코뮌을 방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통찰력 있게 분석했다. 《프랑스 내전》은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 기간에 쓰고, 파리 코뮌이 분쇄된 직후인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제1인터내셔널)에서 발표한 연설문이다.
지금, 아랍 민중의 반란은 ‘혁명’이 더는 고리타분한 옛날 얘기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운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으레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것이냐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는 데 머무를 것이냐 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평범한 사람들이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해 싸운 역사는 우리에게 무수한 영감뿐 아니라 이런 문제에 답하는 데 필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1백40년 전 파리 코뮌을 되돌아 보는 것이 지금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통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무장한 파리
1 이들을 끔찍한 고통으로 내몰았다. 제2제정기 2 동안 프랑스 노동자들은 이미 초기 자본주의의 특징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파리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루 평균 11시간을 일했다 3 )과 반복되는 실업과 물가 폭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동자에게 산다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4
1871년 프랑스 노동계급은 전쟁과 기아에 시달렸다. 5개월 동안 지속된 프로이센의 포위는1870년 제2제정이 물러난 뒤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공화파 정부도 노동자와 빈민들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포위 속에서 식량과 물자가 턱없이 부족해 사람들은 쥐나 개, 심지어 동물원의 코끼리까지 잡아먹었다. 그럼에도 프로이센에 맞서 파리를 방어하는 것은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부르주아지들은 대부분 너무도 쉽게 파리를 내팽개치고 떠나 버렸다.
5 국민방위대National Guard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 강화됐다. “1792년 상퀼로트의 후손들이자 1848년 투사들의 아들, 딸인 그들이 다시 무기를 들었던 것이다.” 6 마르크스가 썼듯, “파리의 무장은 곧 혁명의 무장이었다.”(칼 맑스, 《프랑스 내전》, 55쪽. 이하 쪽수만 표기)
파리의 남성 노동자들이 거의 모두 입대하면서, 그러자 공화정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파리 시민들의 급진화를 더 걱정하게 됐다. 공화정은 정부를 보호하는 길은 프로이센에 항복을 선언하고 협상에 나서는 것뿐이라고 판단했다. “부르주아들은 덫에 걸렸다고 느꼈다. … 그들은 프로이센과 이제까지 ‘빨갱이’라 부르던 자들 사이에 끼어버렸다. … 부르주아는 좌익을 애국 전선의 주류 세력으로 내버려 두고 독일인에게 항복하는 편을 택했다. 1871년에 “내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 국가적 자존심을 압도한 것이다.”8 왕정주의자들이 대거 의원으로 당선했다. 1830년대 왕정 치하에서 프랑스 노동자 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한 경력이 있는, 악명 높은 티에르가 정부 수장으로 임명됐다.
프로이센의 포위에 맞서 고통을 감내했던 파리 노동자들은 분개했다. 그러나 공화정은 곧장 이 결정을 확인하는 총선 실시를 선포했고, 이 선거에서 공화정의 비열한 술책 덕분에 티에르의 첫째 임무는 골칫거리 파리에서 통제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국민방위대를 무장해제시켜야 했다. 1871년 3월 18일, 티에르는 몽마르트 언덕에 군대를 보내 국민방위대가 보유하던 대포 2백 문을 포함해 무기들를 압수하려 했다. 이 시도는 실패했다. 국민방위대와 여성들과 아이들은 티에르가 보낸 병사들을 둘러싸고 대포는 우리 것이라고(실제로 포위 기간에 수집한 철물로 대포를 만든 사람은 그들이었다!), 부끄럽지도 않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르콩트 장군은 군중에게 발포하라고 병사들을 세 차례나 다그쳤지만 병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르콩트와 그의 장교들을 체포했다. 그날 오후 티에르와 정부는 파리를 떠났고, 코뮌이 선포됐다. “세계 최대 도시 하나가 무장한 노동자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새로운 권력
새로운 권력이 탄생했다. 무엇이 새로웠는가? 1871년 3월 30일 코뮌의 첫 포고령은 부르주아의 지배 도구인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것을 ‘무장 인민’으로 대체하는 내용이었다.
파리가 저항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포위 공격의 결과로 군대가 없어졌고 주로 노동자들로 구성된 국민방위대가 그것을 대체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이제 하나의 지속적인 제도로 전환되어야 했다. 따라서 코뮌의 첫번째 포고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것을 무장 인민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86)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계급 대중의 직접민주주의로 대체됐다.
코뮌은 파리의 각 구에서 보통 선거를 통해 선출된 시 의회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책임을 지고 있었고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당연히 노동자들이거나 노동자 계급의 공인된 대표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코뮌은 의회체가 아니라 행정과 입법의 업무를 겸하는 행동기구여야 했다. … 코뮌 의원들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공직은 노동자의 임금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국가 고위 관직의 기득권과 판공비는 이 고위 관리들 자체와 함께 사라졌다.(86)
코뮌은 노동자 계급에게 이로운 조처들을 도입했다. 노동자들을 괴롭히던 밀린 집세를 모두 면제하도록 했고, 제빵 노동자들의 야간 작업을 금지했다. 전당포가 노동자들을 사사로이 착취한다는 이유로 전당포 폐업을 명령했다. 또, 코뮌은 공장주들이 폐쇄한 공장들을 파악해서 이전에 그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도록 했다.
무상 교육을 도입하고, 학교에서 종교적 상징물과 성상과 교리와 기도 등 “개인의 양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추방하도록 했다.(20)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학문 자체가 계급적 선입견이나 정부의 강제력이 부과한 족쇄에서 벗어나게 됐다.”(87) 파리에 남아 있는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코뮌은 대중이 겪던 기근을 없앴다. “코뮌 기간에 남녀노소할 것 없이 아무도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거나 집 밖에 나앉지 않았다. 이 정부가 가진 자원은 매우 부족했지만, 정부는 두 달 동안 끔찍한 전쟁에 맞서 싸울 뿐 아니라, 1년 동안 일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는 수많은 대중 사이에서 기근을 없앴다. 이것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낳은 기적 중 하나였다.”
또 다른 놀라운 변화는 범죄가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야간 도둑도 없었고, 절도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1848년 2월의 날들 이래로 파리의 거리는 처음으로 안전했는데, 그것도 어떤 종류의 경찰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101)
코뮌은 국제주의를 지향했다. 프로이센이 계속 포위하고 있었는데도 독일 노동자가 코뮌의 노동부 장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코뮌의 깃발은 세계 공화국의 깃발이”었기 때문이다.(19) 코뮌은 1809년 나폴레옹의 전쟁을 축하하며 만든 전승비가 배타적 애국주의의 상징이자 민족적 증오를 부추기므로 철거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코뮌은 두 달 남짓 되는 짧은 기간에, 그리고 매우 혹독한 조건 속에서도 놀랄 만큼 많은 성과를 이룩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비밀은 코뮌이 바로 노동자 국가였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기존 국가들은 ‘다수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기구였지만 코뮌은 다수에게 복종하는 정치 형태였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낡은 국가를 해체해 계급 사회 등장 이후 가장 민주적인, 자신들만의 새로운 사회 구조로 대체했다.”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다. 그것은 착취 계급에 맞선 생산 계급이 벌인 투쟁의 산물이었고,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위한 노력 속에서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90)
보통 선거권은, 3년이나 6년에 한 번씩 지배 계급 가운데 누가 의회에 가서 인민을 잘못 대표할지를 결정하는 수단이 아니라 코뮌을 구성하는 인민에게 봉사하는 수단이었다. … 코뮌 헌법은, 지금까지 사회의 자유로운 운동에 기생한 채 사회의 자유로운 운동을 저해해 온, 국가라는 기생충이 빨아들인 모든 힘을 코뮌이라는 사회 기구에 돌려줬던 것이다.(88)
그러나 노동자 국가가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에 파리 코뮌의 수명은 너무 짧았다. “포획 당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실행에 옮기는 것을 시작하는 것뿐이었다.”(21) 마르크스가 썼듯이 “코뮌의 가장 큰 업적은 코뮌이 존속했다는 것 자체였다.”
피의 일주일
공화정은 코뮌 진압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얼마 전까지는 적이던 프로이센에 협력을 구했다. 공화정은 파리의 혁명적 분위기에 물들지 않은 프랑스 전쟁 포로들을 석방해 달라고 프로이센에 요청했다. 공화정은 체계적으로 군대를 조직해 베르사유에 집결시켰고 코뮌은 압도적 열세에 놓였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코뮌의 정치적 미숙함이었다.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와 코뮌에서 다음 두 가지 정치 경향이 득세했다. 다수파 블랑키주의자들은 노동자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다수 대중의 조직된 행동이 아니라 결단력 있는 소수의 행동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프루동주의자들은 협동조합을 바탕으로 경제를 재조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나키즘적 성향 때문에 중앙집중적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 행동을 조직하는 것을 일절 거부했다.
12 그러나 프루동주의자들은 코뮌의 군사적 행동이 중앙집권적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베르사유로 진격하기를 거부했다. 일찌감치 베르사유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블랑키주의자들은 소수의 영웅적 행동을 강조하는 바람에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티에르는 병력을 충분히 모을 기회를 얻었다.
코뮌은 결정적으로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 코뮌은 티에르가 음모를 꾸미던 베르사유로 곧장 진격하기를 주저했다. “공화정이 3월 18일 파리에서 도망칠 때 그 수중에 남아 있는 군대는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그 때 국민방위대가 베르사유로 진격했다면 공화정의 군대를 총 한 방 쏘지 않고 해산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둘째, 코뮌은 부르주아지들의 생명줄과도 같았던 프랑스 은행의 자금을 동결시키지 않았다. 훗날 엥겔스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코뮌의 수중에 있는 은행, 이것이야말로 만 명의 인질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였더라면 프랑스의 부르주아지 전체는 코뮌과의 강화에 관심을 갖도록 베르사유 정부에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24) 그러나 당시 블랑키주의자들이나 프루동주의자들 어느 누구도 이런 ‘재산권 침해’ 행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코뮌이 불필요하게 티에르의 힘을 키워 준 셈이었다.
파리에서는 상비군이 폐지됐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공화정의 군대가 온존했고, 프랑스 은행도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군대와 은행 같은 자본주의 국가 기구들이 노동자 국가인 코뮌과 공존했다. 그래서 코뮌의 경험에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 기구를 접수해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없다”는 교훈을 이끌어냈다.(81)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해야 한다. 즉,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국가 이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티에르 군대가 코뮌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5월 21일, 엄청난 병력이 파리로 진격해 왔다.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코뮌에 가담한 사람이라면 여성이든 아이든 가릴 것 없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노동자들은 파리를 호락호락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티에르 군대가 파리를 점령하는 데는 무려 1주일이 걸렸다. “피의 일주일” 동안 2~3만 명이 재판도 없이 줄줄이 처형됐다. 당시 런던 〈타임스〉는 이 사건을 두고 역사상 더 끔찍한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썼다. “비인간적인 복수의 법칙을 따르는 베르사유 군대는 죄수들, 여성들, 아이들을 총살하고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온몸을 찢어 갈겼다. … 우리 기억에 역사상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 베르사유 군대가 저지르는 집단 처형의 광경은 역겨움 그 자체다.” 살인마 티에르는 코뮌을 진압한 뒤 신임 대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빨갱이들’은 완전히 섬멸됐으며, 내일부터는 활동을 재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투쟁을 벌였지만 패배했으니 앞으로 50년 안에는 두 번 다시 그런 투쟁은 일어나지 못합니다.”
여성과 파리 코뮌
코뮌에서 여성들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여성들은 놀랄 만큼 대범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티에르 군대가 처음 맞닥뜨린 것도 한 무리의 여성들이었다. 소총으로 무장한 여성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무장한 병사 3천 명과 대치했다. 코뮌 기간에 1만여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바리케이드를 지켰다. 토니 클리프는 《여성해방과 혁명》에서 한 반동적인 저자의 말을 인용해 코뮌에서 여성들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음을 보여 줬다.
코뮌에 참여해 선동하고 불평을 터뜨린 여자들은 모두 … 신사의 재봉사, 신사의 셔츠를 만드는 사람, 성숙한 남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각종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 등이었다. … 참으로 우스운 것은 구빈원에서 도망친 이 여자들이 끊임없이 잔 다르크를 되뇌었고, 스스럼없이 자신들을 잔 다르크에 비유한 점이다. … 최후의 날에 이 호전적인 여장부들은 바리케이드 뒤에서 남자들보다 더 오래 버텼다.
코뮌이 여성들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여성들의 행동은 더욱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 여성들은 자기 계급(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았으며 그 권력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코뮌을 위해 싸웠다. 1백20명의 여성 부대를 이끈 여성 투사 루이즈 미셸은 공화정의 군사 법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나는 코뮌 주동자 중 하나라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 자유를 향해 고동치는 심장의 권리가 작은 총탄에 박히는 것뿐이라면, 내 심장에도 총탄이 박혀야 할 것이다. 당신들이 날 살려둔다면, 나는 끊임없이 복수를 외칠 것이다.
21세기의 혁명 코뮌의 최후는 끔찍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코뮌이야말로 자본의 신세계가 그때까지 직면한 도전 가운데 가장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자본이 탄생시켰지만 자본에 적대적인 새로운 계급에게는 최고의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실로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이를 거듭 증명했다. 자본이 뿌리내린 곳이면 어디서든 노동자들은 착취에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1919년 독일과 헝가리에서, 1936년 스페인에서, 1956년 헝가리에서, 1974년 포르투갈에서, 노동자들은 기존 권력에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코뮌보다 더 나아간 형태인) 대안적 권력 기관, 즉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했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기존 국가의 폭력에 맞서 주민 대다수가 스스로 조직할 때 이런 기관들이 등장”했고, “이 기관들은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 전체를 재조직”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혁명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 혁명적 영감과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프랑스 내전》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파리 코뮌 연표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다.
9월 1일 프랑스군이 스당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되고 나폴레옹 3세는 생포되다.
9월 4일 신뢰를 잃은 나폴레옹이 권력에서 물러나고 공화국이 선포되다.
9월 20일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포위하기 시작하다. 1백31일 동안 파리 포위가 지속되다.
1871년
1월 28일 공화정이 프로이센에 항복을 선언하다.
2월 8일 프랑스의 항복 선언을 확인하는 총선이 실시되고 왕정주의자들이 의원으로 대거 당선하다.
2월 17일 티에르가 정부 수장으로 임명되다.
3월 18일 티에르 군대가 국민 방위대가 보유하던 무기들을 압수하려 했지만 실패하다. 공화정은 파리를 떠나 베르사유로 도망가다.
3월 26일 코뮌이 선거로 구성되고 이틀 후 코뮌이 선포되다.(이하 코뮌이 선포한 결정)
3월 30일 징집과 상비군을 폐지하고, 국민방위대가 유일한 무장 세력이라고 선언하다.
4월 1일 코뮌 의원의 임금 상한을 결정하다.
4월 2일 국가로부터 교회의 분리와 모든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선포하다.
4월 8일 모든 종교적 상징물, 성상, 교리, 기도 등을 학교에서 배제시키라고 명령하다.
4월 6일 공개적으로 단두대를 불태우다.
4월 12일 나폴레옹 전승 기념물을 무너뜨리기로 결정하다.
4월 16일 공장주들이 폐쇄한 공장들을 파악해서 그 공장 노동자들이 운영하도록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하다.
4월 20일 제빵 노동자들의 야간 작업을 금지하다.
4월 30일 전당포 폐업을 명령하다.
5월 17일 국민방위대 병사 가족 수당에서 적자와 서자 간 차별을 폐지하다.
5월 21일 티에르 군대가 파리에 진입하다.
5월 27일 뻬르 라 셰즈 묘지에서 코뮈나르와 티에르 군대가 전투를 벌이다. ‘연맹병의 벽’ 앞에서 코뮈나르가 대량 학살되다.
5월 28일 최후의 바리케이드에서 코뮌 최후를 맞이하다.
주
- 1870년 7월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다. 얼마 안 가 프랑스군은 스당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됐고 나폴레옹 3세는 생포됐다. 완전히 신뢰를 잃은 나폴레옹은 권력에서 물러났고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선포됐다. 그럼에도 프로이센 군대는 휴전이 된 1월까지 파리를 포위하면서 가혹한 강화조건을 내걸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프랑스령 알자스-로렌 지방을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
- 1852~70년 나폴레옹 3세(루이 보나파르트)가 프랑스를 통치하던 시기. 이때 프랑스 자본주의는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
- 하먼 2004, p474. ↩
- 하비 2010, p247에서 재인용. ↩
- 심각한 실업난 때문에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국민방위대 일당 1.5프랑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
- 하먼 2004, p475. ↩
- 하비 2010, p455. ↩
- 공화정은 선거일을 겨우 8일 남겨 두고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선포했다. 파리의 좌파에게는 농촌 선거구에서 선거 운동을 벌일 시간이 전혀 없었다. 여전히 대다수 유권자들이 농촌에서 거주했고 성직자와 부유한 지주 들이 투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하먼 2004, p475. ↩
- 하먼 2004, p476. ↩
- Nineham 2006에서 재인용. ↩
- 하먼 2004, p477. ↩
- 하먼 2004, p479. ↩
- 하먼 2004, P481에서 재인용. ↩
- 하비 2010, p471에서 재인용. ↩
- 클리프 2008, p65에서 재인용. ↩
- 클리프 2008, p77에서 재인용. ↩
- 하먼 2004, p481. ↩
- 하먼 2011, p62. ↩
참고 문헌
클리프, 토니 2008, 《여성해방과 혁명》,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04,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11, 《21세기의 혁명》, 책갈피.
하비, 데이비드 2010, 《파리 모더니티》, 생각의나무.
Nineham, Chris 2006, ‘72 days that shook the world’, International Socialism 111(Summer 2006).